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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역사, 이야기 수담, 칼럼 바둑기사 등

바둑의 역사10

by 자한형 2023.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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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의 역사(10) 영원한 기성 오청원/이재형

모든 초일류 고수를 하수로 만들어버린 사나이

1930년대 후반부터 일본 바둑계는 지금까지도 영원한 기성(棋聖)으로 추앙받고 있는 오청원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오청원(呉清源)1914년 중국 푸젠 성(福建省)에서 태어나, 1928년에 일본에 왔다. 오청원의 이야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그의 스승 세고에 켄사쿠(瀬越憲作) 9단이다.

세고에 겐사쿠(瀬越憲作)는 현대 일본 바둑의 출발에 많은 공적을 남긴 기사이다. 명치유신 이후 전통적인 이에모토(家元)제가 붕괴되고 바둑 가문들이 몰락한 상황에서 여러 바둑 단체들이 난립하기 시작하였다. 바둑 단체들 간의 질시반목을 조정하고, 일본 기계를 통합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세고에이다. 그는 온화한 인품과 진지한 자세로 반목을 일삼는 여러 바둑 단체들의 인사를 설득하여 기계(棋界)를 안정화시켰고, 그로 인해 일본 기계는 재도약의 틀을 잡았다고 한다.

1920년대 후반 일본 기계에서는 중국에 대단한 바둑 신동(神童)이 출현하였다는 소문이 돌아다니기 시작하였다. 그 신동이 바로 오청원(吳淸原). 세고에는 오청원에게 본격적으로 바둑수업을 시키기로 하고, 오청원을 일본에 부르려 하였다. 그는 당시 거물 정치인인 이누가이 쯔요시(犬養 毅)에게 오청원을 일본으로 데려오려는데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이누가이 쯔요시란 인물은 일본 총리를 역임한 인물로서, 장관 자리만 7, 중국진보당 총재, 입헌국민당 총재 등 다양한 경력을 지닌 정치가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이누가이 쯔요시(犬養 毅)는 세고에를 말렸다.

이누가이: “그런 뛰어난 천재소년을 일본에 부른다면, 당신네 기사들은 모두 그 애한테 당할 거야

세고에: “우리 모두를 뛰어넘을 정도가 아니라면 그를 일본에 부르는 보람이 없습니다.”

이누가이: “명인위를 그 소년에게 빼앗긴다면 어떻게 할 텐가?”

세고에: “바라는 바입니다. 일중(日中) 친선을 위해서도 바라는 바입니다.”

결국 이누가이는 세고에의 설득에 넘어가 오청원을 일본에 데려오도록 주선을 하였다. 오청원은 그 후 일본 최강의 기사가 되어 일본 바둑을 크게 발전시켰다.

오청원, 세고에 겐사쿠, 이누가이 쯔요시

세고에에게는 또 한 명의 제자가 있다. 바로 조훈현이다. 조훈현은 당초 일본 최고의 바둑전문 도장이자 많은 우리나라 기사들이 수업한 키다니(木谷) 도장에 가려하였다. 그러나 세고에의 제자 욕심이 그를 붙잡았고, 조훈현은 그 후 약 10년을 세고에의 내제자로 바둑수업에 정진하였다. 조훈현이 병역 문제로 한국으로 귀국하자, 4개월 뒤 세고에는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절친한 친구였던 노벨상 수상 작가인 카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죽음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애제자인 조훈현을 한국에 보낸 외로움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세고에는 단 두 명의 제자밖에 두지 않았으나, 한 제자는 영원한 기성(棋聖)으로 세계 바둑인들의 추앙을 받는 사람이고, 다른 한 제자는 세계바둑의 일인자로서 한 시대를 풍미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의 10여 년간 세계바둑을 제패한 이창호라는 천재를 길러내었다는 점에서 제자의 질로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을 것 같다.

오청원은 말년에 여류기사로서 한 시대를 풍미하였고, 지금도 여류바둑의 정상급에 있는 루이나이웨이(芮乃偉)를 제자로 거두었다. 그러고 보면 오청원은 조훈현의 사형이 되고, 루이나이웨이는 조훈현의 사질(師姪), 그리고 이창호의 사매(師妹)가 되는 셈이다. 루이로 봐서는 조훈현이 사숙(師叔), 이창호가 사제(師弟)가 되는 셈이고... 어째 한 집안에서 다 차지하는 느낌이다.

조훈현, 루이나이웨이, 이창호

오청원을 이야기할 때 또 한 사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키다니 미노루(木谷實)이다. 오청원은 키다니 미노루(木谷實)보다 5살 아래인데, 키다니를 친형처럼 따랐다고 한다. 1930년대 두 사람이 일본 바둑계에 새로운 신진강호로서 등장하면서 서로 라이벌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인간적 관계는 매우 친밀하여 두 사람은 서로 힘을 합쳐 소위 신포석”(新布石)을 창안하기에 이른다. 신포석은 과거로부터 타성화되고 정형화된 초반 설계에서 벗어나, 그동안 금기시되었던 착점들을 과감히 도입한 것인데, 신포석을 사용하는 오청원과 키다니의 성적이 워낙 좋았으므로 신포석은 이후 급속히 퍼져나갔다. 신포석의 시작은 바로 현대바둑의 시작을 의미한다.

키다니 미노루는 오청원과 함께 신포석을 개발하는 등 당대의 일류 신진 프로기사였는데, 특히 후진양성에 더 힘을 기울였다. 그는 수많은 제자들을 키워내었는데, 현대 바둑의 쟁쟁한 기사들 중 많은 사람이 키다니 문하(門下)이다. 조남철 선생을 비롯하여 김인 국수, 윤기현, 하찬석 등 1970년대까지 우리나라 바둑사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기사들이 모두 키다니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다. 우리나라 바둑계로서는 잊을 수 없는 은인이라 할 것이다.

일본 바둑을 석권한 조치훈 9단도 키다니 문하이며, 이 외에도 오다케 히데오(大竹英雄), 이시다 요시오(石田芳夫), 카토 마사오(加藤正夫), 고바야시 코이치(小林光一), 타케미야 마사키(武宮正樹) 1970-2000년 초반에 걸친 일본 바둑의 최강자들도 대부분 키다니 문하였다. 20년 전쯤인가, 키다니 문하생들의 단수의 합이 400단을 돌파하였다는 것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는 신문기사가 생각난다.

키다니 미노루에 관한 일화 한 토막. 키다니는 여러 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아들들에게는 바둑수업을 시키지 않았다. 어느 날 친한 친구 한 사람이 키다니에게 물었다.

친구: “선생은 바둑도장을 열어 다른 아이들에게는 열심히 바둑수업을 시키면서 왜 장남에게는 바둑을 가르치지 않는 거요?”

키다니: “그 녀석은 머리가 나빠 바둑을 둬봤자 성공할 수 없어요”.

그 머리 나쁜 장남은 동경대 의대에 진학하였다. 후에 그는 일본 중부의료요양센터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세돌은 전남의 비금도라는 낙도에서 막내로 태어났는데, 위로 2명의 형과 누나가 있다고 한다. 바둑을 즐기는 그의 부친은 3남매에게 바둑을 가르치면서, 둘째 아들인 차돌에게만은 바둑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머리가 나빠서 바둑을 둬 봤자 성공할 것 같지 않아서라 했는데, 그 머리 나쁜 둘째 아들은 서울대 컴퓨터공학과에 들어갔다고 한다. 어째 키다니 일가와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다.

키다니의 차남은 법정대학교(法政大學校) 교수로 재직 중이다. 장녀인 레이코(禮子)는 프로기사로 입문하였으며, 키다니 도장 출신으로 조치훈의 숙적인 고바야시 코이치(小林光一)와 결혼한다. 이들 부부의 딸 고바야시 이즈미(小林泉美) 역시 프로기사가 되어 여류본인방을 획득하는 등, 일본 여류 기계에서 정상급으로 크게 활약하고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오청원은 1961년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는데, 이후 바둑이 급격히 광채를 잃어버렸다. 그 뒤를 이은 기사가 면도날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카다 에이오(坂田栄男)이다. 그는 조치훈에 의해 깨어지기는 했지만 일본의 최다 타이틀 획득자라는 기록을 갖고 있었다. 그 뒤로 대만 출신의 임해봉(林海峰)과 키다니 미노루(木谷実) 문하의 오다케 히데오(大竹英雄) 등이 정상을 다투었다.

여기서 잠시 또 옆길로 빠진다. 우리나라 바둑에서 조남철의 뒤를 이은 사람이 바로 김인(金寅)이다. 그 역시 조남철의 뒤를 이어 일본 유학을 하여 키다니(木谷) 문하에서 수학을 했는데, 그 당시에는 상당히 장래가 유망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세계바둑은 죽림김(竹林金)의 시대가 될 것이라 전망하였다. 즉 일본의 오다케(大竹), 중국의 임해봉(林海峰), 한국의 김인(金寅)이 끌어갈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오다케(大竹)와 임해봉(林海峰)은 일본 바둑이라는 큰 물에서 대성(大成)을 하였지만, 김인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김인은 한국으로 돌아와 비록 조남철의 철벽 아성을 무너뜨리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곧이어 윤기현, 하찬석이라는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말았다. 김인은 당시로서는 한국이라는 바둑 변방에서 찰나 간의 영광을 맛보았을 뿐이다. 김인 9단은 온화한 성격과 중후한 인품으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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