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의 역사 (9) 현대바둑의 출발과 타이틀전/이재형
바둑 가문의 해체와 타이틀전의 시작
19세기에 들어와 일본 바둑계는 황금기를 맞게 된다. 이 때는 상업, 공업 등 경제의 발달에 의해 새로운 상인, 기술자 등의 기능인들이 거상(巨商)으로 발전하게 된다. 즉 부르주아 계급이 탄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농업에도 거대 부농이 등장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이들 부르주아 계급들은 여가활동으로서 바둑을 배우고, 또 바둑고수들을 초청하여 대국을 시키고 관전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바둑고수들을 극진히 대접하였다. 그리고 유명 기사들을 적극 후원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바둑이 전국적으로 붐을 일으키게 되자, 전문기사 층도 크게 두터워졌다. 4대 바둑 가문에서는 많은 강자들을 배출하였다. 일본 바둑계에서는 이 시대를 “바둑의 황금시대”라 일컫는다.
1867년 명치유신(明治維新, 메이지 이신)으로 에도(江戸) 幕府가 붕괴하였으며, 토쿠가와 家 는 정권을 황실(실제로는 국회(國會))로 반환하였다.
명치유신
여기서 잠깐 또 옆길로 빠진다. 명치유신으로 일본은 입헌군주국으로 전환되었으며, 그 제도적 기반으로 명치 헌법(明治憲法)을 제정하게 된다. 이때 헌법을 어떤 형식으로 헌법을 확정시키는가 하는 문제가 등장하였다. 지금이야 헌법은 국민투표에 의해 확정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지만, 그러한 룰이 없었던 그 당시에는 국민투표로 해야 할지, 국회 의결로 해야 할지, 아니면 왕이 선포하는 것으로 해야 할지에 등등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었다.
갑론을박(甲論乙駁) 끝에 결국 명치 천황(明治 天皇, 메이지 텐노)이 헌법을 국회에 하사하는 형식을 취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천황이 국회에 헌법을 하사하면 국회로서도 그냥 받기는 허전하고 뭔가 감사의 예를 표하여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나왔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를 검토하다가 결국 "만세"(萬歲, 반자이)를 세 번 외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입으로만 만세를 세 번 외치면 그것도 뭔가 허전해, 만세를 부를 때마다 양손을 번쩍 지켜 들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탄생된 것이 바로 “만세 삼창(三唱)”. 우리가 삼일절이나 광복절에 목이 터져라 부르는 만세삼창도 따지고 보면 일제 잔재(日帝殘滓)라 할 것이다.
아무튼 이야기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격변기 속에서 그동안 4대 바둑 가문을 후원하던 후원자들도 사라졌다. 막부에 의해 보호되어온 바둑계는 명치유신과 함께 그 기반을 상실하여, 바둑 가문들은 봉록으로 받은 땅과 저택을 반환하게 되었다. 사회적으로 바둑에 대한 관심은 떨어지고, 기사들은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상태로 내몰렸다.
본인방 슈와(本因坊 秀和)는 한때 창고에서 생활을 할 정도로 살림이 어려웠다고 한다. 더욱이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전통문화를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되어 바둑 자체를 경시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바둑 가문을 지탱할 경제적 기반이 붕괴되면서 자연히 이들 가문에 의한 이에모토 제는 해체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엽부터 바둑 4대 가문 출신의 유력 고수들이 바둑 단체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들 단체 간에 바둑 시합이 벌어지면서 바둑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바둑은 활기를 찾게 되었다. 신문에도 바둑란(欄)이 신설되어 인기를 얻었고, 한 신문의 바둑란이 인기를 얻게 되자 다른 신문들도 경쟁적으로 바둑란을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바둑 단체에 의해 바둑의 인기가 높아지자, 너도 나도 바둑 단체를 만들게 되어 바둑 단체가 난립하게 되었다. 바둑 단체 난립의 폐해가 커지자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통일된 바둑 단체를 만들기로 하고, 그 결과로 1923년 설립된 단체가 바로 현재의 일본기원(日本棋院)이다. 일본기원은 바둑과 관련한 일체의 행정, 관리업무를 총괄하는 기구이다. 후에 오사카(大阪)를 중심으로 하는 관서기원(關西棋院)이 분리되어 나가, 현재 일본의 전문 바둑계는 일본기원과 관서기원 2개로 나뉘어져 있다. 일본기원과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우리나라의 단체는 한국기원(韓國棋院)이다.
일본기원이 설립되면서 바둑 시합은 언론사들에 의한 이벤트 기전, 타이틀전 중심으로 옮겨갔다. 이때 일본 바둑계에 혜성과 같이 나타난 인물이 바로 중국인 오청원(吳淸原). 그는 앞에서 소개한 바 있듯이 일본의 초일류 고수들을 치수고치기를 통해 모두 자기의 하수(下手)로 만들어 버렸다. 이후 1950년대 일본 기계는 오청원의 시대였다.
혼인보 슈와, 혼인보 치쿤, 혼인보 슈호
20세기에 들어와서 이에모토제는 사라졌지만, 바둑 가문 자체는 남아있었다. 가문의 당주도 여전히 세습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와 이러한 체제에 변화가 생겼다. 21세 본인방 당주인 혼인보 슈사이(本因坊秀哉)는 11대 명인(名人)이었는데, 그는 본인방 家의 세습제를 폐지한다고 선언하고, 본인방이라는 이름을 일본기원에 헌납하였다. 일본기원은 본인방 자리를 걸고 다투는 기전(棋戰)을 개최하기로 하였다.
이제 본인방의 자리는 세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인방전(本因坊戰)이라는 타이틀전을 통해 우승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물론 본인방의 자리에 앉는다고 해서 무슨 특별한 권한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고, 그저 명예에 지나지 않는다. 이리하여 일본에서 가장 전통 있는 바둑 가문인 본인방가(本因坊家)는 21세 본인방을 끝으로 사실상 해체되었다.
본인방전(本因坊戰)은 이후 일본의 가장 권위 있는 기전(棋戰)으로 자리 잡았다. 본인방전에서 내리 5연패를 하거나, 통산 10회 이상 우승하면 명예 본인방(名譽本因坊)으로 추대된다. 명예 본인방은 비록 이름뿐이지만, 본인방가의 가독(家督)을 잇게 된다. 즉, 최후의 세습 본인방인 21세 본인방 혼인보 슈사이(本因坊秀哉)의 대를 이어 22세, 23세 본인방 등으로 습명(襲名)을 하게 되는 것이다.
본인방 전에서 가장 많이 우승한 사람은 누굴까? 바로 조치훈(趙治勲)이다. 조치훈은 본인방 10연패, 통산 12회 타이틀을 획득하여 명예 본인방으로 추대되었다. 이에 따라 조치훈은 본인방가의 25세 본인방 치훈(二十五世 本因坊治勲, 혼인보 치쿤)으로 추대되어 본인방가의 당주 자리(명예뿐이지만)를 잇고 있다.
보통 본인방 家 당주가 되면 본인방이라는 성과 함께 이름도 바꾸게 된다. 예를 들면 22세 본인방 다카가와 가쿠(高川格)는 혼인보 슈카쿠(本因坊秀格)로, 23세 본인방 사카다 에이오(坂田栄男)는 본인보 에이쥬(本因坊栄寿), 24세 이시다 요시오(石田芳夫)는 혼인보 슈호(本因坊秀芳)로 성과 함께 이름을 함께 바꾸었다. 25세 본인방인 조치훈은 그대로 본인의 이름을 사용하여 혼인보 치쿤(本因坊治勲)으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