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의 역사 (7) 이에모토(家元)제/이재형
바둑계에 있어서 이에모토(家元)제의 성립
에도(江戸) 시대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설치한 에도 막부(幕府)가 일본을 통치한 시대로서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시기이다. 에도란 지금의 동경(東京) 지방을 말한다. 에도 시대는 일본에 몇 백 년 만에 찾아온 평화시대로서 세상이 안정되다 보니 문화가 꽃을 피웠다. 그러한 가운데 본인방(本因坊) 家의 개설을 시작으로 바둑을 전문으로 하는 가문이 차례로 등장하여, 이른바 4대 바둑 가문이 생겨났다. 본인방 家 외에 이노우에(井上) 家、 야스이(安井) 家、하야시(林) 家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 바둑 가문은 일본 특유의 기예(技藝) 육성체제인 이에모토(家元) 制로 세습되었다.
여기서 잠깐 이에모토(家元) 制에 대해 알아보자. 이에모토(家元) 제란 특별한 기술, 재능을 필요로 하는 전문분야에서 시조(始祖)가 그 분야에서 독특한 유파(流派)를 만들어 그 집안 전부가 그 분야의 기술에 전문화하여 이를 세습해 나가는 제도를 말한다. 새로운 유파가 생기면 시조의 자식은 말할 것도 없고, 그 기예를 닦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에 모여들어 제자가 되어 한 집안을 이루게 된다. 이에모토는 집안 식구와 제자군(弟子群)으로 구성되는데, 집안 식구와 상급 제자는 오로지 그 기예만을 전업 직업으로 하여 기술에 정진한다.
바둑은 물론, 검도·유도 등 각종 무술, 차도(茶道), 꽃꽂이, 연극, 서예 전통무용 등 수많은 분야의 기예(技藝)들이 이에모토 제도로 운영되었다. 이에모토의 가독(家督)은 세습되는데, 반드시 친아들에 의해서만 세습되는 것은 아니다. 실력이 가장 뛰어난 제자가 당주(堂主)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잇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같은 조건이면 친자식이 가독을 잇는 경우가 많았다. 가문이 커지면 거기서 분파가 갈려져 나오기도 하는데, 이를 외가(外家)라고 한다. 4대 바둑가문이 전통을 쌓으면서 각 가문마다 여러 개의 외가가 가지를 쳐 나왔다.
그러면 바둑 이에모토 制와 관련하여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우리 바둑애호가들도 부인들에게 평소에 많이 들었을 말이라 생각되는데...
“도대체 맨날 바둑만 두면, 돈이 나와요 쌀이 나와요?”
“대체 뭘 먹고살자는 거예요?”
그렇다. 이들 바둑 가문들은 어떻게 먹고살았을까? 바둑만 둔다고 해서 돈이 나오는 것도 쌀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막부로부터 받는 녹봉이라는 것도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그걸로는 한두 가족이나 먹고 살려나.
적광사에서의 바둑 대국
이들의 주수입원(主收入源)은 후원자(後援者)들이었다. 바둑을 좋아하는 귀족들이나 다이묘(大名, 각 번의 번주를 의미한다.), 고급 관리, 부유한 상인들은 좋아하는 바둑 가문이나 기사들을 후원하였다. 개인에게 보내는 후원금은 일부가 개인에게 돌아가고 상당 부분은 가문으로 귀속되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하층급의 제자들이 막노동 등의 알바를 뛰어 그 일부를 수업료의 명목으로 가문에 바치기도 하였다. 기사(棋士)들이 가장 잘할 수 있으면서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 바로 내기바둑인데 이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되었다. 바둑을 하나의 도(道)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바둑으로 도박을 할 경우 가문에서 파문되었다.
이에모토 제도 하에서는 각 가문은 몇 대에 걸쳐 평생을 한 우물만 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무술이든 예술이든 최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수많은 기예가 이러한 이에모토 제도를 통해 발전하고 찬란한 문화로서 꽃 피운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의 든다. 일본은 이렇게 한 가지 기술이나 예술에 전념하여 그 기술을 발전시켰는데, 우리나라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일본은 자기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장인정신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형식적으로 무엇을 하는 시늉만 하는 적당주의가 만연해서인가? 아니다. 이것은 정치적, 사회적 환경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우리나라도 조선시대는 신분사회였지만, 일본은 우리나라에 비해 몇 배나 더 엄격한 신분사회로서 사회적 이동이 거의 불가능한 사회였다. 사무라이의 자식은 사무라이가 되고, 상인의 자식은 상인, 농민의 자식은 농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의 벼슬아치에 해당하는 사무라이의 경우 아버지가 상급 사무라이면 아들도 상급 사무라이, 아버지가 하급 사무라이면 아들도 하급 사무라이가 되며, 이들 사무라이 간에서 신분의 차이가 엄격하였다. 사회적 신분이 미리 정해져 옴짝 달짝도 할 수 없는 사회에서, 백성들이 사회적 평가를 받으려면 자기 앞에 놓인 직업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이유는 우리나라는 과거 중앙집권적 사회였던데 비해 일본은 철저한 봉건주의적 지방분권 사회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에도 시대 일본의 300개의 번은 하나하나가 독립된 국가라 간주해도 좋았다. 각 번은 중앙정부인 막부에 대해 세금을 마칠 의무도 없었다. 막부도 각 번의 내정에는 전혀 간여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앙집권적인 조선의 경우 경제학적 용어로 설명하자면 대리인 비용(agent cost)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았다. 즉, 중앙정부가 지방관리를 파견하면, 지방관리는 나라의 이익보다는 스스로의 이익을 먼저 챙길 유인이 생긴다. 이러한 경우 정부 기강이 해이해지면 지방관리가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백성들로부터 약탈할 유인이 생긴다. 즉 먹고 튀는 것이 자신에게 가장 유리하게 된다.
이에 비해 일본의 경우는 각각의 조그만 지방, 즉 번이 하나의 국가였으므로, 번의 최고책임자인 영주(다이묘)는 자신의 번이 지속가능(sustainable) 해야 한다. 약탈을 할 경우 한 순간의 수입은 오를지 모르지만 지속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지게 된다. 그러므로 영주는 백성들을 대상으로 약탈을 하는 것은 스스로의 이익과도 어긋난다. 영주로서는 백성들이 각자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생산을 늘리는 것이 스스로에게도 이익이 된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으로 인하여 영주들은 백성들이 각자 자기의 전문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장려하게 되는 것이었다. 일본의 이에모토 제도는 이러한 정치 및 사회환경에서 자라나게 된 것이다.
일본 유술(柔術, 주짓스)와 유도의 창시자 카노 지고로
이에모토 제와 관련하여 또 잠시 옆길로 빠지도록 하자. 이에모토 제에서는 직업으로서 기예를 닦기 때문에 많은 전문가와 뛰어난 인물들이 배출된다. 그 가운데서 특출한 사람이 나타나면 그는 기존의 기예를 발전시켜 또 다른 문파, 또 다른 기예를 창설하기도 한다. 이에모토 제에서는 집안 대대로 오로지 하나의 기예에 전문화하기 때문에 전문가를 양성하기 좋다는 장점이 있지만, 폐쇄적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외부의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는 장애가 된다는 단점도 있다.
나는 종합격투기 시합을 보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전에는 K1이나 프라이드를 즐겨보았고, 요즘은 특히 UFC를 즐겨본다. UFC와 같은 MMA 스타일의 종합격투기에 사용되는 무술로서는 복싱, 킥복싱, 레슬링, 유도, 주짓스, 태권도, 삼보, 카라데 등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주짓스는 이 가운데 가장 널리 사용되는 무술이다. 그럼 주짓스란 어떤 무술인가?
우리나라 고유 무술로서 택견이 있듯이, 일본에서는 옛날부터 유술(柔術)이라는 실전 무술이 있었다. 유술의 일본어 발음이 바로 주짓스이다. 19세기 말 카노 지고로(嘉納 治五郎)라는 뛰어난 유술가가 있었다. 그가 유술 기술을 종합 정리하여 새로운 무술을 창안하여 스포츠화 하였다. 이것이 바로 현대의 유도(柔道)이다. 이후 유도는 급속도로 대중화되어 스포츠로서 확고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합기도(合氣道)와 카라데(唐手, 空手)도 그 뿌리는 유술에 두고 있다.
마에다 미쯔요, 카를로스 그래시에, 로이 그래시에
20세기 초 일본은 미국과의 친선을 도모함과 아울러 일본 무술을 세계에 널리 알린다는 취지로 무술 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미국 전역을 순회하면서 미국의 다양한 무도가들과 시합을 벌였다. 이들 무술 사절단 가운데 일본 유도의 한 이에모토에 속한 제자인 마에다 미쯔요(前田光世)란 유도가가 포함되어 있었다. 사절단이 귀국할 때, 마에다 미쯔요(前田光世)는 홀로 미국에 남았다. 그는 이후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각종 무술 강자들과 시합을 하였는데, 1,000승을 돌파하였다고 한다. 그는 당시 미국에서 힘깨나 쓴다는 무술가들을 모두 제압하였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브라질로 갔다.
브라질에 간 마에다(前田)는 브라질에서 일본의 이에모토 제를 답습한 도장을 개설하였다. 제자들을 모아 그동안 그가 각종 무도가들과 싸워오면서 습득한 실전 기술과 유도로부터 파생된 기술을 종합하여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이것은 실전화(實戰化)된 유도기술로서 마에다는 이를 유도와 구분하여 유술(柔術, 주짓스)이라 하였다. 마에다에게 가스타온 그레이시라는 사람이 자기 아들들에게 유술을 가르쳐주기를 청해왔다. 그의 아들 카를로스 그레이시(Carlos Gracie)와 에리오 카를로스(Hélio Gracie)는 마에다로부터 유술을 배워, 그레이시 가문은 유술을 전문으로 하는 집안으로 태어났다. 카를로스 그레이시와 에리오 그레이시는 도장을 개설하고, 유술을 실전형으로 더욱 가다듬어 브라질에 널리 보급하고, 미국에까지 진출하였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것이 “브라질리안 유술(柔術)”, 혹은 “그레이시 유술(柔術)”이라고 하는 무술인데, 우리는 이것을 유술의 일본어 발음인 주짓스라 부르고 있다.
그레이시 일가 역시 이에모토 제를 답습하여 그 일가에게 모두 유술을 수련하도록 하였다. 브라질리안 주짓스는 세계적인 종합격투기의 대결장인 UFC가 출범하면서 그 진가가 알려졌다. UFC는 그레이시 일가가 창설한 대회라 할 수 있다. 에리오 그레이시로부터 유술을 배운 그의 여섯째 아들 로이스 그레이시(Royce Gracie)는 UFC 1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때의 UFC에서는 체급구분이 없었다. 로이스 그레이시는 참가 선수 중 몸무게가 가장 가벼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선수들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하였다. 로이스 그레이시는 이후에도 UFC 2, UFC 4에서 우승하게 된다. 초기 UFC에서는 브라질리안 유술을 수련한 무도가들이 대회를 휩쓸었다. 이를 계기로 격투가들은 너도 나도 브라질리안 유술을 배웠으며, 이로서 브라질리안 유술, 즉 주짓스는 가장 강력한 격투 무술로서 세계로 확산되게 되었다.
결국 주짓스라는 무술도 일본의 이에모토 制라는 체제로부터 파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