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생, 응집, 잡초, 글 이야기-서봉수론<3>
2. 응집凝集cohesion
말을 하지 않아도 나는 알고 있다.
많은 친구들이 죽었는데 나만 살아남은 것은
단지 내가 그들보다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지난 밤 꿈에 죽어 간 친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나에 대하여 이렇게 평했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내 자신이 싫어졌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전문(번역/흰고독)
서봉수는 독설가라고 합니다. 독설가란 '남을 사납고 날카롭게 매도하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남을 사납고 날카롭게 매도해야만 독설가라는 호칭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독설가를 자청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말뜻과는 달리 독설가는, 언변에 있어서는, 허를 찌르는 말과 정곡을 찌르는 말을 거침없이 하거나 언중유골의 화법에 능한 사람을 지칭하고, 행동에 있어서는, 주류에의 편입을 거부하고 부정을 역설하여 긍정을 이끌어내는 반골기질의 소유자를 지칭하는 게 일반적인 경향인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독설가인 조지 버나드 쇼(그는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하여 독설가의 전형을 보여주었습니다)는 [안드로클레스와 사자]라는 그의 희곡에서, 공개 처형을 당하는 그리스도교 교인들의 의연한 모습을 통하여,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마저도 가차 없이 버릴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반드시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들놈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있습니다만, 종교적인 사람도 아니며, 목숨마저도 가차 없이 버릴 수 있는 대상 또한 알고 있지 못하기에, 그저 [안드로클레스와 사자]에서 인간의 신념을 읽었다는 사실만을 전해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신념은 비단 독설가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존재를 확인하고자 하는 모든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겠지요. 서봉수는 신념이 강한 승부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새로 부임한 한국기원 모 이사장이 바둑 한 판을 청하며 그에게 이사장실로 내려오라는 전갈을 보내자 거부하고, 모 이사장으로 하여금 직접 기사실로 올라오게 만든 일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야기가 거기서 끝났다면 그냥 그랬으려니 하고 말 일이겠지만, 그는 기사실에서, 모 이사장에게 '덤 수십 집을 준 호선'으로 바둑을 두면서, '접대'의 관행을 깨고 반상에 살아 있는 돌이 하나도 없는 '이만방'으로 모 이사장을 모셨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한국기원 이사장이 소속 프로기사를 공적인 일로 부르면 당연히 내려가야 한다. 그러나 바둑을 두고자 한다면 나는 사범이고 그는 아마추어다. 그가 올라와야 한다. 나는 예우받을 자격이 있다. 내가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 하나를 양보하면 끝없이 양보해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그는 임기를 마치고 떠나면 그만이지만 나는 남아 풀기 떨어질 때까지 바둑을 두어야만 한다. 둘 중 누가 바둑 앞에서 존재를 고수해야 하는지는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
이 일화 이후 서봉수의 '가수'생활이 불협화음일변도였으리라는 것은 자명해 보입니다. 물론 그도 그걸 잘 알았을 터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탕을 친 것은 그가 만만치 않은 신념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촌철살인은 철학자에 버금간다고 합니다.
"바둑이란 나무 위에 돌을 놓는 것이다."
"바둑의 핵심은 연결이다."
"존경이란 강아지가 먹이를 주는 주인에게 반대급부로 바치는 감사 표시이다."
어떻습니까? 철학 냄새가 물씬 풍기지 않습니까?
"일류와 삼류의 차이를 아는가? 불행하게도 나는 그 차이를 잘 모른다. 아니, 나는 일류와 삼류는 전혀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말 역시 그의 어록에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반골기질이 여실히 드러나는 이 말이 그의 승부세계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고 보았습니다.
일류라면 성적을 많이 내는 강자를 뜻할 것입니다. 삼류라면 당연히 약자가 되겠지요. 강자라면 전력을 비교하였을 때, 이긴 데이터가 많고 우위를 점한 쪽이며, 승부를 예측할 때, 미리 알고 손을 들어주는 쪽일 것입니다.
약자라면 전력을 비교하였을 때, 코피 난 데이터가 많고 열위로 밀린 쪽이며, 승부를 예측할 때, 사단의 하나인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는 쪽일 것입니다.
강자와 약자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그 사이에는 '이길 가능성이 높다'와 '이길 가능성이 낮다'라는 천양지차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서봉수는 강자와 약자의 차이를 잘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강자와 약자의 차이를 잘 모르는 것이 왜 '불행한' 것이 되는지는 잘 모르지만, 승부로 잔뼈가 굵은 서봉수가 정작 강자와 약자의 차이를 잘 모른다고 말한 것은 도대체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 보다 강자와 약자의 차이를 더 잘 알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또 있는 것일까요?
더욱이 서봉수는 강자와 약자의 차이를 잘 모른다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강자와 약자는 전혀 차이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일류와 삼류는 전혀 차이가 없다니요? 그렇다면 [야전사령관]과 [흰고독]도 전혀 차이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에이. 그럴 리가요. 집문서를 걸고 바둑을 둔다면, <흰고독>이 아홉 점을 깔고도 길거리로 나앉는 것은 시간문제 같은데요.
저는 이 말을 자신감의 표출로 보았습니다.
저는 이 말의 근저에 '그것의 원인이 승부의 의외성에 있든 약자의 절치부심에 있든 강자의 교만에 있든, 때에 따라 승부는 객관적인 예측과는 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그건 곧 승부를 겨루기 전에는 강자와 약자를 구분할 필요도 없고 구분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차이를 알 필요도 없고 차이를 알 수도 없다는 뜻이다. 일류와 삼류, 강자와 약자는 언제든지 신세가 서로 뒤바뀔 수도 있는 것인데, 길고 짧은 것을 대보기도 전에, 짧다 혹은 길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경망스러운가? 바둑알을 굴리면 어느 방향으로 굴러갈는지 누가 안다는 말인가?'라는 강한 자신감이 깔려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걸로는 부족했습니다. 강자와 약자의 차이를 잘 모른다면야 트집거리가 될 수 없지만, 강자와 약자는 전혀 차이가 없다고 단언한다면 반드시 물증이 뒤따라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의 진의를 놓고 고심하다가 가까스로 '응집'이라는 수식어를 떠올렸습니다.
응집은 '분산 또는 용해되어 있던 물질이 한데 엉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응집력이라고 하면 '한데 엉기는 힘' 즉 '끌어 모으는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서봉수가 당구에도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까 당구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당구에 '몰아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단 한 번의 찬스에 '쇼부'를 낸다는 뜻입니다.
만약 '100점 다마'인 하수와 '500점 다마'인 상수가 당구를 - 그것도 내기당구를 친다면 십중팔구는 하수가 코피 납니다. 100점이 500점에게 쌈짓돈으로 덤벼도 코피 나고, 집 판돈으로 덤벼도 코피 나고, 몸 판돈으로 덤벼도 코피 나고, 최후의 보루인 마누라 판돈으로 덤벼도 코피 납니다. 나중에는 쌍코피까지 납니다.
이렇게 하수가 일방적으로 코피 나는 이유는 하수가 '쓰리쿠션'에서 발목을 잡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상수에게는 몰아치는 '한 큐'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120점을 치면서 '짜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언젠가 세미프로(700점)인 당구장주인의 꾐에 넘어가 내기(게임비용과 음료수)당구를 친 적이 있었습니다.
애당초 이긴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분수를 알아야죠. 그런데 열중하다 보니 제가 110점을 올리도록 그는 160점에서 똥을 뭉개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화류계 생활' 오래하다 보니 별 희한한 경우도 다 보겠다고 생각하며 믿어지지 않는 현실에 희희낙락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입니까? 한 순간 700점이 공 두 개를 코너로 몰아넣고 '왔다리갔다리' 개다리 춤을 몇 바퀴 돌았다 싶더니만, 그 길로 그냥 승부가 끝나고 말았습니다.
하하. 큐를 놓고 비누로 손을 닦으며 저는 간발의 차이로 천국과 지옥을 둘 다 구경시켜 준 700점의 허허실실 전법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구의 조건과 바둑의 조건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응집력을 설명하기 위한 예로는 적절한 것 같습니다.
응집력은 '끌어 모아' 폭발하는 힘을 말합니다. 응집력은 '클레이모아'처럼 무섭습니다. 응집력에 걸려들면 사망입니다. 최소한 중상입니다.
저는 서봉수가 강자가 아니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그 자신은 일관되게 강자로 공인받는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린 모양입니다. 강자와 약자는 전혀 차이가 없다라고 단언하는 것은 스스로 강자라고 자부하는 입장에서라면 그렇게 필요한 처사라고는 여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봉수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휴화산처럼 잊을 만하면 한 번 씩 끌어 모아 폭발시키는 기절초풍할 용틀임을 거듭해 온 승부사입니다.
응집력! 저는 연속적이지 못한 그의 패턴이 연속성을 갖게 되기를 바라는 팬 중의 하나이지만, 그가 특정한 승부에 응집력을 발휘하는 것은 분석이 여의치 않은 그만의 타고난 호흡법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도 자신의 호흡법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호흡법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일류고 삼류고 다 때려치우라는 후끈한 속내를 그토록 자신 있게 내비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일류와 삼류는 전혀 차이가 없다라는 말을 통하여, 그 자신이 '계시를 받으면' 하시라도 정상으로 비상할 수 있는 내공을 갖춘 승부사라는 사실을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인물. 우리 시대의 거장, 스승을 말하다(월간중앙 연재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수진 2(프리마 발레리나) (1) | 2023.08.30 |
---|---|
조수미 (소프라노) (0) | 2023.08.30 |
서봉수론2 (0) | 2023.08.25 |
서봉수론 1 (0) | 2023.08.25 |
귀거래사와 인생 이모작 (0) | 2023.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