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의 전설 조훈현 일대기 2
영암(靈巖)-
말 그대로 신령스런 바위로 일컬어지는 지명인데 이는 곧 월출산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해발 809미터의 월출산은 소백산맥이 남으로 뻗어 내려가다 바다와 만나는 종착지에서 못내 아쉬운 듯 최후의 기세를 떨쳐 조각해놓은 명산이다.
남도의 곡창지대에 돌연(突然)히 치솟아 오른 월출산의 윤곽은 웅장하면서 화려하다.
산 전체가 기암괴석으로 이뤄져있어 온갖 전설이 서려있는가 하면 왕인 박사와 도선국사 등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 땅이기도 하다.
정상인 천황봉에 올라서면 북으로 영암 땅, 남으로 강진 땅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같은 남도라도 이른 봄 대지의 빛깔이 완연히 구분된다.
강진(康津)땅이 한 뼘쯤 아래 있다고 보리 싹이 조금 더 파랗게 자라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월출산의 산세도 남과 북이 판이하다.
풍화작용 때문인지 북쪽은 암반의 노출이 심하고 남쪽은 중턱부터 비교적 완만한 능선이 흘러내린다.
그러니까 영암 쪽 산세가 훨씬 급박하고 화려한 것이다.
그에 비해 강진 쪽 산세는 유려하고 온화한 느낌을 준다.
이런 산세가 주민들의 심성에 유형무형으로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 리 없을 터-
아무래도 영암 사람들의 기질은 강진 사람들보다 조금 억센 편인 듯 싶다.
월출산의 지형을 구구절절이 소개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이 두 고장에서 불세출의 바둑명인 두 사람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영암의 조훈현과 강진의 김인(金寅).
그 고장 사람들은 이 두 천재의 출현을 월출산 정기의 발현(發顯)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거기에 나는 월출산 남북사면(南北斜面)의 차이가 기풍의 차이로 드러나지 않았느냐고 강변하는 사람이다.
조훈현의 기풍은 월출산 북 사면의 기암연봉처럼 자유롭고 신묘하며 강미(强味)가 있고, 김인의 기풍은 남 사면의 갈대능선처럼 부드럽고 온유하며 두텁지 아니한가?
다분히 견강부회(牽强附會) 격으로 갖다 맞춘 논리이긴 하지만 언젠가 나는 월출산 천황봉에서 그토록 절묘한 신의 섭리를 혼자 발견한 것만 같아 몇 번이고 영암과 강진을 번갈아 보곤 한 적이 있었다.
영암출신 왕인 박사는 일본에 문물을 전해 아직까지도 그들의 스승을 추앙 받는 인물이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혹시 왕인 박사가 바둑판도 들고 간 것은 아니었을까?
중국에서 탄생한 바둑이 일본까지 전래된 데에는 필연적으로 한반도가 교량 역할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 시기가 꽤나 오래됐을 것을 감안한다면 아마도 삼국시대 무렵이 얼추 맞아떨어질 것이고 그렇다면 백제의 창구인 영암 땅 해창만을 통해 전파됐으리라 추리해봄직하다.
그로부터 아득히 먼 훗날, 이 고장의 바둑천재 김인과 조훈현이 거꾸로 일본에 유학을 떠나 바둑의 정수(精髓)를 습득해왔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현대 한국 바둑의 정상은 거의 호남출신 기사들이 독무대나 다름없다.
조남철(부안) - 김인(강진) - 조훈현(영암) - 이창호(전주)로 이어지는 찬란한 라인업을 보라.
거기에 조치훈도 알고 보면 부안출신이고, 신안의 이세돌도 한 몫을 거든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뭔가 아쉬운 감이 있지 않은가?
나는 이 현상에서도 풍수지리적 코드를 대입해보고 싶다.
예로부터 산자수명(山紫水明)하고 풍요로운 호남 땅은 예(藝)와 풍류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고려시대 왕건의 훈요십조(訓要十條) 이후,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호남사람들의 에너지는 아무래도 현실 바깥쪽으로 많이 분출됐으리라.
서편제와 육자배기, 문인화와 도예, 그리고 바둑 같은 취미가 성행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내력들이 흐르고 맴돌고 고여 스며들었다가 마침내 오늘날 바둑이란 분야에서 엄청난 잠재력을 폭발시킨 것은 아닐까?
억지라고 몰아붙이면 할말 없지만 어쨌거나 세대별로 정상의 자리를 대물림해 온 호남출신 기사들의 득세는 전체 프로기사 출신지별 분포 비율을 완전히 무시하는 결과로 나타나서 한번쯤 이런 식으로라도 분석을 해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조훈현의 뿌리는 대강 이렇다.
이제 이야기는 다시 그의 가족사와 개인사로 돌아간다.
해방이 되자 그의 부친 조규상은 정든 고향 땅을 떠나 목포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메이지 대학출신인 조규상과 명석한 처 박순례는 일제 당시 영암 땅에서 지식인 대접을 받았으므로 아무래도 해방이 된 시점에서 일부 주민들로부터 질시어린 눈총을 받았던 듯 보인다.
그런 부자유로부터 벗어나고 또 성장하는 자녀들의 교육환경을 감안해서 부부는 과감히 목포행을 결정하게 된다.
그 때가 바로 1946년이다.
목포는 항구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가수 이난영은 그리 구슬프게 목포가 항구임을 노래했을까?
너무나 단순한 그 노래 제목에는 영산강의 안개와 삼학도의 등대, 유달산 동백꽃과 똑딱선 기적 위로 나르는 갈매기의 영상이 오버랩 되어있다.
목포와 관련된 유행가나 문학작품의 밑바탕에 흐르는 기본적인 정서는 ‘哀傷’이다.
개항 1백년이 넘은 목포는 일제 때만 해도 삼백(三白)-쌀, 소금, 누에고치 -의 집산지로 번성을 누렸던 곳.
부산, 인천과 함께 3대 항구로 일컬어졌던 도시였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광복과 함께 공출산업의 기반이 와해되면서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물류기지로 발전하기에는 수심이 얕고 조수간만의 차가 극심해 천상 어항(漁港)의 지위로나 만족해야 할 입지조건 때문에 도시의 활력이 감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연유로 많은 사람들이 목포를 떠나 상경하는 러시가 일어난다.
그렇게 떠난 실향민들의 가슴과 뇌리에 목포는 아무래도 애상어린 고향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1번 국도의 종점이자 호남선의 종착역인 목포-
이 나라의 남단 땅 끝에 아련히 떠 있는 목포-
그러나 바둑황제 조훈현에게 있어서 목포는 세계로 뻗어가는 출발점이었다.
해방과 함께 영암에서 목포로 건너 온 조규상 일가는 항구에서 가장 번화한 한복판에 터를 잡고 제 2의 인생을 시작한다.
처갓댁의 배려로 목포극장 바로 옆에 위치한 2층 상가건물에 입주해 본격적인 도시생활에 적응하게 된다.
그 곳에서 조규상은 아주 짧은 기간 내에 사업적 성공을 거둔다.
그리 셈에 밝은 편은 아니었으나 메이지 대학 출신인 이 인텔리 사업가는 목포에서 유일한 지물포를 개업해 독점적 영업으로 제법 돈을 모으게 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히트상품은, 학용품인 공책을 제작판매하는 일이었다.
서울에서 전지 크기의 종이를 도매로 구입해 와 재단한 다음, 기술자들에게 하청을 주어 노트를 만들어 팔았는데 그게 곧바로 대박으로 연결된 거였다.
그 당시에 얼마나 많은 매출을 올렸는지 하루 영업을 끝내면 M1 실탄박스에 하나 가득 지폐가 들어왔고, 자녀들은 그 돈을 추리다가 찢어진 돈을 골라내어 저녁마다 고급과자 센베를 사먹었다고 한다.
그 시기가 상인 조규상의 개인사에 있어 가장 화려했던 절정기였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대부호가 될 것만 같았던 조씨네 일가를 누군가 질투했는지 몰라도 한창 장사가 잘 될 때 엄청난 세금을 맞게 된 것이다.
당시에 개인사업자로는 목포에서 가장 고액납세자로 거론될 만큼 많은 세금을 물게 된 조규상은 끝내 조세(租稅)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파산하게 된다.
그런 와중에 6.25동란이 터졌고, 조씨일가는 빈손으로 피난살이를 하며 극심한 빈곤을 경험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목포로 돌아온 조규상은 목포역 부근에 조그만 고무공장을 차려 재기를 모색하며 가세를 추스르기 시작한다.
바로 그 무렵 늦둥이 막내아들을 얻게 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조훈현이다.
다른 누나나 형들이 아버지의 전성기 때 비교적 풍요로운 환경을 누린데 비해 막내아들 조훈현은 가정경제가 최악인 상황에서 태어난 거였다.
어쨌거나 늦게 본 막동이를 아버지는 끔찍하게 예뻐해 자나깨나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애지중지했는데-
두 살에서 세 살로 넘어가던 조훈현이 남다르게 영특하다는 사실을 가족들이 깨닫게 된 것은 다름아닌 실종소동 때문이었다.
어느날 그 막동이가 엄마, 누나들이 한눈을 판 사이에 집을 나갔는데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자 난리가 났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훈현이는 이제 간신히 걸음마를 시작한 단계였고, 입은 옷도 소변 보기에 용이하도록 앞섶이 동그랗게 터진 갓난애 바지를 입고 있었던 철부지였던 것이다.
온동네를 뒤지고 다녀도 종적이 묘연한 훈현이의 실종 사실을 아버지께 알리기 위해 역전 뒤 고무공장으로 숨가쁘게 달려갔던 엄마와 누이들은 공장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맥이 탁 풀려 희비가 교차하는 한숨을 토하고 만다.
뜻밖에도 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천진난만하게 놀고있는 훈현이를 발견한 거였다.
“아버지께서 훈현이를 공장에 데려 왔나요?”
“아니, 아까 지 혼자 들어오더라.”
아버지 조규상은 그 때까지도 막내 훈현이가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자 딸들이 반문했다.
“얘가 몇 살인데 여기까지 혼자 걸어온단 말예요? 집에서 공장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데......?”
그제서야 아버지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철없는 막내아들을 내려다 보았다.
“훈현아. 너 여기 혼자 왔느냐?”
어린 훈현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만 끄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