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잡문 / 김시헌
논문도 아니고 문학 작품도 아닌, 호적을 밝히기 어려운 글을 통틀어서 잡문이라고 한다. 논문이 사물을 해부 분석해서 작자의 주장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데에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잡문은 처음부터 그러한 의도가 없거나, 있다 해도 그 해부와 분석이 미진하거나 처음부터 의도가 빗나가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잡문은 논문의 자격도 갖추지 못하고, 문학 작품에도 미치지 못했을 때 붙여지는 일시적인 이름이다.
그런데도 잡문은 가끔 문학 작품이 아닌가 하는 혼란을 유발한다. 문학 작품 중에서도 특히 수필과 혼돈을 많이 일으키고 있다. 그 이유는 수필이 가지고 있는 문장적인 특징과 유사한 요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필은 표현 형식이 자유롭고, 대부분 1인칭의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다른 문학인 시·소설 ·희곡은 형식이 대체로 고정될 뿐 아니라, 인칭은 작자 자신을 가리키지 않고 작품 속의 주인공을 지칭하고 있다.
그런데 수필과 잡문은 다같이 '무형식의 형식'이라는 자유로운 형태에 의해 쓰여지고, 인칭도 대부분 1인칭을 함께 쓰고 있다. 또 그 1인칭이 작품 속의 주인공이 아니고, 바로 작자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면 무엇으로 수필과 잡분을 구별할 것인가. 어떤 사람은, 글이 담고 있는 내용에서 수필은 인생과 자연을 주로 다르고 있지만, 잡문은 지식이나 도덕·시사 같은 소재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도 어떤 것을 소재로 하든, 요리하는 각도와 솜씨에 따라 수필도 되고 잡문도 된다. 다 같은 나뭇잎을 식량으로 하면서 누에는 깁실이라는 섬유질을 뽑아내지만. 염소는 동그랗고 작은 배설물만 내놓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수필과 잡문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일까?
가장 분명한 구별은 주제에 있다. 수필의 주제는 인생과 자연, 문화의 진실을 지적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다. 그것도 감정이라는 기름을 곁들여서 문학성을 확보한다. 하지만 잡문은 자극·이해·경고·질책·교정에 목표를 둔다. 따라서 잡문은 특정된 사실을 특정된 사람에게 한정한다. 그러나 수필은 독자를 한정하지 않는다. 사람·지역·빈부·직업·유식·무식을 구별하지 않는다. 따라서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다. 문학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잡문은 제한된 시간에 일어나는 제한된 문제를 제한된 사람에게 전달하려는 의도가 있다. 그리하여 서술어의 말미에 지시·권유·명령·강요의 말이 들어가기도 한다. 즉, 잡문 문장 속에는 "…어야 한다,",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자."라는 표현이 나타나게 된다. 그 반면, 수필은 누구를 향해서 발언하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객관적인 표현에 그친다.
잡문이 때로 독자에게 수필보다 더 강렬한 호소력을 갖는 것은 제한된 대상에게 제한된 문제를 바로 전달하기 때문이다. 굶어죽기 직전의 한 어머니에게 동물도 그러지 않는데, 하물며 사람이 어떻게 자기 자식을 길거리에 버릴 수 있느냐고 지적했다면 그것은 잡문이다. 예컨대 신문에 나오는 '수필 컬럼'은 그래서 대부분 잡문으로 판정을 내린다. 다만 컬럼도 그 속에 인간에 대한 영원하고 근원적인 문제를 고백 형식으로 썼다면 수필로 대접받을 수 있다.
수필은 내용을 독자의 가슴에 전달하지만, 잡문은 독자의 머리에 전달한다. 수필은 예술에서 오는 감동을 주지만, 잡문은 교육과 질책과 죄책을 준다. 수필은 '무목적의 목적'이라는 쾌감과 해방을 주지만, 잡문은 독자에게 부담을 준다. 그렇다고 해서 수필이 반드시 잡문보다 독자에게 유익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글의 목적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매월 잡지에는 수많은 수필이 발표되고 있다. 그 수필 속에는 잡문이 상당수 섞여 있다. 그런데도 수필이라는 표제를 달고 목차를 꾸민다. 그러나 잡지 편집자에게 책음을 묻고 싶지는 않다. 때로는 독자가 변화와 재미와 자극을 주는 잡문을 읽고싶어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필가 자신은 이를 구별해야 한다. 그 단순한 구별은 자신이 써놓은 수필이 백 년 뒤, 5백 년 뒤에도 읽혀지겠느냐를 점쳐보아야 한다. 수필은 시공時空을 초월한 문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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