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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론[수필 작법, 글쓰기 , 기타 ] 비평 수필이론 등

수필의 형식

by 자한형 2023.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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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형식 /신재기

게오르그 루카치는 [에세이의 본질과 형식]에서 "형식은 하나의 세계관이고 하나의 입장이다. 또 형식은 그것이 생겨나는 바의 삶에 대해 갖는 일종의 태도 표명이다."라고 했다. 전후 문맥이 생략된 인용이라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곤란하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가볍지 않다. 형식은 내용을 담아내는 그릇이라는 생각, 형식과 내용은 분리되어 있다는 견해에 제동을 걸어온다. 형식은 이미 고정된 틀로 내용을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는 일반적인 견해가 오해임을 확인시켜 주기도 한다. 루카치는 형식이 세계관에 닿아 있다고 본다. 세계관이 형식을 창조한다는 말이다. 이는 모든 작품에는 작가의 세계관을 구현하는 최적의 형식이 있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형식은 모든 감정과 체험이 압축되어 만들어지는 것으로서 삶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는 그 작가만의 고유한 방식이라고 하겠다.

창작 과정에서 작가는 자신의 개인적인 세계를 작품에 온전하게 구현하는 길을 모색한다. 그런데 작가가 선택한 언어, 즉 내용과 형식은 늘 엉성한 그물 같아서 작가의 의도와 욕망의 많은 부분을 놓쳐버리고 만다. 극단적으로 말해, 작품은 작가의 흔적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애초부터 작가가 의도한 어떤 것이 있다고 치자. 그것이 작품 속에 구현되는것도 일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독자가 받아들일 때 그것은 다른 모습과 색깔로 바뀌고 만다. 이런 점에서 작품이 작가 전부일 수 없음은 자명한다. 그러나 독자 앞에 놓인 작품은 하나의 통일체로서 완결성을 가진 결과물이다. , 그것만의 고유한 형식으로 존재한다. 작품이 독자에게 수용되면서 새로운 빛을 발산하고, 작가 세계는 하나의 통일체로서 해석된다. 작품은 작가의 세계를 닫아버리는 것이지만, 작품이 독자에게 읽히는 순간 작가의 세계는 열린다. 흔적으로만 남았던 작가의 세계는 드디어 통일된 완결체로서 독자에게 새겨진다. 이를 가능하도록 해 주는 것이 작품의 형식이다. 작가의 세계는 작품 형식에 의해 완성되는 셈이다. 이런 이유에서 루카치는 형식을 작가의 세계관이라고 했을 것이다.

무형식의 형식을 가진 것이 수필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비판이 누적되어 수필을 무형식의 문학이라고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다. 어쨌든 수필의 형식이 자유롭다는 생각은 일반적이다. 그래서인지 수필의 형식에 대한 탐구는 아직 짧은 듯하다. 문학에 대한 심미적 사유의 출발이 '무엇을 말하는가'보다는 '어떻게 말하는가'에 있다고 한다면, 수필 형식에 대한 담론은 마땅히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고유 형식의 위반 - 소설 기법 채용

내가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 수필이다. 자아와 세계를 통일시하든, 대상에 자아를 투사하든 간에 ''는 항상 작품 형식의 중심에 있다. 그런데 자기 자신과 연관된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신경 쓰이는 일이 한둘이 아니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수필 쓰기라고 하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작품 속의 ''는 실재하는 ''와 같은 인물이다. ''는 사회생활을 하는 인격적인 주체이기에 도덕적인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수필의 숙명적인 한계인 동시에 고유성이다. 이런 점에서 수필 쓰기는 자기 자신을 적당히 숨기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그 손쉬운 방법은 허구체계를 빌려 오는 것이다. , 소설을 닮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는 불가능하다. 수필은 허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소설인 척해보는 것이다. 이는 '자아' 노출을 일부분 완화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못된다. 수필은 소설이 아니다.

류영택의 [문간방 유씨]는 소설 방법을 부분적으로 채용한 작품으로 읽힌다. 달동네 문간방에서 가난하게 살았던 시절을 회고한다. 그 시절 힘들었던 삶을 이렇게 말한다.

같은 시간대에 하나밖에 없는 화장실을 여러 사람이 쓰느라고 불편했고, 산허리를 돌아 골목길을 오를 때면 등줄기에 땀이 배어나도록 힘들었지만 살다보니 그 집도 문간방도 살 만한 곳이었다. 다들 막노동을 하거나 남들 앞에 떳떳하게 밝힐 수 없는 일을 하는지라 직책 대신 김 씨, 이 씨호칭을 쓰는 웃지 못할 촌극을 빚기도 했지만, ‘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자존심이었으며 행여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는 나름대로의 방어책이었다.

이 예문은 작가의 가난했던 당시 삶을 잘 말해준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작가의 가난했던 시절의 삶을 단지 반추하는 데에서 끝나는가? 과거 어려움을 견뎌내고 열심히 살았기에 지금은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작가의 성공담인가? 누구의 추억담에든 가난과 시련은 미화되기 마련이다. 그 가난이 지금까지 지속한다면 그것을 담아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과거 시련의 극복기는 대부분 지금의 성공과 자기 자신을 미화하는 나르시시즘을 떨쳐내가 어렵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작가의 가난했던 시절을 추억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작품 끝에서 "지금도 문간방에는 사람이 살고 있다."라고 한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이 작품의 문간방 추억은 보편성을 얻게 된다. 작품의 의미가 단단하게 영그는 순간이다. 달동네와 문간방은 사회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소외인의 공간이다. 작가 개인의 체험을 통해 이 작품은 결국 우리 사회 주변에서 소박한 꿈을 간직한 채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으로 완결된다.

이 작품은 주제 형상화에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무엇보다 소설의 방법을 적절하게 차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화자인 ''의 전면 등장을 최대한으로 줄이면서 더러 ''와 같은 인물인 ' 유 씨'를 섞어 언급함으로써 마치 삼인칭 시점의 효과를 얻는다. 유 씨가 함께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을 "이 집 사람들은"이라고 칭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3인칭 시점이란 착각을 불러일으키도록 한다. 그리고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직접적인 대화로 말미암아 작품은 단편소설의 분이기를 연출한다. 단편소설이라고 단서를 붙였다면 독자는 소설로 읽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그런데 문제는 소설 방법을 차용하여 무엇을 얻었는가 하는 점이다. 굳이 이렇게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효용성이 문제된다. 수필인데도 소설의 방법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 작품의 중심 내용이 가난했던 과거 문간방 생활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소설적인 형상화 방법이 적격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언어를 소비하고 있다. 문학적 압축성을 희생해가면서 이렇게 시도할 무슨 뚜렷한 이유가있는가? 답변이 궁색할 듯하다.

전상준의 [거리풍경 2]는 산문이 될 수 있는 최소한 말만을 사용한 경우다. 소위 카메라 렌즈 기법이다. 카메라 앵글 속에 들어오는 풍경만을 포착한다. 물론 대상으로서 풍경 선택과 카메라 초점을 맞추는 일은 작가의 몫이다. 이 작품이 보여준 최소한 언어 사용은 그 양을 줄인 것이지, 함축적인 것은 아니다. , 그만큼 사용된 언어가 투명하다는 말이다. 카메라에 포착되는 대상은 정지된 상태다. , 순간적인 풍경이다. 정지된 풍경을 담는 데는 절제되고 투명한 언어가 적격일 것이다. 사실주의 소설에서 장면이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상세한 묘사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이때는 많은 언어를 동원하여 세부적인 충실성을 추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거리풍경 2]는 거리 풍경의 진실한 실체를 탐색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풍경의 순간적인 이미지를 포착할 뿐, 그것의 진실성은 독자 몫으로 남겨둔다. 작가가 대상의 진실을 자신의 의도대로 정확하게 말하려는 욕망이 크면 언어의 양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작가는 대상을 보여주기만 하고 그것에 대한 의미나 가치 판단은 전적으로 독자에게 맡긴다.

첫째 풍경긴 '책가방을 멘 할머니'에서는 "할머니와 중년 남자한테서 살아온 인생 경륜만큼이나 삶의 철학에서 차이가 있음을 느낀다.", 둘째 풍경인 '술떡 파는 할머니'에서는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삶의 모습이 나를 어리둥절하게 한다."로 끝난다. 이야기 밖에서 관찰자로 있던 화자가 안으로 들어오는 대목이다. 작가는 풍경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미진함을 느낀 것인가. 화자가 끝까지 이야기 밖에 머물고, 작가의 의도는 풍경 형상화에 흡수될 수 있도록 했다면 더욱 완벽했을 것이다. 그런데 수필의 자아인 ''를 철저하게 소외시키는 것은 수필의 위반이다. 수필을 위반해가면서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는 것은 어떤 의의를 지니는가? 시의 방법을 가져왔든 소설의 기법을 적용했던 간에 그 형식은 작가가 선택한 것인 만큼 작품 의미와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전통 거부와 중심으로부터의 이탈은 새로운 실험이 주는 위험을 피하기 어렵지만,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 '자아' 과잉과 나르시시즘에 갇힐 가능성이 큰 것이 수필이 아닌가. 인접 장르의 방법을 잠깐 빌려오는 것은 매너리즘의 일시적인 탈출구는 될 수 있을지언정 본질적인 방법일 수는 없다.

해당 장르의 일반적이고 관습적인 형식 해체나 새로운 형식 시도는 작품을 상승시키는 작용을 할 수도 있고, 단지 하나의 형식적 실험 자체로 끝날 수도 있다. 선명한 주제와 메시지는 어쩌면 수필의 본질적인 속성이다. '교술'은 원래 주제를 형상화하기보다는 드러내기 방식의 글쓰기다. 주제와 결합하여 상승작용을 일으키지 못하는 형식 선택은 의욕이 넘치나 실속이 없을 성싶다. 수필적 자아인 ''를 삼인칭 '사내'로 표현하면서 완전히 괄호 속에 묶어버린 정태헌의 [그림자 초상]은 형식이 내용과 만나 상승 작용을 일으켰다면, 김인기의 [꽃이 좋아서] 그 반대인 것 같다.

고유 형식의 옹호 - 문체의 품격과 힘

고정된 형식이 존재하지 않을진대, '형식의 위반'은 가능한가? 새로 써지는 작품은 한상 기존 형식에 반기를 듦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확립한다면 '형식적 실험'을 거명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오랜 기간 변하지 않고 전통으로 굳어져 내려오는 부분도 있다. 이를 '문학적 관습'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불변의 가치는 아니지만, 원심력에 의해 변화하고 분산하려는 힘을 중심으로 모으는 것에 비교하면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 존재를 분명히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본전 찾기가 어렵다고나 할까. 그런데도 이를 지키는 것은 변화를 추구할 능력이나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이거나, 전통적인 가치를 존중하고 기본에 충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후자에 해당하는 작품을 만나면, 충격과 감동은 비록 크지 않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정서적 감응이 진지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최민자의 [겨울 나무 아래서]를 읽는다. 자연 대상을 예찬하는 전통적인 형식에 맥이 닿아 있는 작품이다. 1960-1970년대 국어교과서에서 읽은 수필 중에 민태원의 [청춘예찬]이나 이양하의 [나무]를 기억할 것이다. 대상을 예찬하는 이 같은 유형의 작품은 우리 수필계의 전통적인 양식으로 이어왔다. 동양의 전통적이 문체 양식에서 '송찬頌讚'은 일찍부터 있었다. 중국 육조시대 유협은 그의 [문심조룡]에서 '송찬'을 중요한 핵심 장르로 분류했다.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에서는 찬의 양식을 빌려와 찬양하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우리의 고전문학에서도 송찬 양식은 시조, 가사, 기타 산문 등에 널리 통용되었던 글쓰기 방식이다. 오랜 전통을 가진 익숙한 것이라서 오히려 이러한 형식을 채용하기는 편하기보다 조심스러울 수 있다. 이 같은 작은 우려 때문에 최민자도 작품 첫머리에서 "나무에 대해서는 쓸 생각을 마라. 습작 시절 스승께서 하신 말씀이다. 이양하 선생이 이미 써버렸으니 웬만큼 써서는 안 먹힌다는 것이다,"라고 했는지 모른다. 주제나 문장이 수준에 이르지 않고는 이러한 형식을 소화하기에는 부담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승의 삶을 다 살아 내어도 끝내 적멸에 이를 수 없다면, 바람처럼 자유롭게 떠돌 수도 없고 바위처럼 무심해질 수도 없다면, 오랜 늙은 배롱나무 아래 순한 흙거름으로 묻혀도 좋겠다. 저 마당 한 귀퉁이에 밝고 환한 빛으로 서서, 갈 길 묻는 나그네의 어둠을 가만히 밝혀 주어도 좋고, 승자의 역사 속에 묻혀 버린 패장의 무덤 가를 지키며 안으로 안으로만 나이를 먹어도 괜찮겠다. 불 속에서조차 소멸되지 못할 내 안의 광기들은 캄캄한 물관을 거슬러 올라 삼복 염천 석 달 열흘을 혼곤한 울음으로 타오를 것이다. 타 버린 것들만이 다시 맨몸으로 설 수 있음을 알기에. 죽어 나무가 되고 싶은 건 끝끝내 아름답고 싶어서이다. 아니면 끝끝내 살고 싶어서일까.

이 작품의 발상지는 배롱나무 예찬이었다. 그런데 마무리 단계인 여기에 이르면 예찬 대상은 사라지고 자아만이 남는다. 예찬의 맥락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나, 처음의 예찬 모습은 아니다. 대상에 자아 투사가 정점에 도달핟여, 대상은 완전하게 자아로 바뀌었다. 예찬 구조가 원래 자아와 대상의 동일화에서 출발하지만, 대상이 소멸할수록 예찬의 성격도 축소된다. 소위 자아의 세계화라는 '서정'의 틀 속에 갇히게 된다. 사물은 온통 자아로 채색되고 만다. 위의 예문에서 보다시피 자아는 아주 격렬한 모습을 드러낸다. 감정이 고조되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강한 서정을 보여주기는 쉽지 않다. "불 속에서조차 소멸되지 못할 내 안의 광기들은 캄캄한 물관을 거슬러 올라 삼복 염천 석달 열흘을 혼곤한 울음으로 타오르 것이다."라고 한다. 서정을 통한 작가의 감정 표출은 가능하면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 수필 창작 교과서의 가르침이다. 관조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반대다. 자아의 감정과 정서 표출이 폭발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시나 수필이 자아를 드러내는 전통적인 형식이지만, 자아의 정서 과잉은 금기의 규율로 인식되어 왔다. 특히, 모더니즘의 대두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이른 이론적인 인식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시인이나 수필가는 누구나 체득하고 있는 원리다. 그런데 이 작품이 의도적으로 이를 거부하고 서정의 극점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바꿔 말하면, 서정의 과잉에서 오는 부담을 상쇄해 주는 요소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문체다. 위의 예문에서 자세히 보면, 판소리체의 흔적이 묻어난다. 풍성한 어휘와 비유적인 어구, 동일한 의미나 이미지의 반복, 고조된 감정표출에 의한 호소 등이 그것이다. 과장과넘침의 구조가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체는 자아를 드러내기 위한 것보다는 청중의 호응과 참여를 얻어내는 데 무게 중심을 둔다. 여기에다"꽝꽝한 겨울 추위를 말없이 견디고 정물처럼 서 있는 한겨울 배롱나무가 서사를 버린 통찰의 결구처럼 비장미마저 느끼게 한다."라는 문장에서 보는 것처럼 비유 수준이 예사롭지 않다. 다의성을 내장한 '서사를 버린 통찰의 결구'와 같은 표현은 도달하기 쉽지 않은 품격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점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안고 있는 부담도 만만찮을 것이다. 전통적인 형식이 주는 익숙함이 꼭 편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말해 준다.

박헬레나의 [수다]을 읽는다. 일상의 발견, 자기 성찰, 소박하고 솔직한 사유, 정제된 문장 등 좋은 수필의 일반적인 요소를 두루 갖춘 작품이다. 여기서 좋은 수필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기본을 잘 갖추었다는 점일 것이다.

수필의 형식을 흔히들 시와 소설의 중간쯤에 있다고 한다. 작품의 길이뿐만 아니라 언어를 사용하는 방법도 그렇다. 시가 언어를 줄여 압축한다면, 소설은 풀어서 묘사하고 이야기한다. 수필은 산문문학인만큼 소설적 진술에 바탕을 두지만, 문장 표현에서는 시적인 함축을 상당 부분 채용한다. 그런데 중간은 양자의 장점을 취할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 양쪽 어느 것에도 온전히 소속될 수 없는 한계를 지닌다. 수필은 후자다. 중간 지점에 있기에 불편하고 까다롱누 형식이 수필인 것 같다. 수필의 숙명적인 구조라고 할 수 있는, 작가와 화자의 일치는 작가의 익명성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다. 허구 세계에 터전을 둔 시와 소설은 시인과 소설가의 익명성을 충분히 보장한다. 그리고 함축적인 표현을 통한 의미 표출의 애매성은 시의 고유한 속성으로 인정받고 있다. 소설에서도 다양한 장치와 방법에 의한 다성적인 의미 구성은 소설 미학의 기본이다. 이처럼 '자아'의 익명성이 충분히 보장되는 시와 소설과 비교하여 전혀 그렇지 못한 수필의 경우수필가의 운신 폭은 매우 좁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수필의 고유한 형식과 기본을 준수하기란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수필에 대한 박헬레나의 내공은 만만찮다.

인간에게는 얽힌 감정을 배설하고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원초적인 욕구가 있다. 그 소통의 수단이 말이다. 말은 위험한 도구다. 날 선 칼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 것이 말이다. 위험한 도구는 안전하게 사용할 자신이 없으면 사용횟수를 줄이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그렇다면 말은 적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등식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유머와 해학이 담긴 수다, 그것은 생활의 양념이자 활력소다. 끈끈한 정의 통로다. 틀을 벗고 너울대는 언어의 유희다.

말은 날 선 칼과 같이 사용될 수 있다. 그러니 위험을 덜려면 말을 줄여야 한다. 한편, 말은 감정을 배설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인간의 원초적인 요구를 충족시켜 주는 수단이다. 문제는 양자의 균형이다. 이 작품은 말, 즉 수다가 가진 양면성을 사색한다. 메시지 자체로서는 그리 대단할 것이 없다. 평범하고 익숙한 통찰이다. 또한, 구체적인 체험이 배제되고 주관적인 사색 일변도라서 관념적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수필의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사색의 전개가 막힘이 없고 문장에 힘이 넘친다. 무엇보다도 사색에 동원된 언어와 표현이 분석적인 논리로 쏠리지 않고 다양한 '감정적 연관'을 보여준다. 반서정의 형식을 취했으면서도 적절한 '감정의 값'을 유지한다. 철학적 설리 형식이 정서적 호소력을 발휘하는 데 미흡하지 않고, 풍부한 서정성 속에 차가운 이성의 논리가 존재하는 것. 이것이 수필의 기본 형식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