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형태와 형식 / 유병근
산문시대란 말은 수필가에게 어떤 도움이나 특이한 언술은 아니다. 산문이란 수필을 위한 한갓 형태의 구실을 할 따름, 형식은 아니기 때문이다.
수필에서 말하는 형태란 수필을 감싸고 있는 포장물이다. 즉 산문이라는 문장으로 얽어 맨 수필을 위한 틀(hardware)를 의미한다. 그 틀 속에 담겨 틀을 뜯어보게 하는 궁금한 갖은 내용물이 형식(software)이다. 수필은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롭게 쓰는 산문이라고 교과서는 말한다. 그 형식이 무엇임을 수필가는 나름대로 풀이를 한다. 하기에 형식에 관한 해석이 그다지 명쾌하지 못한 느낌마저 든다.
산문형태로 포장된 수필은 구조상 또는 다른 형태를 갖는다. 문단이란 것이 그것이다. 문단은 이를테면 전체 주제 속에 있는 작은 주제를 감싸는 덩어리들이다. 그 작은 주체인 덩어리가 다른 덩어리와 어울려 한 편의 수필이란 중심사상을 감싸는 큰 덩어리를 구성한다. 형태는 문단가름의 의미와 묘에서 수필의 시각적인 미를 돋보이게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수필에서의 형태미는 줄글이라는 점에서 그 기능이 활발하다고는 보기 어렵다.
수필의 형식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글의 배경, 관조, 사색, 상상 등을 들 수 있다. 하므로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쓰는 수필이란 배경, 관조, 사색, 상상을 동원하는 감성의 지성으로 뜸들인 자유 자재한 글이라고 할까. 흔히들 입에 담는 허구는 수필의 형식에 든다고 볼 수 없다. 허구를 수용하는 이론을 보면 문학적인 표현 기능을 들이댄다. 그러나 수필의 문학적인 표현기능을 위한 것은 이미 수필의 형식에 골고루 간이 박혀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수필에는 상상이란 형식이 있다. 재생적 상상을 창조적 상상으로 구현하는 것이 상상의 기능이다. 상상은 말할 나위도 없이 과거에 이미 지나가거나 미쳐 감지 못하는 순간에 전광석화처럼 스쳐간 미세한 기억조차 사색이란 드레로 길어 올리는 재생작업이다. 이에 다시 뜸을 들여 창조적 상상이란 얼개로 걸러낸다. 그런데 이를 허구와 혼돈하여 수필에 허구를 내세워 문학적 표현을 위한 수법이라는 이론을 내세운다.
그렇다면 허구는 왜 수용할 수 없는가? 아쉬운 일이지만 그것은 수필이 갖는 수필의 숙명이다. 그 숙명의 손금에는 진솔, 품격, 선비정신 따위 고전적인 담론이 끼어들기도 한다. 수필의 숙명을 수용하며 수필의 결을 표현문학으로 참신하게 모색하려는 십자가를 짊어진 고행자가 곧 수필가이다. 수필은 조작이 아닌 대상을 새롭게 느끼고 듣고 보는 표현문학이다. 하므로 수필 속에는 수필가의 불꽃 같은 응시하는 정신이 스며든다. 이런 정신을 저버리고 허구 운운으로 짜 맞춘 수필을 한다면 그것은 수필이 아닌 사기주의를 도무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기억 속에는 무수한 사색의 줄기세포가 전자파처럼 종횡무진으로 깔려 있다. 가령 실내공간에 깔린 눈에 띄지 않는 거미줄 같은 수천 수만의 전자파란 갈래도 실은 그것을 감지하는 자의 몫이다. 가령 휴대폰을 켜 놓았을 때 지나가던 전파의 어느 줄기는 어느 휴대폰에 가서 다정한 합궁을 한다. 이른바 코드가 맞는 것이다. 눈치 빠른 전자파는 사람들의 두뇌를 통과하거나 두뇌 속에 둥지를 틀고 들앉는다. 그 일순은 몹시 짧은 여윤이기도 하지만 긴 여운이기도 하다. 하기에 미처 감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전자파는 기억의 회로 속을 가고 온다. 재생적 상상은 가고 오는 그 기억을 끌어내는 민첩한 수단과 기능을 다한다.
상상은 이를 재생시키는 기능만으로 그 일을 다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상상으로 유도될 때 기억은 비로소 창조적 상상이란 값에 한 몫을 한다. 수필의 씨앗은 거기서 움이 트기도 한다.
수필은 산문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흔히 산문정신으로 쓴다는 말을 하기 쉽다. 그러나 이미 밝힌 대로 산문정신으로 쓴다면 형태(hardware)에 의한 형태주의를 지향하는 수필 쓰기란 언급이 되기 쉽다. 말할 나위도 없이 수필은 어디까지나 수필정신으로 하는 치열한 수공업적 작업이다. 산문과 수필이 어떻게 같으며 다른가를 보면 산문정신과 수필정신은 절로 수긍이 간다.
수필에 관한 담론은 다양할수록 수필문학을 발전시키는 힘이 된다. 어느 한 이론에만 치우칠 수는 없는 것이 문학을 지향하는 수필정신이며 수필이론이다.
길을 가다가 차버린 돌멩이는 얼마나 아파할까. 얼마나 외로워할까. 혹은 얼마나 이를 갈까. 이런 생각이 어울려 수필이 된다는 것은 일종의 상식이다. 그러나 이런 상식을 간과할 수는 물론 없다. 수필가는 그것을 안다. 돌멩이의 아픔이 내 아픔이고 내 외로움이고 내 원한일 수 있지 않겠는가. 모든 사물의 정신은 수필가의 정신이다.
그런데 어떤 수필은 지나치게 주변의 이야기로만 짐을 실으려 한다. 그것이 그르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수필의 본성이 관조에 있듯 사물을 깊이 통찰하고 거기서 나름대로 새로운 사물을 재창조하려는 것이 수필을 하는 보람이라는 점이다. 하므로 수필가는 모름지기 사물과의 대화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져보는 것이 유익한 일이지 싶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수필의 문제점을 가령 꼽아 본다면 다음과 같은 것이 되지 않을까 싶다.
1)회고조에 매달려 회고조로 끝내는 경우.
2)사적인 이야기에 끌려 사회성과 시대정신이 부족한 경우.
3)단순한 풍경스케치로 만족하는 경우.
4)표현보다는 요설적인 설명으로 늘어놓는 경우.
5)사건중심으로 기술하는 사건주의자인 경우,
6)새로운 도전 정신이 희박한 경우.
수필도 부단하게 미래지향적이라야 한다. 시대정신의 선봉이어야 한다. 그런데 과단성을 버리고 안전주의로만 안주하려는 경향에 젖어 실험성이랄까 그런 점을 볼 수 없는 것이 오늘 우리나라의 선비 같은 김빠진 수필정신이며 그 현황이다. 담담하고 아늑한 선율만이 수필의 음조라는 우기는 지루한 평편이다.
이는 수필가 개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개성이 희박한 수필잡지가 범람하는 터에 조금 더 진취적이고 저돌적인 수필지가 나옴직하다. 그러나 읽혀야 한다는 의기소침한 명분 때문에 그런 과단성을 부릴 수 없는 마당이다. 하지만 독자에 끄렬가는 잡지가 아닌 독자를 끌어들이는 수필지가 향후 보다 참신한 수필지로 각광 받으리라 본다. 그 노력으로 수필문학의 휘상 제고만이 아닌 수필 세계를 이끄는 단단한 견인차가 될 것임은 물론이다.
소설은 그 분량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재미가 큰 몫을 차지한다. 수필 또한 재미를 마다할 수는 물론 없다. 하지만 수필에서의 재미란 대상을 참신하게 보고 읽을 수 있는 재미라야 참다운 재미라고 하겠다. 하기에 수필은 정신의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감동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것이 수필의 육질이지 싶다.
한 편의 수필을 읽은 뒤 갖는 보람은 무엇인가. 대상을 새롭게 보고 느끼는 기쁨이다. 그 기쁨을 찾아 수필의 가슴을 헤친다. 가슴 밑바닥에 깊이 감추어져 쉽게 드러나지 않는 기쁨의 마그마를 찾아 독자는 수필의 바닥에 정신을 판다. 심 보았다고 하는 소리가 심금을 울리고 나올 때 비로소 수필을 읽은 참된 보람을 갖게 된다. 하기에 수필읽기는 눈을 통한 머리와 가슴을 집중시키는 끈질기고 아름다운 작업이다.
그렇다고 수필을 읽기 위해서 정색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가장 자연스런 수필읽기에서 가장 자연스런 기쁨이 터져 나온다. 대상을 요렇게 볼 수도 있었구나 하고 속으로 탄성을 지르는 것이 기쁨이라고 보면 수필의 행간에서 속속들이 깊은 맛이 우러날 것이다.
쉬코로프스키 일당이 설파했다는 낯설게 보기의 이론이라는 것도 새로운 인식이니 형상화니 하는 이론과 크게 다른 점이 없어 보인다. 기왕의 이론을 굳이 낯설게 보기라고 말 바꿈을 하는 이유는 한번 둘러치기를 해보자는 의도로 보면 어떨까 싶다. 이는 기발한 발상으로 문학이론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치열한 이론정신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수필도 그런 정신이 함께할 때 보다 참신하고 진취적인 작품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수필은 새로운 형태 속에 새로운 형태미의 구축을 바란다. 새로운 형식 속에 새로운 뇌세포, 새로운 세계를 입력시켜 감동받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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