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헨리
1.
한 경찰관이 느린 걸음으로 길을 걷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조금 거들먹거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특별한 이유가 있거나 남을 의식하는 게 아니라 그저 습관일 뿐이었다. 밤 10시라 아직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바람이 세게 불어서 그런지 거리는 인적이 드물고 한산했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경찰관은 익숙한 솜씨로 봉을 돌리면서 골목길 구석구석을 살폈다. 이곳에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24시간 운영하는 식당이나 편의점 불빛이 가끔 보이기도 했지만 거의 모든 회사나 가게의 문은 닫혀 있었다.
여기저기 살피던 경찰관은 뭔가 발견한 듯 갑자기 걷는 속도를 늦추고 조심스레 다가갔다. 불이 꺼진 철물점 앞에 한 사나이가 서 있었다. 그는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벽에 기대어 있었다. 사나이는 경찰관이 다가오자 안심시키려는 듯이 서두르며 말했다. “수고 많으십니다. 전 지금 친구를 기다리고 있어요. 20년 전에 한 약속이긴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사실이 그렇답니다. 제 말이 의심스럽다면…아, 참 20년 전에 이곳은 음식점이었지요. 우리가 ‘빅 조우’라고 불렀던 브레디가 운영하는 음식점이죠.”
그 말을 듣고 경찰관은 여기 사정을 잘 안다는 듯 여유를 부리며 말했다.
“그 음식점은 5년 전만 해도 여기 있었는데, 최근에 헐렸습니다.
2.
사나이는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라이터를 켰다. 그 순간 사나이의 날카로운 눈매와 각진 턱이 불빛에 드러났다. 표정은 창백했고, 오른쪽 눈썹 옆에는 작은 흉터가 있었다. 그의 넥타이핀에는 이상한 모양의 큰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사나이가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바로 오늘, 나는 브레디의 음식점에서 가장 친했던 친구인 지미 웰즈와 저녁을 먹었습니다. 지미와 나는 뉴욕에서 함께 자라서 형제나 다름없었죠. 그때 나는 열여덟 살이었고, 지미는 나보다 두 살 많은 스무살이었어요. 나는 큰돈을 벌기 위해 서부로 떠날 예정이었지만 지미는 뉴욕보다 더 멋진 곳은 없다면서 여길 떠날 생각이 없다고 했죠. 그래서 우리는 그날 밤에 20년 뒤 이 자리에서 꼭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했어요. 서로 어떤 상황이든, 어떻게 변해 있든,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반드시 만나자는 굳은 약속이었죠. 20년 뒤면 서로 부자가 되거나 높은 지위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어요. 우리는 각자 다른 길을 가더라도 말이죠.”
“재미있군요. 하지만 20년 후의 약속이라 시간이 너무 긴 것 아닐까요? 그래, 그렇게 헤어진 후에 한 번도 연락을 못 했나요?”
“아니요.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한동안 연락을 했죠. 하지만 한두 해가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소식이 끊기더군요. 잘 아시다시피 서부는 매우 복잡한 곳이고, 일거리도 너무 많았고, 부지런히 돈도 벌어야 해서 그리된 겁니다. 어찌 되었건 지미는 죽지 않았다면 꼭 올 겁니다. 지미는 약속을 잊을 사람이 아니죠. 저도 아주 긴 여행이었지만 친구를 만나려고 천 마일을 달려왔습니다. 그 친구를 만날 수만 있다면 천 마일이 그리 멀진 않죠.”
이야기하면서 사나이는 뚜껑에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고급 시계를 꺼내서 시간을 봤다.
“10시 3분 전이군요. 우리가 여기에서 작별 인사를 나눈 게 바로 10시 정각이었지요.”
“그래, 한밑천 크게 잡았나요?”
경찰관이 묻자 사나이가 대답했다.
“물론이죠. 아마 지미도 성공했을 겁니다. 그 친구는 너무 착한 게 탈이지만…서부에서는 자기 돈을 지키기 위해서 악착같이 싸우며 살아야 하지요. 뉴욕이야 그저 그런대로 비슷하게 매일 살아가지만, 서부에서 살아남으려면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할 만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경찰관은 봉을 돌리면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이제 그만 가 봐야겠군요. 그 친구를 꼭 만나길 바라요. 근데 약속 시각에서 얼마나 더 기다릴 거죠?”
“글쎄요. 한 30분 정도는 더 기다릴 생각입니다. 살아만 있다면 반드시 올 거라 믿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경관님.”
“그럼, 전 이만.”
경찰관은 남은 순찰 구역을 살피면서 걸어갔다. 계속 바람이 불더니 차가운 이슬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한산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20년 전 오늘,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사나이는 철물점 앞에서 옛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3.
20분 정도 지났을 무렵 길 저쪽에서 키가 큰 남자 한 명이 외투를 휘날리며 나타났다. 그 남자는 급히 사나이 쪽으로 오더니 조금 어색한 말투로 이렇게 물었다.
“보브?”
사나이는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지미 웰즈? 야. 이거 정말 오랜만이야!”
남자는 사나이의 두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보브 맞지? 틀림없는 보브야. 살아 있으면 꼭 다시 만날 줄 알았다니까. 20년이라니, 정말 긴 세월이군. 옛날 그 식당은 없어졌어. 있었더라면 같이 저녁도 먹고 좋을 텐데. 그런데 서부는 어땠어?”
사나이가 말했다.
“서부는 정말 대단하지. 원하는 건 뭐든 얻을 수 있고 말이야. 그런데 자네도 많이 변했군. 내가 생각한 것보다 키도 더 크고….”
“스무 살이 훨씬 넘어서까지 키가 자라지 뭐야.”
사나이가 말을 이으면서 물었다.
“그래, 그동안 뉴욕에서 어떻게 지냈어?”
“난 잘 지냈지. 지금 시청에서 일하고 있고. 자, 친구. 우리 자리를 옮겨서 천천히 옛날얘기나 나누자고.”
두 사람은 함께 길을 걸었다. 사나이는 남자에게 자신이 어떻게 성공하고 출세했는지를 자랑스럽게 떠벌렸다.
남자는 그저 흥미롭다는 듯 듣고만 있었다. 길모퉁이의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약국을 지나갈 때 두 사람은 동시에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4.
사나이는 갑자기 야수 같은 표정으로 외쳤다.
“넌 지미가 아니야. 아무리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지만 어떻게 매부리코가 그렇게 납작해질 수가 있지?”
“그래, 하지만 20년 동안에 악당이 될 수는 있지 않겠어?”
키 큰 남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자넨 지금 경찰서로 끌려가고 있다네. 사실 시카고에서 자네가 이쪽에 나타났다는 전보를 받았지. 순순히 나랑 함께 가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자네에게 전해 달라는 편지도 있다네. 경찰서로 가기 전에 읽어 봐. 오늘 외근 중인 지미 경찰관이 부탁한 편지야.
사나이는 편지를 받아들고 다 읽기도 전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편지 내용은 몇 줄 안 되었다.
“보브! 나는 우리가 약속한 날, 그 시간에 거기에 갔었네. 난 담뱃불을 붙이려고 켠 라이터 불빛에 비친 자네 얼굴을 보고는 시카고 지명 수배범이란 사실을 알았지. 하지만 내가 직접 자네를 체포하기는 힘들었어. 그래서 다른 형사에게 부탁한 것이라네. -지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