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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단편 소설

빛 기둥의 출조

by 자한형 2021.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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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충상

나는 촉광이 밝은 백열 전구를 머릿속에 켜고 네모난 방 그 한쪽 벽에 잇대인 침대 위에 누워 있습니다. 모든 나의 의식은 보이는 사실, 느끼는 사실에 대하여 전혀 무관한 듯하면서도 막연한 어떤 힘의 작용으로 겁먹고 있습니다,

이윽고 바람이 천정으로부터 쏟아져 내립니다. 천정엔 아무리 찾으려 해도 구멍 하나, 틈새 하나 없습니다. 그런데 바람은 마구 쏟아져 내립니다. 여기서 보이는 사실을 어떻게 믿으며, 또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는 수없이 생각을 바꿔봅니다. 아마 바람이 몹시도 외로운가 보지요. 정말 그래서인지 바람은 내 가슴에 가을 햇살처럼 켜를 이루고 있는 빛을 날리며 동심(童心)처럼 장난을 겁니다.

나는 이 빛깔을 알아. 이 빛깔의 냄새, 사람들은 이 냄새를 고독, 아니야 뭐라더라, 그래 맞아 공허라고들 했어. 나는 사람마다의 가슴에 켜를 이루고 있는 이 공허의 빛깔을 날려보낼 테야.

고마운 바람이 이렇게 말했지만, 웬일로 나는 이러지 말아야 하는데 하면서도 조금씩 아주 서서히 허전해하며 가슴을 천정 쪽으로 반듯이 누인 채 누워 있어야 합니까? 대상이 없는 이 물음을 의미 있게 하소서.

나는 방바닥으로부터 떠 있는 기분이어서 막연하지만 약간 무서운 느낌이 치는 듯싶습니다. 그러나 바람의 일로 나는 빛이 모두 날아가 버린 내 가슴을 상상하지 않습니다, 본래 내 가슴에는 빛이 없었으니까 그러한 현상을 상상한다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그렇다고 가슴에 자리한 빛이 날아가는 것을 그 어떤 질서에 의한 것이라고 믿어 방치하겠다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그런 까닭의 유심(有心)함인지 비로소 나를 향한 나의 눈빛은 빛나기 시작합니다. 보십시오, 나의 휑한 두 눈을. 정상인의 눈빛보다 밝은 광도이어서 어쩌면 광기 서린 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놀라시는군요. 놀라지 마십시오. 어절 수 없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그저 지금으로서는 나는 이럴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담담하고 조용하기 만을 바라니까요. 하지 만 생성(生成)의 본질에 따라 조용할 수가 없듯이 조응하지가 않군요. 타인의 눈으로는 보이거나 들리지 않겠지만 지금 내 가슴은 덜그럭거리고 있어요. 가슴으로부터 빛이 날아가는 소리는 시작일 때 미세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을 조장하기에 알맞도록 제법 커지고 있습니다, 이제 그 소리는 파의 머리가 감당하기에 지겨을 만큼 요란하답니다. 마침내 나의 두뇌는 그 소리에 의해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소리의 파장이 두뇌의 금간 곳을 지나가며 색상(色相)을 일으켜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 색상은 아직 추하다거나 아름답지 않습니다. 색상이 확연하지 않으니까요. 어찌 느낌으로 보건대 비릿한 감을 주는 색상인 것 같아서 조만간 그 색상은 내 비위를 몹시 상하게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하겠지만 일어나 다음 행위를 찾지 못하고 다시금 누워야 할 공포감 때문에 계속 그대로 누워 있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나를 족하게 합니다,

이러는 날들이 보름쯤 지났습니다. 보름 동안 마냥 그렇게만 지냈냐구요?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만 지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무())의 상태를 갈망했던 나의 의지는 무참히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보름 동안 나는 나를 생각함에서 한 차원 높여 나를 연구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경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기대하지 마십시오. 내가 나에게서 실망한 것을 그대로 전념시키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럼 지금부터 보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내가 살아온 일들을 몽상해드리겠습니다.

나는 광풍(狂風)에 의한 파도였습니다. 생성을 알 수 없는 광풍은 순수하고 부드럽던 물)인 나를 파도로 변화시켜버렸지요. 본성은 그대로인 채 성깔만 부리게 되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변화였습니다. 그 변화는 변화의 형질로써 나를 감금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헐떡이며 잠잠한 물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잠잠한 물. 정지된 물은 썩는다고 광풍은 몰아쳤습니다, 광풍에 힘입은 파도가 얼마나 열정적인지, 상상해보실 수 있겠습니까? 조금씩 서서히 술을 드십시오. 그러면 그 술의 힘이 마침내 광풍에 힘입은 파도를 경험하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려 이해하시기가 곤란할 것입니다. 이해를 도울 수 있다면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다음은 제가 저를 가장 아끼고 대접하는 이야기여서 자연 꺼려집니다만. 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용서하십시오. 돕는다는 말이 경우에 따라 얼마나 무가치한가를 생각하면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술이 익듯이 때가 되어 자연스럽게 넘쳐나는 말이라면 해도 무방하겠지요.

나는 그를 잘 안다, 그 자신이 그를 알듯이.

나는 그를 믿는다, 그 자신이 그를 믿듯이.

그는 이제 갓 중년의 나이로 들어선 조각가다. 평범한 여자여서 가끔 현묘함을 볼 수 있게 하는 아내와 여섯 살 난 딸아이를 둔 가장. 그는 아틀리에 겸 생계를 꾸려가기 위한 방편으로 보일지 모르나 그로서는 그런대로 긍지를 갖고 경영하고 있는 미술학원이 있다.

나는 그를 잘 안다, 그 자신이 그를 알듯이.

나는 그를 믿는다, 그 자신이 그를 믿듯이.

그는 조각을 함으로써 그를 나타냈다. 그는 그가, 만든 조각 작품을 소유함으로써 스스로를 대변했다. 그는 그가 만든 조각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대화함으로써 자신을 이해했다. 그러나 종국에 가서는 울면서 조각작품의 생명력을 부인함으로써 그는 스스로를 긍정하는 모순을 낳았다. 그 모순은 어설프지 만 그의 삶을 이끌어 가는 데 신기(神氣)를 불어넣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자신의 삶을 설명할 수도 없지만. 설명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다만 조각을 함으로써 존재할 뿐이었다. 따라서 그가 사물을 재현한 조각작품들은 숫자가 늘어 갈수록 그가 거기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했다. 그리고 그가 지향하는 예술의 쾌락 가운

데서 그의 고통과 연민을 발견함으로써 그것들로부터 떠나는 작업을 시작할 수가 있었다. 정작 그의 마음에 드는 작품은 그러한 작업을 통해서만 이룩될 수 있었고 그로 인한 그의 절망은 그를 충분히 보상했다.

나는 그를 잘 안다, 그 자신이 그를 알듯이.

나는 그를 믿는다. 그 자신이 그를 믿듯이. 그리하여 마침내 그가 나의 분신

임을 확인했다.

타인들, 그들은 나를 모릅니다, 그러나 나의 작품에 대해서만은 관대합니다. 그걸 보면 그들 속에 예술을 사랑하는 기운이 분명 있습니다. 따라서 작품에 대해서만은 내가 나를 아는 만큼 그들도 나를 압니다. 비교적 작품에 대해서만은 내가 나를 믿듯 그들도 나를 믿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나의 작품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구든지 나만큼 인내를 가지고 정열을 쏟아 작품에 임한다면 반드시 그 결과에 대해서 나만큼 절망할까요? 이 물음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도 나는 계속 조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순진한 생각과 단순한 시선으로 응축시킨 나의 작품이 어떻게 무엇 때문에 역사를, 그것도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세계를 배반해야 합니까? 가슴을 쪼개고 복통을 할 일입니다.

조금은 과장한다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내게는 로댕이 추구한 조각예술과 근사한 에 작품이 있습니다. 고려조 말기의 장군(將軍), 역사를 들추어 그 장군이 누구라고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장군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은 주변 의혹의 눈빛이 싫어서가 아닙니다. 하지만 좋습니다. 알 만한 사람은 알겠기에 성()의 이니셜만은 밝혀드리죠. L장군, 강압적인 청부로 제작한 L 장군의 브론즈 입상, 저로서는 考證에 의한 심혈을 기울인 작품입니다.

한데 청부를 맡긴 쪽의 이념적 시행 착오로 나는 스스로 자기 작품을 산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작상의 모든 비용을 되돌려주고 말았으니까요. 어쨌든 대작인 (L장군-입상과 여성으로서 현묘한 점만 뽑아 담은 아내의 -나상-롯털), 그리고 딸아이의 갓났을 적 청정무구한 천성을 담은 강보에 쌓인 <갓난아기>, 이 세 작품을 저의 대표작으로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아하, 한 작품 빠질 뻔했습니다. -완전한 순종-이란 제목으로 국전 특선을 한 작품인데, 모델이 되어준 진도개를 볼 때마다 마음이 쓰여 -진도개-改題한 작품이죠. 저의 두 번째 특선작입니다.

특선 작가라는 미명이 사람을 금물에 튀긴 듯 똥물에 튀겨놓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한순간 허영에 눈멀었음을 고백합니다. 특선 2회 이상의 경력을 가진 조각가에게 L장군 동상 제작을 맡게 하는 데 여러 사람 물망에 올랐으나 스승, 선후배의 힘입은 바 커 내게 그 일이 맡겨졌던 것입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 L장군 동상을 완성했습니다. 그러나 결과가 웃지 못하게 되고 말았어요. 상대적인 반증 없이 무조건 고증(考證)이 잘못이란 한마디로 (L장군)은 납품 취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거기에는 정치적 속성이 개입하고 있어 나를 아끼는 주변 사람들은 물론 내 스스로도 없었던 일로 잊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L장군) 동상을 대할 때마다 나는 가슴으로 느끼는 것과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동시성을 이루지 못하고 이완됨으로써 일종의 강박감에 사로잡히곤 하였습니다. 이것이 내가 나에게 시험을 건 첫 조짐이었습니다. 나는 강박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작품의 변화를 시도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회화의 색채를 조각의 볼륨으로 극대화시키는 작업, 즉 회화와 조가의 공감대를 좁히는 일이 그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날 새벽녘 5시까지 피카소의 그림으로부터 감지되는 회화의 입체적 조각 구도를 놓고 석고를 칼질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무척 기진한 상태였습니다. 전날 저녁을 거른데다 소주 몇 잔과 커피만 마셨으니까요. 게다가 피카소란 작자의 빛깔 농도에 따른 면밀한 기하학적 구도의 선을 조각으로 옮겨놓을 수 없겠느냐는 싸움은 초장부터 무리였습니다. 아는 더 계속하지 못하고 소파에 몸을 묻었습니다. 아주 잠깐동안 나는 악몽에 시달린다는 의식을 하며 몸을 일으켰습니다. 나는 뛰어갔습니다. 나는 어떤 의지의 작용으로 용접기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L장군) 입상 앞으로 가 외쳤습니다.

비열한 소인배. 아아 이런 바보를 미화시키다니!

이어 나는 칼을 뽑아든 L장군의 오른팔을 절단한 다음 얼굴을 뭉개버렸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나는 정신신경과 의사의 외래 진료를 받았습니다. 아내를 통한 집안 어른들의 은근한 배려였지만, 나는 몹시 불쾌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정신이 건강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의심받지 않기 위해 나는 무관하게 진료에 응했습니다.

의사는 마치 옛친구처럼 온유한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진료에 불안을 느끼십니까? 느낌만을 솔직히 말씀해주십시오.

아니오. 별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L장군 동상에 대해서 물어도 되겠읍니까?

그건 곤란하군요. 한동안 그 일에 대해서만은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일차 진료의 방향이 서지 않을 경우 진료를 계속할 수 없음을 이해하여주십시오.

좋습니다. 뭐에 관해서 알고 싶습니까-

L장군 동상을 계약대로 청부한 쪽에서 인수했다면 선생은 작품료로 얼마를 받게 되시나요?

일체의 제작 경비를 부담하고 순수한 작품료만 삼백만 원 받기로 했습니다.

제작 기간은 얼마나 걸렸습니까?

r7개월에 완성했습니다.

지금까지 대답하신 가운데 스스로 의혹이 생기는 대답은 없읍니까?

없습니다,

그럼 기억을 상기시키십시오. 용접기로 L장군 동상의 팔을 절단하고 얼굴을 뭉개기 전 악몽에 시달리셨다고 들었는데, 그 악몽을.

나는 한동안 의사의 말에 순종하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습니다. 너는 지금 누구에게 질문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질문을 만들어 대답할 수 있겠느냐? 있구 말구. 묻고 긍정하고 되풀이해 묻고 긍정했으나 답을 찾는 노력은 허사였습니다.

미안합니다. 기억을 할 수가 없어요.

의사의 물음보다도 나는 나를 위해 그 꿈을 기억하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전혀 불가능했습니다,

일주일쯤 지나 나는 의사를 못 오게 하고 하나의 방편을 세웠습니다. 그 꿈을 다시 꾸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지요. 당장 가능성에 대한 시도를 했습니다. 나는 악몽을 꾸기 전의 작업으로 돌아갔습니다. 모든 예술이 세계를 가시화 시킨다면, 피카소의 회화를 조각으로 옮길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것을 해낼 것이라고 나는 나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쳐 소파에 파묻히면 잠이 와서 나를 먹었습니다. 다행히 하늘이 도왔던지 그 꿈을 재현해 할 수가 있었습니다. 꿈이 시작되자 그 꿈의 기억이 살아나 이어졌던 것입니다. 다그치지 마십시오. 물론 꿈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광활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수평선이 시야를 가로지르는 해변의 벼랑 위. 지형상으로 우리 나라 동해안 어느 벼랑을 연상케 한다, 핏줄기로 얼룩이 진 백마를 탄 L장군. 천천히 말에서 내려 칼을 뽑아든다. 바다, 악 트인 물의 평온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어느새 L장군의 칼 빛에 대응하듯 일렁임의 조짐을 보이더니 서늘한 바람과 함께 서서히 파도를 일으키며 밀려온다, 조약돌을 넘어 모래톱을 쌓는 파도의 자락. 빛으로 환한 맑은 하늘 아래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구름의 무게와 더불어 납빛으로 대응하여 조화를 이룬 바다. 불을 지퍼기만 다면 확 번질 것 같은 언덕. 모두가 자연 그대로 무()의 상태를 동경하는 정적을 이루고 있다. 그 정적의 부동으로 태양은 생각을 밝혀주는 빛이 아니라 오히려 혼미하게 한다. 따라서 태양은 열광케 하는 힘을 잃고 마침내는 열정을 무로 돌려놓는 미지근한 힘만을 상징한다. 하여 지금 펼쳐놓은 풍경의 밝음은 환상을 적용하기에 알맞은 외면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한 폭의 풍경화와도 같은 이 전경 속의 모든 사물들은 안개 속의 물처럼 자유자재함으로써 그 신비함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파도와 함께 동적인 L장군의 칼 빛이 자연의 신비함을 시기한다. 그와 더불어 L장군의 표정이 굳어진다. 이어 칼끝이 바다로 향함과 동시에 근엄한 음성으로 L장군 외친다.

보라, 누가 저 광풍을 잡을 수 없는가!

불과 같은 격정을 지닌 L장군의 호령이 망망대해로 벋치자, 학창의 차림의 선비가 앞으로 나서며 읍한 자세로 아뢴다.

광풍의 조짐이 없사온데 어찌 광풍을 보시나이까?

L장군 급한 성깔을 참느라 표정이 불그락푸르락 꿈틀거린다.

그럼, 나를 향해 태산을 이루는 파도를 잠재우라!

광풍이 없사온데 어찌 파도를 잠재우라 하십니까?

어허, 그럼 내가 지금 헛것에 홀리어 있단 말이냐. 이 무슨 변고로고------그렇다면 내 눈앞에 보이는 너도 헛것이렷다. 헛것인 너부터 베리라!

L장군 단 칼게 선비의 목을 날려버린다. 순간 영상의 신이 바뀌듯 선비의 목과 동체가 광풍에 날리어 L장군이 버티고 서 있는 벼랑 밑으로 파도와 함께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이어 거센 파도가 밀려와 L장군을 벼랑 밑으로 처박아버렸다.

나는 꿈속에서 이것은 분명 꿈이다 라고 생각하며 상서롭지 못한 꿈이 더 지속되지 말았으면 하고 바랐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어진 꿈은 내 아틀리에로 옮겨졌다. 아틀리에의 작품들이 하나같이 생명체로 존재하고 있다. 아내의 -나상-, 강보에 싸인 -갓난 아기-, -L장군-, -진도개-들이 다 생명체였다. 나는 오들오들 떨며 L장군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 황흘하도다. 나를 위해 알몸으로 빛나는 부인, 가까이 오오.

L장군은 색에 굶주린 눈빛으로 아내의 나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황급히 L장군의 무릎을 끌어안으며 애원하듯,

장군이시여, 이 여인은 소인의 아내로소이다.

라고 말했다.

그래, 그럼 네게 묻겠다. 벌거벗은 여자에게 옷을 주어야 하겠느냐, 아니면 남자를 주어 야 하겠느냐?

황공하오나 옷도 주고 남자도 주어야 하겠나이다만, 더욱 바라옵는 것은 저희로 하여금 자유하게 하소서.

어허, 심상하도다. 흑인지 백인지도 모를 말을 하는구나. 그대는 옛 석수장이만도 못한 조각가렷다. 죽여 마땅하겠거늘 죽여도 죽는 줄도 모르는 버러지만도 못한 것을 내 어찌 죽이기까지 하겠느냐. 내 너로 하여금 죽음을 알게 하리라. 눈 번히 띄여 놓고 죽음을 맛보게 하리라.

번쩍, L장군이 내리치는 칼이 빛을 발했다. , 애상함이여. 나는 눈을 감으며 가슴의 뜨끔함을 느꼈다, 눈을 감아도 두 동강 난 아내의 나상이 뜨물 같은 피를 꽐꽐 쏟음은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차마 울지도 못하였다. 피비린 냄새로 강보에 싸인 아기가 공복을 느꼈던지 아니면 나의 울음을 대신 울어주는 것인지 울음을 터뜨렸다, 이어 진도개도 짖기 시작했다.

고연 것들, 조용하지 못할까. 심기가 매우 어지럽도다.

울음을 그칠 줄 모르는 갓난아기를 내려다보며 L장군은 칼 든 오른손을 부르르 떨었다. 아차 싶어 나는 L장군에게 매달려 다시 애원했다.

장군, 온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 아기는 마음의 동함이 없다고 하였나이다, 제발 용서하소서.

그렇다. 너는 도()를 갓난아기에 비유한 노자(老子)를 말하려 드는구나. 무릇 도에는 형체가 없기 때문에 짐승이 볼 수가 없다고 하였느니라. 헌데 짐승인 네가 이 아이를 보고 있질 않느냐. 보라, 띠 아기는 도()의 체()와 작용(作用)을 함께 나타내고 있다. 이는 오직 너의 죄니라. 쓸데없이 네가 아기에게 불어넣은 체와 작용을 보렷다. 그렇다면 나를 원망하기 전에 네 안에 거하는 예()가 도()라면 예가 없음을 오히려 슬퍼하라.

어느새 L장군은 두 번째 칼을 내리쳤다. 나는 다시 눈을 질끈 감고 두 동강 난 아기를 보았다, 진도개의 울음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개는 어쩔 수 없군. 에잇 개새끼! 내 안에 거하는 개가 개에게 내리는 칼을 받아라.

L장군의 칼이 세 번째 빛을 뿌렸다, 순간 나는 하늘의 소리, 생명의 기원인 무의 상태에서 울려 퍼지는 노자(老子)의 말을 듣고 있었다.

 

골자기의 신()은 영원히 죽지 않아 현묘한 여자라고 부른다, 현묘한 여자는 문()과 같은데, 이를 하늘과 땅의 뿌리라고 한다. 그녀는 은밀하게 연달아 있는 것 같고, 힘쓰지만 항상 지치지 않는다. 그리하여 영원히 우리를 이끌어간다. 그리고 도()에서 우러나오는 원기를 함뿍 품고 있는 갓난아기는 벌과 전갈도 쏘지 않고, 호랑이와 표범도 발톱으로 할퀴어 붙잡지 않으며, 독수리도 날개로 치지 않는다, 갓난아기는 뼈가 약하고 힘줄이 부드럽지만 고사리 같은 주먹을 단단히 쥔다. 아직껏 남자와 여자의 합침을 알 바 없지만 고추 모양이 일어선다. 정기를 극진히 갖춘 까닭이다. 온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음은 조화를 이룬 까닭이다, 조화를 아는 것을 상도(常道)라고 하며 상도를 아는 것은 밝음인 것이다. 그런데 L장군 너는 무의 기능을 상징하는 현묘한 여인과 갓난아기를 무심히 살해했다. 마음의 억지로 원기를 부림을 굳세다곤 하나 무엇이든 굳세고 장하면 쉬 쇠하는 법이다. 이는 곧 도가 아니며, 도가 아닌 것은 곧 끝난다. 그리하여 L장군 너도 끝났느니라.

 

이어 나는 개에게 불성(佛性)이 없다고 한 불가(佛家)의 화두(話頭)를 떠올렸다. 개의 울음소리가 나의 전신에서 돋아남과 더불어 꿈은 걷혔다.

나는 꿈을 깨자마자 쏜살같이 산소 용접기를 향해 달려갔던 것입니다. 잘 전달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상이 저의 몽상의 전부입니다,

그후로도 나는 이와 비슷한 꿈의 연속으로 시달렸습니다. 그로 인한 강박관념, 불면의 밤들이 내게 현존하는 사물들을 압살했습니다. 나는 내가 인식하는 사물들과 더불어 압살 당하려는 찰나를 못견뎌했습니다. 이제 내겐 내 자신에 대한 자신이 없습니다. 따라서 스스로에게 의문의 대상도 되지 못합니다. 시간의 허송, 남용만이 있을 분입니다. 난 초조합니다. 난 사물이 내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자신을 제한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조금 안심이 되는 것은 무관한 상태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임을 알게 될 것 같습니다. 좀 더 시간을 둔다면 말입니다.

그 동안 아내의 가슴에 미세한 열풍이 일더니 그녀의 가슴은 가지빛으로 변하였습니다. 과로에서 오는 심신장애로 대수롭지 않게 여긴 정신과 의사의 왕진 결과만을 믿었던 아내가 더는 참지 못하고

당신 종합진단을 받아보아야 할까봐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내의 말에 현실감이 나지 않아

며칠만 더 이대로 누워 있고 싶소. 너무 걱정하지 말우

라고 나의 진심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보름이 지났습니다. 이로써 나의 천정만 바라보는 일상은 만 한 달을 채우게 되었습니다. 이제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이 본격적으로 나의 두뇌를 마비시키려듦을 느끼고 있습니다.

여섯 살 난 딸아이가 무엇을 알겠습니까만, 움푹 패인 내 눈을 들여다보며,

아빠, 어디가 아파?

라고 묻습니다. 비로소 나는 나를 점검해봅니다. 의사가 아닌 이상 어떻게 무슨 병인지를 알겠습니까마는 내 개인의 상식으로는 아무 병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결론이 막연해서인지 그저 조금 답답함을 느낍니다. 나는 이 답답함 때문에 가슴의 빛이 날아가는 것을 소리로 들으며 서럽고 억울한 기분이 됩니다. 묻고 싶습니다. 누구라도 좋습니다. 무기력함이 서럽고 억울한 기분을 키우는 것일까요? 대답이 없군요. 스스로 대답합니다. 그럴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지금 저의 무기력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이전의 활동적이던 나는 나를 떠나 어디를 방황하고 있을까요. 문젭니다. 나는 나를 피하려듭니다. 현실적인 나를 떠나 환상적인 나를 찾아 안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나를 떠나 어딘가 헤매고 있을 나를 만날 수 있다고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설사 내가 방황을 하더라도 이미 나를 떠난 나를 만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만나더라도 나는 나를 설득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실체성에 근접한 시작을 해야 하겠지만 당장은 암담할 뿐입니다. 그러나 차라리 암담하니까 가정을 조금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마치 어둠에서 빛이 생성하듯 말입니다.

이제 더는 아내를 괴롭힐 용기나 의지가 없습니다. 아내의 말대로 나는 종합 진단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아내여, 아직 젊은 살이요, 피여. 제발 나를 이해하여주오. 나의 사랑은 육신을 관통하는 빛이 사라져버린 언외적이라는 것을. 그러한 까닭으로 나의 의식과 지각능력은 허공을 헤맬 뿐이오. 용서하오. 나의 살을 가장 민감하게 잘 감지하는 아내여, 이제 더 이상 그대에게 이해라는 개념을 강요하지 않겠소.

내가 병원을 찾는 것은 나의 육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이겠지만 오히려 의사들 쪽을 위해섭니다. 나만을 내세운 불손한 말이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이승의 모든 의사들이 모인다손치더라도 나의 이 병은 치유하지 못합니다.

특별한 병명을 지목해내지 못한 의사들의 종합진단 결과를 듣고 병동을 나서며 나는 히죽 웃고 말았습니다. 육신의 정상을 스스로 확인하면서도 별 뜻이 있을 수 없이 웃는 웃음의 잘못으로 나는 보았습니다. 옆에서 걷고 있던 아내의 얼굴이 퍼렇게 질려가며 나의 웃음을 반사하는 것을. 그리고 나는 아내의 가슴에 회오리치며 떨어지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이가 정상이 아니야.

글쎄요. 아내의 생각이 아내의 말을 낳듯이, 나도 나의 생각이 내 말을 낳아야 할 것입니다.

아니야, 나는 정상이야.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이 뛰어넘지 못할 벽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어쨌든 나는 나의 웃음을 참으로 잘못 웃은 웃음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토록 오래도록 참았던 아내가 그리고 그녀의 신()이 내게 대하여 노하기 시작했으니까요.

노기 띤 아내의 얼굴이 신()의 얼굴이고 자애로운 신의 얼굴이 아내의 얼굴이 됩니다. 나는 지금 아내와 함께 거리를 걷고 있습니다. 나는 눈 번히 뜨고 현상학적인 사물들 속에서 동시에 아내와 신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네가 나의 과거를 보고 있다는 의식을 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나의 환상은 현실과 거의 구분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잠시 마음을 정제시키면 그것이 환상이 아니라 나의 과거인 것을 알게 됩니다. 무섭습니다. 나의 시야에서 안개가 걷혔으면 합니다. 모든 의식의 작용이 정지될 수는 없을까요? 등줄기에서 식은 땀이 흐르고, 나는 눈을 감아보지만 더욱 선명한 과거의 현상들이 영사하듯 전개됩니다. 아무래도 나는 배가 만든 감옥에서 갓 나선 사람이 아닐는지요? 어째서 감옥을 만들고 그 감옥살이를 했냐구요 ? 아니지요. 하나 그에 대한 참말은 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참말을 함으로써 거짓말을 하는 것이나 진배 없이들 생각하니까요. 그렇다면 이해하십시오. 그저 정신분열을 일으켰다고 보는 것이 모두를 위해서 안전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감옥을 만들더라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역사가 그것을 대변하니까요. 한 인간의 모든 것, 그가 처해 있는 사회구조, 역사가 말입니다. 그러나 부끄럽습니다. 나는 지금 그 무엇엔가 홀리어 있음이 분명한데 그 무엇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용서하십시다. 그 무엇을 말하면 나는 자의처럼 타의에 의해 정신병동으로 가야 합니다.

나는 먼저 아내를 집으로 보내고 공원을 찾아갔습니다. 서울 4대문 안의 어느 공원으로 생각하십시오.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는데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어버렸던 모양입니다. 정말 그토록 오랜 잠을 깊이 잘 수 있었던 것은 그 동안 천정만 바라보며 쌓았던 불면의 산이 무너져 내렸던 것이겠지요. 죽음과 같은 잠이었습니다.

나는 용케 잠에서 깨어났지만 이해할 수 없는 나의 낯선 존재에 대하여 소스라치며 놀랐습니다. 그럴 수 밖에요. 나는 알맹이가 없는 껍질에 불과했습니다. 섬뜩 당황하며 나는 장님이 더듬어 찾듯 나를 더듬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스스로를 잃어버렸음을 깨달았을 때 주위의 어둠이 몰려와 나를 채웠습니다. 이상하게도 어둠은 미소를 짓고 있는 듯 참으로 친근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둠이 밤 몇 시인가를 나는 알려 하지 않았습니다. 내게서는 그때 이미 시간이 죽어 있었으니까요. 우리를 조종하는 시간의 의미 속에 놓여질 수 없는 내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오직 내게 안식을 주는 것은 공원 벤치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무 생각, 어떤 행위도 나는 취할 의지를 갖지 못했습니다.

이제 내게 기억상실이란 단어가 있을 뿐입니다. 이 단어의 개념 속에서 허우적거려보지만 나는 지칠 뿐입니다. 어느덧 밤이 새벽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공원에 내린 이슬이 내 가슴에 젖어 들어와 있습니다. 냉랭한 가슴입니다. 따스한 온기를 불어넣을 수 없는 가늠. 이 가슴으로 나는 나를 이끌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날이 밝아옵니다. 허기가 육신에게 굶주림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어떤 잠재 의식의 끈이 추스러지는지 알 수 없으나 담배, 그 한 모금을 빨아들이고 싶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정신을 조금 맑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발 아래 제법 긴 꽁초가 보입니다. 하지만 성냥이 없습니다. 누구 없느냐고 나는 두리번거립니다. 그러나 아직 이른 새벽, 그림자 하나 없습니다. 지구에 혼자 남은 듯 적막이 있을 뿐입니다.

나는 일어서고자 하는 의지도 없이 벤치에서 일어섰습니다. 나는 어디론가 걷고 있습니다. 걷다보니 어떤 의지가 조금씩 생성합니다. 과거와 연결되어지는 곳에 가기를 바랍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고 싶습니다. 공원 출구의 좌편에 파출소가 보입니다. 과거를 유추시키지 못하는 잠재의식은 그들 제복이 싫지만 우선 나를 그리로 이끌고 있습니다, 이러는 나의 의지는 누구의 뜻입니까?

막상 나는 파출소 문 앞에서 머뭇거리다 돌아서고 맙니다. 몇 발짝 떼어놓고 있을 때 갈고리로 나의 등을 찍어 끌듯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내가 기억 상실 이후 듣는 인간의 첫 음성.

이보세요, 무슨 일이에요?

나는 돌아설 뿐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는 그 말을 떠올리기 위해 젊은 순경 앞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드디어 내 첫 음성이 육신의 공허한 동굴로부터 울림이 섞이어 나왔습니다.

내가 누구요?

순경은 내 눈빛을 보더니 당황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머뭇거리다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아침 산책이 끝나셨으면 집으로 돌아가시죠.

분명 나는 벤치에서 잠을 깼는데. 내가 아침 산책을 나왔다,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맙소. 헌데 내 집 좀 알으켜 줄 수 없겠소?

나는 이 말을 하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행입니다. 순경이 오히려 용서를 빌 듯 내게 자유를 불어넣었습니다.

농담하지 마세요. 순경 초년생이라고.

고맙소, 그럼 가리다.

나는 복잡해질 것 같아 순수한 의지의 이끌림으로 돌아서 버렸습니다.

지금 다시 걷고 있는 나의 등덜미가 참으로 외롭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게 지난 과거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공허가 눈앞을 안개로 채웁니다, 암만 생각해도 지금 나는 걷고 있지만 장님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침 공기만은 상쾌합니다. 상쾌함 속에서 절망은 선혈처럼 선명합니다. 선혈을 떠올려 대비시킬 수 있는 이 절망, 하지만 여느 단어적 절망과는 구별이 분명합니다. 뿌리가 없는 절망, 그래서 이 절망은 근원을 유추시킬 수가 없습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은 거리의 육교 밑입니다. 육교로 거리를 건널 것인지 그냥 계속 걸을 것인지 나는 작정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머릿속이 텅 비어 있어 이 머리로는 무엇을 결정하기란 불가능일 분입니다. 거리로 나서는 사람이 조금씩 불어나고 있습니다. 저들 가운데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것만 같습니다. 이 생각은 정말 큰 희망입니다. 나는 육교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내 얼굴이 잘 보이도록 자꾸 처지는 고개를 바로 세웁니다. 그러나 하루 해가 다 가도록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니지요. 지나는 갔지만 나를 발견하지 못했을 겁니다. 참이 생각은 기가 막힙니다. 단지 이 한 생각 때문에 일 주일 동안 무엇을 먹기는커녕 마신 기억도 없이 육교 위를 지킬 수가 있었으니까요. 분명 나는 일주일 동안 희망을 버리지 않고 육교 위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나는 가물가물 꺼져 가는 마지막 의식을 되살리고 있습니다. 육신을 통하여 무엇인가 마지막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가물거리는 것마저 천천히 옵니다. 어디론가 내 육신이 떠메어져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나를 알아본 사람이 나타나 내 집지나 아니면 병원으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주 먼 막연한 느낌이 평온을 만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지금 내가 떠메어져가고 있는 곳이 이 지구의 공간을 벗어나고 있는 듯싶습니다. 그 순간 나는 놀라며 외쳤습니다.

. 빛 기둥! 저것이야.

지구의 땅과 하늘이 빛 기둥으로 이어짐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 빛 기둥이야말로 내가 지구와 하늘을 오갈 수 있는 출구이자 통로입니다. 하여 나는 육교 위로 돌아와 누군가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나기까지 계속 기다릴 것입니다. 단언하건대, 그렇습니다. 이 약속을 내가 스스로 믿게 하소서. 바로 이것이 아멘이고, 나무관세음보살입니다.

 

 

 

 

 

 

 

 

지은이 : 황충상(黃忠尙: 1945- )

 

전남 강진 출생. 1969년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81<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무색계]가 당선되어 등단. 그는 현실적 삶을 초월하려는 관념적 무속 세계를 통하여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작가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빛 기둥의 출조], [꽃을 드니 미소 짓다], [붉은 파도], [화생(化生)], [복원가], [물과 구름의 순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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