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헌은 산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강을 건너야 했고 한 뱃사공이 그를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길을 안내했다. 그는 왕의 산성행을 이끌었고 안내했던 이였다. 마지막 지점에 다다랐을 때 권고한다. 자기와 함께 산성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그는 내일쯤 청군을 안내해 산성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고 좁쌀이라도 받을 요량이라고 실토했었다. 상헌은 그를 살려둘 수 없었다. 길을 떠나올 때 손녀 나루가 배웅을 했었다. ‘날이 춥다고 어여 들어가“ 라고 당부를 했던 할아버지였다. 주검 옆으로 핏물이 번졌다. 조정은 시끄러웠다. 화친파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분 1586-1647 병자호란 당시 50세)의 진언이 이어지고 그러면 반대파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식분 1570-1652 당시 66세)의 척화파의 주장이 뒤를 이었다. 대장간 대장장이 서날쇠(고수 분)는 오늘도 열심히 쇠로 연장을 만든다. 추위에 떨고 있는 병사들을 위해 가마니를 배급해주면 그게 추위를 막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예조판서에게 건의한다. 어전회의에서 예조판서는 주청을 드리고 임금은 그것을 실행하라고 엄명을 내린다. 청과의 사절로 나선 이조판서는 그들에게서 항복권고 문서를 받아온다. 그것은 세자를 불모로 내놓으라는 것이다. 조정회의에서는 격론이 벌어진다. 결코 세자를 인질로 보내서는 안 된다는 측과 인질로 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선다. 그는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나루를 데리고 온다. 그러자 임금이 그녀를 보자고 한다. 그를 길안내 했던 뱃사공의 손녀임을 알게 되고 그를 예조판서에게 거두라고 한다. 예조판서는 하는 수없이 그 여자아이를 보살피게 된다. 청군의 병력은 청(淸)군 7만 몽골군 3만 한(漢)군 2만 도합 12만이다. 반면 우리의 군사는 1만3천 수준이다. 거의 10배차이가 나는 군사력이다. 병력면이나 화력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전력이다. 식량도 50일분 정도에 불과한 양을 비축해 놓은 상태다. 명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근왕병의 지원을 호소하고 갖가지 방법을 써보지만 여의치 않다. 이시백(박휘순 분)은 관군을 이끌고 청군과 전투를 벌인다. 적장의 목을 베어오고 전투에서의 승리로 아군의 사기를 진작시킨다. 그는 왕으로부터 치하를 받고 의기양양해진다. 곧 칸이 도착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다. 왕은 격문을 보내 근왕군들이 남한산성으로 오도록 전령을 내보낸다. 그런 와중에 이번에는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말들이 죽어나간다. 대신들은 그 일로 논쟁을 벌이고 결국 군사들에게 배급된 가마니를 걷고 초가의 볏짚을 수거해 말먹이를 준다. 그러나 결국 말들이 죽어나가자 이번에는 말을 죽인 고기로 백성들의 입을 즐겁게 한다. 한 백성이 입바른 소리를 하자 영의정 김류(송영창분)는 그를 죽일 것을 명한다. 그러자 예조판서가 만류한다. 그러자 영의정이 자신의 뜻을 굽힌다. 조정에서는 또다시 전투를 벌여야 한다는 주장과 화친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선다. 이번에는 싸워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줘 북문전투가 벌어진다. 300명을 이끌고 나선 영의정은 뒤에서 전투를 독려하고 사기를 북돋우고자 노력해보지만 전력상 열세인 상태여서 제대로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패배한다. 전투에 관한 논공행상이 벌어지고 구원병을 못 보낸 이시백에게 곤장30대의 처벌이 내려진다. 영의정은 체찰사에서 내려오게 되고 그 자리는 예조판서가 맡게 된다. 예판은 날쇠에게 임금의 원군요청문서를 주고 그것을 근왕병에게 전할 임무를 준다. 날쇠는 전쟁의 마무리를 위해 불가피한 임무라고 여기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한다. 청군의 추격을 피해 겨우 도원수 김자점 진영에 도착한다. 그러자 그들은 그의 서신이 임금의 옥새가 찍힌 정본임에도 사신의 신분이 미천하다는 것을 핑계로 벽서를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를 시해하려 한다. 그러자 그는 그들의 습격을 피해 도망을 치게 되고 그는 근왕병과 청군이 맞닥뜨리는 사이에 끼게 된다. 그가 빙벽을 타고 오르고 추격군들이 화살을 쏘고 총을 겨누는 상황에서 청군의 반격이 이어진다. 총격전이 오가고 원군이 가까이 오게 되었음을 감지한 청군은 그들에게 추격대를 보낸다. 근왕군은 봉화불을 올리고 총공세를 펼쳐보지만 청군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월 보름날이 되자 청황제는 공격을 명하고 대대적인 전투가 시작된다. 홍이포가 발사되고 성벽이 무너지고 사다리를 타고 벌떼처럼 청군이 쇄도한다. 한편 최명길은 항복문서를 초안해서 임금의 윤허를 받아 청군 진영으로 향한다. 항복문서를 칸에게 바치고 공격을 멈추라는 황제의 엄명이 떨어진다. 포화가 멎고 전쟁이 종료된다. 왕은 남색평복을 입고 삼전도에 나와 삼배고구두례(삼배를 올리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다)를 행한다. 이조판서는 눈물을 흘리며 그 모습을 지켜본다. 한편 예조판서는 나루를 날쇠에게 부탁하고 최후의 결단으로 사직을 청하고 조용히 죽음으로 속죄한다. 임금은 결국 군신의 예를 다하기로 하고 항복한다. 왕의 세자, 봉림대군, 그리고 삼학사(오달제, 윤집, 홍익한) 등이 불모로 심양으로 끌려간다. 본래 역사에서는 먼저 예조판서가 끌려가 10년을 불모생활을 하고 오는 것으로 되어져 있다. 그리고 이조판서도 명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1642년부터 45년까지 3년간 불모생활을 한다. 인질생활에서 돌아온 세자는 돌아온 지 2개월 만에 불귀의 객이 되고 세자자리를 이어받은 봉림대군도 철천지한을 풀고자 북벌을 계획했지만 왕위에 오른 지 10년 만에 영면하는 바람에 북벌의 꿈도 허사가 되고 만다. 나루는 날쇠의 보살핌 속에 자라난다. 드디어 봄이 오고 남한산성에도 민들레가 피었다. 예조판서는 나루에게 약속했었다. 민들레가 필 때 돌아올 것이라고 말이다. 힘없는 나라의 백성으로 민초로 살았던 이들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동상이 걸리고 아픔과 배고픔에 추위까지 겹쳐지는 속에서 고통을 겪었던 수많은 백성들의 한이 남한산성에 서려 있을 것이다. 청나라로 끌려갔던 이들의 고초도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환향녀가 되어 돌아온 그들의 애환을 필설로 다할 수 있으랴. 반듯한 나라, 올곧은 나라, 굳건한 나라를 만들지 못하면 결국 언제나 외세에 의해 굴욕적인 참변을 당하고 만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대응하지 못했던 민족의 한과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듯하다. 오늘의 우리도 아직 제대로의 자립국방을 갖추지 못해 이리 채이고 저리 휘둘리는 꼴이 꼭 400년 전의 그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미, 중, 일 강대국의 사이에서 제대로 목소리를 내고 자위할 수 있는 힘은 가지고 있는지 자문해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