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자의 정원 / 이진숙 - 2024 경북이야기보따리수기 공모전 가작
서석지는 대문에서 남동쪽으로 1km 떨어진 석문石門에서부터 시작된다. 청기천을 따라 자금병과 가지천이 만나는 곳에 우뚝 솟은 기암절벽과 맞은 편 골립암이 서석지로 들어가는 문이다. 자연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이 지형만이 가진 독특한 암석의 빛깔과 거친 질감이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4백 년 된 은행나무의 기세에 눌린 채 폭 좁은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선다. 나무 대문에 걸린 쇠고리가 스쳐 덜컹거린다. 마당에 들쑥날쑥한 징검돌이 납작납작 줄지어 정자로 이어진다. 정자 중앙에 경정이라고 쓴 편액이 한눈에 들어온다. 경정의 팔작지붕과 주일재의 맞배지붕이 처마 끝 모서리를 맞대고 바라본다. 자꾸 경정 쪽으로 돌아가는 고개와 연못 쪽으로 기울어지는 몸을 날려 겅중겅중 징검다리를 건너 툇돌 위로 올라선다. 단박에 몇백 년을 거슬러 올라선 듯 얼떨떨하다.
자양산 기슭에 자리한 경정이 마당 전체를 차지한 연못을 내려다본다. 자연석으로 쌓은 주춧돌 위에 연못 쪽으로 세워진 거대한 원통 기둥들이 여전히 건재하게 지붕을 떠받친다. 안쪽은 다부지게 각을 세운 사각형 기둥들이 맞물려 옹골찬 골격을 이룬다. 사람 몸통보다 굵은 통나무가 가로로 길게 천장 가운데를 관통해 중심축을 잡아준다. 작은 통나무들이 생긴 대로 어우렁더우렁 줄 간격을 맞추어 천장을 만든다. 나란히 선 기둥들이 음양 사상을 적용한 부드러운 곡선과 정적인 직선을 하나로 떠받든다.
고색창연한 마룻바닥을 손바닥으로 쓸어 만진다. 윤기 없이 빛바랜 감촉이 의외로 촉촉하다. 옛 주인의 체취를 살결처럼 더듬는다. 마루, 기둥, 천장, 내부 곳곳에 구불구불 오랜 세월을 건너온 나뭇결무늬가 사방으로 잔물결 친다. 폭넓은 나이테의 면적을 따라 얼룩무늬로 흩어져 박힌다. 무늬의 명암이 진갈색 잉크 펜으로 꾹꾹 눌러 그린 그림처럼 선명하다. 밖으로 닫아걸은 가로세로 격자무늬 창호지 문살이 어린 시절 고향 집 향수를 불러온다. 홑처마 모서리 아래로 덧댄 나무 장식은 승천하려는 용의 얼굴이다. 그 사이로 늘어진 풍경이 물고기를 물고 딸랑거린다.
중앙 대청마루를 좌우로 온돌방 1칸씩 들인다. 양쪽 창호지 방문은 시원하게 열어젖혀 공간의 미학을 넓힌다. 마루 끝에서 방 끝까지 빠름과 느림의 아름다운 선율이 살아서 내달린다. 방문 몇 짝이 말려서 천정으로 접혀 올라간 벽에는 임천산수경, 임천산수도 그림이 붙었고, 서까래 아래는 정영방의 경정잡영과 당대에 교류한 현판들이 걸렸다. 전면으로 둥글려 깎아 멋을 낸 계자난간을 최대한 연못 가까이 끌어내 정자에 앉아 있으면 연못 위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이다.
먼발치에 삿갓구름을 휘두른 석문이 몽환적이다. 한눈에 들어오는 자연풍광이 서서히 다가와 눈을 맞추고 낮은 담 너머로 두리번두리번 정원을 기웃거린다. 토담 안팎으로 짙게 드리운 나무 그림자가 숨어들 공간을 깔아준다. 담쟁이넝쿨이 덩굴손을 뻗어 연못 담을 타고 경정으로 기어오른다. 주일재 앞 배롱나무와 사우단에 심어진 소나무는 여러 각도로 휘어져 경정을 향해 오매불망 바라본다. 연못가에 향나무와 은행나무도 경정 쪽으로 몸을 기울여 서석지를 아우른다. 나무, 식물 하나도 허투루 심지 않고 위치와 가지가 뻗을 방향까지 정교하게 계산해서 나온 그림이다.
그러고 보니, 정원에 마침맞게 자리를 잡은 나무도 다 뜻이 있다. 공자를 상징한 은행나무는 안정과 번영을, 배롱나무는 고결한 선비의 정신을, 늘 푸른 소나무는 신념과 기상이다. 대나무는 곧은 절개를, 석죽화는 배려와 사랑을, 금작화는 존중과 겸손이다. 자형화는 변치 않는 우정을, 국화는 애정과 축하를, 매화는 청결과 순결이다. 목재를 향으로 쓰는 향나무는 견고함과 굳은 의지를, 연못에 가득한 연꽃은 군자를 상징한다.
서석지는 담양 소쇄원과 보길도 세연정과 함께 한국 3대 민간정원이다. 1613년에 석문 정영방이 17년에 걸쳐 조성했다. 그는 성균관 진사시로 합격하고도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고 벼슬을 등진다. 임진왜란 때 가족을 잃고 병자호란으로 혼탁한 세상을 피해 이곳 연당마을로 내려와 은거하면서 신선이 사는 세상을 만들어 시문을 즐겼다.
연못 가장자리에 기묘한 돌들이 눈길을 잡아끈다. 우락부락한 기암들이 물 밖으로 돌다리를 내어준다. 수백 년 동안 물에 잠겨 내적 수양을 갈고 닦은 돌들이 무언의 언어로 말을 건다. 이 돌들을 왜 깔았을까. 호기심에 이끌리듯 연못 아래로 내려간다. 큰 돌은 작은 바위처럼 보이기도 한 60여 개의 돌이 물이끼를 뒤집어쓰고 가슬가슬 드러난다. 돌들의 생김새가 하나같이 꾸밈없이 투박하다. 흐트러져 깔린 돌다리를 찍어 밟고 연못 가운데로 들어간다. 뜻밖에도 태풍의 눈 같은 고요가 기다린다. 잠잠한 돌들이 연못의 소요를 가라앉힌다. 모든 돌의 배열이 뒤죽박죽 어수선하면서도 질서 정연하게 잔잔하다.
돌의 배치도 그냥이 아니다. 치밀하게 기획하고 연출한 무대장치다. 휴대폰을 꺼내 그 의미를 검색해본다. 옥을 쌓아 만든 옥성대, 옥황상제가 사는 옥계척, 높이 존중받는 상경석, 별이 떨어지는 낙성석, 학 머리를 구름처럼 두른 봉운석, 도낏자루가 문드러지는 란가암, 꽃과 꽃술을 감상하는 화예석, 물고기들이 모여드는 어상석, 물결을 바라보는 관란석, 나비가 노는 희접암, 갓끈을 씻는 탁영반, 물이 갈라지는 분수석, 눈이 흩날리는 징검다리 쇄설강, 바둑 두는 기평석, 선계로 건너가는 다리 통진교, 선선이 노니는 선유석, 연못 속에 웅크린 와룡암, 낚싯줄을 드리우는 수륜석, 광채를 뿜는 촛대 돌 조천촉, 상서로운 돌 상운석….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라는 관란석과 내면을 충실히 다지라는 상경석이 천연색 질감으로 반짝인다. 인간의 근본처럼 갈라진 물도 근원은 하나라는 분수석이 여러 갈래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잡아당긴다. 낙성석에 떨어진 빗방울이 별빛처럼 잘게 부서진다. 수위에 따라 잠기고 드러나는 탁영반은 탁한 물에 갓끈을 씻고 발을 담근다. 수륜석이 낚싯줄을 드리우면 어상석은 비에 젖은 연잎을 헤치고 상운석 쪽으로 잉어 떼를 몰고 간다. 연못에 구름처럼 솟아오른 통진교를 건너 신선의 세계로 들어간다. 란가암은 선유석에 앉아 도낏자루 썩는 줄도 모르고 바둑 두는 기평석을 바라본다.
돌에 시선을 고정하고 감상에 젖는다. 빗물이 타다닥 돌의 감성을 잠 깨운다. 오랫동안 돌에 갇힌 무늬들이 흐슬부슬 깨어난다. 깊게 주름진 돌 표면에 빗물이 고여 숨결처럼 일렁인다. 서석지를 품은 돌의 숨소리가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빗물에 세수한 돌들이 자기만의 빛깔과 향기로 상서롭게 빛난다. 가만히 응시하며 그 의미를 하나하나 음미하다 보니, 여기가 바로 무릉도원이요, 지금 내가 바로 신선이다.
비가 후두둑 쏟아진다. 지붕에서 미끄럼 타는 빗줄기가 곧바로 퐁당퐁당 연못으로 뛰어든다. 수면 위로 크고 작은 물꽃들이 동글동글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간다. 진분홍 꽃대를 올린 연꽃이 수줍은 듯 고개를 떨군다. 이파리마다 깨진 물방울이 보석처럼 박힌다. 잎맥을 타고 알알이 구르는 방울들이 한 덩이로 넘칠 듯 또록또록 잘방대다 또르르 굴러떨어진다. 이 풍경을 연출하려고 연못 위로 처마 끝을 맞췄나 보다. 비가 올 때나 볼 수 있는 선경仙境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서석지의 지당은 물을 바라보는 곳이 아니라 돌을 감상하는 곳이다. 정영방은 경정과 주일재 사이에 배치한 상경석을 바라보며 “돌도 아름다운 광채를 머금고도 나타내기를 꺼리는데, 어찌 사람이 사적인 실상에 힘쓰지 않고 명예만 얻으려 급급하는가. 군자의 도는 은은하되 날로 드러나고, 소인의 도는 선명하되 날로 없어지는 것이다”라고 은둔자 자신을 비유해 노래한다.
서석지는 은거한 선비의 정신문화를 물상으로 형상화한 정원이다. 자연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자존감을 높이고 유교 사상과 가치관, 생활 철학, 사회현상을 상징적 물상으로 이미지화시킨 물리적 공간이다. 자연을 최대한 이용해 시와 의미와 사상을 담아 물상으로 보여준다. 서석지의 물상들은 배치와 의미 하나하나가 은둔자의 철학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은둔자의 정원, 서석지를 알고 나니, 저 물상들이 보석처럼 빛난다. 그의 정신세계에 스며들어 내 안 별채에 연못을 들이고 나만의 서석 하나 심고 현실로 돌아간다. 여우 시집가는 날처럼 먹장구름 사이로 반짝 햇살이 내비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