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수필 6

by 자한형 2024. 8. 27.
728x90

/이영자

뒷산을 등진 도산서원의 원경이 고즈넉하다. 오른편에는 탁 트인 안동댐이 있어 산과 강을 낀 배산임수다. 양지바른 터에 오백 년 해묵은 서원이라니! 빛바랜 나뭇결조차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 같아 옷깃을 다시 여민다.

 

인접한 안동댐 가장자리에 섬처럼 솟은 시사단이 보인다. 시사단은 도산별과를 기념하기 위한 장소였다. 댐 공사를 하면서 수몰 위기에 처하자 건물에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본래의 모습을 살려냈다. 그 모습이 아침 햇살 받은 윤슬 위에서 호수의 배꼽처럼 반짝인다. 저기에 올라 시 한 수 읊고 싶은 시심(詩心)이 일어난다.

 

 

 

안동을 정신문화의 고향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를 찾고자 떠나온 탐방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도산서원의 숨은 뜻을 만나볼 요량이다. 멀리서 서원을 렌즈에 담는다. 천 원짜리 지폐에서 보는 풍경이 고스란히 담긴다. 자연스럽게 눈 가는 곳엔 고풍스런 건축물을 배경으로 퇴계 이황 선생의 갓 쓴 모습을 마주한다.

 

도산서원의 건물 배치는 물론 그 의미에도 나름의 질서가 있다. 가운데 일자형 4칸짜리 지숙료가 중심을 잡는다. 서당 앞에 사립문이 있어 그윽하고 바르다는 뜻을 지닌 유정문(幽貞門)을 걸었다. 마당에는 깨끗한 벗들이 사는 연못, 정우당(淨友塘)이 내방 객을 맞이한다.

 

 

 

도산서당은 선생이 몸소 제자를 가르치던 곳이다.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사색과 연구를 계속하며 제자를 교육하던 단칸방을 '완락재(玩樂齋)'라 하였으니, 그 뜻이 완상하여 즐기니 족히 여기서 평생토록 지내도 싫지 않겠다.’이다. 휴식을 취하던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고 하는데, '학문에 대한 자신을 오래도록 가지지 못해서 바위에 깃들어 조그마한 효험을 바란다.'라는 겸손의 뜻이다. 돌아보니 하나하나가 가르침이요, 철학이다.

 

 

 

제자들의 기숙사인 농운정사는 공부하는 동편 마루가 시습재이고, 휴식하던 서편 마루는 관란헌이다. 농운정사를 앞마당에서 보면 모든 칸마다 모양이 다르다. 특히 창문 위치나 형태, 크기가 현대 건물처럼 제각각이다. 바깥에서 보는 외관에 신경 쓰기보다 공간을 사용할 제자들의 편리와 실용성에 맞추었다. 퇴계 선생이 자신보다 제자들의 기숙사 짓는 일에 더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퇴계 선생은 기숙사 설계 도면을 직접 설계했고 유생들 기숙사 현판도 직접 쓴 친필인 것으로 보아 선생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만하다.

 

 

 

기숙사를 위에서 내려다보면, 건축물이 공부의 공()자 형태로 앉아 있는 게 독특하다. 문과 창호도 중용을 지키라는 뜻에서 중() 자로 설계했다. 빈 마당, 빈방, 공부와 사색을 두 축으로 탐구에 매진하라는 게 건물이 지향하는 의미다.

 

 

 

을 나름대로 해석해본다. 장인 공() 한자 중 가로로 된 아래 글자는 기초이며 퇴계 선생 자신이다. 사람은 기반이 튼튼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로의 뚫을 곤 ‘I’ 은 당신의 제자들을 비롯한 이 나라 백성 전체를 의미하며 위아래를 받쳐주는 기둥이다. 그 기둥이 받치고 있는 가로획은 나라와 임금 그리고 창조에서 역사까지 포함하는 지붕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라는 글자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건축물에도 뜻을 두어 지었을진대, 사람은 사는 동안 어떻게 되기 위한 어떤 공부(工夫)를 해야 하는가. 공부(工夫) 또한 학문으로 기본을 튼튼히 하고, 논리를 든든히 세우고, 하늘의 이치를 따르며 쌓은 건물 (建物)과 같다. 확고한 신념으로 정체성을 갖고, 논리로 기둥을 세워 인간관계에 힘쓰고, 온 힘을 다하되 나머지는 하늘에 맡기는 인성을 갖춰야 할 것이다.

 

 

 

한옥 기와집은 선비를 닮았다. 나무가 주재료이며, 기둥을 깎아 세우고, 지붕에는 기와를 올린다. 도산서원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집을 짓는 데는 공()을 들인다. 다지고 올리면서 기둥을 세우고 힘을 쓰고 노력해서 지은 기숙사가 농운정사다. 간결하고 검소하게 꾸며져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잘 반영한다. 기숙사를 돌아보며 퇴계의 깊은 정신세계를 마음 깊이 들인다.

 

 

 

선생은 건축물에 자신의 뜻을 입힐 공()을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제자들의 공부가 성취되기를 염원하는 스승의 마음이 그대로 형상화 된 농운정사, 건축에 새겨진 공() 자형 공법은 지워지는 글자가 아니다. 제자를 사랑하는 스승의 정신세계가 형상화된 문자이다.

 

 

 

퇴계 선생은 삶이 곧 공부이길 바랐다.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 사람은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야 하는가. 선생의 학문은 이기이원론적 주리론(理氣二元論的 主理論)이다. 사람이 본래 타고난 성품인 이()로써 기질인 기()를 다스려 인간이 선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모든 사람이 우주의 순리로 운행해 나갈 것을 가르쳤다.

 

 

 

어느 때엔가는 이곳에 온 우주가 들어앉아 있기도 했을 자리, 오늘도 햇살이 머물다 간다. 문득 오래된 건물과 새로 지은 건물 저편에서 스승과 제자가 나타나 대화하는 실루엣이 지나간다. 제자들에게 계승되길 간절히 바라는 선생의 당부가 궁금해서일까? 가끔이라도 옛일 그리워서 스승과 제자들이 다녀가는 일도 있을 것 같다.

 

 

 

이 땅에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문화유산이 많다. 한국의 서원이 등재된 9곳 중 제향 자가 손수 짓고 생활한 곳은 이곳 도산서원뿐이다. 그래서일까? 처음 이곳을 둘러보았을 때 가슴 뭉클한 울림이 느껴졌다. 도산서원은 겉으로 보면 아름답고, 내면으로 보면 의미 깊은 감동을 일으키는 상형문자이기 때문이다.

 

 

 

문화유산은 지금도 살아서 우리의 혼을 움직인다. 도산서원을 세운 퇴계 선생의 정신이 현세에까지 이어졌다고 본다. K, K영화, K뷰티에서 K문화까지, 세계를 누비는 한류열풍도 공()이라는 정신세계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다시금 우리 문화의 우수성에 자부심을 느낀다.

 

 

 

종이 글씨는 지워진다. 그러나 기반을 다지고, 기둥을 세우고, 기와를 올린 건물은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다. 먼 길 발품을 팔아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상형문자를 찾아낸 기쁨으로 하루가 충만할 것이다.

 

 

 

 

'현대수필 6'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사에 대한 서사  (1) 2024.08.28
사두족 엄지 이야기  (0) 2024.08.27
은둔자의 정원  (1) 2024.08.27
묵주와 발판  (0) 2024.08.26
어머니의 방  (0) 2024.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