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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글쓰기, 수필론 문학기행, 작가론, 문학작품 해설 등

문화를 업으로 예술은 취미로 4

by 자한형 2024.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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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업()으로, 예술은 취미로 (9)/손민현

담당자의 책임, 11사업

오늘은 무엇 때문에 야근을 하는가

오늘은 붐뱁 힙합이 당기는 날이다. 사업과 관련한 문의가 빗발치고, 수없이 쏟아지는 전화로 낮에 일을 하지 못한 날에는 퇴근시간 6시는 순식간에 다가오지만, 야근도 함께 따라온다. 쿵쿵 거리는 비트 소리를 들으며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남은 일을 처리하는 건 생각보다 그렇게 암울한 일만은 아니다.

그 이유는 오늘 다룰 이야기와 관련되어 있다. 내 사업이니 당연히 내가 아끼고 챙겨야 하기 때문에 야근을 "선택"했기 때문이다(진심이다). 사랑과 책임감, 후회를 모두 안겨줄 수 있는 오늘은 기관의 11사업에 대해 다뤄보려 한다.

작고 소중한 내 사업, 담당자의 책임과 무게감

이곳에 와서 보니 솔메이트, 여자 친구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존재가 있었다. 처음에는 너무 어색하지만 알아가고 싶은 생각이 앞서고, 도중에는 다툴 일이 생겨서 밤잠을 못 이루기도 한다. 지속적으로 계속 관심을 갖고 노력하지 않으면 화를 내거나 떠나가기도 한다. 그건 바로 내가 맡은 내 사업이다. 그리고 1년이 지나 떠나보낼 때가 되면 아쉽고 후회와 미련이 남는다. 문화행정가들은 그렇게 자신의 사업과 애증의 관계로 지내게 된다.

흔히들 이곳에서는 11사업이라고 말을 한다. 처음에 들었을 때는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는 못했고 처음부터 온전히 하나의 사업을 받지도 못했다. 처음엔 하나의 보조로 일하기도 하고, 사업을 운영하는 방식과 그 모든 것보다는 일 자체에, 그리고 조직에 적응하는 것에 훨씬 더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기회일지 위기일지 모를 날이 찾아왔다. 공석이 생겨 하나의 사업을 맡아야 하는 것. 가슴이 뛰기도 하고 빨리 내 사업을 알아가고,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부풀어 오른 기대감도 잠시, 하나의 사업을 맡는 건 AtoZ를 모두 챙겨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연초엔 정해진 예산으로 계획을 세우고, 적절한 시기에 사업을 실행해야 하고, 실행한 사업이 잘 진행되는지 관리도 해야 한다. 그리고 요청사항과 문의가 들어오면 성실하게 대응해야 하고, 혹시나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면 홍보도 빼놓을 수 없다. 사업이 끝나갈 즈음에는, 성과 정리와 정산을 위해 또 엄청난 서류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또 내년이 와서 계획을 세우고.. 살아가는 게 그렇듯 계속해서 반복이다.

위처럼 11사업이 어떤 의미냐하면, 본인이 이 세상에서 이 사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봐 줄 유일무이한 담당자가 된다는 뜻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임과 동시에, 수없이 괴롭히기도 하면서 동시에 엄청난 뿌듯함과 성취감을 주기도 한다. 힘들고 나를 괴롭게 해도 이 사업에 온전히 관심을 쏟고 노력할 '사업 담당자'는 나 하나뿐이므로, 무엇을 하든 나의 선택이고, 나의 역량에 달려있다.

그렇기에 11사업에서 오는 담당자의 책임감과 무게감은 견뎌내야 할 필연적인 운명이자, 늘 함께하는 존재이다. 그것들을 스트레스로 받아들일 수도, 아니면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물론 일로써 존재하는 것들을 좋아하기란 쉽지 않지만, 끊임없이 생각하고, 신경 쓰고, 도전하고, 노력하다 보면 그 책임과 무게감이 싫지만은 않게 느껴진다. 야심한 밤에 뜬 별을 보고 오늘 한 일들을 생각하고 있노라면 왠지 모를 후련함과 뿌듯함이 마음을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좋은 방식일까?

물론 이 방식이 가장 좋은 방식인지, 그리고 앞으로는 개선될 여지가 있을지 의문이 든다. 분명 한 명이 사업을 맡는 건, 문제가 없을 때에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임은 분명하다, 문제가 없을 때에는.

가령, 담당자가 갑자기 퇴사를 한다거나, 민원이나 다른 문제로 담당자가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거나, 도저히 1명이 처리하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나지 않는다거나, 심지어는 N개의 사업에다가 시설, 비품, 여타 보고자료까지 맡아 도저히 하나에 집중할 상황이 아니라거나 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장담컨대, 위 서술한 것들은 거의, 아니 글자 그래도 모든 기관에 실제로 존재한다. 사업에 갈려나갈 수많은 기관 담당자들의 서러운 하소연이 귀에 들리는 듯하다.

또한, 조직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모두가 각개전투를 하고 있고 그것들을 위에서 올려다본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같은 팀이라 하더라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세세하게 알기는 쉽지 않다. 조금 더 관심을 갖고, (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들여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그러나 앞서 얘기한 책임과 무게감으로 인해 본인이 맡은 사업에 집중하다 보면, 다른 사업까지 신경 쓰는 것은 솔직히 무리다.

지금 말한 두 가지 외에도 다른 이유도 많겠지만, 오랫동안 뿌리내린 이 제도에 많은 사람들은 각자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1사업이라고? N사업이 아닌 게 어디야!"라고 말할 수도 있고, 조금 더 유기적으로 사업을 추진하는 방식을 생각할 수도 있다. 오히려 중요한 지점은 방식이 변화하는 것보다는 바꿀 수 있는 환경과 조직문화를 기관들이 만들어가고 있는지, 그리고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에 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 문화예술 전문기관이 등장했고, 이제 그 역사는 20년 차로 접어들었다. 지역문화재단과 문체부 산하의 다양한 기관들은 오늘도 각자의 영역에서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또 현재도 지자체에서는 역할에 맞는 다양한 기관들이 새롭게 생겨나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인력들이 문화예술 공공기관에 투입되고 인력들이 순환될 것이고, 꽤 거대한 생태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다만 아쉽게도, 구직 플랫폼이나 회사 후기를 보면 11(N)사업으로 대표되는 공공기관의 조직문화는 이곳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큰 메리트로 작용하지는 않는 것 같다.

일전에 '행정'에 대해서도 썼듯, 공공기관과 행정시스템의 경직성은 필수 불가결하다. 다만 문화예술 기관의 조직문화와 일하는 방식은 다른 곳들보다 특별해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문화와 예술의 유연함, 자유로운 표현 등 국가 행정이 미처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곳에서 문화예술 기관만의 조직문화와 생태계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담당자의 책임감과 무게감이 스트레스가 아닌 발전할 수 있는 계기로 느껴질 수 있도록, 직원 모두가 일하고 싶어 하는 곳이 되기 위해서는 11사업도 좋고 N사업도 좋지만 유연하게 변할 수 있는 조직문화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문화를 업()으로, 예술은 취미로 (10)

전화, 받았습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연재가 늦어졌다. 하나의 주제로 길게 호흡을 가져갈수록 더 깊은 이야기를 다뤄야 할 것 같아 어떤 것으로 채워야 할까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영감을 얻어볼까 하고 사람들에게 요즘 회사 생활에 대해 쓴다고 하며 글을 보여주기도 했다. 앞으로 어떤 주제로 써야 할지 고민이라고 말하니 꽤 많은 사람들이 그냥 그날 있었던 일을 소소하게 일기처럼 써보라고 조언을 건넸다.

문득 너무 무겁게 생각한 건 아닐까,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회사에서 하루에 수십 개씩 일어나는 일들도 재밌게 풀어낼 수 있었을 텐데. 지금 쓰는 주제들은 잠깐 제쳐두고 일상의 소재와 에피소드를 재밌게 풀어내는 시도를 도전해보자고 생각했다. 그러는 와중에 오히려 자연스럽게 깊은 이야기들도 담기리라 기대하면서.

그래서 고른 첫 번째 소재는 컴퓨터와 마찬가지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도구인 '전화'. 지금에 와서야 익숙해져 눈을 감고도 자주 거는 곳의 번호를 누를 수 있지만 초반에는 그렇지 않았다. 아마 그때 전화를 하는 것은 내가 가장 어려워하고 부담스러워하는 일 중 하나였을 것이다.

입사한 지 1일 차, 처음 사무실에 배정받고 다른 선배들은 다들 바쁘게 일하고 있을 때 옆 자리의 전화벨이 울렸다. 이럴 때 전화를 대신 받아야 하는 건 "첫 출근 전 신입사원이 꼭 챙겨야 할 몇 가지 것들"과 같은 유튜브 영상을 보며 배워갔지만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받아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혹시나 실수를 하면 어떻게 하지 하고 고민하는 건 둘째치고 다른 자리의 전화를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렇게 고민하는 중에 전화벨이 2~3번이 울리자 다른 분이 전화를 당겨 받았다.

디스플레이와 특수 버튼은 없지만 다양한 기능이 있는 유선전화

그날 이후 선배들이 전화기 조작법에 대해 친절하게 알려주었지만, 전화를 걸고 받을 때 입력하는 커맨드들은 생각보다 복잡했고 일주일 간은 이 단축키를 잘못 눌러 당황하는 등 적응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사무실에 들어가면 꼭 한 두 명은 수화기를 붙잡고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른 어떤 일보다도 전화를 잘 주고받는 것이 꽤 중요할 것이라는 사실은 꽤 부담으로 다가왔다.

전화기 조작법 같은 것이야 배우면 그만이다. '전화 공포증'까지는 아니지만 전화와는 그렇게 친숙하지 않았던 나는 전화를 걸고 받는 과정에 익숙해지는 데 꽤 많은 시간이 들었다. 이런 건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 적응 기간이 필요한 소통 방식이었기 때문에 꽤 오랜 시간 나를 힘들게 했던 것 같다. 전화하기 전에는 늘 메모장에 시나리오 1부터 3까지를 써놓을 정도였으니.

1년이 조금 지난 지금은 아직도 부담스럽고 받기 싫은 전화도 있는 건 여전하지만 대체로 전화와 익숙해진 것 같다. 내 자리의 전화기도 위 사진과 같은 버튼만 있는 전화기가 아닌 디스플레이와 다양한 부가 버튼이 있는 최신식 전화기로 대체되었고, 이제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아내기도 한다. 가끔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다 업무 전화를 받으면 적잖이 당황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평소엔 전혀 내지 않는 하이톤의 목소리에 그동안 접해보지 못했던 안부까지 묻는 친절함이 그들에겐 낯섦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OOO입니다. , 아 저번에 말씀하신 것 맞죠? 제가 내일 살펴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요즘 잘 지내시죠..?"

또 사무실에서 받는 전화는 곧 나의 소속과 일을 대표한다. 한 사람이 맡는 업무에 대해 합의한 소통 방식이자 소속을 함께 상징한다. 집에서는 전혀 쓰지 않는 내선 전화가 자리에 하나씩 놓여 있는 이유도 여기 있다. 어느 정도는 정해진 방식으로 받아야 하고 협력하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원하는 응답을 해주어야 한다. 더군다나 공공기관에서는 이곳에 전화를 건 시민들과 예술가들에게 친절하게 응대하고 원하는 정보를 제공하기도 해야 한다.

특히 외부 공개 행사 혹은 지원사업의 참여자 모집 공고 기간 동안은 정말 전화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친절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사업과 관련한 정보를 매번 찾아볼 수는 없으니 언제라도 대답할 수 있도록 익숙해져야 했다. 언제 전화가 걸려올지 모르니 자리를 비울 때도 조마조마했다. 예상 질문과 답변을 아무리 준비해두어도 수화기를 넘어 연락을 주는 사람들은 늘 예상 밖의 질문을 들고 왔다. 경험이 부족한 담당자는 당황하면서 연락처를 적어두고 알아보고 연락드리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또 전화를 주고받는 사람 중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을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나(와 나의 사업, 그리고 회사까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오로지 이 전화 통화 하나가 될 수도 있다. 앞으로도 우리의 사업에 참여하고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첫 대면인 전화부터 제대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전화로 편하고 좋은 인상을 심어주면 얼굴 한번 보지 않고 전화만으로도 좋은 관계가 생기기도 하고 그 이외의 일도 더 잘 풀리기 마련이다.

이처럼 전화는 자칫 소홀하게 대할 수 있지만 업무에 있어서 꽤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문득 전화처럼 사소하게 생각했지만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던 건 아닐까 돌아보게 된다. 어느새 입사한 지 1년 하고도 다섯 달이 지난 지금도 막 출발점에 있는 순간이겠지만 체감하지 못한 채 꽤 많은 시간이 지나버린 것 같다.

다시금 전화 벨소리가 울린다. 전화를 받다 보니 이 사무실이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진다. 알람소리에 잠이 깨듯 정신을 차린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과 일상에 치여 나는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앞으로는 어떤 길을 가야 할지 돌아보는 시간이 부족했던 건 아닌지 돌아본다.

문화를 업()으로, 예술은 취미로 (11)

개조식으로 쓰다 보면...

태생이 문과인 나는 글과 꽤 오래 친구처럼 함께 지냈다. 최근에는 오랜 친구인 글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원인은 바로 이곳에 있었다. 재밌고 위트 있는 글을 쓰는 데에는 재능이 없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나게 쓰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어쩐지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일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1년이 넘는 시간을 문화예술 기관에 몸 담으면서는 지금까지 시도하지 않았던 형식과 내용의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일까. 지금까지 써오지 않았던 형식의 '문서'라는 더 딱딱한 이름으로 불리는 글을 쓰다 보니 다른 글도 자연스레 경직되는 것 같다. 글에 담긴 내용을 찬찬히 보다 보면 과연 내가 쓴 글이 맞는가 하며 낯섦을 느끼기도 한다. 오늘은 내 글에 나타난 변화에 대해 고찰해볼 겸 기관에서 쓰는 문서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파고 들어가 보았다.

개조식으로 글쓰기 개조하기

사람처럼 글에도 패턴이 있다. 오랜만에 아트인사이트에 쓴 글들을 읽어보니 내가 쓰는 글에도 일정한 패턴이 있었다. 크게는 두 개에서 세 개 정도의 큰 선을 그어 큰 주제를 나누고, 그 주제 안에서도 5~6줄 정도의 문단을 나누어 글을 쓴다. 문단에도 보통 5개 정도의 문장이 자리하는 '서술식'으로 작성하는 데 익숙하기에 그렇게 써왔던 것 같다.

우리의 공공기관에서도 정해진 형식이 있다. 기관에서는 보통 '개조식' 형태의 문서를 작성한다. 개조식은 써야 할 주제에 대해 번호 등을 붙여 요점만 간단하게 작성하는 방식으로 문장이나 문단으로 이루어진 ''과는 성격이 다르다. 마침표로 끝나지도 않고 보통은 명사형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으며, 읽는 사람이 많아지고 높이 올라갈수록 글꼴부터 앞머리, 자간까지 정해져 있는 경우도 다반사다.

예컨대 회의를 주최하기 위한 기획서를 쓴다고 해보자. 개조식 글 앞머리의 도형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불필요한 내용은 모두 잘라내고 순전히 뼈대만 남은 글을 쓴다. 내용을 조금 더 직관적으로 단번에 표현할 수 있는 표나 차트가 있다면 더욱 좋다. 그래서 이러한 글을 쓸 때의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읽을 수 있고 중요한 요점을 전달해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개조식의 머리말 하나를 차지할 내용은 아니지만 내용 상 빠트리면 안 되는 주요 사항이 있다면, 당구장 표시()를 활용하여 넘어가는 등 가끔은 유연함을 발휘할 필요도 있다.

한번 "문화를 업으로, 예술을 취미로"를 작성하는 사람들이 정기 회의를 개최한다고 상상해보자. 회의에 꼭 필요한 요소는 일정, 장소, 참석자, 회의 내용, 필요하다면 추후 일정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선택하여 하나씩 간단하게 적는 것으로 개조식은 시작된다. 사실 글을 쓴다기 보다는 개조식의 형식에 맞춰 글자들이 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래 이 회의에 대한 계획 문서를 작성한다고 생각하고 개조식을 간단하게 맛보자.

제목 : "문화를 업으로, 예술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의 정기 회의 추진

주제 : 문화를 업으로, 예술을 취미로 11회 차 주제 선정

일정 : 20221113~ 15

장소 : 온라인 Zoom 회의

코로나 확산세와 강화된 거리두기 수칙을 고려하여 비대면 회의로 진행

목적 : 글 주제 선정 및 아이디어 정리

회의 안건

- 11번째 글 소스 취합 및 주제 선정

- 2022년 문화예술 현황 및 이슈 논의

- 추후 글 방향성 토론

예산 : #,###

추후 일정 : 1회의 정기 회의 개최 예정

개조식으로 쓰는 글 외에도 메일부터 시작해서 원고 청탁서, 안내문, 지시서 등 개조식을 활용하지 않은 형식의 글도 작성할 때도 있다. 이렇게 여러 가지 형태의 글을 쓰다 보면 개조식으로 작성한 글을 다시 서술형으로 옮겨야 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실제로 어떤 일의 계획서와 실제로 진행할 때 필요한 문서는 형식부터 내용까지 달라지기도 한다. 문서의 목적과 독자를 고려한 여러 형식의 문서는 꼭 필요하지만 가끔 일이 바쁠 땐 손가락과 오랜 기간 수련해 온 타자연습 속도에 기댈 수밖에 없다.

개조식 글이나 기관에 익숙한 문서를 쓰다가 다른 성격의 글을 쓰다 보면 순간 그 문서의 딱딱함이 짙게 묻어나기도 한다. 홍보문구나 심지어는 문자를 보낼 때에도 자연스럽게 개조식으로 작성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흠칫 놀라기도 한다. 그래서 안내 메일이나 조금 더 편한 글을 작성할 때에는 친절하고 사람 냄새나는 글을 쓰려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문서에는 정보 전달의 목적도 있지만 ''와 함께하는 일에 대한 편안함이나 친절함도 함께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개조식은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글쓰기와 문서 작성을 구분하기

이렇게 개조식에 대한 단상을 늘어놓는 이유는 최근 글들이 자아의 혼란을 겪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떤 행위든 익숙해지면 정해진 방식을 따라가기 마련인데 개조식 '문서 작성'에 익숙해져 버린 내 글들은 어느새 이전의 '글쓰기' 방식을 잊어버린 듯하다.

불과 1년 전에 썼던 글들에는 생동감이 있었는데 지금의 글들은 분명 다르다. 원인이 개조식이라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분명 저 딱딱한 개조식에 뭔가가 있다. 이 생각이 지속되다 보면 심지어 개조식도 어려워질 게 분명하여 하루빨리 시급한 대처가 필요하다.

내가 내린 솔루션은 2022년의 목표인 '성숙한 글짓기'와 함께한다. 성숙한 글짓기가 도대체 뭘까, 늘 고민했지만 지금으로서는 내가 써야 하는 글의 성격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의식적으로 아트인사이트의 글쓰기와 개조식 문서 작성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다, 내용적으로도 형식적으로도. 글쓰기와 문서 작성은 다른 영역에 두고 의식적으로 쓰기 위한 노력을 해보려 한다.

정보보다는 생각을 적는 것은 '글쓰기', 생각보다는 정보와 사실을 적는 것은 '문서 작성'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 방식이 과연 맞는 것일지 또 다른 혼란을 가져올지는 이후의 글들에서 확인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