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업(業)으로, 예술은 취미로 6/손민현
행정 너는 대체 누구니?
1인용 컴퓨터 PC가 발명된 이후, 인류는 모든 일을 컴퓨터로 처리하기 시작한다. 컴퓨터가 인류 사회에 가장 크게 기여한 부분은 아마 관료제와 문서 행정 분야가 아닐까 생각한다. 컴퓨터로 작성하는 문서와 전자파일은 엄청난 처리 속도를 가져다주었을 테니, 관료제는 21세기에 재부흥을 맞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비단 일반 행정에만 그치는 이야기는 아니다. 문화행정 영역에서도 컴퓨터는 중요한 역할을, 그리고 특히 행정에서 차지한다. 오늘은 이곳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 중 행정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보고자 한다.
문화예술 공공기관에서 벌어지는 일 : 예술, 기획, 행정
행정 이야기를 다루기에 앞서 먼저 문화예술 공공기관에서 나타나는 예술, 기획, 행정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보자. 문화예술 공공기관은 문화와 예술을 대상으로 하는 기획과 행정의 영역이 교차하는 거대한 문화예술계 플랫폼이(라고 나는 정의한)다. 이곳에 모이는 크게는 세 부류의 사람들에는 예술가, 기획자, 행정가가 있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적 생각을 표현하고 공공기관의 다양한 공적인 사업을 수행하고자 하는 실행자 역할을 맡는다. 이들은 축구로 따지면 자신의 스타일대로 골을 넣는 공격수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기획자들은 플랫폼에 모이는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을 읽고 엮어내어 일정의 결과물을 계획하고 실행될 수 있도록 조율하는 역할을 맡는다. 경기장의 중앙에서 골을 넣기 위해 공을 배급하고 전체적인 경기 흐름을 읽는 미드필더 포지션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행정가들은 연간의 사업이 잘 수행될 수 있도록 예산을 사용하고, 지금까지의 결과를 바탕으로 내년의 계획을 세우고 이 과정에 필요한 문서 작업을 맡는다. 발생 가능한 위기를 관리하고, 공격 방향이 시원치 않을 때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공을 받아주는 수비수 역할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주 간단하게 세 가지 정도의 역할을 분류하고 정리하였지만 이곳에서의 인간상도 다른 여느 조직이나 사회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정해져 있는 일은 따로 없고 행정가가 기획자가 되기도 하고, 예술가가 기획자가 되는 일도 있다. 각자의 포지션은 어떤 시기에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위 그림처럼 각각의 교차 영역에서는 다양한 사업과 작업, 활동들이 나타난다. 예컨대 예술가와 행정가의 교차영역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지원사업들이 나타날 것이다. 지역에 있는 문화재단에서는 각 지역의 예술인들을 위한 지원사업이, 한국예술인복지재단과 같은 곳에서는 예술인 자녀 돌봄 지원과 같은 예술인들을 위한 다층적인 복지제도가 나타날 것이다. 앞서 말했듯, 공공기관에서 행정가들의 역할은 각각의 교차지점에서 관계를 통해 맺는 다양한 사업과 제도를 수행하기 위한 행정, 문서 작업들을 맡는다.
행정(行政), 너는 대체 누구니?
이렇게 보면 행정가들은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직원으로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대표적인 행정가들이 그들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모두가 행정가가 되기도 한다. 예컨대 지원사업을 수행하는 예술가나 기획자도 정산과 같은 행정 작업을 거쳐야 한다면 그 사람은 행정가가 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누가 행정가이냐보다는, 행정(行政)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아야 한다.
사전적 정의로 행정은 입법과 사법을 제외한 국가작용을 말하지만, 행정은 일상생활에서 다양한 의미로 쓰인다. 먼저 행정안전부에서 행해지는 다양한 활동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국가가 굴러가기 위해 행해지는 모든 일들이 행정이라고 할 수 있다. 행정의 영역에서는 공정하게 국가의 예산을 사용하기 위해 계획이 세워졌는지, 그 과정에 혹시라도 부적절한 절차가 없는지, 그리고 적절한 대상에게 적절한 절차로 사업이 실행되었는지에 대한 모든 일들을 다룬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여행하고 있는 문화예술 공공기관에 처음 들어온 사람도 행정 시스템을 가장 먼저 익히게 될 것이다. 이곳에 있는 모든 물건(한 잔의 커피나 각 자리에 한 대씩 놓여 있는 컴퓨터마저도) 적합한 계획에 따라 공정하게 쓰이고 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영수증이나 견적서와 같은 문서들로 증명을 했는지, 그리고 일어난 일에 대한 결과는 보고했는지의 과정을 익히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 발행되는 수많은 영수증들이 사실은 이 행정이란 녀석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영수증도 어떠한 의미에서는 행정가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행정은 신뢰도를 쌓는 과정이다. 그러니까 나아가서는, 문화 행사나 축제를 위해 누군가를 선발하거나 선정해야 하는 문제에도 행정의 깃발이 꽂혀있다. 심사나 심의처럼 평가해야 하는, 공정한 행정을 해야 하는 영역에서는 행정의 중요성이 더 커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행정 과정에서 효율성은 차선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포기해야 했던 몇몇의 일들은 그 과정에서 공정성을 해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협력 업체를 선정할 때에도 아무리 나와 같이 여러 번 일해서 가장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이 자명해도 임의로 그 업체를 선택할 수는 없다. 행정을 거치지 않은 결과는 기관의 신뢰도를 점점 하락시킬 것이다.
행정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보았다. 행정 과정에 몸담으며 세상에 일어나는 어떠한 작은 일에는 그 과정에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았다. 의미 없고 재미없는 일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그 일들이 모여 하나의 행사가, 하나의 사업이 운영되는 것이라 생각하니 참으로 거대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문화예술 공공기관은, 공공 문화예술 플랫폼은 다른 국가 기관과 조직과 마찬가지로 행정이라는 시스템에 의해 굴러간다.
문화를 업(業)으로, 예술은 취미로 (7)
취미도 전략적으로 노력해야 해
행정을 다룬 지난 글과는 다르게 오늘은 번외 편처럼 예술을 취미로 삼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문화를 업으로 삼는 이야기를 꽤 오랫동안 다루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이야기도 못지않게 나에게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제목에서도 같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예술을 취미로 하는 삶에 대해 다루고 싶은 이유를 먼저 설명해야 할 것 같다. 문화를 업으로 삼은 것에는 취업, 커리어,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등 꼭 해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예술을 취미로"에는 그렇게 현실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지 않고, 어떻게 보면 이 글에서도, 내게서도 뒤로 미뤄져 있었다.
이렇게 미뤄두었지만 업을 얻기 이전에 나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데 취미는 중요한 것들이었다. 글을 쓰고 기타를 치며 나만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취미들은 나의 삶에서 꽤 중요한 부분이었다. 공연을 보고 책을 읽고 글로 타인의 생각을 읽어내는 것도 꽤 흥미로운 취미였다. 취미와 그것으로부터 시작한 관심들은 내가 업을 얻게 해 주었고, 그 과정에서 얻은 인사이트와 노하우들은 일을 할 때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취미는 업에 밀려났다.
문제는 뒤로 미뤄두다 보니 한없이 미뤄진다. 업은 생각보다 더 빠르고 거대하게 삶을 채워나가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매일같이 하는 출근과 일에 더하여, 새롭게 생긴 관계부터 다달이 들어오기 시작한 월급을 관리하는 일까지 신경 써야 할 일이 수도 없이 많았다. 먼지가 쌓여가는 기타와 비어있는 메모장을 보며 비어 가는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주말이면 짐짓 모른 체하고 다른 '해야 할 일'들을 하느라 바빴다.
예술을 취미로 삼기 위한 노력
내가 취미를 다뤄온 과정을 분석해보니 일을 하기 전에는 별다른 노력 없이도 취미에 시간을 쏟을 수 있을 만큼 시간이 많았고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에디터로 활동하면서는 영화와 공연을 한 달에 몇 편씩 보러 다니고 다녀와서는 글을 써야만 했다. 동아리 정기 공연이 있는 시기에는 한 달 내내 기타와 살았다. 그러고 보니 내 삶이 180도 달라졌는데 이전처럼 취미 생활을 하려 했다니 그건 너무나 무모한 짓이었다.
대학생 시간표 애플리케이션으로 만든 직장인 시간표, 막막하다.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전략적으로, 그리고 그때와 비슷한 목표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취미도 '해야 할 일'의 영역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략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취미는 시간과 돈이 드는 '일'이며 의도적으로 관심을 쏟고 노력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단순히 좋아서 해온 취미 생활이더라도, 직업을 갖고 나면 남은 시간을 자유롭게 낼 수가 없다. 자유로운 시간과 마음이 있을 때야 그렇게 큰 의지가 없어도 빈 시간에 기타도 치고 여러 가지를 시도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제는 취미를 위해서는 큰 결심을 해야 할 때였다.
정말로 오랜만에 먼지 쌓인 기타를 닦고 기타 줄을 갈고, 말랑해진 손가락이 아프더라도 코드를 잡는다. 무언가 손에 잡히는 것은 있지만 이전만큼의 가슴 뛰는 뭔가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하다. 오랜만에 나의 생각들을 문장으로 적어본다. 금방 흥미를 잃고 말았다. 취미를 내 삶에 다시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는 노력뿐만 아니라 접근하기 위한 전략이 필요했다.
혼자 연주하는 기타는 누군가와 함께 공연이나 한 곡의 완성처럼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합주를 하는 것보다 못했다. 목적이 없는 글들은 자기 반복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다시 쓸 동력을 잃고 만다. 거기에 더해 환경 문제가 조금 있었다. 기타를 치고 싶은 환경과 글을 쓰고 싶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중요했다. 새로운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돈과 노력이 조금 더 들겠지만, 이 정도의 노력이야 나의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데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느껴졌다.
공연을 하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쉬웠다.
그렇게 지쳐가는 내 모습을 보며 처음으로는 다시 합주를 하고 싶어 나는 작은 밴드에 들어갈 결심을 하게 되었다. 처음 결심하고 합주실로 향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아직 해야 할 일을 끝내지 못하고 퇴근하여 합주실로 가는 나는 걱정과 피곤함에 가득했다. 손에 든 기타는 무거웠고 무엇보다 퇴근 후에는 그저 가만히 있고 싶은 유혹이 너무나 크게 다가왔다. 이 유혹을 이겨내는 게 왜 이리 어려웠고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
첫 음을 연주하는 순간, 4년 만에 합주를 하는 순간 무언가 살아났다. 자연스럽게 열정과 새로운 기타나 연주에 대한 관심도 싹트는 순간이었다. 나는 어쩌면 기타를 연주하는 것보다 모여서 합주를 하는 취미를 가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합주를 하려고 결심하지 않았다면 느낄 수 없는 감정들과 생각들이 떠오르면서, 결심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로는 글을 쓰는 취미에도 목표를 가지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는 글을 쓰고 싶었고, 내 경험으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더 좋은 환경에서 글을 쓰기 위해 5년간 사용해온 노트북 대신 새로운 컴퓨터도 장만했다. 그렇게 <문화를 업으로, 예술을 취미로>를 연재하게 되었다.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을 보며 책임감과 장기적인 목표도 어렴풋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열심히 쓰다 보니, 꼬리에 꼬리를 무는 궁금증으로 다른 사람들의 글까지 더 열심히 읽게 되었다.
취미는 삶의 장기전을 위한 원동력
합주를 끝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밤 11시가 다되어간다. 아직 마무리를 하지 못한 글도 써야 한다. 내일 아침이면 다시 출근해야겠지만 어쩐지 집에 가는 길이 피곤하지 않다. 빨리 다음 합주를 하고 싶었고, 집에 가서도 기타 연습을 하고 싶었다. 사람이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더니, 2시간의 합주로 인해 나에게 무슨 변화가 생긴 걸까.
취미는 삶을 건강하게 살기 위한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일을 처음 시작하고 친구들에게 "내 삶의 목표는 불로소득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최소 30년은 일을 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부담감과 스트레스부터 비롯된 비현실적인 상상이다. 이렇게 업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는 사무실에서, 업에서 풀 수는 없다. 당장 내일 아침이 되면 가방을 들쳐 메고 출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곳에서 얻는 나름의 보람과 성과는 있지만 그것은 업을 위한 것일 테다.
삶은 장기전이다, 반환점 없이 아주 긴
삶은 반환점이 없는 마라톤 같은 장기전이다. 지치면 쉬어가야 하고 힘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취미는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나를 일으켜 세워주는 원동력이다. 예술은 날이 갈수록 삭막해지는 우리 삶에 화려한 색깔을 더해줄 수도 있다. 그 방식이 예술이 아닌 삶에 활력을 더해줄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되더라도 좋다. 좋은 커피 향을 찾아가는 취미를 가져도 좋고, 게임이나 스포츠를 즐기거나,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거나, 미뤄둔 공부를 하는 것마저 취미가 될 수 있다. 그렇게 취미를 갖게 되면 이전과는 다른 힘을, 삶과 업을 이어나가기 위한 무언가를 얻게 될 것이다.
문화를 업(業)으로, 예술은 취미로 (8)
구슬이 서말이어도 (기획이) 꿰어야 보배
들어가며
기획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던 건 광고쟁이를 꿈꾸던 고등학생 때였던 것 같다. 광고 기획이라는 말은 아이디어와 생각을 현실에 내보이는, 그러니까 머릿속의 무언가를 뚝딱 만들어내는 일 정도의 개념으로 성큼 다가왔다. 실제로 공익광고 기획을 해보면서는, 이거.. 쉽지 않은데..라고 어렴풋이 느꼈다. 복잡하고 어려운 기획의 역사는 동아리 공연기획으로 이어진다. 기획의 주체도 없고, 명확한 분업도 없는 체계 아래에서 기획은커녕, 일을 분배하는 데 급급하기만 했다.
마스다 무네아키의 저서 지적 자본론에서는 현대사회에서 기획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기획이라는 것은 아이디어를 현실로 옮기는 것에서 끝나는 일이 아니고, 그 결과를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치밀한 분석을 통해 결과로써 보여주는 다양한 행위와 일들의 종합이었다. 그의 기획 중 가장 유명하고 인상 깊은 사례로는 츠타야 서점을 들 수 있다. 현대 서점들과 유사한 형태의 라이프스타일 서점(책 이외의 다양한 것을 함께 파는)을 기획한 것인데, 고객들이 서점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어 적용시킨 기획이 인상 깊었다. 책의 저자 마스다 무네아키의 철학은 책의 부제에도 쓰여있는데, '모든 사람이 디자이너가 되는 미래'이다. 디자이너라고 그대로 쓴 저 말이 우리말로 옮기면 '기획자'를 의미할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같은 대(大) 유튜브 시대에 영상 하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도 기획이 필요하고, 카카오나 토스 같은 벤처 기업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라면 서비스 기획자, UI-UX기획자 등의 말도 심심찮게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물며 우리가 여행 중인 문화예술 기관에서도 '기획'은 역시나 큰 비중을 차지한다. '문화기획'이나 '공연기획', '전시기획' 등 ~~ 기획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쓰이는 곳 역시 이곳일 것이다. 서론이 길었지만 오늘은 문화예술 기관의 기획에 대해, 그리고 기획과 행정의 관계에 대해 아주 조금 엿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한다.
아직 어려운 기획의 세계
신입사원에게 미션이 주어졌다. 2021년의 마감까지는 앞으로 약 2달, 그 안에 주어진 예산으로 우리 사업과 관련이 있는 가지 사업을 하나 수행해야 한다. 우리 사업의 목적과 부합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공공의 예산이 쓰이는 일이기 때문에 공정한 방식으로 진행이 되어야 하며, 지금까지의 사업 성과와는 다른 방식의 결과물이 도출되어야 하고, 아마 종료 시기쯤에는 성과에 대한 압박도 조금씩 다가올 것이다.
먼저 사업을 하는 목적과 대상을 찾는다. 그리고 예산을 분배한다. 가능한 범위 안에서 A와 B와 C에 쓸 돈을 구분한다. 얼핏 보면 착착 진행되는 것 같은 느낌에 조금씩 안도감이 든다. 열심히 문서를 작성하며 우리가 왜 이 사업을 하고 있지..? 하고 고민하는 와중에 퍼뜩, 내가 지금 행정을 하는 건지, 기획을 하고 있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현 상황을 진단을 내려보니, 아직 사업의 내용이 본인이 쓴 것임에도 너무나 불명확했다. 정확히 어떤 목적을 위해 누구에게 얼마큼의 일을 수행할 것인지 세부적으로 짜여 있는 게 없었다. 문서 상에는 분명히 딱딱한 말로 쓰여있긴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사람들에게 와닿을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함께할 사람이 없었다. 어느 누구라도 목적이 명확하지 않은 사업에 흥미를 느끼고, 세세한 과정을 엮어서 풀어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선배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해본다. 다행히 수많은 피드백이 쏟아진다. 현장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야 한다거나, 조금 더 창작자나 예술가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아니면 그냥 기획자와 함께하는 것은 어떠냐는 조언도 인상 깊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지금까지의 과정은 기획의 탈을 쓴 행정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창작자의 마음을 잘 이해한다고 착각했던 때도 있었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고 이해하는 기획은 말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음을 깨닫는다. 첫 기획에서 조용히 부족함을 인정하고 도움을 줄 기획자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서로 믿고 의지하는 기획과 행정의 관계
우리의 여행지에서 기획은 행정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기획은 행정에 활기를 불어넣고, 행정은 기획이 가는 길을 닦아주기도 한다. 물론 둘의 뗄 수 없는 관계 때문에 조금만 방향이 엇나가도 흔들거린다. 이를 잘 조절하기 위해서는 행정가도 기획자의 시선을 가져야 하고, 기획자 역시 행정가의 시선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보통 그러한 관계에서 대부분 좋은 사업이 탄생한다. 일례로 좋은 기획자를 섭외하기 위해 알아보는 눈, 행정적으로 가능하게 도움을 주는 행정 역시 좋은 기획을 위해 꼭 필요한 기획의 일부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제 막 씬에 들어온 초보 기획자는 기획의 전 과정을 맡기는 어렵다는 것을, 그리고 좋은 기획을 하기 위해서는 꾸준함과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즘에는 어떤 주제를 어떤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지, 그리고 씬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누구와 함께 일할 수 있을지, 그리고 어떤 사람들끼리 함께해야 최고의 시너지가 날 수 있을지 등 시간과 경험이 쌓여야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 방법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본인의 방식으로 꾸준히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기획은 판을 깔거나, 다양한 요소요소를 엮는 역할을 한다. 오늘의 부제처럼 기획은 구슬들을 꿰어서 보배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비슷한 색깔의 구슬들을 언제부터 어디를 엮어서, 잘 전시하는 것까지 기획자는 구슬을 꿰는 전 과정을 읽고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자면, 문화기획에서 보배는 다름 아닌 사람이다. 때문에 기획자들은 이 사람이 어떤 일에 흥미를 느끼고,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등에 대해서 남들보다 예리한 눈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기획 공부는 사람 공부
그래서 당연히 좋은 기획자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사람 공부'다. 문화예술의 주체는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니, 기획도 사람과 사람을 만나서 관계를 맺고 연결하는 일이 많다. 단순히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부터 시작해서 A라는 사람이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지, 그리고 어떤 사업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지의 경향성을 파악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다. 이러한 과정은 후에 어떤 일을 시작할 때, 기획할 때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지금까지 해왔던 공부와 일보다는 조금 더 사람 냄새나는 공부가 될 것이라는 게 흥미롭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모든 행정가가 기획자가 될 필요는 없다. 강점을 보이는 부분에 더 투자하는 게 앞으로 발전하는 데 더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기획자가 된다면, 기획의 시각으로 더 넓게 판을 볼 수 있다면 더 좋은 행정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행정이 혼자서 하기에 부족한 부분을 기획이 채워줄 수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기도 했거니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기획 일이 흥미로워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 몇 년이 더 지난다면 공공기관에서도 기획과 행정이 서로 믿고 지속 가능한 가치 있는 일들을 할 수 있다면 우리나라의 문화예술계는 조금 더 풍성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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