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1 [윤한철]/이재욱(1,2,3,4,5/ )
3월 20일 춘분, 오전 10시 30분쯤 진도 녹진 버스정류장에서 내렸다. 점심을 먹기엔 좀 이른 시간이었지만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섰다. 식당 안에는 주인 여사장과 종업원이 커피를 마시며 TV를 보고 있었다. 내가 점심 첫 손님이었다. 진도는 지난 2월 1회차 도보여행에 이어 두 번째이고 이 식당은 세 번째다. 뷔페식당으로 건설노동자와 농촌노동자가 주 고객이었으며, 깔끔하고 먹을만했다.
4차선 넓은 자동차도로 보행자 길을 따라 기분 좋게 걷기 시작했다. 지난번 진도 도보여행은 녹진에서 서해랑길 순로를 따라 왼편으로 걸었고, 이번에는 오른편 역순으로 걸었다.
날씨는 춘분치고는 바람 불고 쌀쌀했다. 하지만 하늘은 기가 막히게 맑았다. 하늘 높이 제주도로 가는 여객기가 길게 비행 구름을 그으며 날아가는 모습도 눈에 잡혔다. 어릴 적 비행 구름을 쳐다보고 걷다가 농수로에 빠졌던 기억에 옅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혼자지만 외롭지 않았고, 엔돌핀이 솟고 몸도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을 길을 걷고 비스듬한 언덕배기 밭둑길을 올랐는데, 그만 길을 놓치고 말았다. 다행히 밭일하는 여인의 도움을 받아 건배산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다른 데 비해 안내 리본이 인색하게 달려 있어 몇 번이나 길을 헤맸다. 건배산은 118.3m, 얕은 산이었지만 근방에서는 제일 높았다. 척박한 비럭돌산이라 나무가 제대로 자라지 못해 사방이 훤하게 눈에 들어왔다.
진도들은 생각보다 넓었다. 너른 들은 대부분 간척지였다. 간척을 하기 전에는 바닷고기가 얼마나 많이 잡혔는지 소달구지로 밤새 실어 날랐고, 갯벌에 고기비늘이 많이 쌓여 비늘등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입간판에 소개하고 있었다.
건배산 등산로에서 본 진도 간척지 들판
나리 방조제는 3,225m, 가물가물 끝없이 멀었다. 오른편 바다 쪽에서는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고, 왼편으론 너른 호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호수는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곳이며, 특히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진도 고니류가 겨울을 나는 곳이었다. 겨울 철새들은 이미 북쪽으로 날아갔고, 오리떼만 한가롭게 떠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방조제 시멘트 길 위에 반짝이는 작은 물체가 있어 보니 100원짜리 동전이었다. 꼭 네 잎 클로버를 본 듯, 내게 행운이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기분 좋았다. '100원짜리 동전', 나의 서해랑길 마스코트로 삼기로 했다.
오후 4시 조금 지나 청룡마을 민박집에 도착했다. 주변에 식당이 없어 3km나 떨어진 쉬미항으로 걸어갔다. 도보여행을 짜면서 숙소와 식당을 잡는 게 난제 중 난제였다. 인터넷 검색 과정에서 쉬미항 '속삭이는 바다' 식당을 찾게 되었고, 전화를 걸어 혹시 숙박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고맙게도 민박집을 소개해 주었다.
식당은 TV 인간극장에도 나온 유명한 곳이었다. 내 또래 내외가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전복과 장어요리로 이름난 집이었으며 전복장과 게장을 택배로 판매하고 있었다. 식당은 주로 안 주인이 맡아 운영하고, 바깥양반은 구릿빛 얼굴에 탄탄한 몸매를 가진 천생 어부였다. 한식 뷔페 식사를 했다. 숙소로 돌아올 때는 식당 주인이 부른 민박집 주인 차를 타고 편하고 왔다. 얘기를 들어보니 두 여성은 자매지간이었다.
새벽에 눈이 떠졌고, 아침 일찍 민박집을 나섰다. 아침 해가 뜨기 전 하늘은 어스름 청회색이었다. 날씨는 좀 쌀쌀했지만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부지런한 얼리 버드, 참새가 짹짹 내 발걸음을 더 신나게 했다. 걷는 길은 '푸른빛 낙원길'. 너무나 환상적이었다. 걷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그 축복, 그 짜릿한 희열이 느껴졌다.
서서히 아침 해가 떠오르자 하늘색도, 바다색도 변하기 시작했다. 하늘은 짙은 청색으로 바뀌었고, 바다는 기묘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바다 위 검은 물체로만 보였던 전복 양식장은 아침 햇살을 받아 붉은빛의 멋진 해상 리조트 같았고, 검은 부표가 줄지어 떠 있는 미역 양식장에서는 은빛 광채가 은은하게 비쳐왔다. '바람이 머무는 곳'이라는 이름이 붙은 전망대에서 아침 바다 풍경에 취해 한참을 멍하게 서 있었다.
또다시 쉬미항 '속삭이는 바다'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믹스커피도 한 잔 마시고 길을 나섰다. 긴 방조제를 건너고 해안 길을 돌아, 들길로 들어섰다. 부지런한 농부가 갈아놓은 논에는 물이 고여 있었고, 비닐하우스 안에는 어린 묘가 파랗게 자라고 있었다. 잘 익은 거름 비료 냄새도 사방에서 역겹지 않게 코를 자극했다.
양지바른 들길뿐만 아니라 언덕의 풀섶에도 봄 풀들이 잎을 키우고, 꽃을 피우고 있었다. 민망한 개불알풀에서 이름을 바꾼 봄까치꽃은 어린아이처럼 앙증맞은 푸른 꽃을 방긋 달고 도란도란 앉아 있었고, 붉은 보랏빛 꽃을 단 광대나물꽃은 바람에 나폴나폴 떼 지어 춤추고 있었다. 마르고 긴 풀들이 찬 바람을 막아주는 풀섶에는 쑥이며 들풀이 긴 겨울을 이겨내고 서둘러 새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동안 낙조, 노을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었다. 몇 차례 기회가 있었는데, 제대로 된 낙조와 노을을 본 적은 없었다. 몇 년 전 동석산을 넘어 이곳에 왔을 때도 실패했던 기억이 난다. 노을 하면 왠지 슬픈 감정이 일었는데, 이곳 낙조는 장엄했다. 하루를 마무리한 태양의 마지막은 위대하고 아름다웠다.
젊은 부부는 자연이 좋아 6년 전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이런 분들을 가끔 만난다. 하동 먹점골에서도 산이 좋아 산골에 펜션과 찻집을 운영하는 부부를 만나 한국의 산행 명소를 소개받기도 했었다. 아침 식사까지 해결하고 느긋하게 아침 바다를 즐기다가 동석산으로 향했다.
아침 바다 풍경, 솔바람 소리를 느끼면서 동석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붉은 동백꽃이 뚝뚝 떨어져 있는 돌길을 지나자 가파른 오르막이었다. 산을 오른 지 40분 만에 큰애기봉 전망대에 도착했다. 눈앞에 섬들이 펼쳐졌다. 어제 낙조 때 본 섬들을 산 위에서 조망하는 풍경이었다. 세방낙조는 중앙기상대가 '제일의 낙조 전망지'로 선정하였으며, 섬들은 '어느 스님이 붉은 노을이 아름다워 학 떼를 따라 날아가다가 떨어져 생겼다.'라는 전설 같은 안내문이 있었다.
동석산은 심하게 오르내리막하는 산은 아니었지만 심한 돌산이었다. 칼날 같은 바위 능선길을 위태위태하게 넘어야 했고, 바위 틈새로 난 아찔한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하지만 전망이 빼어났고, 무엇보다 노루귀, 산자고, 개별초 등등 이른 봄꽃을 여기저기 감춰놓고 있어 보석 같은 꽃들을 눈요기하며 걷는 재미가 쏠쏠했다. 산행 거리는 약 6km, 산행 시간은 3시간 30분 정도로 만만찮은 산이었다.
동석산 큰애기봉에서 바라본 진도 앞 다도해
산에서 내려와 강 따라 난 방천길을 걷고 해안 길을 돌아 긴 방파제로 들어섰다. 멀리 바다 건너편으로는 팽목항이 보였다. 마지막 목적지였다. 하지만 멀고 힘들었다. 점심도 거른 채, 사탕 몇 개로 에너지를 보충하며 오후 2시가 넘어 팽목항에 도착했다. 팽목항 방파제에는 바람에 찢긴 깃발이 웅웅 울어대고 있었다. 새빨간 등대에는 세월호 참사 추모 노란 엠블럼이 여전히 선명했다.
텅 빈 부두에서 텅 빈 버스를 타고 진도읍으로 돌아왔다. 착잡한 여운이 남기도 했지만, 진도의 2박 3일은 아름답고 보배 같았다.
우수영 '강강술래길'과 '법정스님마을도서관'
‘빈 마음의 무심’이 되기는 어려워도 걷기 여행은 순간 이동의 마법 부려
[윤한철의 서해랑길 3]
우수영의 아침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했다. 개 짖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명색이 부두가 있고, 길 이름마저 ‘강강술래길’이라는 안내판에다 정겨운 이름의 카페도 있었는데… 면 소재지 중심부로 들어가는 길은 산업화 전 6~70년대 거리를 재현한 세트장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꼭 과거로 돌아가는 것 같은 길모퉁이에서 '법정스님마을도서관'을 만났다. 법정 스님이 이곳 우수영 출신이었다.
명량대첩비
작은 돌 언덕 위에 명량대첩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 옆에 강강술래 마당이 널찍하게 조성돼 있고,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가 있었다. 명량대첩비는 일제강점기 때 강제 철거돼 경복궁 내에 버려졌던 것을 지역 유지들이 뜻을 모아 옮겨 세웠다고 했다.
아침 식사를 걱정하며 걷는데, 문을 연 식당이 있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섰더니, 외국인 여성 두 분이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중년의 여성은 주방에서 일을 하고 젊은 여성은 홀에서 서빙을 했다. 얘기를 듣고 싶어 말을 걸어봤는데,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어쩌면 대화를 피했는지도 모르겠다. 된장찌개는 좀 묽었지만 짜지 않아 좋았다.
식당 맞은편 찐빵집 아저씨 얘기를 들어보니, 여사장이 먼저 한국에 왔고 뒤에 아들과 며느리를 불렀다고 했다. 두 외국인 여성은 자매지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시어머니와 며느리였다. 식당과 빵집의 주 고객이 농촌 노동자와 노인들이라는 말에도 놀랐다. 변화하는 농촌의 모습이었다. 점심용으로 5천 원을 주고 옥수수빵 4개를 샀다.
마늘 밭 너머 농촌 풍경
비 온 다음 날, 농촌 풍경은 산뜻했다. 짙은 초록의 마늘밭 너머 연초록 보리밭이 정겹고, 그 너머로 서너 채 마을은 그림 같았다. 이런 풍경 속을 걸으면 가슴마저 두근거린다. 나에게 걷는다는 것은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전깃불도 안 들어오는 시골에서 태어나 도시로, 도시로, 도시로 유학 생활을 했고 결국 수도권에 살게 된 삶 자체가 어쩌면 유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본격적으로 걷게 된 것은 은퇴 후부터다. 준비 없이 닥친 은퇴에 급격히 자존감이 떨어져,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극심한 우울증까지 앓게 된 나를 붙잡아 준 것이 걷기 여행이었다. 걷게 되면 생각도 따라 걷게 되고, 그러면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맑아짐이 느껴지고, 그러면 풍경이 더 아름답게 보이고, 들리고, 느껴졌다. 내 몸속의 많은 내가 사라지고 오롯이 몸만으로 자연을 느끼게 되는 것 같았다. 일상으로 돌아오면 또다시 내 몸속에는 많은 내가 우글거리게 되지만 걷기 여행 경험은 삶을 여유롭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법정스님마을도서관석판
법정 스님의 말씀처럼 '빈 마음의 무심'이 되기는 쉽지 않지만, 걷기 여행은 잠시나마 나를 무심의 세계로 순간이동 시켜주는 것 같다.
풍경에 취해, 생각 없이 걷다가 그만 길을 놓치고 말았다. 그것도 한참을 지나 바닷가 쉼터에서 알게 되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신발도 벗고, 양말도 벗고, 쉬었다 가기로 했다. 배낭에서 옥수수빵 2개와 우유를 꺼내 주린 배도 채웠다.
해남 복 터진 마을 ‘예락’을 아세요?
'솔라시도'는 새로운 개념의 친환경 생태도시 표방
[윤한철의 서해랑길 4]
‘예락리, 이젠 해남 복 터진 마을입니다.’
쉼터 옆 바닷가에 안내판이 서 있었다. 예락마을은 예사 마을이 아니었다. 전남에서 가장 먼저 천주교가 뿌리내린 교우촌이고, 최근에는 세발나물, 토판염, 묵은지 등 3가지 보물로써, 또 천혜의 자연과 풍부한 농업자원으로 '복 터진 마을'이 되었다고 자랑하고 있었다. 직접 마을을 둘러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아쉬움을 바닷가 쉼터에서 그 여운이나마 느끼는 것으로 대신했다.
다시 서해랑길을 만나 별반 다르지 않은 풍경 속 길을 걷는데 갑자기 붉은 벽돌의 보도블록까지 깔린 널찍한 인도가 나타났다. 처음 보는 낯선 가로수가 심겨 있고, 화단도 조성돼 있으며, 돌로 만든 구조물이 놓인 작은 정원도 곳곳에 보였다. 지금까지의 서해랑길과는 격이 다른 길이었다.
바닷가 숲속에는 리조트 건물이 보였고, 널찍한 캠핑장과 해수욕장, 그리고 잘 관리된 초록의 골프장도 눈길을 끌었다. 오시아노 관광레저단지였다. 토요일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대라 아직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으나, 관리 상태로 봐서는 찾는 사람들이 제법 많은 것 같았다.
오아시노 관광레저단지 인도
인지정류소에서 화원면 소재지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서해랑길을 계속 따라가면 숙소도 없고 식당도 없으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처럼 선택하는 여행자가 많은지, 서해랑길의 이정표가 화원면사무소 이정표와 같이 붙어 있었다. 완만한 오르막길에는 특이하게도 목련 나무가 가로수로 심겨 있었다. 아직 꽃망울이 터지지 않아 그 아름다움을 볼 수는 없었지만 이런 특색있는 가로수길을 보면 흐뭇하고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맞은편 양지바른 산 아래 있는 폐교 교정에 하얗게 핀 백목련이 초봄 춘정의 아쉬움을 대신 달래 주었다.
화원면 소재지에 도착해서 전화로 숙소를 예약하고 중국집에 들어가서 짬뽕에 이과두주 1병을 시켰다. 농산물과 해산물이 풍부한 해남답게 짬뽕은 푸짐했고, 간이 딱 내 입에 맞았다.
아침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요 며칠 쾌청했다가 흐리고 비가 내리는, 변덕 많은 봄 날씨였다. 길 아래로 화원농협 김치공장 넓은 단지가 눈에 띄었다. 해남은 전국 최대의 배추 생산지이고, 화원농협은 김치 가공공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우리 집에서도 오래전부터 화원농협 절임배추로 김장을 해왔다.
저상마을 버스 정류소에서 다시 서해랑길을 만나, 방조제를 지나고 갑문을 건넜다. 왕복 6차선 넓은 길가에 식당들이 여럿 영업하고 있었다. 주차장에는 빼곡히 승용차들이 들어차 있었고, 행색을 보니 휴일을 맞아 골프장에 가는 사람들 같았다. 돼지국밥집에 들어가 오랜만에 느긋하게 아침다운 아침 식사를 했다.
바다 건너편으로 대불공단 높은 크레인이 눈에 잡혔고, 방파제에는 생각하는 사람처럼 낚시에 빠진 강태공들이 꿈쩍도 없이 앉아 있었다. 차로에는 화물차며, 승용차가 굉음을 내며 무서운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달도교차로에서 통행량 많은 차도를 벗어나 새로 만든 길로 들어섰다. 길가에는 '햇빛 도시 솔라시도'라는 커다란 입간판이 서 있었다. '솔라시도'는 전라남도와 민간기업이 공동으로 개발하는 새로운 개념의 도시로 친환경 생태도시를 표방하고 있었다. 개발로 어수선한 비포장도로를 지나자 넓은 호수가 나타났고, 서해랑길은 호수를 따라 계속 이어졌다.
솔라시도 서해랑길은 너무나 조용한 길이었다. 길은 차 1대 다닐 수 있을 정도 넓이의 비포장도로였고, 호수를 따라 평탄하게 끝없이 이어졌다. 휴일임에도 다니는 자전거도 사람도 없는 한적한 나 홀로 길이었다. 왼편으로는 넓은 호수가 있고, 오른편으로는 갈대가 듬성듬성 바람에 춤추고 있는 황무지였다. 마치 영상으로 본 영국 스코틀랜드 링크스 해안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길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마치 낯선 곳에서 낯선 풍경을 보고 흥분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너무나 색다른 풍경이고, 색다른 아름다움이었다.
솔라시도 황무지 길
'푸드덕' 풀섶에서 까투리 세 마리가 날아가고, 잠시 후 장끼가 날아갔다. 겁이 많은 까투리가 먼저 날아오른 것일까, 까투리가 안전하게 도망가도록 장끼가 나중에 난 것일까. 맵시도 좋은 장끼가 기사도 정신을 발휘해 나중에 날아오른 것이라 믿고 싶었다.
안개비 날리던 하늘에서 제법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호숫가 서해랑길은 내川를 만나면 한참을 돌아서 나와야 했다. 아무도 없을 것 같은 늪 호수에는 강태공이 용하게도 낚시 포인트를 찾아 외롭게 시간을 낚고 있었다. 황량한 풍경에 비마저 내리니 더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그런데 얄궂게도 그 을씨년스러움이 온몸을 짜릿하게 했다.
벌써 2시간 넘게 이런 길을 걸었다. 이 길은 아이러니하게도 개발로 인해 생긴 황무지 길이었다. 계획대로 도시가 들어서고, 정원이 만들어지고, 태양광 발전소가 건설되면 전혀 다른 풍경이 될 것이다. 어쩌면 개발이 진행되면 사라지게 될 한시적 운명의 길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풍경의 길이 우리나라에 또 있을까 싶었다. 경험하기에는 인내가 필요하지만, 감탄이 나오는 기막힌 길이었다.
드디어 솔라시도대교에 도착했다. 멀리서부터 눈에 띄는 다리였다. 황량한 풍광에 돋보이는 멋진 다리였다. 그런데 비 오고 바람 부는데 저 긴 다리를 어떻게 건너지, 걱정하며 걸었었다. 놀랍게도 인도와 자전거 길이 다리 상판 아래 만들어져 있었다. 다리 길이 2,200m. 다리 한가운데 전망대까지 갖춰져 있었다. 이렇게 보행자 친화적인 다리는 처음 만났다. 전망대에서 배낭을 내리고, 신발을 벗고, 양말까지 벗어 오랜만에 발이 자유를 누리도록 했다.
오후 2시 넘어 세한대학교 캠퍼스에 도착했다.
주변에 식당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왔는데 영업하는 식당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편의점에 들어가서 간편식으로 점심을 때웠다.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는 젊은이를 몇 사람 보았지만, 대학가 분위기는 아니었다. 식당뿐만 아니라 원룸도 문을 닫고, 카페도 문을 닫은 지 오래된 것 같았다. 그런데 유독 골프연습장에는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시 너른 호수를 만났고, 제방길을 걸었다. 호수는 영산강 하구언 댐 건설로 생긴 호수였고, 호수 건너편으로 새롭게 건설되는 도시가 보였고, 상류 쪽으로는 월출산이 대장군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걷는 길은 영암 땅이었고, 건너편 신도시는 무안 전남도청 소재지였고, 아래쪽으로 목포시도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솔라시도대교는 영암 땅과 해남 땅을 잇는 다리였다.
무안 도청 소재지 신도시
이 지역은 전남지역 개발 중심 지역이었다. 이미 대불산업단지가 들어서 있고, 광활한 태양광 발전소가 들어서 있으며, F1 자동차 경주장과 골프장이 들어서 있고, 신도시를 건설 중이었다.
전남의 젖줄인 영산강 하구는 한강이나 낙동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영산강을 중심으로 여러 도시가 저마다의 색깔로 발전하며 연합하고 있었다. 영산강의 개발이 만들어낸 효과가 아닌가 싶었다. 물산과 문화의 교류, 수많은 영욕의 역사를 간직한 영산강의 발전하는 모습일 성싶기도 했다.
근대역사문화도시 목포, 소설가 박화성의 고향
목포개항문화거리에서 도보여행 나그네와 조우하고 유달산에 오르다
[윤한철의 서해랑길 5]
영산강 하구언댐, 삼호대교를 넘어 목포로 들어왔다. 길고 긴 왕복 6차선 대로에는 차들이 무서운 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다리 남단 대불공단 그리고 진도와 해남으로 왔다 가는 차들일 것이다. 차들이 내는 굉음은 댐 콘크리트 매끈한 경사면에 증폭되어 귀가 아플 정도로 끔찍했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호텔로 들어갔다. 시간은 오후 5시 30분, 10시간 넘게 걸었고, 거리는 서해랑길 안내 맵을 보니 40km가 넘었다. 중간지점에서 쉴 생각이었는데, 마땅한 장소가 없어 목포까지 넘어오게 되었다. 발가락이 욱신욱신하여 보니 양발 둘째 발가락이 붉게 피멍이 들었고, 발톱은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흐리고 비 오는 날씨에 멀고 힘든 하루였다.
여행은 힘듦을 견디면서 즐거움을 얻는 것이라고 애써 위로하며 식당을 찾아 나섰다. 마침 눈에 띄는 고기 쌈밥집에 들어갔더니 고맙고도 친절하게 메뉴판에 1인용 차림이 별도로 있었다. 생오리 쌈밥에 맥주 1병을 시켰다. 영양 보충을 하는 기분이었고, 시원한 맥주에 피로도 가시는 듯했다. 그리고 약국에 들러 후시딘 연고를 사서 아픈 발가락에 바르고 일회용 밴드로 감았다.
날씨는 여전히 비가 올 듯 흐리고 쌀쌀했다. 해안을 따라 파란 아스콘 보행길이 잘 조성돼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조깅하거나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부지런한 목포 시민들과 마주쳤다. 그런데 삼호대교에서 넘어오는 자동차 소음은 한참 동안 계속 뒤따라오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이 소음에 익숙해진 것일까. 차량 속도를 제한할 수는 없는 것일까.
해안을 따라 만들어놓은 나무데크 길에서 특이하게 생긴 바위를 만났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갓바위였다. 마치 삿갓을 쓰고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 있는 형상이었다. 설명을 보니 8천만 년 전 화산재가 쌓여 바윗돌이 되었고, 오랜 세월에 걸쳐 바닷물과 비바람에 풍화돼 생성된 지질학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자연유산이라고 했다. 옛날에 불효를 저지른 아들이 하늘을 바라볼 수 없어 갓을 쓰고 바위가 됐다는 전설도 있었다.
갓바위
남농로 4차선 길 양옆으로 목포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목포자연사박물관, 목포항토문화관, 남농기념관, 목포생활도자기박물관, 목포문학관, 목포문화예술회관 등등. 아직 이른 시간이라 열람할 수 없어 아쉬웠다. 특히 눈길은 끈 것은 여류 소설가 박화성 흉상이었다. 100편 이상 방대한 작품을 남겼고, 장편소설을 집필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작가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목포는 우리나라 소설, 극예술, 평론의 대가들이 태어나고 활동했던 곳이었다.
목포는 남해안의 항구도시 통영과 입지적 여건이 비슷하면서 많은 예술가를 배출한 공통점을 지닌 도시였다. 두 도시가 예술의 향기가 짙은 것은 다른 지역에 비해 토속성이 강하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으며, 신문물을 빨리 도입할 수 있는 항구라는 특수성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가 박화성의 흉상
남농기념관은 수년 전에 본 적이 있고, 신안 해저 유물선 인양으로 설립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한때 문화답사 여행을 다닐 때 문화재를 연구하는 친구의 안내를 받아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인터넷을 통해 자연사박물관에 입장해 보니, 먼 옛날 목포·신안 지역은 공룡들의 놀이터였다.
수로를 따라 잘 닦아놓은 산책로를 따라가니 삼학도 공원이 나왔다. 길에는 삼삼오오 중년의 여성들이 나들이 나와 있었고,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도 더러 만났다. 삼학도 공원을 지나고 경북 화합의 숲을 지나니,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이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육지로 쑥 들어온 목포항에는 배들이 나란히 평화롭게 정박해 있었다.
목포항과 삼학도
목포종합수산시장에는 붉은 홍어회를 파는 가게, 세발낙지를 파는 가게들이 즐비했다. 마침 눈에 띄는 적당한 식당에 들어갔더니, 혼자 먹을 수 있는 요리는 홍어애탕과 낙지연포탕이었다. 홍어애탕 한번 먹어볼까, 잠시 망설이다가 낙지연포탕을 시켰다. 낙지 한 마리에 조개류 서너 개가 들어간 멀건 탕이었지만 귀하게 먹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목포진성을 지나고 목포개항문화거리에 도착하니 주룩주룩 비가 세차게 내렸다. 3월 이른 봄 치고는 빗줄기가 굵었고, 차갑기까지 했다. 6일간 도보여행의 마지막 날, 피곤하기도 했고 비마저 세차게 내려 예정 시간보다 조금 앞당겨 여행을 마무리했다.
목포개항문화거리
4월 13일 토요일, 봄기운이 무르익은 화창한 날에 다시 목포를 찾았다. 일주일 전에 KTX를 예약했음에도 자리가 없어 입석으로 내려왔다. 기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목포역에서 걸어서, 지난달에 여행을 중단했던 목포개항문화거리까지 가리로 했다.
차림과 걸음걸이로 봐서 나처럼 도보여행을 온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거리 풍경은 여느 중소도시와 다를 바 없었다. 목포다움을 찾고 느끼고자 뚤레뚤레 눈길을 돌리면서 걷는데, '행복한 시간 갤러리' 간판이 계속 보였다. 무려 10호점까지 있었다. 그림, 서예, 골동품 등을 전시하고, 판매하고 있었다. 서울의 인사동 거리와 같은 전통예술의 거리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목포개항문화거리에서 서해랑길을 걷는 여행자를 만났다. 반가워서 인사를 하고 얘기를 들어보니, 하루에 한 코스만 걷는다고 했다. 숙소가 있는 곳까지 걷는 나와는 여행 패턴이 달랐다. 근대목포역사관 계단에서 친구로 보이는 상큼한 차림의 두 소녀에게 사진 부탁을 받고 찍어 주었다. 붉은 일본식 건물을 배경으로 예쁜 표정을 짓는 모습이 깜찍했다. 두 손 흔들고 뒤돌아선 포즈에서는 젊은이의 배면미와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근대목포역사관은 구 일본 영사관 건물이었다.
목포라는 지명은 '이곳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까닭에 목포라 한다'라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예부터 목포는 곡창지대를 끼고 흐르는 영산강과 서해가 만나는 길목에서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조선시대는 조운선의 통과 거점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나주평야와 신안 섬들에서 생산되는 쌀과 면화의 수탈 항구 역할을 했던 곳이다.
목포는 1910년 부산, 원산, 인천에 이어 네 번째로 개항되었고, 1928년과 1929년 자료에 의하면 쌀과 면화가 개항 초기에 비해 무려 9배나 더 많이 목포항을 통해 실려 나갔다고 한다.
유달산에서 내려다본 목포 시가지
유달산 올라가는 길에는 벚꽃이 난분난분 바람에 춤추듯 내리고 있었다. 엄마, 아빠를 따라 나온 어린 남매는 떨어지는 벚꽃잎을 잡기 위해 이리저리 춤추듯 놀고 있었다. 벚꽃잎은 잡으려고 하면 얄밉게도 고양이보다 재빠르게 달아나 버린다. 지난주에 함께 여행한 공대 교수 친구는 떨어지는 벚꽃잎을 잡으면 점심을 사겠다고 내기를 걸어왔었다. 떨어지는 벚꽃잎은 손바닥을 내밀어 잡으려고 하는 순간, 공기 흐름이 바뀌어 잡을 수 없다고 했던가.
노적봉을 돌고 유달산 등산길로 올랐다. 계속 이어진 계단은 가팔랐고, 숨이 차오르며 온몸에 땀이 배기 시작했다. 벚꽃은 벌써 떨어져 산길에는 낙화가 수북했고, 여린 신록이 온 산을 덮어 가고 있었다. 유달산은 화강암 바위산. 투구바위, 애기바위, 마당바위… 여러 형상의 바위들을 지나 드디어 유달산 정상 228m 일등바위에 올랐다.
유달산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사방팔방 목포를 볼 수 있었다. 유달산은 목포의 심장 같았다. 목포항을 중심으로 한 구시가지뿐만 아니라 새로 뻗어나가고 있는 도심지역도 막힘없이 볼 수 있었고, 고하도로 연결된 케이블카 그리고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는 목포대교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몸으로 눈으로 유달산 정상에서 목포 풍경을 만끽했다.
유달산에서 내려와 서해랑길과 다시 만났다. 서해랑길은 유달산 정상으로 연결돼 있지 않고, 산 중턱 산책로를 따라 연결돼 있다. 굳이 서해랑길을 벗어나 유달산 정상에 오른 것은 목포에 가면 유달산은 올라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힘들기는 했지만, 정상에 오른 것은 잘한 선택 같았다.
또다시 차도 옆 인도를 걷고, 그리 높지 않은 산을 두 개나 넘고, 저수지 옆 숲길을 걸었다. 숲에는 시민들이 쉬고 운동을 할 수 있도록 곳곳에 운동시설이 설치돼 있고, 요즘 유행하는 황톳길도 조성돼 있었다. 그런데 길을 걸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왜 그럴까. 목포라는 지역을 좀 잘 봐야지 하는 압박감 때문일까. 주마간산 격으로 지나온 것 같은 아쉬움 때문일까.
[윤한철은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750Km의 해파랑길과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전남 해남 땅끝마을까지 1,470Km의 남파랑길을 도보로 섭렵한 다음 도보여행 체험기『해파랑길』과 『남파랑길』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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