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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내 여행, 해외 여행, 등 ]

서해랑길 3

by 자한형 2024.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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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3

무안 해제 반도 들판과 황톳길,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의 흔적/윤한철(12,13,14,15/ )

염병헐, 운동 삼아 (배낭에) 넣어!” 양파 인심에 찍소리 못하고 감사할 따름

[윤한철의 서해랑길 12]

신안 북부권 섬 여행을 마치고 다시 무안 해제 반도로 넘어왔다. 해제 반도와 지도 섬은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거의 붙다시피 경계가 모호했다. 갯벌을 막아 간척을 한 결과 만들어진 지형 같았다. 넓은 들판에는 온통 청사료(靑飼料), 트리티케일 천지였다. 해협을 따라 부는 골바람이 거센지, 청사료 들판은 쓰러지고 넘어지고 거인들이 놀고 간 난장판처럼 변해 있었다. 반도의 기운이 마지막으로 응어리져 솟은 듯한 야트막한 산을 돌아서자, 해제 반도 특유의 완만한 구릉 지형이 나타났다.

청사료, 트리티게일 들판

지난 4, 황토 들판을 짙은 녹색으로 물들였던 양파는 색이 바래고 있었다. 꽃대가 솟은 숫양파가 삐죽삐죽 머리를 내밀고 있고, 쓸모없다고 뽑혀 밭 가에 막 버려져 있기도 했다. 한 달 전 풍경과는 크게 달랐다. 마침 양파를 수확하는 밭도 있었다. 여인들이 밭고랑마다 앉아 수확한 양파를 붉은 망에 담고 있었다. 길가에는 양파 자루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모처럼 보는 농촌 사람들이었는데, 한량 같은 내 차림이 겸연쩍어 곁눈질하면서 벗어났다. 마을 어귀 텃밭에서 양파를 거두는 할머니께 인사말을 건넸더니 주먹만 한 양파 3개를 주었다. 무겁다고 손사래를 쳤더니 염병헐, 운동 삼아 넣어.” 하는 말에 찍소리 못하고 고맙다는 인사말을 건네고 배낭에 넣었다.

양파를 수확하는 사람들

석산 마을 담벽에는 횃불과 농기구를 든 농민군과 칼을 든 일본군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을 묘사한 벽화였다. 마을회관 옆에는 '동학혁명 해주최씨 삼의사 추모비'가 세워져 있었다. 동학의 접주였던 이들은 동학군을 양성하고, 전투에 참여하여 용맹을 떨쳤다. 그러나 밀고로 체포되어 고문당했으며, 처형되고 말았다. 후손들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사람들에게 땅을 팔지 않고 굳세게 마을을 지켰다고 했다.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이 그려진 벽화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애비야 나는 간다.'

김지하 시인의 <황톳길>이 떠오른다. 구불구불 황톳길, 붉은 길은 구릉 언덕을 넘고 있었다. 길옆의 황토밭에는 일찍 심은 호박이 벌써 노란 꽃을 피우고 있었다. 고난의 역사는 현재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된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황톳길을 넘었다.

멋진 소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끌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15세기 담양 전 씨가 개척한 감정마을에서 당산영감으로 보호하고 있는 수령 350년 곰솔이었다. 해안가에서 느티나무나 팽나무 당산나무는 많이 보았지만, 소나무 당산나무는 해파랑길 기장 죽성에 이어 두 번째였다. 전염병이 돌았을 때 주민들이 정성을 다해 치성을 올렸더니 마을이 평안해졌고, 그 후 마을에서 신목神木으로 여기고 매년 당산제를 올리고 있다고 했다. '외지인은 곰솔나무에 치성을 올리는 행위를 엄금합니다.'라는 배타적 안내문이 흥미로웠다.

곰솔 당산나무

비슷한 풍경의 황톳길은 계속 이어졌다. 마을을 또 지나고, 양파밭을 지나고 또 양파밭을 지났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황톳길에서 서서히 지루함도 느껴졌다. 5월의 태양은 제법 따가웠고, 기온도 올라 더위가 느껴질 정도였다. 마침 언덕배기 황토밭 가장자리 숲 아래 잘 단장한 무덤이 있어 배낭을 내리고 편안하게 앉아 목을 축이면서 에너지를 보충하고, 지나온 구불구불 황톳길을 내려다보면서 한참을 쉬었다.

가도가도 황톳길

서해랑길은 바닷가 아름다운 숲길로 나를 안내했다. 숲길은 평탄했다. 포장하지 않은 흙길이었고, 따가운 햇살을 막아주는 그늘 길이라 좋았다. 왼편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걸었다. 상쾌한 바닷바람과 상큼한 숲 향기가 느껴졌다. 숲속 새소리도 반가웠고, 짝짓기 놀이에 빠진 잠자리들의 비행도 흐뭇했다.

바닷가 임도의 나무 벤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나무 벤치가 놓여 있었다. 벤치 앞에 무성하게 자란 풀들을 정리하고 벤치에 앉았다. 가까운 바다는 회색이었고, 먼바다는 청색이었다. 지금까지 봐온 서해바다 풍경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바다의 색감은 달랐지만, 남해바다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오히려 푸르기만 한 남해바다보다 더 편안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개척입향(開拓入鄕) 마을 지나 도리포 해수욕장, 다리 건너면 영광 땅

프리미엄 명품 곱창김만 생산하는 청년 여성의 자부심

[윤한철의 서해랑길 13]

숲길이 끝나는 곳에 절이 있었다. 그동안 교회 건물만 많이 봐오다가 절집을 보니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하기도 해서 안으로 들어가 이리저리 살피니 보살 한 분이 어떻게 왔냐고 물어왔다. 교회가 많은 지역인데 신도는 얼마나 되냐고 되물었더니, 지난 초파일에 300여 명이나 다녀갔다고 했다. 그러면서 인근에 절이 3곳이 더 있다고도 했다.

낮은 구릉 아래 아늑하게 자리 잡은 마을 안 길을 지났다. 자연부락치고는 호수가 적지 않았다. 들이 내려다보이는 명당자리에 제법 규모가 큰 기와집도 있었다. 마을의 역사와 기품이 느껴지는 마을이었다. 조선 중기 사화(士禍)로 정국이 혼란스러울 때 사화를 피해 경기도 평택에서 함평으로 이거(移居)했다가 입향(入鄕)한 함평이씨가 개척한 마을이었다. 마을 어귀 안내판을 보니 마을 앞 산이 비파를 타는 형상이라 슬산(瑟山)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했다.

삼강공원에 도착했다. 팔작지붕을 한 작은 기와집 두 채가 눈길을 끌었다. 마치 미니어처 기와집처럼 보였다. 안내판에는 마을 지도와 함께 충절이 깃든 역사, 문화마을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팔작지붕 기와집은 광산 김씨 충렬문(忠烈門)과 칠효열각(七孝烈閣)이었다. 임진왜란 때 광산 김씨 일족이 배를 타고 피난하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이곳에 상륙해 집성촌을 이루었고, 병자호란 때 큰 공을 세운 아들이 매화나무를 많이 심어 마을에 매화 향기가 그윽하여 분매동이라 불렸다고 했다.

광산김씨 충렬문과 효열각

마을의 유래를 알 수 있는 안내판이나 비석을 읽으면서 걷는 것도 흥미로웠다. 대부분 조선 중기 사화나 임진왜란을 피해 들어와 마을을 개척한 것 같았다. 당시 숲이 우거지고 풀이 무성한 황무지를 개척하여 마을을 일구었을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산림천택은 백성과 공유한다(山林川澤 與民共之).’라는 정책을 펴 산림 천택(川澤)의 개발을 억제해 왔다. 고려 말에 무신 세력과 권세가가 산림 천택까지 점거해 백성을 괴롭힌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조선 중기 이후, 그 정책은 서서히 완화되었고, 임진왜란으로 전 국토가 황폐하게 되자 나라에서 개발을 장려하였다. 이 시기에 전국적으로 개간, 간척이 많이 일어났다. 임진왜란 후, 나라 살림이 매우 어려웠을 때 백성들이 스스로 황폐해진 국토 재건에 앞장선 셈이었다. 전쟁의 참화를 겪고도 조선이 망하지 않고 일어선 것은 개발에 앞장선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어떻게 보면 황무지를 개척해 마을을 일군 사람들은 조선의 디벨로퍼(developer), 개척자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지 않을까 싶다.

개척입향(開拓入鄕)한 마을은 자연스레 동족 중심의 마을이 되었을 것이고, 종중을 중시하고 조상에 대한 제사를 함께 지냄으로써 마을의 단결을 과시하고 그러한 전통을 자랑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이러한 풍습이 널리 형성된 데는 조선 후기 가부장적 유교문화의 확산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씨족산소 세장산(氏族山所 世葬山) 비석이 다른 지역에 비해 유난히 눈에 많이 띄었던 것도 이런 연유가 아닌가 싶었다.

도리포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도리포는 해제 반도 북쪽 송곳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곳으로, 다리 하나만 건너면 영광 땅이다. 해변을 따라 길게 해송 방풍림이 조성되어 있었고, 좁고 긴 흰 모래 백사장이 반짝이고 있었고, 잿빛 뻘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먼바다에는 지주식 김 양식장이 마치 검은 성벽처럼 바다를 가로막고 있었다. 마침 토요일 오후를 맞아 오토캠핑 나온 사람들은 텐트 그늘 아래서 고기를 굽고 맥주를 마시며 야영을 즐기고 있었다. 철없는 아이들은 뻘밭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장난치며 놀고 있었다.

도리포 해수욕장 앞 지주식 김 양식장

전화로 예약한 민박집으로 갔다. 주인은 나이가 지긋한 분이었다. 자연스레 마루에 걸터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젊을 때 삼치를 잡아 일본에 수출했고, 30대 후반에는 물고기를 수집해서 서울에 파는 유통업을 하여 원 없이 돈을 벌었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서울로 보낸 물고기가 되돌아오고, 수집한 물고기는 판로가 막혀, 결국 큰 손해를 보았다고 했다. 처음에는 이유를 알지 못했는데,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서울로 가는 교통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는 하는 일마다 운이 따르지 않았다고 덤덤하게 얘기했다. 공교롭게도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44년이 지난 518일이었다. 대학 4학년 때, 그날 새벽 계엄군의 살벌한 감시 속에 쫓기듯 기숙사를 빠져나온 기억이 떠올라 울컥했다.

곱창김 카페

민박집 주인이 추천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눈길을 끄는 담미소라는 카페에 들어갔다. 특이하게 커피와 함께 김이 나왔다. 김을 생산하는 공장에서 홍보 겸 운영하는 카페였다. 담미소 대표는 대학에서 식품가공학을 공부한 청년 여성이었다. 프리미엄 명품 곱창김을 생산한다고 했다. 갯벌 바다에 대나무 지주를 박아 생산한 김은 구불구불 곱창처럼 생겼다고 곰창김이라 부른다고 했다. 도리포 곱창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정화 기능이 뛰어난 갯벌 그리고 미네랄이 풍부한 황토 바닷물에서 생산하여 깨끗하고 영양이 풍부하다고 자랑했다. 황토 지역이다 보니 여름이면 발생하는 녹조현상도 없다고 했다. 1% 최고 명품 곱창김을 생산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입맛을 사로잡겠다는 당당함이 멋졌다.

도리포 숲길

이른 아침 새소리를 들으며 숲길로 들어섰다. 서해랑길은 무안군의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 탐방로와 함께 하고 있었다. 울창한 활엽수 숲이 하늘을 가리고 있고, 무성하게 자란 풀이 가는 길을 방해했다. 간간이 거미줄이 얼굴에 감겨 귀찮았지만, 아침 산길은 상쾌했다. 숲길은 평탄하고 꽤 길었다. 언뜻언뜻 좌우로 바다가 보였고, 두견이 울음소리도 슬프게 들렸고, 여전히 새들은 나를 따라온 듯 가까운 숲에서 노래하고 있었다. 먹이인 벌레의 활동이 뜸한 아침, 왜 새들은 일찍 일어나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 새벽잠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그냥 심심해서일까.

무안갯벌생태랜드 데크길

무안갯벌생태랜드에 도착했다. 그냥 호기심이 일어 갯벌 위 나무데크 길을 따라 먼바다 안쪽까지 갔다 왔다. 휴일을 맞아 오토캠핑장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쌩쌩이를 타며, 그냥 신나게 놀고 있었다.

정자 쉼터에 편안하게 앉아, 노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우유를 마시고 카스테라 빵을 먹었다. 그리고 석산 마을에서 할머니로부터 받은 양파 반쪽을 생으로 먹었다. 양파는 그렇게 맵지 않고 오히려 단맛이 느껴져, 그냥 먹을만했다.

무지개다리와 돌머리해변, 그리고 함평만의 다양한 풍경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 선생님노래비 지나 향화도항으로

[윤한철의 서해랑길 14]

65, 용산에서 KTX를 타고 광주 송정역에 내려 버스를 갈아탄 다음 함평에서 또 택시를 타고 돌머리 해변에 도착했다. 지난달 무안과 신안 여행에서 느낀 색다른 풍경의 짜릿함이 아직 가시기 전이라 이번 여행에서는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가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나를 제일 먼저 맞이한 것은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다리였다. 바다 멀리까지 뻗은 컬러풀(colorful) 무지개다리는 젊은이들의 SNS 사진 명소로 각광받을 듯했다.

돌머리해수욕장 무지개다리

백사장은 넓고 평탄했다. 바다는 얕아 보였다. 산책하듯 백사장을 걷는 사람들이 보였고, 바다 가운데 접이식 의자에 앉아 물멍에 빠진 다정한 연인의 모습도 보였다. 백사장은 걷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발바닥에 느껴지는 촉감이 너무 좋았다. 적당히 단단하고 기분 좋게 부드러웠다. 가는 모래와 진흙 뻘이 절묘한 비율로 뒤섞인 모래사장이었다. 동해안 푹푹 빠지는 모래 해변을 걸을 때와도 달랐고, 남해안의 울퉁불퉁 몽돌 해변을 걸을 때와도 달랐다. 서해안에서만 만날 수 있는 느낌 좋은 해변이었다.

돌머리해수욕장

등 뒤로 정오의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걸었다. 서쪽에서 부는 바닷바람은 시원하게 왼쪽 어깨로 파고들었다. 멀리 주포 한옥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한옥마을은 한적하고 깨끗했다. 일주일 살기에 딱 좋을 듯해서 전화를 걸어봤더니, 휴일 예약이 없으면 가능하다고 했다. 전체 한옥 50채 중 39채가 펜션으로 운영되는데, 휴일이면 거의 다 찬다고 했다.

주포 한옥마을

바다 가운데 긴 막대를 꽂아 만든 원형의 설치 예술품 같은 낙지 산란장. 바닷물에 반쯤 잠겨 묘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는 폐()선박들. 바닥이 드러난 뻘밭 물길에 설치한 정치망 그물. 그리고 이러한 풍경을 앵글에 담으려고 카메라를 설치하고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

폐선박

정치망그물

함평만의 다양하고 독특한 풍경을 눈요기 삼아 즐기다가 밤꽃 향기 은근한 낮은 고개를 넘었다. 간척지 넓은 들이 나타났다. 길가에는 청사료 더미가 마치 성벽처럼 쌓여 있었고, 들에는 거대한 딱정벌레처럼 생긴 트랙터가 천천히 모내기 논 만들기 써래질을 하고 있었다. 간척지 제방길에 올랐다. 듬성듬성 피어있는 개망초 향기를 느끼면서 걸었다. 노랗고 흰 달걀처럼 생긴 꽃 무더기는 옹기종기 모여 조잘조잘 밝게 웃는 예쁜 아이들 같았다. 두세 마리 나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장난치듯 날았다. 직선의 제방길은 길고 멀었지만, 망초꽃과 눈 맞추고 이리저리 나비를 찾으며 지루한 줄 모르고 걸었다.

간척지 제방길

해당화 피고 지는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 노래비를 지나고 새끼 바지락을 뿌리는 어촌 체험 마을 사람들과 짧게 이야기도 나눴다. 멀리 칠산대교가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바다 건너편으로 지난달 걸었던 해제 반도의 숲길 얕은 산 그리고 갯벌 체험장도 어렴풋이 눈대중되었다. 다리 하나 사이에 둔 함평 바다와 무안 해제 바다는 너무 다르다고 생각하며 해안 길을 계속 걸어 칠산대교 아래 향화도항에 도착했다. 칠산대교를 건너면 바로 지난달 하루를 묵었던 해제면 도리포다.

섬마을선생님 노래비

하루 여정을 마칠 시간, 그런데 향화도항에는 숙소도 식당도 없었다. 차라리 도리포로 건너가 지난달 묵었던 민박집에서 하루를 묵을까, 아니면 염산면 소재지로 갈까, 고민하고 앉아 있는데 낯선 분이 말을 걸어왔다. 혼자서 걷는 내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IMF 때 사업을 접고 고향에 내려와서 낙지잡이를 하는 어부였다. 하루에 많이 잡을 때는 600마리까지 잡았다고 자랑했다. 염산면을 거쳐 영광읍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염산면으로 가기로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명함을 건네받고 헤어졌다.

1호 순교사적지 염산교회 지나서 설도항 아침 풍경 만나다

뜨거운 태양 아래 서해랑길 36코스 칠산 갯벌 300리 길

[윤한철의 서해랑길 15]

이른 아침 마침 문을 연 식당이 있어 아침밥을 먹고, 산책하듯 걷다가 염산교회로 들어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6.25 전쟁 때, 교인 77명이 퇴각하지 못한 공산당원들에게 순교한 한국기독교 순교사적지 1호로 지정된 교회였다. 숱한 한국전쟁 참화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었건만,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는 점이 더 놀랍기도 했다.

염산교회, 한국기독교 순교사적 1

착잡한 마음속에 설도항에서 서해랑길을 다시 만났다. 설도항은 바닷물이 빠져나가, 뻘 위에 배들이 정박하고 있었고 검은 갯벌 사이로 은빛 좁은 물길이 길게 뻗어 있었다. 부두에는 여인들이 막 들어온 배에서 내린 새우를 가리고 있었고, 생선 가게 바닥 빨간 고무다라이에는 가오리, 갑오징어, 꽃게... 서해 바다의 싱싱한 활어가 팔딱거리고 있었다. 까아까아, 먹이 냄새를 맡은 갈매기들도 어지럽게 배 주위를 날고 있었다. 전형적인 작은 어촌 마을의 아침 풍경이었다.

설도항, 새우 가리는 여인들

다시 간척지 긴 제방길에 올랐다. 오른편 넓은 간척지 논에는 이양기가 한창 모심기 중이었고, 왼편으로는 갯벌이 지평선인지 수평선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넓게 펼쳐져 있었다. 양식장을 지키는 개 3마리가 무섭게 짖어댔다. 이 녀석들은 대개 무시하고 그냥 지나면 제풀에 조용해진다. 제방 시멘트 바닥에 뱀 한 마리가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냉온 동물인 뱀은 아침나절 체온을 높이기 위해 햇볕을 쬐는데, 그냥 몸 위로 넘고 지나가도 꿈쩍을 하지 않는다.

모를 내기 위해 써래질하는 트랙터

제방길 아카시 그늘 아래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어르신을 만났다. 갯벌 저 멀리서 부인이 방게를 잡고 있었다. 여름 반찬 장조림용으로 잡는데, 갯벌이 깊어서 아무나 못 잡는다고 했다. 이 지방에서는 유난히 큰 한쪽 집게발을 들고 다니는 방게를, 꼭 보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똘마니 같다고 해서 충성 게라 부른다고 했다. 갯벌에 칠면초처럼 생긴 붉은 염초가 있어 물어보니 행자(해홍)라고 했다. 봄에 나는 행자 나물은 별미라고도 했다. 너른 들판은 일제강점기 뻘밭 작은 섬 사이를 막아 간척한 땅이며, 해방 후에도 계속해서 간척이 이루어졌고, 한때 해제 반도 도리포와 영광 염산 사이를 막아 간척하는 것을 논의했으나 후세대를 위해 갯벌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판단에 다리를 놓았다는 얘기도 들려줬다.

행자 뻘밭

나무 한 그루 없는 간척지 바닷길을 계속 걷고, 염전 사잇길을 걷고 또 걸었다. 서해랑길은 칠산 갯벌 300리 길을 따라 이어졌다. 6월의 뜨거운 태양을 피할 수 없어 인내하며 걸었다. 왜 서해랑길 36코스는 걷기 힘든 바닷길만 고집하는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숲길도 걷고, 마을 길도 걷고 했으면 좋으련만. 그래도 인내하며, 식당이 있는 펜션 마을까지 갔는데 아예 문이 닫혀 있었고, 산자락 모퉁이를 돌아 백바위 해수욕장까지 갔건만 식당은 영업하지 않았다. 식수마저 떨어졌는데, 어떻게 하지 망연해졌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중년의 부부가 여행 삼아 운영하는 미니버스 카페가 있어 생수 한 병과 두부과자 한 봉지를 사서 소나무 숲에서 더위를 식히며 피로를 달랬다.

불갑천 행자

수도 없이 많은 풍력발전기가 서 있는 들판이 나타났다. 바람이 많은 산 위나 바다 위가 아니라 들판 한가운데, 어림잡아 100개쯤 되는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는 풍경은 이채로웠다. 들판 너머 산 아래, 목적지 백수읍도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들판 가운데를 흐르는 불갑천을 따라 걸었다. 진흙 뻘이 쌓여 있는 불갑천 풍경 또한 이채로웠다. 까만 진흙 뻘 위에 붉은 염초가 자라고 있었다. 남파랑길에서 많이 봐온 순천, 보성, 강진의 하천 하구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곳은 녹색으로 깔맞춤한 갈대가 생기발랄하게 군무를 추는 무희들 같았다면, 이곳은 붉은 씨스루 염초 옷을 입고 몸매를 뽐내는 검은 피부의 아름다운 모델 같았다. 머리 위로는 윙윙 풍력발전기가 돌아가고, 몸은 지치고 정신마저 혼미해져 갔다. 그런데 검은 불갑천은 너무나 매력적이면서 관능적이기까지 했다.

오후 4시쯤 서해랑길 36코스 종점에 도착했다. 마을 쉼터에서 예약한 숙소로 전화하였더니 고맙게도 픽업하려 오겠다고 했다. 먼저 차를 한잔하고 숙소로 가는 게 어떻겠냐고 하기에 흔쾌히 좋다고 했다. 찻집인 줄 알았는데 거주하는 멋진 한옥이었다. 마루에는 부인이 찾아온 손님과 다과를 나누면서 대화 중이었다. 마당에는 잔디가 잘 관리돼 있었고, 꽤 넓은 정원에는 정원수와 꽃들이 잘 어우러져 있었다. 주인의 정성 어린 보살핌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집주인은 12년 전에 귀촌한 부부였다. 순천이 고향인데, 먼저 구례로 귀촌하였다가 마음에 드는 한옥 매물이 나와 이곳으로 옮겼다고 했다. 발효차가 나왔다. 직접 재배하여, 덖고 발효한 차라고 했다. 내 고향이 차의 고장 하동이라 하니 더 반가워했다. 귀촌 후 남편은 농어촌 휴양마을을 운영하고, 부인은 천연염색, 다도 체험 등 지역 문화 활동을 하고 있었다. 워낙 텃세가 심한 지역이라 정착하기가 쉽지만은 않았다고도 했다.

오유당

오유당(悟有堂)이라는 이름까지 있는 한옥은 100년의 역사를 지닌 이 지역 뼈대 있는 집안의 종택이었다. 6.25 , 사정상 후손이 살 수 없게 되었고, 매수자가 없는 집을 적당한 가격에 매입해 들어왔다고 했다. 차를 마시고, 또 찻잔이 비면 따라주는 차를 계속 마시며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이 집을 다녀간 손님 중에는 계속 연락하고 서로 방문까지 하는 부부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 집의 내력과 지역의 감춰진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인천상륙작전 후, 지역에 남은 좌익들이 지역주민들을 대량 학살하였다고 했다. 6.25 6만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는데, 영광군에서만 2만여 명이 죽었고, 특히 백수읍 일대에서 그 정도가 심했다고 했다.

염산교회 교인 77명이 지역 좌익에 의해 무참히 학살됐다는 안내문을 보고 전율을 느꼈는데, 백수지역의 참상은 듣고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전쟁의 흔적 보여주는 110년 된 백수읍교회와 열부 순절지

베를 짜기 위해서가 아니라 떡을 만들려고 키우는 모시풀

[윤한철의 서해랑길 16]

아침 일찍 오유당(悟有堂)에 다시 갔다. 고택 사진을 찍은 다음, 간 김에 오래됐다고 들었던 백수읍교회를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고택의 주인은 정원에 물을 주고 있었다. 반갑게 아침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백수읍교회 안내까지 받았다. 1903년도에 세워진 교회였다. 교회 본당 옆에는 선교 110주년 기념탑이 세워져 있었고, 많은 순교자가 나왔다는 안내문이 있었다. 차 한잔하고 가라는 살가운 말을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사양하고 마을을 빠져나왔다.

백수읍교회 선교 110주년 기념탑

찻길을 버리고 들길로 들어섰다. 들은 비옥하고 넓었다. 뒤돌아보니 산자락이 물결치듯 흘러내린 아늑한 곳에 자리 잡은 마을은 평온했다. 일찍부터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고, 일제 강점기 때 어느 지역보다 일본 유학생이 많았다고 들었다. 평온한 마을에 전쟁의 끔찍한 참화가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러한 역사를 전혀 몰랐다는 것 또한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비극의 판도라 상자, 사람들은 열기를 꺼렸던 것일까.

빨치산의 주() 활동 무대였던 지리산 남부 능선 자락 들녘, 고향 마을이 떠올랐다. 그곳에서도 내가 모르는 크고 작은 비극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났을 것이다. 러시아 혁명 당시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눈 소설 <고요한 돈강>도 생각났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에 읽은 중편 소설의 내용이 자꾸만 오버랩되었다.

밤이 되자 느닷없이 한 무리의 무장 부대가 마을로 스며들어 왔다. 괴한들은 마을로 들어오자 집집마다 짝을 지어 다니며 젊은 남자들은 불러냈다. 우리는 경찰들인데 마을이 안전해질 때까지 배로 함께 피신을 해가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마을 남자들이 옳다구나 하고 그들을 따라나섰다. 동네 어귀도 빠져나가기 전에 무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괴한들은 지방 공비들이었다.

<소문의 벽, 이청준>

들길을 지나 꽤 넓은 수로 옆길을 따라 내려갔다. 수로에서 보는 풍경은 그림 같고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물길은 아침 햇빛을 받아 비늘처럼 일렁거렸고, 멀리 풍력발전기는 흰옷 입은 거인처럼 우뚝 서 있었다. 짙은 초록의 수초들이 듬성듬성 수로를 점령하고 있었고, 군데군데 똑같은 초록은 싫다고 노랑으로 탈색한 수초 무리의 반항이 있어 수로는 더 싱그러웠다. 수로를 따라 불어오는 바람 또한 상쾌했다. 이 지역은 앞 바다에 섬이 없어 바람길에 막힘이 없고, 그래서 양질의 바람이 불어온다고 했다.

백수들 풍력발전기

수로 끝에서 다시 서해랑길을 만났다. 오른편으론 백수 들녘, 왼편으로는 백수 앞바다를 바라보면서 제방길을 제법 걸었다. 참조기연구센터를 지나니, 서해랑길은 해안 길 공사로 인해 폐쇄하니 지방도로로 우회하라는 안내판이 나타났다. 백수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낮은 중턱 길을 따라 걸었다. 쭉 직선의 평탄한 해변 길과 들판 길을 걷다가 사흘 만에 만나는 곡선의 길이었고, 약간의 오르내리막이 있었지만, 오히려 편안했다.

느티나무 당산목

아담한 마을을 지났다. 마을에는 오래된 느티나무숲이 있었고, 외경스러운 느티나무 당산목이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모시풀을 재배하는 밭도 보였다. 요즘도 모시 베를 짜나, 하는 생각을 하고 걷는데 모시떡 판매장이 나타났다. 껍질로 모시 베를 짜기 위해서 모시풀을 재배하는 것이 아니라 잎으로 모시떡을 만들기 위해 재배하는 것이었다. ​​ ​

백수해안도로, 동해 같은 서해의 최고 해안 길이라고 새긴 표지석이 나타났다. ‘자연경관 최우수상을 수상한 길이라고 자랑하는 안내문도 있었다. 뭐가 있을까, 약간 오르막길을 기대하며 걸었다. 그런데 도보 여행자에게 썩 친화적인 길은 아니었다. 차도 갓길이 인도였고, 그마저 걷기에 좁았다. 벚나무 가로수가 바다 전망을 가로막았고, 그나마 가로수 사이 바다 풍경은 동백나무가 또 막고 있었다. 경관에 대한 기대가 컸던 탓일까, 전망 좋은 자리에 들어선 펜션, 카페도 풍경과 조화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정유재란 당시(1597) 함평군 월야면 월아리 등에 살던 동래정씨와 진주정씨 문중의 부녀자들이 절개를 지켜 죽은 곳이다. 이들은 전쟁을 피해 묵방포까지 피난하였으나, 결국 왜적에게 잡히자, 대마도로 끌려가 치욕을 당하느니 의로운 죽음을 결심하고 모두 칠산 앞 바다에 몸을 던졌다.

<영광 정유재란 열부 순절지 안내문>

정유재란 열부 순절지 비각

망망대해가 펼쳐진 바닷가 절벽 끝에 있는 비각의 사연이다. 얕은 담장 안 팔작지붕 아래 감춰놓은 듯 세워져 있는 작은 비각 둘은 의로운 죽음을 선택한 여인들의 심정을 잘 보호하고 있는 듯했다. 도드라지지 않으면서 품격있게 서 있는 두 비각의 모습에서 절박한 순간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욕되게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의로운 분노에서는 참혹한 전화 속에서 조선을 지켜낸 백성들의 진실한 모습이 느껴지기도 했다. 자랑처럼 우뚝 세우지 않고 다소곳이 앉은 듯 비각을 세운 후손들의 마음 씀도 참 갸륵했다. 무엇보다 탁 트인 바다와 조화롭게 자리 잡은 비각의 풍경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벼랑 끝 바위틈에 무당이 굿을 하고 있었다. 한풀이 굿인지, 소원풀이 굿인지. 치 떨며 욕됨을 피한 여인들의 한 맺힌 원한의 기운을 받고자 함인가. 바다를 보고 앉아 무언가 빌고 있는 무당의 모습에는 간절함이 절절했다.

괭이갈매기 스카이워크

나무 계단 길을 따라 걸었다. 스카이워크에서 보는 서해바다는 막힘이 없었다. 오로지 하늘과 바다만 보였다. 수평선을 사이로 옅은 청색은 하늘이요, 무거운 청색은 바다였다. 스카이워크 끝에는 비상하는 괭이갈매기 조형물이 있었고, 사람들은 배경 삼아 사진을 찍고 있었다. 마침 가까운 곳에 면옥 집이 보였다. 한여름 못지않은 더위 탓인지, 냉면이 당겼다. 불고기를 곁들인 물냉면을 음미하며 천천히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