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문학 기행 『서울 이야기』 - 이광수와 홍지동 산장/학고재(1/4)
성북동에 상허 이태준의 수연산방이 들어설 즈음, 건너편 쪽 산 중턱에는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이 들어선다. 북향집이었다. 세간에는 만해가 총독부를 보기 싫어 그렇게 터를 잡았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실제 주변을 살피면 달리 방향을 잡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서울의 동북쪽 성북동 골짜기에는 그 밖에도 안서 김억, 일엽 김원주, 팔봉 김기진, 춘성 노자영, 홍효민 등 여러 문인이 살았다. 「성북동 비둘기」의 시인 김광섭이 성북동에 깃든 것은 훨씬 훗날(1961)의 일이다.
서울의 서쪽 세검정 일대에도 그곳 못지않게 여러 문인이 살았다. 빙허 현진건이 금세 눈에 띈다. 그는 1936년 『동아일보』 일장기 사건으로 옥고를 겪고 나서 곧바로 자하문 밖 부암동 (325번지 2호)에 자리를 잡았다. 거기서 양계나 하면서 살겠다는 거였다.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형 현정건이 붙잡혀 옥고를 치르고 나오자마자 곧 죽는데, 형수 윤덕경도 뒤를 이어 자결했다. 그런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저도 다시 영어의 몸이 되었던 것이니, 이제 닭이라도 키워야 세상의 시름을 견딜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러나 그가 키운 닭들은 운이 좋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벗들이 술병을 차고 몰려오니, 달걀을 낳으면 술안주요, 병든 닭은 모조리 복놀잇감이었다. 월탄 박종화, 노작 홍사용 등 문인들이 언론계와 예술계의 여러 벗과 함께 자하문 고개를 넘었다. 빙허도 동아일보사를 아직 다닐 때에는 매일같이 그 길을 넘어 황토마루까지 오가곤 했다. 그 중간 담피골(현당 주동)에 치롱 집이라고 부르던 술맛 좋은 술집에서 어젯밤 술이 덜 깬 빙허가 그곳을 지나다가 아침부터 부르자, 주모와 사환들은 빙허의 주정이 무서워 신발을 부엌에 감추고 벽장으로 숨어버렸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자 빙허가 안으로 들어갔고, 부엌에서 신발들을 찾아냈다. 화가 난 빙허는 아무 소리 없이 그 신발들을 죄 우물 속에 던져버렸다.
세검정 개천 건너편 산자락에는 춘원 이광수가 소리 없이 찾아든다. 1934년 7월의 일이었다. 그의 나이 마흔둘. 그해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슬픈 해이기도 했다. 연초, 허영숙과 사이에서 낳은 아들 봉근이를 갑자기 발병한 패혈증으로 잃고 만 것이다. 춘원 부부의 충격은 이루 형언키 어려울 정도였다. 춘원은 그게 자기의 죄, 자기의 업보라고 생각했다. 처음 허영숙과 결혼해서는 5년이나 아무런 소식이 없다가 마침내 낳은 아이였다. 그때 춘원은 죄 많은 몸이 새로 오시는 귀한 손님을 온전히 받을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부모가 짝지워준 첫 번째 아내 백혜순을 버린 일, 신여성 허영숙과 벌인 사랑의 도피 행각, 그로 인해 상하이 한인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일, 도산의 뜻을 저버리고 귀국한 일, 변절자라는 딱지, 그리고 「민족개조론」과 「민족적 경륜」(1924) 필화, 그 밖에도 꼽을 허물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조부와 부모가 못나시기는 하였어도 살아생전 남에게 악한 일을 하신 적이 없어 그 덕을 제가 받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황송한 아이 봉근이가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 거였다. 하필이면 그때 춘원은 병이 도져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의 얼굴도 볼 수 없었다. 의사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제가 그 귀한 손님 곁에 있으면 부정을 탈 것 같아 황해도 안악 연등사로 정양을 떠났다. 거기서도 병이 더쳐 쉽게 거동도 못 하던 어느 날, 하필이면 궂은 비가 추적추적 오던 초겨울 날이었는데, 깊은 밤, 허영숙이 갓난아이를 업고 나타났다. 춘원은 절로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몸에 있는 눈물이 다 없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가 귀하고 귀할수록, 예쁘면 예쁠수록 삼가야 했다. 춘원은 사흘 만에 모자를 돌려보냈다. 마침 바람 없고 볕 따뜻하던 날이었다. 춘원은 산국화 많이 핀 등성이에 앉아, 아이가 주지 노장의 등에 업혀 처네를 펄렁거리며 가물가물 동구를 빠져나갈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렇게 빌었다. “내게 남은 목숨을 통 저 어린 것에게 주시옵소서.”
아이는 티 없이 잘 자랐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아이는 세상에 온 지 불과 6년 8개월 만에 도로 세상을 저버렸다. 춘원은 무덤을 쌓고 통곡했다. 세검정 홍지동에 볕 잘 드는 땅을 구했을 때, 그리고 거기에 집을 짓기로 결정했을 때, 춘원은 실은 무엇보다 참척의 슬픔을 잊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인연을 찾았다. 장산사의 사주 정세권이 그 첫 번째 귀한 인연이었다. 그는 춘원의 아내가 효자동 175번지에 허영숙산원을 지을 때 거처가 마땅치 않자 가회동 집을 빌려준 인연이 있었다. 매사 하는 일이 그처럼 시원시원한 이였다.
정세권이 조성한 북촌 도시형 한옥들. / 『서울 이야기』
정세권은 당대 유명한 부동산 개발업자였다. 도시 개발에 밀려나는 옛 고관대작이며 양반 사대부들의 너른 집과 땅을 매입해 거기에 여러 채 작은 규모의 한옥을 지어 조선 사람들의 주거 지역을 마련했다. 그 덕에 전통 한옥의 골격을 살리면서도 생활에 불편하지 않게 개량된 집들이 대거 들어서게 되었다. 북촌 가회동이 시초였지만 그곳만이 아니었다. 익선동 166번지와 33번지는 각각 왕의 종친 이해승 소유의 누동궁과 고종의 서자 완화군의 사저를, 창신동 651번지는 조병택의 대저택을 매입해 개발했다. 그때 정세권은 예컨대 이해승 소유의 익선동 166번지 1필지 땅을 무려 68필지로 나누어 개발했는데,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보는 익선동 집단 한옥 지구가 형성되었다. 말하자면 필지 분할을 통한 대규모 주택 건설이었다. 사실 1930년대에 들어서면 지난 10년간하고는 또 다르게 조선인들의 경제 상황이 악화되어, 전 같으면 서른 칸 집도 무난히 팔렸지만 이제는 고작 너더댓 칸의 집을 찾는 이들이 제일 많았다. 여유가 좀 있는 사람도 열 칸 안팎의 집을 찾는 형편이었다. 이에 따라 부동산 개발업자들도 전략을 바꾸었다. 정세권은 체부동, 계동, 재동 같은 지역에도 조선 기와집을 수많이 짓고 고치고 다듬었다. 『경성편람』(1929) 에는 그가 해마다 주택 300여 채를 신축했다고 나온다. 1934년부터는 새 건양 주택의 이름을 내걸었다. 기존 한옥의 문제점들을 파악해, 예를 들어 수도를 내부에 설치하고, 부엌 바닥에 타일을 깔거나 석탄 아궁이를 설치하고, 햇빛이 잘 드는 남쪽 면을 넓게 설계하고, 식당, 세탁장, 하수구 등을 모두 물을 사용하는 주방에 가깝게 배치하는 식으로 해서 위생적이고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점에 초점을 맞춘 것이 새 한옥의 특징이었다. 그런 작업들은 결국 일본인의 북촌 진출을 막아낸 공로로 이어진다.
이광수의 홍지동 산장. / 『서울 이야기』
그 정세권이 춘원의 홍지동 집을 짓는 역사를 총지휘했다. 바짝 깎은 머리처럼 빈틈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부리는 목수, 미장이, 도배장, 유리장, 차양장 등 모든 장색匠色도 그를 본받았다. 폐풍이 거의 없었다. 춘원은 집 짓는 현장에서 그들을 보는 걸 낙으로 여겼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일하는 손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물론 조금 못난 이도 있었고 조금 꾀를 쓰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이 두루 어울려 100일이나 힘을 합한 끝에 큰 탈 없이 마침내 집의 완성을 보게 된 거였다.
열두 간이라면 조그마한 집이언마는 나와 같이 덕과 복이 다박한 사람에게는 이 집도 과분하다는 황송한 감이 없지 아니하다. 만일 나만 능히 큰 닦음이 있을진 댄 이 조그마 한 집에도 조선의 모든 현인을 다 모을 수 있을뿐더러 세계의 모든 성현과, 널리 말하면 삼천 대천세계의 제불보살과 천인 아수라를 다 모을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인제 사십삼 세다. 하루로 말하면 오정이 훨씬 넘은 때다. 이제사 비로소 정도正道에 눈이 떴으니 늦다고 하겠지마는, 이제부터라도 불퇴전의 바퀴를 굴리고자 나는 이 집을 지을 때에 오직 감사하고 오직 경건하는 마음으로써 하였다. 내 집을 위하여 짐을 지고 나무를 깎는 이들의 무의식중에 하는 부탁 ─내게 복을 주오. 나를 고해에서 건져주오─ 하는 부탁을 분명히 들었다. 나는 이 집에서 새사람이 되지 아니하면 아니 되고 참 사람이 되지 아니 하면 아니 된다. 그렇지 못하면 나는 어언 일생을 허송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거기서 그는 새벽같이 일어났다. 그리고 밤새 제가 잠든 사이에 이루어진 우주의 놀라운 공사를 감사히 여겼다. 북극성만이 변함이 없이 한자리에 있는 것을 보았다. 동動 중의 정靜, 변變 중의 항恒, 다多 중의 일이 우주의 신비한 통일과 법을 느끼게 했다. 그는 새삼 제가 태어난 데 대해 하늘에 감사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
한국 근대 문학 기행
『서울 이야기』·『평안도 이야기』·『함경도 이야기』·『도쿄 이야기』
책 미리보기는 계속됩니다!
한국의 근대문학이 움튼 서울.
조선의 무수한 청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건너간 도쿄.
그리고 휴전선 너머 압록강과 두만강,
개마고원을 지나 백두산까지 이어지는
우리 작가들의 생생한 숨결과 뜨거운 발자취
근대 문학의 ‘장소들’,
그리고 지난날 우리가 꾸었던 ‘꿈’
욕망도 사상도 아득해진 지난 시대가
이야기꾼 김남일의 온기로 되살아난다!
근대 문학의 흔적을 따라 걸으며 길어올린 『서울 이야기』
소설가 구보 씨가 돌아다니던 종로와 청계천,
조선인 징병을 외친 이광수가 살던 북악의 산자락.
교과서 속 수많은 작가들의 황홀한 꿈과 절박한 한숨이 빚어낸
우리 문학사와 식민지 ‘경성’의 풍경.
지도에서 사라진 길, 역사와 문학과 지리를 한데 잇는 『평안도 이야기』
진달래 꽃 피고 지던 소월의 영변 약산,
이효석이 서국주의西國主義의 꿈을 키웠던 평양의 푸른 집,
김남천이 벗들과 술 마시던 성천의 눈 내리던 밤 풍경.
이제는 갈 수 없는 휴전선 너머 우리 땅과 우리 문학 이야기.
문학 작품으로 남은 북국의 자취, 글로 다시 그린 『함경도 이야기』
죄인처럼 수그리고 코끼리처럼 말이 없던 이용악의 두만강,
아직 철저한 민족주의자이던 시절
육당 최남선이 벅찬 가슴으로 올랐던 백두산,
그러나 지금은 아득히 멀어진 ‘북방’의 문학사적 복원.
‘나’와 ‘조국’을 생각하던 청년들이 헤매던 곳, 『도쿄 이야기』
나쓰메 소세키, 루쉰, 홍명희와 이광수.
메이지 유신 이후 동아시아의 제도帝都를 꿈꾸던 도쿄에서
동아시아의 다른 작가들과 함께 호흡을 나누던 우리 작가들.
싫든 좋든 도쿄를 빼놓고는 한국의 근대 문학사를 말할 수 없다.
한국 근대 문학의 영광과 좌절,
그 뒷모습을 숨김없이 찾아가는 우리 문학사의 내비게이션
지금은 가볼 수 없는 공간들이 꿈결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시간이 흘러 가볼 수 없는 한 세기 전 서울과 도쿄, 혹은 국경 아닌 국경으로 가로막혀 구경조차 할 수 없게 된 휴전선 이북의 산천. 소설가 김남일이 ‘한국 근대 문학 기행’이라는 담대한 기획으로 『서울 이야기』, 『평안도 이야기』, 『함경도 이야기』, 『도쿄 이야기』 4부작을 펴냈다. 『어제 그곳 오늘 여기』(2020)를 통해 아시아의 근대 문학 작품을 지도 삼아 서울과 도쿄, 교토와 오키나와, 사이공과 하노이, 상하이와 타이베이를 가로지른 데 이어, 이번에는 뚝심 있는 발걸음을 우리 땅으로 옮겨 오롯이 한국의 근대 문학에 집중했다. 한국 문학의 근대를 이룬 작가들이 당혹감을 떨치지 못하던 시대, 그 시절 문학의 바탕이 되고 뿌리가 된 분단 이전의 우리 땅이 대장정의 출발지이자 목적지가 되었다.
우리 문학에 대한 관심과 애정,
‘한국 근대 문학 기행’의 출발점이자 종착지
그 어느 때보다 읽을거리가 많고 콘텐츠도 풍성한 시대, 그럼에도 우리의 독서는 심각하리만큼 서구 편향적이었다. 특히나 근대 문학에 관해서라면, 이는 누구도 부정하기가 어려운 사실이다. 40년 넘게 소설을 써온 저자 김남일은 “등단 이래 수많은 외국 작품들을 읽어왔으면서도, 정작 우리 문학은 중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것들 말고는 딱히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읽은 기억이 없다”고 반성한다. ‘한국 근대 문학 기행 4부작’을 기획하게 된 배경이다. 이 시리즈는 한국의 근대 문학이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다. 처음부터 딱딱한 문학사론의 틀을 배제하고 ‘문학 기행’이라는 형식을 채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래전 문학 작품을 좌표 삼아 소설 속 도시와 촌락, 산과 들을 되짚으며 그 장면장면에 담긴 ‘사람’과 ‘삶’을 들여다보기로 작정한 만큼, 이 방대한 ‘한국 근대 문학 기행’ 역시 소설처럼 읽는 가운데서 저절로 한국 문학사의 큰 줄기를 그릴 수 있는 ‘이야기’가 되도록 의도한 것이다.
지난날 우리는 무슨 꿈을 꾸었을까?
문학 작품 속 ‘그곳’에서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살아난다
교과서에서 보고 들은 우리 문학사의 걸출한 시인과 소설가 들은 일제 식민 치하에서 오히려 지금보다 넓은 한반도를 누볐다. 언어와 정신에 대한 억압이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그들은 저 남쪽에서 기차를 타고 두만강, 압록강을 지나 백두산에 올랐고, 앞질러 천지개벽의 문명 세계를 경험한 일본인들의 틈바구니에서 꿈과 불안에 치이며 도쿄를 배회했다. 저자 김남일이 근대기 선배 작가들의 행적을 뒤따르며 그들의 작품에 몰입한 독자였던 것처럼 『서울 이야기』, 『평안도 이야기』, 『함경도 이야기』, 『도쿄 이야기』의 책장을 넘기는 독자들은 다시 그 뒤를 이어 한국 근대 문학의 현장을 누빈다.
김남일은 오래전 작가들이 풀어놓은 글줄을 속속들이 곱씹는다. 그러고는 주먹만 한 눈송이가 하늘을 채우던 북방의 눈 내리던 밤 풍경부터, 함흥과 제주에서 온 유학생이 뒤섞인 서울의 교실 풍경까지 생생하게 우리 눈앞으로 옮겨놓는다. 반 세기 넘는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은 저자는 고정된 풍경화로 그칠 뻔한 장면들을 유려하게 살아 움직이는 동영상으로 되살려냈다.
지도에서 사라진 길, 마음마저 멀어져 쉬이 갈 수 없는 곳,
그 길을 안내하는 소설가 김남일이 글로 그린 근대 풍경
‘한국 근대 문학 기행’은 한국 근대 문학의 출발지이자 보고인 서울에서 시작한다. 식민지 ‘경성’에서 개화의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내던 작가들은 소설과 시를 통해 그 시대의 언어로 세상을 그렸다. 당대의 작가들이 보여준 생활상과 시대정신은 평안도와 함경도, 지도에서 사라진 북한 지역까지 넘나들며 ‘한국 문학의 영토’가 어디까지 뻗어 있었는지를 되새기게 해준다. 분단의 세월이 길어져 ‘통일’에 대한 회의는 물론 그 의미조차 무용해지려는 때, 김소월의 영변 약산과 백석의 신의주 유동, 또 이용악의 눈앞에서 코끼리처럼 말이 없던 두만강은 어느새 활자의 박제가 되었다 해도 틀리지 않은 지경이 되었다. 저자 김남일은 이렇게 납작해진 글귀들을 풍성하게 들춰 돋운다. 행간 가득 흐르던 작가들의 호흡을 지금 우리의 호흡으로 되살려내 박동케 한다. 바다 건너 도쿄와 국경 너머 중국, 러시아까지 한달음에 오르내리면서도 지치지 않는다. 그 ‘장소들’을 찾는 발길이 바쁘지만 숨가쁘지 않고, 그곳 ‘사람들’에 머무는 눈길은 더딜수록 두근거린다. 상투어가 되다시피한 ‘길 위의 인문학’이야말로 은유가 아닌 말뜻 그대로, 김남일의 4부작 ‘한국 근대 문학 기행’을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인 셈이다.
작가 ㅣ 김남일
소설가. 1957년 경기도 수원 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네덜란드어를 공부했다. 1983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해, 장편 소설 『청년일기』, 『국경』, 『천재토끼 차상문』, 소설집 『일과 밥과 자유』, 『천하무적』, 『세상의 어떤 아침』, 『산을 내려가는 법』, 산문집 『염치와 수치』, 『수원을 걷는 건, 화성을 걷는 것이다』, 『책』 등을 펴냈고, 『민중신학자 안병무 평전』을 썼다. 이밖에 특히 아시아 문학과 신화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쓴 『어제 그곳 오늘 여기』, 『백 개의 아시아』, 『꽃처럼 신화』 등이 있다.
전태일문학상, 아름다운작가상, 제비꽃문학상 등을 수상하고 권정생 창작기금을 받았다.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을 만들었고, ‘한국과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아시아문화네트워크’ 등에서 활동했다. 현재 동료 작가들과 함께 소모임 ‘아시아의 근대를 읽는 시간’을 꾸려가고 있다.
'철학, 글쓰기, 수필론 문학기행, 작가론, 문학작품 해설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 근대 문학 기행 함경도 이야기 (2) | 2024.09.17 |
---|---|
한국 근대 문학 기행 평안도 이야기 (1) | 2024.09.17 |
한승원의 산돌 키우기 (0) | 2024.09.17 |
김유정의 동백꽃 (1) | 2024.09.17 |
이육사의 광야 (2) | 2024.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