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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글쓰기, 수필론 문학기행, 작가론, 문학작품 해설 등

한국 근대 문학 기행 평안도 이야기

by 자한형 2024.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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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문학 기행 평안도 이야기- 을밀대 체공녀/학고재(2/4)

1931529일 새벽 평양의 명승 을밀대 근처를 산보하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한 여자가 을밀대 지붕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충분히 젊은 나이였다. 까만 치마와 하얀 저고리 차림이 여염의 여자하고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더니 어느새 수십 명 한 무리를 족히 이루었다. 여자는 혹은 손가락질을 하고 혹은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향해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 번 생각한 듯 거침이 없었다. 이런 내용이었다.

 

을밀대 지붕에 올라간 강주룡. 이 일로 을밀대 체공녀라는 별명이 붙는다. / 평안도 이야기

내레 선교리에 있는 평원고무 공장의 직공 강주룡입네다. 회사 측은 이번에 돌연 불경기를 구실로 임금을 삭감하겠다고 통보해왔시오. 이는 회사 측의 일방적인 통보에 지나지 않습네다. 그렇지 않아도 쥐꼬리만 한 월급에서 도대체 무엇을 더 깎는다 말입네까? 우리는 회사 측의 삭감 조치를 받아들일 수 없습네다. 이것은 비단 우리 공장 마흔아홉 명 파업단만의 문제가 아니오. 우리가 이를 용납하면 결국 평양의 2,300명 고무 직공의 임금 식감도 불을 보듯 뻔한 일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죽기로 반대하는 것입네다. 내레 배워서 아는 것 중에 대중을 위하여서는 목숨도 초개처럼 버리는 게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거이 가장 큰 지식입네다. 이래서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에 올라왔지요. 내레 평원고무 사장이 이 앞에 와서리 임금 삭감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겠습네다. 자본가와 맞서 싸우는 노동 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네다. 그러하고 여러분, 구태여 나를 여기서 강제로 끌어내릴 생각은 마십시오. 누구든지 이 지붕 위에 사닥다리를 대놓기만 하면 내레 곧 떨어져 죽을 뿐입네다.”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금세 가까운 평양성 안에 쫙 퍼졌다. 경찰이 황급히 출동해 구경꾼들을 멀리 물리쳤다. 강주룡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지만, 결국 경찰의 손에 끌려 내려오고 말았다. 실은 경찰이 양동 작전을 써서 앞에서는 설득을 하고, 뒤쪽에서는 사다리를 대고 몰래 올라가 완강히 버티던 강주룡을 밀어버린 거였다. 그녀는 그물 위에 떨어지면서 기절하고 말았다. 528일 밤 광목 한 필을 사가지고 올라간 지 아홉 시간 만이었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처음에는 그것을 벚나무에 걸고 제 목숨 하나를 끊을 작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대로 죽으면 젊은 과부 년이 또 무슨 짓을 하다가 세상이 부끄러워 죽었나 하는 오해를 받을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이왕 을밀대까지 온 이상 아침에 사람들이 모이면 실컷 평원 고무 공장의 횡포나 호소하고 시원히 죽자고 마음을 돌려먹었다. 지붕에 올라가는 게 쉽지 않았으나 광목 끝에 무거운 돌을 매달아 지붕 위로 던졌고, 여러 번 시도 끝에 줄이 튼튼하게 걸린 것을 확인한 후 가까스로 뜻을 이룰 수 있었다. 강주룡은 경찰에 체포되자 즉시 단식에 돌입했고, 풀려나자 곧장 파업단 본부로 돌아갔다. 그녀는 이미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지고 있던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어 있었다.

 

1930년대 초 평양은 고무 공업의 선도 지역이었다. 특히 평양에서 만든 고무신은 평판이 좋아서 거의 전 조선으로 팔려 나갔으며, 국경 너머 만주에서도 수요는 날로 늘어갔다. 그 무렵 평양에는 총 열 개의 고무 공장에서 노동자 2,500여 명이 일하고 있었다. 이들은 매우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으며 일을 했다. 조선인 노동자의 임금은 대체로 일본인 노동자에 비해 절반 이하였고, 특히 고무 공업에서 대다수를 이루는 여성 노동자의 경우는 그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일급 30전으로 일고여덟 명이나 되는 가족을 부양하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그런데 19308월 고무 공장 공장주들은 세계적인 불경기를 이유로 2할의 임금을 내리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가난한 노동자들에게는 청천벽력과 다름없었다. 평양 고무 직공 조합은 즉시 반발했다.

 

조합 측은 저들 고주(공장주)들은 이익이 적을까 하여 공임을 내리자는 것이지만, 우리는 먹고살기 위하여 하는 일이라 하여 강력하게 맞섰다. 공장주 측에서는 직공들을 얼마든지 새로 뽑을 수 있다며 자기들의 뜻을 밀고 나갔다. 이로부터 평양 고무 공장 노동자들의 대파업 투쟁이 전개되었다. 노동자들은 그야말로 목숨을 내걸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각 공장에서 속속 해고와 동시에 신규 직공 모집이 시도되었다. 조합 측은 공장 습격 투쟁을 전개했다. 평안, 내덕, 동양, 세창 등에서 앞다 투어 습격 투쟁이 벌어졌다. 신문은 연일 평양 고무 공장 맹파소식을 굵은 활자 제목으로 뽑아 전했다. 이에 놀란 일제의 경찰은 대대적인 탄압을 전개하여 조합의 지도부를 속속 검거했다. 820일에는 시내 백선행기념관에서 열린 직공 대회를 습격하여 노동조합 간부 수십 명을 체포해 트럭에 싣고 갔다. 격분한 노동자들은 회장을 빠져나가 물밀듯 거리로 몰려갔다. 이들은 구호를 외치며 행진을 계속했고 나중에는 평양 경찰서까지 포위했다. 기마경찰대가 제지에 나서자 150여 여직공들은 오히려 붙잡힌 동지들을 구출한다고 경찰서 안으로 돌진했다.

별항 보도한 바와 같이 대회에 모였던 고무 직공 파업단과 형사와 격투가 일어나게 되자 경관 측에서는 수십 명 경관의 응원을 청하야 드디어 강덕삼 씨를 경찰서로 인치하자 일방으로는 자동차에 다른 직공을 검속하여 경찰서로 몰아가게 되니 남녀 고무 직공들은 행동을 같이하자, 우리는 다 함께 경찰서로 가자 소리를 치며 일제히 경찰서로 달려가게 되니 경찰서 앞에는 5천여의 군중이 몰려들게 되자 경찰서에서는 경찰부에 응원을 청하고 기마순사까지 출동케 되었다. 그러나 동 직공 파업단 중 여직공 150여 명이 경관의 저지도 불구하고 그대로 경찰서로 몰려들어가 통곡과 함성을 지름으로 경관은 동 여직공 150명을 그대로 훈시실로 몰아넣고 말았다는데 때는 오후 4시경이었고 이때까지 검속된 사람은 24인이었었다.

 

아래는 평양의 고무 공장 내부. / 평안도 이야기

당황한 경찰은 체포한 노동자들을 모두 풀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평양 고무 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은 1931년에도 계속되었고, 평원고무 공장 노동자 강주룡의 거사 역시 이러한 투쟁의 연장 선상이었다. 강주룡은 67일 한 잡지사 기자의 방문을 받고 그간의 사정을 상세히 들려주었다. 그때 자신이 살아온 내력도 기탄없이 밝혔다. 그녀는 평안북도 강계 출신으로 어렸을 때는 크게 어렵지 않게 살았으나, 아버지가 가산을 탕진한 후에는 먹고살 길이 막막하여 간도로 건너가야 했다. 거기서 농사를 지으면서 7년을 살았는데, 스무 살 때 통화현 출신의 열다섯 살짜리 귀여운 도련님하고 결혼했다. 부부는 동리가 다 부러워할 만큼 금슬이 좋았다. 그러나 1년 후에 큰 변동이 생겼다. 남편이 독립단에 가입했기 때문이다. 강주룡도 남편을 따라갔다. 그리하여 백광운의 독립군 부대에 들어가 약 6~7개월간 활동했다. 하지만 거추장스러워 귀찮으니 집에 가 있으라는 남편 말에 시댁으로 돌아왔다. 그런 뒤 다시 몇 개월 후 남편이 위독하다는 갑작스런 기별을 받고 곧바로 달려갔으나 그날 밤 남편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후 강주룡은 스물넷 나이에 귀국했고, 평양에 와서는 줄곧 고무 공장 노동자로 지내며 늙은 부모와 어린 동생들을 부양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체공녀로 불렀다. ‘옥상 여자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별칭이 어떤 것이든 그때부터 그 이름은 그전 해 일본에서 한 노동자가 높은 굴뚝에 올라 항의 운동을 벌여 얻은 연돌남煙突男이라는 이름에 비견되기 시작했다. 강주룡은 기자 회견 직후 평양 적색 노동조합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투옥된다. 그녀는 예심에 회부되어 근 1년간 미결수로 살았는데, 거기서도 끈질기게 옥중 투쟁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 극심한 신경 쇠약과 소화 불량 증세를 보이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하지만 생활이 너무 어려운 나머지 병원 한 번 가보지 못한 채 앓던 그녀는 1932813일 평양 서성리 빈민굴의 자기 집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래도 강주룡으로 대표되는 평양 고무 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은 1929년의 저 유명한 원산 대파업, 그리고 1930년의 부산 방직 공장 파업, 신흥 광산 노동자 폭동 등과 더불어 조선 노동 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기록된다.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던 김남천은 여름 방학을 맞이하여 귀국해서는 평양 고무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에 참가, 격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공장신문문예구락부, 그리고 희곡 조정안등을 썼다.

*

한국 근대 문학 기행

서울 이야기·평안도 이야기·함경도 이야기·도쿄 이야기

책 미리보기는 계속됩니다!

 

한국의 근대문학이 움튼 서울.

조선의 무수한 청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건너간 도쿄.

그리고 휴전선 너머 압록강과 두만강,

개마고원을 지나 백두산까지 이어지는

우리 작가들의 생생한 숨결과 뜨거운 발자취

근대 문학의 장소들’,

그리고 지난날 우리가 꾸었던

욕망도 사상도 아득해진 지난 시대가

이야기꾼 김남일의 온기로 되살아난다!

근대 문학의 흔적을 따라 걸으며 길어올린 서울 이야기

소설가 구보 씨가 돌아다니던 종로와 청계천,

조선인 징병을 외친 이광수가 살던 북악의 산자락.

교과서 속 수많은 작가들의 황홀한 꿈과 절박한 한숨이 빚어낸

우리 문학사와 식민지 경성의 풍경.

 

지도에서 사라진 길, 역사와 문학과 지리를 한데 잇는 평안도 이야기

진달래 꽃 피고 지던 소월의 영변 약산,

이효석이 서국주의西國主義의 꿈을 키웠던 평양의 푸른 집,

김남천이 벗들과 술 마시던 성천의 눈 내리던 밤 풍경.

이제는 갈 수 없는 휴전선 너머 우리 땅과 우리 문학 이야기.

 

문학 작품으로 남은 북국의 자취, 글로 다시 그린 함경도 이야기

죄인처럼 수그리고 코끼리처럼 말이 없던 이용악의 두만강,

아직 철저한 민족주의자이던 시절

육당 최남선이 벅찬 가슴으로 올랐던 백두산,

그러나 지금은 아득히 멀어진 북방의 문학사적 복원.

 

조국을 생각하던 청년들이 헤매던 곳, 도쿄 이야기

나쓰메 소세키, 루쉰, 홍명희와 이광수.

메이지 유신 이후 동아시아의 제도帝都를 꿈꾸던 도쿄에서

동아시아의 다른 작가들과 함께 호흡을 나누던 우리 작가들.

싫든 좋든 도쿄를 빼놓고는 한국의 근대 문학사를 말할 수 없다.

한국 근대 문학의 영광과 좌절,

그 뒷모습을 숨김없이 찾아가는 우리 문학사의 내비게이션

 

지금은 가볼 수 없는 공간들이 꿈결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시간이 흘러 가볼 수 없는 한 세기 전 서울과 도쿄, 혹은 국경 아닌 국경으로 가로막혀 구경조차 할 수 없게 된 휴전선 이북의 산천. 소설가 김남일이 한국 근대 문학 기행이라는 담대한 기획으로 서울 이야기, 평안도 이야기, 함경도 이야기, 도쿄 이야기4부작을 펴냈다. 어제 그곳 오늘 여기(2020)를 통해 아시아의 근대 문학 작품을 지도 삼아 서울과 도쿄, 교토와 오키나와, 사이공과 하노이, 상하이와 타이베이를 가로지른 데 이어, 이번에는 뚝심 있는 발걸음을 우리 땅으로 옮겨 오롯이 한국의 근대 문학에 집중했다. 한국 문학의 근대를 이룬 작가들이 당혹감을 떨치지 못하던 시대, 그 시절 문학의 바탕이 되고 뿌리가 된 분단 이전의 우리 땅이 대장정의 출발지이자 목적지가 되었다.

 

우리 문학에 대한 관심과 애정,

한국 근대 문학 기행의 출발점이자 종착지

 

그 어느 때보다 읽을거리가 많고 콘텐츠도 풍성한 시대, 그럼에도 우리의 독서는 심각하리만큼 서구 편향적이었다. 특히나 근대 문학에 관해서라면, 이는 누구도 부정하기가 어려운 사실이다. 40년 넘게 소설을 써온 저자 김남일은 등단 이래 수많은 외국 작품들을 읽어왔으면서도, 정작 우리 문학은 중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것들 말고는 딱히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읽은 기억이 없다고 반성한다. ‘한국 근대 문학 기행 4부작을 기획하게 된 배경이다. 이 시리즈는 한국의 근대 문학이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다. 처음부터 딱딱한 문학사론의 틀을 배제하고 문학 기행이라는 형식을 채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래전 문학 작품을 좌표 삼아 소설 속 도시와 촌락, 산과 들을 되짚으며 그 장면장면에 담긴 사람을 들여다보기로 작정한 만큼, 이 방대한 한국 근대 문학 기행역시 소설처럼 읽는 가운데서 저절로 한국 문학사의 큰 줄기를 그릴 수 있는 이야기가 되도록 의도한 것이다.

 

지난날 우리는 무슨 꿈을 꾸었을까?

문학 작품 속 그곳에서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살아난다

 

교과서에서 보고 들은 우리 문학사의 걸출한 시인과 소설가 들은 일제 식민 치하에서 오히려 지금보다 넓은 한반도를 누볐다. 언어와 정신에 대한 억압이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그들은 저 남쪽에서 기차를 타고 두만강, 압록강을 지나 백두산에 올랐고, 앞질러 천지개벽의 문명 세계를 경험한 일본인들의 틈바구니에서 꿈과 불안에 치이며 도쿄를 배회했다. 저자 김남일이 근대기 선배 작가들의 행적을 뒤따르며 그들의 작품에 몰입한 독자였던 것처럼 서울 이야기, 평안도 이야기, 함경도 이야기, 도쿄 이야기의 책장을 넘기는 독자들은 다시 그 뒤를 이어 한국 근대 문학의 현장을 누빈다.

김남일은 오래전 작가들이 풀어놓은 글줄을 속속들이 곱씹는다. 그러고는 주먹만 한 눈송이가 하늘을 채우던 북방의 눈 내리던 밤 풍경부터, 함흥과 제주에서 온 유학생이 뒤섞인 서울의 교실 풍경까지 생생하게 우리 눈앞으로 옮겨놓는다. 반 세기 넘는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은 저자는 고정된 풍경화로 그칠 뻔한 장면들을 유려하게 살아 움직이는 동영상으로 되살려냈다.

 

지도에서 사라진 길, 마음마저 멀어져 쉬이 갈 수 없는 곳,

그 길을 안내하는 소설가 김남일이 글로 그린 근대 풍경

 

한국 근대 문학 기행은 한국 근대 문학의 출발지이자 보고인 서울에서 시작한다. 식민지 경성에서 개화의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내던 작가들은 소설과 시를 통해 그 시대의 언어로 세상을 그렸다. 당대의 작가들이 보여준 생활상과 시대정신은 평안도와 함경도, 지도에서 사라진 북한 지역까지 넘나들며 한국 문학의 영토가 어디까지 뻗어 있었는지를 되새기게 해준다. 분단의 세월이 길어져 통일에 대한 회의는 물론 그 의미조차 무용해지려는 때, 김소월의 영변 약산과 백석의 신의주 유동, 또 이용악의 눈앞에서 코끼리처럼 말이 없던 두만강은 어느새 활자의 박제가 되었다 해도 틀리지 않은 지경이 되었다. 저자 김남일은 이렇게 납작해진 글귀들을 풍성하게 들춰 돋운다. 행간 가득 흐르던 작가들의 호흡을 지금 우리의 호흡으로 되살려내 박동케 한다. 바다 건너 도쿄와 국경 너머 중국, 러시아까지 한달음에 오르내리면서도 지치지 않는다. 장소들을 찾는 발길이 바쁘지만 숨가쁘지 않고, 그곳 사람들에 머무는 눈길은 더딜수록 두근거린다. 상투어가 되다시피한 길 위의 인문학이야말로 은유가 아닌 말뜻 그대로, 김남일의 4부작 한국 근대 문학 기행을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