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문학 기행 『도쿄 이야기』 - 최초의 문학동인지 『창조』 의 창조/학고재(4/4)
1919년 2월 8일은 독립운동사뿐만 아니라 근대 문학사에서도 의미 깊은 날로 기억되고 있다. 이날 조선 최초의 순문예 동인지 『창조』가 그 첫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발행 부수는 1,000부, 인쇄처는 요코하마 복음 인쇄소였다. 발행인은 주요한.
우리나라 최초의 문학동인지 『창조』 창간호(1919년 2월). / 『도쿄 이야기』
『창조』의 발행에는 평양 출신 두 청년 유학생의 의기투합이 가장 큰 동력으로 작용했다. 김동인과 주요한은 평양에서 보통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 사이였다. 둘은 나중에 일본에 가서 함께 공부하자고 약속도 했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가기 직전 (1912) 주요한이 먼저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목사인 아버지(주공삼)가 도쿄에 있는 조선 유학생 감독부의 목사로 부임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 해 동안 일본어를 익힌 후 이듬해 시로가네에 있는 미션 스쿨 메이지 학원 보통부에 입학했다. 일찍이 박영효와 이광수와 김관호(화가)가 공부한 바로 그 학교였다. 김동인은 홀로 남아 동쪽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성격이 아니었다. 내로라하는 평양 부호의 둘째 아들인 김동인에게 넘지 못할 언덕은 없었다.
그는 만 열네 살이던 1914년 숭실중학을 그만둔 채 곧장 유학을 떠났다. 고려환을 타고 현해탄을 건넌 그는 도쿄행 기차를 탈 때 반액권을 사용했다. 그만큼 체구가 작았다. 하지만 자존심만큼은 누구에 비길 바 아니었다. 그는 친구 주요한이 다니던 메이지 학원 대신 이치가야에 있는 도쿄 학원에 등록했다. 친구 밑에서 하급생 노릇을 하는 걸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아서였다. 하숙집을 나카시부야에 잡았기 때문에 꽤 거리가 멀었지만 그는 아침마다 걸어서 등교하는 고집을 스스로 즐길 줄도 알았다. 그렇게 도쿄에 가서 한 1년은 일부러 주요한을 멀리했다. 그 배경에 대해 김동인이 「문단 30년의 회고」에서 이렇게 기록을 남겼다.
동경의 요한을 만나니 요한의 말이 자기는 장차 ‘문학’을 전공하겠다 한다. 법률학은 분명 변호사나 판검사가 되는 학문이다. 의학은 의사가 되는 학문이다. 그러나 문학이란 장차 무엇이 되며 무엇을 하는 학문인지, 어떻게 생긴 학문인지, 그 윤곽이며 개념조차 짐작할 수 없는 나는 이 주요한이 나보다 앞섰구나 하였다. 소년의 자존심은 요한보다 뒤떨어지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불쾌하고 부끄러워서 학교에 임하는 데도 ‘명치학원’을 피하고 ‘동경학원’에 들
었다.
하지만 이듬해 도쿄 학원이 문을 닫자 김동인은 어쩔 수 없이 메이지 학원으로 적을 옮겼다. 그때부터 둘은 자주 만났다. 그만큼 김동인에게는 자존심 상할 기회가 는 셈이기도 했다. 특히 1918년 주요한이 제일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김동인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훨씬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제일 고등학교라니! 이광수가 그토록 부러워해서, 심지어 그들의 자살까지도 ‘찬미’했던 학교가 아닌가! 그해 입시에서 메이지 학원 출신이 재수생까지 포함해서 모두 80여 명이 응시했는데, 합격자는 단 한 사람 바로 주요한이었다. 이제 그는 김동인으로서는 감히 쳐다볼 수 없는 위치까지 달아나버린 셈이었다.
김동인
1918년 유학생들의 성탄절 집회에도 둘은 함께 참가했다. 혼고에 있던 김동인의 하숙에 돌아온 둘은 당시 유행하던 농축 커피도 마시고, 주요한이 기숙사에서 배워온 카드놀이도 함께 했다. 그러다가 어지간히 지친 둘은 배를 깔고 누웠다. 주요한의 입에서 문학잡지를 만들자는 말이 나왔다. 처음, 김동인은 무슨 말이지 싶었다. 그러다가 겨우 꺼낸다는 게 돈이 꽤 들 텐데 그런 걸 어떻게 감당하느냐 하는 말이었다. 주요한은 아주 쉽게 대답했다.
기획과 편집은 물론이고 금전적인 부분까지 죄 꿰고 있던 터였다. 주요한은 첫 호를 내는 데 200원이면 충분하다고 말했고, 그다음부터는 이전 호의 판매 성적으로 충당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다. “그러니 동인이, 창간호 비용만 대게.” 둘이 이야기를 끝냈을 때는 어느덧 동이 터올 무렵이었다. 방바닥에는 먹고 비운 농축 커피 병이며 하다 치운 트럼프 따위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둘은 쇠뿔을 단김에 빼기로 다짐했다. 김동인은 곧바로 집에 전보를 쳐서 돈 200원을 요청했다. 그런 한편 둘은 또 부지런히 동인을 그러모았다. 유학생 사회에서 이미 글로써 이름이 나 있던 이들이 대상이었다. 전영택을 비롯하여 몇이 쉽게 합류했다. 그렇게 하여 『창조』가 우리 문학사의 문턱을 성큼 넘어서게 되었다.
전영택
김동인이 이 ‘거사’에 대해 얼마나 자부심을 느꼈는지, 그는 훗날 『창조』가 “민족 4천년래의 신문학 운동의 봉화”라고 스스로 뻐길 정도였다. 전체 82쪽의 창간호에 주요한은 한국 문학사 최초의 자유시라 평가받는 「불노리」를 발표했다. 장차 “한국어의 가능성이 「불노리」만큼 최대로 확장된 경우는 찾을 수 없다”(김윤식)고까지 극찬을 받게 될 이 작품에 대해 김동인이 “요한의 많고 많은 시 가운데 『창조』 창간호에 난 「불노리」는 가장 졸렬한 시일 것”이라고 비평하는 건 꽤 훗날의 일이다.
김동인은 소설 「약한 자의 슬픔」을 냈다. “가정 교사 강엘리 자벳은 가리킴(가르침)을 끝내고 자기 방으로 들어왔다”고 시작하는 이 소설은 그 첫 줄부터가 문제적이었다. 그전에도 그는 소설을 몇 편 구상했는데 대개 일본어로 상상하던 것들이었다. 일본어는 이미 무수한 전범들이 있어서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반면 책상 맡에 앉아 조선어로 소설이라고 쓰려 하니 이렇게 첫 줄을 쓰고 나자 그 둘째 줄부터가 탁 막히는 것이었다.
이것이 나의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의 첫머리인데 거기 계속되는 둘째 구에서부터 벌써 막혀버렸다.
순 ‘구어체’로 ‘과거사’로─이것은 기정 방침이라 ‘자기 방으로 돌아온다’가 아니고 ‘왔다’로 할 것은 예정의 방침이지만 거기 계속될 말이 ‘かの女(그녀)’인데 ‘머릿속 소설’일 적에는 ‘かの女’로 되었지만 조선 말로 쓰자면 무엇이라 쓰나? 그 매번을 고유 명사(김 모면 김 모, 엘리자벳이면 엘리자벳)로 쓰기는 여간 군잡스런 일이 아니고 조선 말에 적당한 어휘는 없고…. 이전에도 막연히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본 일이 있다. 3인칭인 ‘저’라는 것이 옳을 것 같지만 조선 말에 ‘그’라는 어휘가 어감으로건 관습으로건 도리어 근사하였다. 예수교의 성경에도 ‘그’라는 말이 이런 경우에 간간 사용되었다. 그래서 눈 꾹 감고 ‘그’라는 대명 사를 써버렸다.
없는 전례前例 앞에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을 김동인의 모습이 눈앞인 듯 삼삼하다. 사실 일본의 근대 문학 역시 똑같은 과정을 겪어야 했다. 일본 최초의 언문일치 소설로 유명한 「뜬구름」(1887~1991)의 작가 후타바테이 시메이도 러시아어로 먼저 소설을 쓴 후 그것을 다시 일본어로 옮겨 쓰는 번거로운 과정을 통해서야 겨우 새로운 문체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가 센슈 학교와 도쿄 외국어학교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한 후 번역 작업도 병행했기에 가능한 시도였다.
김동인 역시 주인공이 남작에게 능욕을 당하고 버림을 받 는다는 소설의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특히 소설이라는 장르의 형식적 측면에 대해서 훨씬 크게 고민을 거듭했다. 가령 문장을 일관되게 과거 시제로 끝냈는데, 이것은 먼저 나온 이광수의 『무정』이 여전히 “~이라”, “~더라” 하는 식의 옛날 투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것이나 『창조』 창간호에 함께 낸 전영택의 소설 「혜선의 사」가 현재형 문장을 주로 택하는 것에 비기면 충분히 그 의미를 따질 만했다.
이런 식으로 김동인은 소설의 시제는 물론이고, 인칭 대명사 선정, 조선어 다운 어휘와 용어법 등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꽤나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소설은 곧 문체”라는 인식을 우리 문학 사상 의식적으로 처음 제기한 자의 영예를 그에게 부여해도 크게 어긋난 일은 아닐 것이다. 잡지의 지향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창간호의 「남은 말」은 그의 이런 자부심을 충분히 뒷받침한다.
여러분은 우리에게서 무엇을 얻으시려 하십니까. 한낱 재미있는 이야깃거립니까? 저 통속 소설의 평범한 도덕입니까? 또 혹은 ‘바람에 움직이는 갈대’입니까? 우리는 결코 도덕을 파괴하고 멸시하는 것은 아니올시다마는, 우리는 귀한 예술의 장기를 가지고 저 언제든 얼굴을 찌푸리고 계신 도학道學 선생의 대언자代言者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또 우리의 노력을 할 일 없는 자의 소일거리라고 보시는 데도 불복이라 합니다. 우리는 다만 충실히 우리의 생각하고 고심하고 번민한 기록을 여러분께 보이는 뿐이올시다.
“언제든 얼굴을 찌푸리고 계신 도학 선생”이 누군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것은 “분명히 ‘문장보국’을 모토로 한 육당, 춘원의 계몽주의에 대한 도전”(김병익)이었다. 이처럼 『창조』의 창간 이후 그의 자존심은 누구에게든 꺾일 기세가 아니었다. 김동인의 머릿속에는 이미 다음 상대가 들어 차 있었으니, 그는 바로 당대 조선 문단에서 자신이 인정하던 유일한 문사 춘원 이광수였다.
*
한국 근대 문학 기행
『서울 이야기』·『평안도 이야기』·『함경도 이야기』·『도쿄 이야기』
를 발췌한 글입니다.
한국의 근대문학이 움튼 서울.
조선의 무수한 청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건너간 도쿄.
그리고 휴전선 너머 압록강과 두만강,
개마고원을 지나 백두산까지 이어지는
우리 작가들의 생생한 숨결과 뜨거운 발자취
근대 문학의 ‘장소들’,
그리고 지난날 우리가 꾸었던 ‘꿈’
욕망도 사상도 아득해진 지난 시대가
이야기꾼 김남일의 온기로 되살아난다!
근대 문학의 흔적을 따라 걸으며 길어올린 『서울 이야기』
소설가 구보 씨가 돌아다니던 종로와 청계천,
조선인 징병을 외친 이광수가 살던 북악의 산자락.
교과서 속 수많은 작가들의 황홀한 꿈과 절박한 한숨이 빚어낸
우리 문학사와 식민지 ‘경성’의 풍경.
지도에서 사라진 길, 역사와 문학과 지리를 한데 잇는 『평안도 이야기』
진달래 꽃 피고 지던 소월의 영변 약산,
이효석이 서국주의西國主義의 꿈을 키웠던 평양의 푸른 집,
김남천이 벗들과 술 마시던 성천의 눈 내리던 밤 풍경.
이제는 갈 수 없는 휴전선 너머 우리 땅과 우리 문학 이야기.
문학 작품으로 남은 북국의 자취, 글로 다시 그린 『함경도 이야기』
죄인처럼 수그리고 코끼리처럼 말이 없던 이용악의 두만강,
아직 철저한 민족주의자이던 시절
육당 최남선이 벅찬 가슴으로 올랐던 백두산,
그러나 지금은 아득히 멀어진 ‘북방’의 문학사적 복원.
‘나’와 ‘조국’을 생각하던 청년들이 헤매던 곳, 『도쿄 이야기』
나쓰메 소세키, 루쉰, 홍명희와 이광수.
메이지 유신 이후 동아시아의 제도帝都를 꿈꾸던 도쿄에서
동아시아의 다른 작가들과 함께 호흡을 나누던 우리 작가들.
싫든 좋든 도쿄를 빼놓고는 한국의 근대 문학사를 말할 수 없다.
한국 근대 문학의 영광과 좌절,
그 뒷모습을 숨김없이 찾아가는 우리 문학사의 내비게이션
지금은 가볼 수 없는 공간들이 꿈결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시간이 흘러 가볼 수 없는 한 세기 전 서울과 도쿄, 혹은 국경 아닌 국경으로 가로막혀 구경조차 할 수 없게 된 휴전선 이북의 산천. 소설가 김남일이 ‘한국 근대 문학 기행’이라는 담대한 기획으로 『서울 이야기』, 『평안도 이야기』, 『함경도 이야기』, 『도쿄 이야기』 4부작을 펴냈다. 『어제 그곳 오늘 여기』(2020)를 통해 아시아의 근대 문학 작품을 지도 삼아 서울과 도쿄, 교토와 오키나와, 사이공과 하노이, 상하이와 타이베이를 가로지른 데 이어, 이번에는 뚝심 있는 발걸음을 우리 땅으로 옮겨 오롯이 한국의 근대 문학에 집중했다. 한국 문학의 근대를 이룬 작가들이 당혹감을 떨치지 못하던 시대, 그 시절 문학의 바탕이 되고 뿌리가 된 분단 이전의 우리 땅이 대장정의 출발지이자 목적지가 되었다.
우리 문학에 대한 관심과 애정,
‘한국 근대 문학 기행’의 출발점이자 종착지
그 어느 때보다 읽을거리가 많고 콘텐츠도 풍성한 시대, 그럼에도 우리의 독서는 심각하리만큼 서구 편향적이었다. 특히나 근대 문학에 관해서라면, 이는 누구도 부정하기가 어려운 사실이다. 40년 넘게 소설을 써온 저자 김남일은 “등단 이래 수많은 외국 작품들을 읽어왔으면서도, 정작 우리 문학은 중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것들 말고는 딱히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읽은 기억이 없다”고 반성한다. ‘한국 근대 문학 기행 4부작’을 기획하게 된 배경이다. 이 시리즈는 한국의 근대 문학이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다. 처음부터 딱딱한 문학사론의 틀을 배제하고 ‘문학 기행’이라는 형식을 채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래전 문학 작품을 좌표 삼아 소설 속 도시와 촌락, 산과 들을 되짚으며 그 장면장면에 담긴 ‘사람’과 ‘삶’을 들여다보기로 작정한 만큼, 이 방대한 ‘한국 근대 문학 기행’ 역시 소설처럼 읽는 가운데서 저절로 한국 문학사의 큰 줄기를 그릴 수 있는 ‘이야기’가 되도록 의도한 것이다.
지난날 우리는 무슨 꿈을 꾸었을까?
문학 작품 속 ‘그곳’에서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살아난다
교과서에서 보고 들은 우리 문학사의 걸출한 시인과 소설가 들은 일제 식민 치하에서 오히려 지금보다 넓은 한반도를 누볐다. 언어와 정신에 대한 억압이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그들은 저 남쪽에서 기차를 타고 두만강, 압록강을 지나 백두산에 올랐고, 앞질러 천지개벽의 문명 세계를 경험한 일본인들의 틈바구니에서 꿈과 불안에 치이며 도쿄를 배회했다. 저자 김남일이 근대기 선배 작가들의 행적을 뒤따르며 그들의 작품에 몰입한 독자였던 것처럼 『서울 이야기』, 『평안도 이야기』, 『함경도 이야기』, 『도쿄 이야기』의 책장을 넘기는 독자들은 다시 그 뒤를 이어 한국 근대 문학의 현장을 누빈다.
김남일은 오래전 작가들이 풀어놓은 글줄을 속속들이 곱씹는다. 그러고는 주먹만 한 눈송이가 하늘을 채우던 북방의 눈 내리던 밤 풍경부터, 함흥과 제주에서 온 유학생이 뒤섞인 서울의 교실 풍경까지 생생하게 우리 눈앞으로 옮겨놓는다. 반 세기 넘는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은 저자는 고정된 풍경화로 그칠 뻔한 장면들을 유려하게 살아 움직이는 동영상으로 되살려냈다.
지도에서 사라진 길, 마음마저 멀어져 쉬이 갈 수 없는 곳,
그 길을 안내하는 소설가 김남일이 글로 그린 근대 풍경
‘한국 근대 문학 기행’은 한국 근대 문학의 출발지이자 보고인 서울에서 시작한다. 식민지 ‘경성’에서 개화의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내던 작가들은 소설과 시를 통해 그 시대의 언어로 세상을 그렸다. 당대의 작가들이 보여준 생활상과 시대정신은 평안도와 함경도, 지도에서 사라진 북한 지역까지 넘나들며 ‘한국 문학의 영토’가 어디까지 뻗어 있었는지를 되새기게 해준다. 분단의 세월이 길어져 ‘통일’에 대한 회의는 물론 그 의미조차 무용해지려는 때, 김소월의 영변 약산과 백석의 신의주 유동, 또 이용악의 눈앞에서 코끼리처럼 말이 없던 두만강은 어느새 활자의 박제가 되었다 해도 틀리지 않은 지경이 되었다. 저자 김남일은 이렇게 납작해진 글귀들을 풍성하게 들춰 돋운다. 행간 가득 흐르던 작가들의 호흡을 지금 우리의 호흡으로 되살려내 박동케 한다. 바다 건너 도쿄와 국경 너머 중국, 러시아까지 한달음에 오르내리면서도 지치지 않는다. 그 ‘장소들’을 찾는 발길이 바쁘지만 숨가쁘지 않고, 그곳 ‘사람들’에 머무는 눈길은 더딜수록 두근거린다. 상투어가 되다시피한 ‘길 위의 인문학’이야말로 은유가 아닌 말뜻 그대로, 김남일의 4부작 ‘한국 근대 문학 기행’을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인 셈이다.
'철학, 글쓰기, 수필론 문학기행, 작가론, 문학작품 해설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박인환 시인 5 (9) | 2024.09.18 |
---|---|
김수영 시인은 왜 박인환 시인을 그리 혹평했나 4 (5) | 2024.09.18 |
한국 근대 문학 기행 함경도 이야기 (2) | 2024.09.17 |
한국 근대 문학 기행 평안도 이야기 (1) | 2024.09.17 |
한국 근대 문학 기행 서울이야기 1 (4) | 2024.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