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1진정성2/배철현 [ 1.2/40, 1/20]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다.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국민 한명 한명이 선진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선진국은 선진적인 개인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자신들의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한 과학기술혁명을 확신한 인간은, 정신적으로는 유아상태였다. 도덕적으로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인간이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인류 최악의 전쟁인 제 1,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원자폭탄을 만들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하여, 인류를 거의 말살직전까지 몰아넣었다. 21세기 초, 우리는 100년 전부터 더 위험한 시대에 진입하였다. IT혁명으로, 인류가 과거의 신의 영역이라고 여겼던 불멸을 추구하는 ‘길가메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자신의 생각과 다른 국가를 핵무기로 말살하기 위해 핵무기 스위치만 누르기만하면 된다. 인간의 모든 생각은 인터넷에 자국을 남겨, 인간은 디지털 숫자로 전락하였다. 만일 우리가 상대방의 다름을 인정하고 배려하며, 역지사지하는 마음을 훈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100년 전 전쟁보다 더 끔찍한 자기말살의 길에 들어설 것이다. 애벌레가 고치 안에서 일정한 시간을 보낸 후에 나비가 되듯이, 인간은 과거의 자신을 직시하고 개선하기 위해 자신이 마련한 고치에서 변신을 시도해야한다. 그 변신은 정신적이며 영적인 개벽이다. 필자는 그 개벽을 ‘승화’라고 부르고 싶다. 저는 일주일 한번, 여러분과 함께 ‘더 나은 자신’을 모색하는 글을 게재할 것이다. 여러분과 함께 일주일 전과 다른 자신의 모습을 함께 수련하고 싶다.
편견(偏見): DMZ를 떠도는 과거의 망령
거북이의 인생은 자신을 보호하는 알을 깰 때, 비로소 시작한다. 어미 거북이는 자신이 오래전에 태어난 해변으로 돌아와 뒷발로 모래를 파고 수 십 개의 알들을 낳는다. 다시 뒷발로 알을 덮고 매정하게 쩌벅쩌벅 다시 바라도 돌아가 버린다. 2달 후면, 알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수 십 개의 알들이 어미가 흘린 점막과 모래가 섞어있다. 아무도 새기 거북이가 알에서 나오도록 도와주는 이는 없다. 새끼 거북이들은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알을 깨고 나와야한다. 알은 새끼 거북이의 몸과 마음을 만든 기적의 공간이다. 그러나 새끼 거북이가 그 알에 안주하여 나오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이내 죽고 말 것이다. 자신에게 익숙한 것, 자신을 안주시키는 환경, 자신에게 편리를 제공해 주는 것은 쉽게 우리를 중독자로 만들어 고사하게 만들 것이다. 새끼 거북이는 ‘카벙클’이라는 임시치아를 가지고 있다. 카벙클은 오로지 자신을 안전하게 둘러 싼 알을 깨기 위한 도구다.
새끼 거북이가 임시치아로 자신의 보금자리를 깨야할 공간이 있다. 그것은 내부도 아니고 외부도 아닌 신비한 공간인 ‘경계經界’다. 경계는 이중적이다. 나의 한계限界를 확장할 유일한 장소이면서 동시에, 나의 월경越境이 허용되지 않는 금단禁斷의 공간이다. 인간 대부분은 그 경계 안쪽에서 안정되고 행복하다. 경계 안에서 자신이 경험한 세계를 ‘진리’라고 여기고, 그 진리를 자신의 삶을 위한 도덕의 기준 혹은 이념으로 숭배한다. 경계를 타부의 대상으로 회피하고 소외시키려는 사람들은, 일생동안 자신과 유사한 생각을 도모하는 사람들과 어울린다. 그들은 항상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며 자화자찬한다. 우리가 나이 들면 들수록 인간이 완고해 지는 이유다. 다양한 경험과 교육인 인간을 유연하게 만들고 자유롭게 만든다. 그러나 자신의 경계를 담을 높게 세워, 타인의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경험해보지도 않는 사람은 언제나 무식無識할 수밖에 없다. 무식은 어떤 사실을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새로운 정보를 수용하는데 더디거나 인색한 상태다.
경계로 진입하여, 감히 다름을 경험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이란 의미를 지닌 단어를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만들었다. 바로 ‘히브리인’들이다. ‘히브리인’들은 민족적인, 인종적인 용어가 아니라, 사회학적인 용어다. ‘히브리’Hebrew라는 단어는 ‘국경을 넘어가다’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동사 ‘아바르’abar에서 파생된 명사로, ‘국경은 넘나드는 (자유로운) 사람’이란 의미다. 그들은 ‘도시’라는 질서로 진입하지 못해, 도시를 둘러싼 성벽이나 경계를 월경하여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는 사람들이었다. 인류가 물질적인 공간이 도시(都巿를 구축하고, 서로 다른 이념을 지닌 시민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 동일한 문자文字를 창제하여 소통하였다. 문명은 도시와 문자가 낳은 자식이다. 서양문명의 한 기둥인 헬레니즘이 ‘도시문명’이라면, 또 다른 기둥인 헤브라이즘은 ‘월경문명’이다. 월경문명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열망하는 장소로 이동한다.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집, 친척, 고향을 떠나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해 타부의 공간을 넘어간다.
현대문명의 특징은 경계가 가져다는 주는 불안, 모호, 빔, 그리고 무정형이다. 현대문명은 우주탄생의 원칙인 ‘질서’가 탄생하기 이전의 상태인 혼돈을 실험하고 있다. 독일 철학자 니체는 1886년 겨울에 완성한 <선과 악의 넘어선 저편: 미래철학의 서문>(Jenseits von Gut und Böse: Vorspiel einer Philosophie der Zukunft)에서 현대문명의 새로운 문법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저편’이라고 번역된 독일어 원제목 엔자이츠Jenseits는 ‘저편’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사후세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지난 2000년 동안 서양문명을 지배해온 이분법적인 구분을 넘어선 희망을 제시한다. 그는 플라톤의 서양철학과 그리스도교 사상의 기본구조인 이원론을 넘어선 새로운 지평을 모색한다. 이 새로운 지평이 경계이며, 경계의 특징은 ‘선과 악’을 넘어선 부정형不定形의 경계다.
그 경계는 신이 우주를 창조하기 이전의 상태인 ‘형태가 없고 비어있는’ 어떤 것이다. 니체는 이 책의 첫 번째 장을 ‘철학자들의 편견偏見에 관하여’로 시작한다. 그는 철학자들의 논거가 아니라, 철학자들의 주장하는 ‘진리’는 자신들이 처한 특수한 상황에 대한 ‘생리적인 구성’일 뿐이라고 진단한다. 그것들은 객관적일수가 없고, 더욱이 상대방의 시점에서 관조할 수 없다. 그 지식은 아무리 미사여구로 그럴듯하게 치장한다 할지라도 자신이 속한 공동체 혹은 자신이라는 객체의 이익을 대변할 수밖에 없다. 니체는 근대까지의 철학이나 종교에 깃들어 있는 이분구조에 스며들어 있는 ‘편견’을 지적하였다. 현대예술은 니체의 생각을 가장 잘 대변한다. 에드바르 뭉크, 달리, 고야, 피카소, 그 이후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은 비정형인 인간과 환경, 파편으로 망가진 인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경계는 자신의 입장인 선과 타인의 입장이 악이 첨예화된 공간이다. 1950년대 TV를 통해 대중문화, 관광, 그리고 국제무역으로 우리는 점점 더 우리와 다른 문화를 경험하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생활방식과 이념이 옳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그 경계에서 분쟁이 터지고 편견이 오히려 강화하였다. 하버드대 심리학자 고돈 알포트Gordon Allport는 <편견偏見의 본질>(1954년)이란 책에서 현대인들이 지닌 편견의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우리는 원자폭탄의 비밀을 알기 위해 오랜 시간의 노동과 엄청난 돈을 투자하였습니다. 인간의 비이성적인 본성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더 많은 노력과 돈이 들어갈 것입니다. 핵무기를 제거하는 것이 편견을 제거하는 것보다 쉽습니다.”
알포트는 ‘편견’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어떤 집단에 속한 사람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다. 그 이유는 그가 그 집단에 속해 있고 집단에 부여된 거부할 만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대방을 이해하는데, 시간을 벌기 위해 자신이 상상한 집단 안으로 쉽게 구분해 버린다. 우리는 사람을 개인으로 보지 않는다. 특히 미디어가 그것을 부추긴다. 대한민국은 편견으로 가득 차 있다. ’태극기부대, 좌파, TK, 광주, 보수, 진보,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자사고, 일반고···’ 이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일관된 철학이나 문법이 존재하지 않는 허상虛想들이다. 편견은 상대방을 알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제거하고, 그 대상을 섣부르게 판단하려는 유혹이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을, 그 사람 자체로 볼 수 없고, 자신의 야속한 편견 안에서 그를 왜곡해 보려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다.
인간은 자신이 아닌 반대에서 생겨나는 존재가 아니다. 니체에 의하면, 최선의 가치를 지닌 것들은 전혀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자기-자신’이다. ‘선과 악’을 넘어선 저편이라는 경계는 인간이 태어난 어머니의 자궁과 같아서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공간이다. 그것은 파괴될 수 없고 사라질 수 없는 자신이라는 숭고한 다름이다. 상이한 가치를 기반으로 구축된 철학과 종교는 사라질 것이다. 경계는 선과 악을 넘어선 ‘자기-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경계의 공간에서 상대방의 다름을 관조하고 자신의 ‘편견’을 발견하고 고백하는 작업이다. 편견의 제거 없이, 진정한 대화는 불가능하다. 크게 기대는 하지 않지만, 트럼프와 김정은이 DMZ라는 이데올로기라는 과거의 망령이 춤을 추는 공간에서, ‘편견’이라는 자신의 무기를 해제하길 바란다. 나를 감싸는 이 안전한 보호막이 시간이 지나면 나의 편견이 되어, 나를 그 안에서 안주시키고 진부한 인간으로 만들 것이다. 어제의 나로부터 탈출하여 내일의 나로 변화하는 승화의 과정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조치는, 자신의 편견을 인식하고 제거하는 일이다!
<에드와드 뭉크: 와인 잔과 자화상> 노르웨이 화가 에드와드 뭉크 (1863–1944), 유화, 1906, 110 × 120 cm, 노르웨이 오슬로 뭉크박물관
진정성2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다.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국민 한명 한명이 선진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20세기 초, 자신들의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한 과학기술혁명을 확신한 인간은, 정신적으로는 유아상태였다. 도덕적으로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인간이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인류 최악의 전쟁인 제 1,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원자폭탄을 만들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하여, 인류를 거의 말살직전까지 몰아넣었다. 21세기 초, 우리는 100년 전부터 더 위한 시대에 진입하였다. IT혁명으로, 인류가 과거의 신의 영역이라고 여겼던 불명을 추구하는 ‘길가메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자신의 생각과 다른 국가를 핵무기로 말살하기 위해 핵무기 스위치만 누르기만하면 된다. 인간의 모든 생각은 인터넷에 자국을 남겨, 인간은 디지털 숫자로 전락하였다. 만일 우리가 상대방의 다름을 인정하고 배려하며, 역지사지하는 마음을 훈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100년 전 전쟁보다 더 끔찍한 자기말살의 길에 들어설 것이다. 애벌레가 고치 안에서 일정한 시간을 보낸 후에 나비가 되듯이, 인간은 과거의 자신을 직시하고 개선하기 위해 자신이 마련한 고치에서 변신을 시도해야한다. 그 변신은 정신적이며 영적인 개벽이다. 필자는 그 개벽을 ‘승화’라고 부르고 싶다. ‘더 나은 자신’을 모색하는 두 번째 글의 주제는 진정성((眞正性)이다.
진정성(眞正性): 가슴을 뛰게 만드는 삶의 원칙
나는 지난 3월 부산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그는 농사에 관한 타인이 넘볼 수 없는 경험과 지식을 자신만의 품격(品格)을 지녔다. 그의 언행은 신중했고 늘 상대방을 배려했다. 계절에 순응하고, 그 안에서 최선을 경주해야하는 농사가 그를 훌륭한 인간으로 개조하였을 것이다.
내가 수년전부터 알던 한 음식 장인도 이 농부와 같은 인격의 소유자다. 그녀가 손님을 위해 마련한 식당 방석을 보면 알 수 있다. 방석은 언제나 방금 풀을 먹여 다림질해 바삭 바삭 소리가 나고, 눈이 부시도록 깨끗했다. 그 방석은 식사를 하려는 나의 몸가짐을 고치게 만들다. 그녀가 손수 만든 음식 하나하나는 정성이 스며들어, 과연 ‘예술’이다. 나는 그녀를 음식 예술가로 존경한다. 한 분야의 권위자란 명성을 취득한 자는, 현재의 자아에 만족하지 않고 미래의 더 나은 자아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런 노력으로 최고의 실력과 내공을 소유한 자는 항상 겸손하다.
서양은 15세기 르네상스를 통해, 인간의 위대함을 인간의 내면에서 발굴하기 시작하였다.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조바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1463-1494년)는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연설De hominis dignitate>이란 책에서 인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마그눔 미라쿨룸 에스트 호모Magnum miraculum est homo.” 이 라틴어 문장을 번역하면 “인간은 위대한 기적이다”다.
피코는 인간은 자유의지를 신장하는 배움을 통해, 신적인 지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위대한 기적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이 ‘신적인 권위’를 신에서 찾지 않고 인간의 내면에서 발굴하기 시작하였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에서 To thine own self be true, 즉 ‘당신 자아에 진실하십시오’라고 외쳤다. 인간이 진정으로 진실해야한 대상은 자기-자신이다. 인간은 모두 각자에서 어울리는, 그래서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이상(理想)을 소유하고 있다.
이 이상의 존재를 믿고,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승화시킨 사람들이 천재(天才)들이다. 20대 제프 베조스(1964년-)는 남들이 부러워하고 안정된 생활을 보장하는 금융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죽음 시점에 놓고 가장 후회하지 않을 삶을 상상하였다. 그는 인터넷의 등장으로 오프라인이 아니라 온라인으로 상거래가 급성장할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전자상거래’에 몰입하였다. 그 결단의 결과가 ‘아마존닷컴’이다. 베조스의 생각은 종말론적이다. 종말론적인 생각은 죽음의 시점에서 현재의 나를 응시하여, 소박하지만 한없이 빛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별을 찾으려는 마음가짐이다.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자신만의 과업을 찾아 집중하였다.
시간은 멈추지 않는 강물처럼, 항상 저 만큼 도망간다. 나에게 할당된 시간도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처럼, 제한적이며 순간적이다. 누구나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그래서 진정성을 담보해야 행복하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 대부분은 결과를 예상할 수 없는 위험한 시도를 회피한다. 차라리 사회에 순응하여 안정적인 삶을 추구한다. 우리 대부분의 삶의 목표는 진정성보다는 순응이다.
인간은 각자에게 기적이라고 불릴만한 진정한 자아를 소유하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자아를 어린 시절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뛰어놀 때, 경험하였다. 그런 자아는 즉흥적이며 창조적이며, 남의 눈치를 보지 않으며 열정적이다. 우리는 학교라는 구조 안에서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신장시키기는 커녕, 점점 거세한다, 우리는 행복을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길 때, 주어진 선물로 착각한다. 현대인들은 타인을 희생시켜야 자신이 생존하는, 로마의 원형경기장에 내몰린 검투사로 변질되었다.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는 삶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요구한다. 첫 번째, 우리에게 알맞은 진정한 자아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 존재에 대한 인식과 깨달음은 돈으로 쉽게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 자아는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경청할 수 있는 고독으로 들어가, 자신을 응시하고 성찰하는 묵상을 통해서만 발견된다. 그는 남이 훌륭하다고 말하는 성인이나 철인의 훈계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 속 깊이 은닉된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경청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만난다. 그런 목소리에 귀를 막는 행위는 자신의 삶에 대한 모독이다.
두 번째, 그는 자신이 발견한 독보적인 권위를 일생생활에서 지속적으로 인내를 가지고 행동으로 표현해야한다. 예수의 삶과 죽음을 기록한 복음이 아니라, 천국에 관한 비밀스런 가르침을 독자에게 일러주는 복음서가 있다. 2세기 콥트어라는 이집트어로 기록된 <도마복음서>다. <도마복음서> 어록 #70에 진정성이 발견되는 장소와 활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만일 당신이 당신 안에 존재하는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면, 그것이 당신을 구원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당신 안에 존재하는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지 않는다면, 그것이 당신을 파괴할 것입니다.”
미국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진정한 자아를 ‘나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내면의 삶’the palpitating inward life이라고 정의하였다. 나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삶의 원칙이 나의 진정성이다. ‘진정성’이라는 뜻을 지닌 ‘어쎈티서티’authenticity는 ‘권위’를 의미하는 영어단어 ‘어쏘러티’authority와 깊이 연관되어있다. 이 두 단어 모두 인도-유럽어 어근 ‘아우그’*aug-에서 유래했다. ‘아우그’는 ‘창조하다 생산하다 제작하다’라는 의미다. ‘저자’를 의미하는 영어단어 author는 ‘글을 통해 새로운 것을 창작하는 자’이며 대문자로 시작하는 Author는 ‘창조주 신’라는 의미다. 진정한 자신을 말, 글, 그리고 행위로 표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아우라가 ‘authority’, 즉 ‘권위’다.
‘권위’라는 단어는 우리사회에서 부정적이다. ‘권위주의 시대’와 ‘권위적인 인간’이란 표현은 각각 ‘유신독재 시대’와 ‘사회가 부여한 얄팍한 계급으로 자신보다 사회적인 신분이 낮은 사람을 하대하고 무시하는 사람’을 뜻한다. 우리사회에는 권위가 땅에 떨어져, 아무나 스스로 권위자와 전문가라고 주장한다. 권위는 진정성을 지닌 인간이 오랜 훈련을 통해 획득하는 자신만의 상표(商標)다. ‘권위자’는 자신의 분야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진정성을 소유한 자다. 나는 어디를 응시하고 있는가? 나하고는 상관없는 타인을 보고 부러워하고 흉내를 내는가? 나는 내 안에 존재하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진정성을 담아 내가 속한 공동체에 과감하게 표현하는가? 나는 가슴 뛰는 나만의 소중한 일을 하고 있는가?
<독일 화가 파울 나우엔> 폴란드 여류화가 올가 보즈난스카Olga Boznańska (1865–1940) 유화, 1893년, 121 cm x 91 cm 크라코프 폴란드 국립박물관 소장
'배철현 칼럼(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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