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배철현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다.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국민 한명 한명이 선진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애벌레가 고치 안에서 일정한 시간을 보낸 후에 나비가 되듯이, 인간은 과거의 자신을 직시하고 개선하기 위해 자신이 마련한 고치에서 변신을 시도해야한다. 그 변신은 정신적이며 영적인 개벽이다. 필자는 그 개벽을 ‘승화’라고 부르고 싶다. ‘더 나은 자신’을 모색하는 세 번째 글의 주제는 의무(義務)다.
의무(義務); 내 자신을 희생재단에 바치는 거룩한 일
오늘 나의 심장을 뛰게 할 일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위해 오늘을 헌신한 것인가? 자신이 최선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가지고 하루를 장악하는 사람이 리더다. 리더는 ‘스스로에게 리더’인 사람이다. 리더는 구분區分할 수 있는 자다. 구분이란 자신의 삶을 도약시킬 수 있는 생각, 말, 그리고 행위와, 자신을 과거로 도태시키거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마지 못해하는 것들에 대한 선명한 분리다. 구분은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시급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선명하게 나누어, 중요한 것과 시급한 것에 몰입하려는 준비다.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우선순위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가려내어, 그것을 완전하고 효율적으로 완수하기 위해서 집중한다.
집중(執中)은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의 완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도구이다. 평상시 집중을 연습하지 않는 자는, 허접한 결정을 내려 일을 망치고 만다. 집중을 훈련한 사람은, 자신이 해야 일을 완벽하고 탁월하게 마친다. 집중은 일을 완수하기 위한 목적은 아니지만, 그 일을 완벽하게 마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덕목이다. 누구나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할 수 있지만, 완벽한 집중을 통해, 일을 완수하는 사람은 드물다. 의지와 이성이 모든 인간에게 열려져 있지만, 불굴의 의지를 발휘하고 균형이 잡힌 이성을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리더는 집중을 연마하는 자다.
노예로 태어났지만 후에 자유의 몸이 되어 그리스 아드리안 해안가에 위치한 니코폴리스라는 도시에 철학학교를 세운 사람이 있다. 에픽테토스(55-135년)다. 철학이 귀족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상의 경험을 통해 숙성된 삶의 철학으로 등장하였다. 주인의 학대를 받아 절름발이가 된 에픽테토스는 지팡이를 집고 일어서서 우리에게 호소한다. “여러분, 자신이 짧은 인생동안 반드시 완수해야할 일을 발견하여 그것에 집중하십시오!”. 세상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내 머리고 상상학고 내 두 손으로 시도하여 그 가시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일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란,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이다. 나의 욕심에 근거한 허상들이다.
에픽테토스의 제자인 아리안은 그의 강의를 요약하여 <엔키리디온>Enchiridion이란 책에 남겼다. ‘엔키리디온’이란 그리스어는 ‘손에 들어오는 조그만 책’ 즉 ‘인생수첩’이란 뜻이다. <엔키리디온>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엔, (내 생각에서 나온 나의) 의견, (충동억제를 통해 내려진) 선택, (무엇을 얻고자하는) 욕망, (무엇을 피하고자하는) 반감 혹은 회피, 한마디로 생각을 통해 걸러진 우리의 행위들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엔, (젊음을 유지하려는) 육체, (운명의 여신이 선사하는) 재산, (남들이 부여하는) 명성, (통치자가 임명하는) 고위직, 한마디로 우리의 행위로 결정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유롭고, 거침이 없고, 타인에 의해 방해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힘이 없고, 누군가에 매여 있고, 타인에 의해 방해를 받으며, 다른 사람에 의지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자발적으로 조용하게 완수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조절할 수 없는 일, 운이나 다른 사람의 판단이나 결정에 좌우되는 불안한 일을 얼떨결에 추구한다. 그것은 마치 마라톤을 뛰고 있으면서 결승점을 상실한 상태다. 남들이 뛰고 있으니, 자신도 생각도 없이 바쁘게 뛴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어리석은 선택을 한 자신을 탓하지 않고, 남을 탓한다. 어리석은 자는 욕심과 체면의 노예가 되어, 일을 하기에, 신명도 없고 신명이 가져다주는 집중도 없다.
로마황제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는 일생의 마지막을 북유럽 전선에서 게르만족과 전쟁을 치루면서, 아침 일찍 일어나 스스로에게 당부하는 글을 썼다. 우리에게 <명상록>이라고 알려진 책의 그리스어 원제목은 ‘타 에이스 헤아우톤’ta eis heautōn이다. 번역하지면, ‘그 자신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들’이다. 그는 자신을 1인칭으로 여기지 않고 3인칭으로 관찰하였다. 아우렐리우스 안에는 그가 되고 싶은 흠모하는 자신인 ‘그 자신’이 존재한다. 3인칭이 된 1인칭이, 매일 아침을 시작하려는 1인칭에게 당부한다. “나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위해 아침에 일어난다. 만일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나는 누구란 말인가?” (<명상록> 제5권 1단락)
아우렐레우스는 자신이 아침에 일어나 해야 할 일을 그리스어로 ‘에르곤’ergon이라고 표현하였다. ‘에르곤’은 충동적으로 아무렇게 하는 저지른 일이 아니다. 에르곤은 마라톤을 달리는 선수가 반드시 두 다리로 달려 마쳐야할 구간(區間)이다. 이 구간은 목표점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단계다. 어떤 마라토너도 이 단계를 거치지 않고는 목표점에 도달할 수 없다. 로마 시대 스토아철학에서 ‘에르곤’, 인간이 매일 매일 완수해야할 임무는 우주라는 거대한 퍼즐을 맞추기 위한 한 조각이다. 완성된 퍼즐이 우주이며 질서다. 라틴어 ‘오피키움’officium이란 단어는 스토아철학의 핵심사상을 담고 있다. 우리가 흔히 일하는 직장을 의미하는 ‘오피스’와 같은 어원인 ‘오피키움’은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완수해야할 의무(義務)다.
내가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이유는,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침을 묵상으로 시작하는 일은 나의 의무(義務)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의무란 내 자신(我)을 기꺼이 희생제단의 양(羊)으로 바칠만한 거룩한 일이다. 나는 그 의무를 오늘이란 구간에서 효율적으로 완수할 것이다. 의무는 남이 나에게 강요하거나 부가한 일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스스로 부과한 일이다. 인간은 에픽테토스의 말처럼 자발적인 의무에 집중할 때, 자유롭고, 거침이 없고, 타인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다. 내가 오늘 자신이 해야 할 의무를 알고, 그것을 완수하려고 집중할 때 오늘 신의 선물이 있다. ‘침착沈着’과 ‘평안平安’이다. 오늘은 나에게 안부를 묻는다. “당신은 자신이 오늘 완수해야할 의무를 알고 있습니까? 당신이 스스로 희생양이 될 정도로 자신이게 감동적인 의무를 이행하고 있는 중입니까?”
<실내에서 독서하는 젊은이> 덴마크 화가 빌헬름 하메르스회Vilhelm Hammershøi (1864–1916), 유화, 1898, 64.4 cm x 51.8 cm, 덴마크 코펜하겐에 있는 미술관 히르슈스프룽 컬렉션Hirschsprung Collection
자아실현4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다.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국민 한명 한명이 선진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애벌레가 고치 안에서 일정한 시간을 보낸 후에 나비가 되듯이, 인간은 과거의 자신을 직시하고 개선하기 위해 자신이 마련한 고치에서 변신을 시도해야한다. 그 변신은 정신적이며 영적인 개벽이다. 필자는 그 개벽을 ‘승화’라고 부르고 싶다. ‘더 나은 자신’을 모색하는 네 번째 글의 주제는 자아실현(自我實現)이다.
자아실현(自我實現) ;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가슴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
요즘 나를 정신 바싹 차리게 해주는 TV프로그램이 있다. 현재 광주에서 진행 중인 2019년 세계 수영 선수권 대회 경기들이다. 수영선수들은 자신이 일생동안 닦은 기량을 그들의 전진을 저항하는 물속에서 발휘한다. 다른 선수들과 경쟁하는 풀장인 ‘경영 풀’은 세로가 50m, 가로 25cm, 그리고 수심이 3m다. 인위적으로 움푹 파인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물을 넣었다. 선수들은 출발선상에 올려 있는 디딤판 위에 올라가, 출발신호를 기다린다. 그 누구도 이 신호 전에 물속으로 먼저 들어가면, 실격이다.
그들 뒤에는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응시하는 검은 옷을 입은 심판관이 있다. 공정公正은, 경기에서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선수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라인 안에서 실력을 발휘한다. 그(녀)가 실수로 혹은 고의로 옆 라인에서 수영하고 있는 선수의 진로를 방해한다면, 그는 실격失格이다. 그는 출발선을 떠난 후, 전환점轉換點을 손이나 발로 만진 후에 다시 출발선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수영선수가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여 메달을 획득하기 위해, 두 가지를 성취해야한다. 첫 번째, 선수는 그가 공식경기에서 성취한 과거기록을 갱신更新해야한다. 자신의 기록을 능가하지 않고는 메달을 획득할 수 없다. 두 번째, 선수는 자신의 옆 라인에서 경쟁하고 있는 동료 선수들과 경쟁競爭하여, 이겨야한다. 자기기록 갱신과 타인기록 능가는 둘이면서 하나다. 자기기록 갱신의 경쟁자는 자신自身이고 타인기록 능가의 경쟁자는 타인他人이다. 금메달을 획득하는 세계적인 선수는 대개 자신이 과거의 기록과 경쟁한다. 그가 최고의 성적을 거둘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는 다른 선수들보다도 홀로 고된 훈련을 견뎠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쪼온 폴리티콘’zoon politikōn, 즉 ‘도시 안에서 거주하는 동물’이라고 정의했다. 도시가 상징하는 문명은 타인과의 교류위에 만들어진다. 우리는 남들과 함께 있을 때, 자신의 존재가치가 확인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혼자 있기를 두려워한다. 사회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수용소’라는 별도의 공간에 감금한다. 그들 가운데, 다른 수용자들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 범죄자는 특별 관리대상이다. 그는 독방獨房에 감금된다. 인간이 ‘혼자’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은 반사회적이며 반인륜적이다. 우리는 사회가 부여한 역할을, 자신의 역할로 여긴다. 사회는 그를 보호하고 그는 사회에 충성을 맹세한다. 사회가 옳다고 판단한 것이 곧 도덕이며 법이고, 사회가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은 비윤리적이며 범죄다. 인류는 그런 위험한 인물들을 추방, 유배, 감금, 그리고 처형을 통해 제어해왔다.
고독孤獨과 불복종不服從은 반사회적인 가치로 최근까지 금기였다. 특히 SNS가 발달한 현대문명은 자신의 혈연과 지연을 넘어선 타자와의 연결망 안에서 개인의 존재가치를 확인한다. 인간은 점점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것처럼, 개인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타인들이 정의한 ‘일원一員’이다. 나는 그들에 부여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사회적 가면假面’을 쓴다. 그들이 부여한 배역을 나라고 착각한다. ‘그런 나’는 나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일 수밖에 없다. 나는 더 나아가 ‘내가 흠모하는 나’이며, 아직은 발굴되지 않았지만, 나의 최선最善이고 싶다. 누구나 세상의 모든 꽃들이 모양이 달라 저마다 아름답듯이, 그 개인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잠재력을 자신의 삶을 통해 완벽하게 실현해야한다. 이 잠재적인 나를, 종교나 사상에서는 거듭난 나, 무아, 진아, 신, 이데아, 초월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다.
미국 심리학자 아브라함 매슬로Abraham Maslow(1908-1970년)는,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발견한 긍정적인 최선’이라고 주장하였다. 20세기 위대한 심리학자들, 프로이트, 융, 그리고 아들러는 모두 인간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부정적인 자아에 집중하였다. 매슬로는 이들이 말하는 수동적이며 부정적인 정신질환이나 무의식에서 탈피하여,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삶의 태도에 집중하였다. 그는 인간을 마음의 병이나 진부로부터 탈출시킨 정신적이며 심리적인 힘을 ‘자아실현自我實現’이라고 불렀다.
현대인들은 ‘자아실현’을 거부하고 사회가 부여한 일을, 마치 공장의 컨베이어 라인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반복하는 기능공처럼 반복한다. 매슬로는 이런 현대인들의 심리를 ‘요나 콤플렉스’The Jonah complex라고 불렀다. 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 요나의 모습을 빗대어 붙여진 이름이다. 요나는 보통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예언자다. 어느 날 신이 느닷없이 등장하여 그에게 아시리아 제국의 멸망을 막기 위해,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로 가서, 그들을 회개시키라고 명령한다. 요나가 니네베로 가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많다. 그는 예언자로서 이스라엘 안에서도 할 일이 많았다. 더욱이 니네베는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원수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매슬로는 현대인은 ‘요나 콤플렉스’ 환자로, 인간은 모두 자신의 잠재성을 확인하기 두려워하고 회피한다고 주장하였다.
‘자아실현’은, 매슬로가 제안한 인간욕구 5단계의 최상위다. 첫 다섯 단계는 동물로서 인간이라면 충족시켜야할 기본적인 욕구다. 생존이 필한 의식주를 충족시키려는 생리적 욕구다. 인간이 의식주가 충족되면, 심리적인 안정을 원한다. 두 번째에서 네 번째가 심리적인 만족을 위한 욕구들이다. 두 번째 단계는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안전에 대한 욕구, 세 번째 단계는, 주위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은 애정에 대한 욕구다. 더 나아가 인간은 주위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싶어 한다.
존경이 네 번 째 단계다. 육체적인 그리고 심리적인 욕구가 충족되면, 인간은 자신이 실현하고 싶은 자아, 자기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는 다섯 번째 단계 ‘자아실현自我實現’의 단계로 들어간다. 자아실현이란 자신이 즐길 수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에 몰입하여 그 분야의 권위자가 되는 것이다. 구두 수선공은 구두를 수선하고, 농부는 농사를 짓고, 작곡자는 음악을 만들고, 조각가는 조각을 하고 시인을 글을 쓴다. 이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몰입할 때 평온하다.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잠재潛在를 발휘하는 화신化身이 된다.
우리는 자신의 잠재를 실현하여 남들이 넘볼 수 없는 그 사람만의 실력을 구비한 자를 ‘프로’라고 부른다. 프로는 부와 명예를 따라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정한 인생의 포부와 의미가 삶의 기준이다. 자신의 포부와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신은 독보적인 실력을 선사한다. 셰익스피어, 바흐, 피카소, 메시와 같은 인간들은 언제나 자신과 경쟁한다. 이들은 일상을 항상 새롭게 볼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다. 일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진부하지만, 그들에게는 경외, 쾌락, 놀라움 그리고 황홀경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의 작품이나 움직임은 자신들이 일상에서 발견한 놀라움이다. 우리는 이들의 시선을 통해, 일상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경험하고 감상한다.
프로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 안달하지 않고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는다. 그들의 삶의 인도자는 자신의 양심良心이다.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는 <명상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내 자신을 재판할 법률과 법정을 가지고 있다. 나는 다른 사람에 의해 다른 장소가 아니라, 바로 이곳에서 심판을 받는다.”
몽테뉴 정신은 스티브 잡스의 스탠포드 졸업식 연설문 문구에도 등장한다.
“당신의 시간은 제한적입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살지 마십시오. 교리에 갇혀 살지 마십시오. 교리는 다른 사람이 만들어낸 생각의 결과입니다. 타인의 의견이라는 소음이 당신의 내면의 소리를 잠재우지 뇌두지 마십시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가슴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입니다. 당신의 가슴과 직관은 당신이 진정으로 되고 싶은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나 나머지는 군더더기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되어야만 하는 그 사람’이다. 인간은 남들이 되길 바라는 그런 사람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내가 아닌 가면이다. 내가 되어야만 하는 인간은, 내가 발견해야하는 내 자신이다. 나는 오늘 나를 실현하고 있는가? 더 나은 자신을 실현하려는 세계적인 수영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싶다.
<엘부스 산맥과 인간> 러시아 화가 니콜라이 야로센코(1846–1898) 유화, 1894, 90.5 cm x 134 cm,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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