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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인물

스티브 잡스 혁신의 아이콘

by 자한형 2024.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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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의 두 얼굴/구사일생<벌세계>

‘21세기 혁신의 아이콘스티븐 폴 잡스(Steven Paul Jobs, 1955-2011)를 대표하는 수식어다. 전세계 기업가치 1위인 애플(Apple)의 창업주인 스티브 잡스는 개인용 컴퓨터의 시대를 개척하고, 스마트폰(아이폰.iPhone) 개발을 이용하여 전 세계인의 삶을 바꿔놓은 인물이기도 한다.

누구보다 시대를 앞서간 잡스의 창의적인 발상과 행보는 그를 ‘IT업계의 아이돌이자 21세기 디지털 시대를 상징하는 혁신의 아이콘으로 올려놓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인성적인 면에서는 비정한 워커홀릭이자, 사람들을 무자비하고 사람들을 나쁘게 대하는 냉혈한이었다는 상반된 평가도 공존한다. 과연 잡스의 진짜 얼굴은 무엇이었을까.

815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12회에서는 비정한 워커홀릭 스티브 잡스는 어떻게 혁신이 되었나편을 통하여, 잡스의 일대기와 그가 현대 사회에 남긴 위대한 유산을 조명했다. 미국사 전문가인 김봉중 전남대 사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잡스는 1955224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시리아계 이민자였던 아버지 존 잔달리와 미국인 어머니 조앤 시블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이미 외가 쪽에서 종교와 인종의 문제로 결혼을 강력하게 반대했고, 잔달리와 헤어져야했던 조앤은 부모님 몰래 홀로 잡스를 출산한 이후 입양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조앤은 당초 대학을 졸업한 인텔리 부부를 양부모로 원했지만 조건에 맞는 상대를 찾기 어려웠고, 결국 기계공과 경리 출신이던 폴 라인홀트 잡스와 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잡스 부부는 아이를 반드시 대학에 보낸다는 조건을 받아들이며 아이를 입양할수 있었다. 이는 이후 잡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행히 잡스는 양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개방적인 양부모의 성격 때문에 자신이 입양아 출신이라는 것도 어린 시절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잡스는 어린 시절 친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이웃집 아이의 놀림에 상처를 받았으나, 양부모는 그런 잡스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우리가 널 특별히 선택한 거란다.”라는 이야기를 천천히 반복해서 들려줬다고 한다.

훗날 잡스는 이 일화를 회상하며 양부모님은 진짜 1000% 나의 부모님이었다.”며 깊은 애착과 존경심을 드러냈다. 반면 정작 친부모에게는 그들은 나의 정자와 난자은행일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독설을 날릴만큼 애정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양부모는 생업으로 바쁜 와중으로 잡스의 교육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버지 폴 잡스는 전기와 기계에 박식한 뛰어난 기술자였고, 잡스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기계를 접하고 관심을 갖게 되었고, 꼼꼼한 완벽주의 성향 역시 그대로 물려받았다.

잡스의 어린 시절은 많은 천재들이 흔히 그러하듯, 평범하지않은 괴짜이자 악동의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잡스는 입학전부터 엄청난 독서량으로 다양한 지식을 쌓았고 어린 시절부터 학년을 뛰어넘어 월반을 할만큼 남다른 똑똑한 아이였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오히려 평범한 학교 수업과 공부에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말썽꾸러기가 됐다. 잡스는 반려동물과 함께 등교하는 날을 만들어서 학교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놓는가하면, 친구들의 자전거 자물쇠 비밀번호를 알아내 모두 바꿔버리는 기상천외한 장난을 일삼았다고 한다.

중학교에 진학한 잡스는 여전히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방황을 거듭했고 양부모에게 전학을 가고 싶다고 요청했다. 그렇게 잡스 가족이 이사한 샌프란시스코 남부 일대는 원래 평범한 농업 지역이었지만, 미국을 대표하는 첨단산업단지인 실리콘밸리가 자리잡던 시기였다. 뛰어난 엔지니어들이 대거 몰려든 도시에서 호기심많은 10대 시절을 보낸 것은, 잡스의 인생에 있어서도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훗날 잡스는 실리콘밸리라는 장소와 그 시대에 정확히 내가 있었던 것은 놀라운 행운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의 잡스는 1960-70년대 시대 미국의 많은 청춘들처럼 히피(Hippie 혹은 Hippy) 문화에 심취했다. 그 상징이었던 장발 헤어를 하고 다니며 밥 딜런, 비틀즈의 음악이나 동양철학 등에 심취했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 17세의 잡스는 친구들과 마약에 빠지기도 하고, 대학에 입학했으나 한 학기만에 자퇴하는 등 방황을 거듭했다.

또한 이 당시 잡스가 취업을 위하여 작성했던 자필 이력서는 부실하고 허풍스러운 내용으로 가득한 흑역사에 가깝지만, 정작 잡스의 명성이 유명해진 사후에 20217월 경매에서는 무려 343천 달러(4억원)라는 거액에 낙찰되었다는 놀라운 뒷이야기도 전한다.

1974, 19세의 잡스는 전도유망한 비디오 게임회사였던 아타르에 입사하며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다. 아타르의 창업자인 놀란 부쉬넬은 여전히 히피문화에 심취하여 기행을 거듭하고 동료 직원들도 기피하던 잡스를 과감히 채용하고 그가 사람들과 마주치지않고 일에만 전념할수 있도록 야간 근무에 배정하며 특별히 배려했다. 부쉬넬은 남들이 2-3개월 걸린다던 프로젝트를 일주일만에 해낼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잡스에 흥미를 느꼈고 다루기 힘들었지만 마음에 들었다.”고 평가하면서 그의 특별한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봐준 인물이었다.

또한 잡스의 인생에서 평생의 동반자로 빼놓을수 없는 것이, 훗날 애플의 공동 창업자가 되는 스티브 워즈니악이라는 인물이다. 잡스가 16세일때 두 사람은 친구의 소개로 처음 만났고, 잡스는 당시 첨단분야였던 워즈니악을 보고 자신보다 더 똑똑한 사람은 처음 본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잡스는 워즈니악과의 인연을 통하여 컴퓨터에 빠져들었다.

잡스는 회사로부터 1인용 게임을 제작해보라는 미션을 부여받았고, 워즈니악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2-3일밖에 시간이 없다는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놀랍게도 워즈니악은 실제로 3일만에 게임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이후 1인용 게임 분야에서 일약 센세이션을 일으킨 벽돌깨기(Break out)’.

잡스는 회사에서 개발 보상금으로 무려 5천달러 이상을 받았지만, 정작 진짜 개발자인 워즈니악에게는 액수를 속이고 350달러만 지급했다고 한다. 한참 시간이 흘러서야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된 워즈니악이 따져묻자 잡스는 '기억이 안난다.'고 둘러댔다는 후일담이 전한다.

1976, 각자 직장생활을 이어가던 21살의 잡스와 26살의 워즈니악은 의기투합하여 애플을 창립한다. 1년전,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던 개인용 컴퓨터 알테어 8800’의 출시에 자극받은 워즈니악은 절치부심하여 더 발전된 컴퓨터인 애플 원을 개발해내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잡스는 개인용 컴퓨터 사업의 비전을 확신하고 워즈니악에게 동업을 제안한다.

비록 애플 원은 기대만큼 수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잡스는 굴하지 않고 당시 소수의 마니아층에게만 알려져있던 컴퓨터 분야를 대중의 관심을 끌수있도록 개인용 컴퓨터 개발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제안했다. 1977년에 출시한 애플2는 키보드와 본체가 결합된 일체형과, 그래픽-컬러 영상 모니터 출력 지원 등에서 오늘날의 컴퓨터와 점차 흡사해지는 것을 파악할수 있다.

홍보의 귀재였던 잡스는 컴퓨터 대중화를 위하여 제품내에 게임을 설치하는가하면, 로고를 과감하게 변경했다. ‘컬러풀한 사과를 한 입 베어문형태의 2대 애플 로고는 1977년부터 1998년까지 21년동안 사용되며 애플의 이미지는 전 세계 대중들에게 각인시켰다. 또한 잡스는 애플2는 다른 컴퓨터들보다 향상된 기능에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가성비 전략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애플2는 폭발적인 성공을 거뒀고 애플은 창업 5년만에 자산가치 256백달러(현재 2850억 추정)에 이르는 거대 IT기업으로 성장했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일약 실리콘밸리를 대표하는 라이징스타이자 영앤 리치의 상징으로 거듭난 것이다.

하지만 잡스와 애플의 독주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세계 최대의 컴퓨터업체이자 애플의 강력한 라이벌이 된 IBM의 등장 때문이었다. 1981년대들어 IBM은 새로운 개인용 컴퓨터를 잇달아 출시하며 애플과 본격적인 경쟁구도를 형성했다. IBM이 선보인 ‘5150’은 애플과 당시 타사 제품과도 소프트-하드웨어 호환이 가능하다는 차별화되던 장점을 앞세워 출시 2년만에 75만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는 선풍을 일으켰다.

잡스는 처음에는 IBM의 등장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오히려 경쟁자의 등장을 환영한다는 광고까지 내걸며 여유만만했다. 하지만 막상 오래 가지않아 IBM에 밀려 2인자로 전락할 위기에 놓이자 초조함을 감추지못했고, 뉴욕 여행중 IBM 본사 로고 앞에서 손가락 욕을 하는 사진을 찍는 기행을 선보이기도 했다.

잡스는 IBM를 꺾을수 이는 최고의 컴퓨터를 만들어야한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잡스의 독불장군적인 면모가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시기도 이때부터다. 본인이 지독한 워커홀릭이었던 잡스는 새벽야근이나 주말 오전 아침 회의 소집은 물론이고, 마음에 들지않는 사람에게는 모욕적인 폭언도 마다하지 않으며 쉴틈없이 회사 직원들을 압박했다. 창업주이지만 잡스의 도를 넘은 전횡을 묵과할수 없었던 회사는 잡스에게 컴퓨터 제작 프로젝트에서 손을 뗄 것은 통보했다.

하지만 잡스는 보직만 옮기게 되었을뿐 여전히 컴퓨터 개발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잡스는 이동한 팀의 팀장을 쫓아내고 자신이 원하는 매킨도시컴퓨터 개발에 집중하도록 팀의 성격을 바꾸어버렸다. 또한 잡스는 자신이 원하는 유능한 직원들을 타 부서에서 데려오기 위하여 직원이 하던 작업을 마무리할 시간도 주지않고 컴퓨터 전원의 코드를 뽑아버리는 기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이처럼 잡스는 끊임없이 직원들의 영혼까지 갈아넣어가면서 원래 3년 예정으로 기획했던 매킨토시 개발을 1년 반으로 단축하는데 성공했다.

1984년 잡스의 야심작이었던 세상에 없는 컴퓨터매킨도시가 모습을 드러낸다. 잡스는 홍보를 위하여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38억원에 가까운 비용을 감수해가며 헐리우드의 거장 영화감독이던 리들리 스콧에게 광고 제작을 의뢰했다.

해당 광고는 SF 소설 ‘1984’를 모티브로 하여 경쟁사인 IBM의 악(빅 브라더)으로 묘사하고, 영웅 매킨도시가 IBM에 지배당한 이들을 구원한다는 파격적인 내용을 담았다. 특이하게도 이 광고는 컴퓨터의 기능이나 장점을 설명하는 내용은 전무하고, 그저 경쟁사에 대한 노골적인 저격만 담고있다는게 특징으로, 이는 잡스의 감정이 반영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매킨토시는 역사적으로 개인용 컴퓨터 기술 혁신에 중대한 전환점이 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기존 키보드 위주였던 컴퓨터에서 마우스를 활용하여 작업이 간편해졌고, 서체의 다양화 역시 매킨토시 개발과 함께 시작된 중요한 변화였다.

하지만 매킨토시는 정작 잡스가 기대만큼의 반응을 불러오지는 못했다. 잡스는 완벽한 컴퓨터라고 자부했던 매킨토시에 다른 컴퓨터의 접근을 막기 위하여 매킨토시 고유의 프로그램만 사용할수 있도록 만들면서 호환성이 떨어졌고, 미관상의 이유로 쿨링팬을 제거한다는 어이없는 실책까지 저질렀다. 자연히 일반인 소비자들에게는 실용성이 떨어진 반면, 가격은 지나치게 비쌌다. 잡스 특유의 과도한 독선과 완벽주의가 오히려 제품의 경쟁력을 떨어뜨린 독이 된 셈이었다.

이미 잡스를 곱지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애플 이사회는 매킨토시 판매부진이 결정적인 게기가 되어 1985년 잡스를 회장에서 해고하기로 결정한다. 30세의 잡스는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다. 공동 창업자인 워즈니악은 당시 비행기 사고의 후유증으로 인한 건강악화에 이어, 사내 정치와 경영에 적응하지못하면서 모든 주식을 팔고 사표를 낸 상황이라 잡스를 도울수 없었다. 잡스는 훗날 한 대학연설에서 삶의 초점을 모두 잃어버렸고 참담한 심정이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절치부심의 시기를 거친 잡스는 ‘NeXT’라는 새로운 컴퓨터 회사를 창업하고 또다른 도전에 나선다. 초기에도 회사의 행보는 순탄하지 못했다. 하지만 설립 1년만인 1986년 잡스가 컴퓨터 개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3D편집과 특수효과 기술력을 보유한 영화 그래픽 회사였던 루카스 필름를 인수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세계적인 컴퓨터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 불리우는 픽사(PIXAR)’의 전신이다.

훗날 잡스는 컴퓨터 그래픽에 큰 흥미를 느꼈기 때문에 정말로 이 회사를 사고 싶었다. 루카스 필름의 사람들을 봤을 때 그들이 예술과 기술을 결합하는 일에서 남들보다 훨씬 앞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잡스가 픽사 인수와 설립이 불러올 효과를 처음부터 예상했던 것은 아니었다. 픽사가 1990년대부터 제작한 <토이 스토리> 시리즈는 세계 최초의 3D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꼽히며 전세계에서 36200만달러(현재 9923억 추정)의 수입을 벌어들이는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는 벼랑 끝까지 몰렸던 잡스가 다시 사업가이자 컴퓨터 개발자로 재기할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1997, 잡스를 내쳤던 애플이 놀랍게도 12년만에 그의 복귀를 요청한다. 당시 애플은 잡스가 떠난 이후에도 부진을 면치못하며 파산위기까지 몰려있었다. 또한 당시 경쟁사의 윈도우95에 대항할 운영체제로 잡스의 넥스트 스텝 기술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결국 애플은 NeXT사를 인수하고 잡스를 다시 임시 CEO으로 추대하는 방식으로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잡스는 애플의 복귀 제안을 처음 듣고 인생 참 돌고도는 구나(What a circle of life)”라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잡스는 애플에 복귀하고 넥스트 스텝 기술을 제공하는 댓가로 연봉을 거의 받지않는 대신, 12천만달러의 현금과 애플 주식 37천만달러를 받았다. 잡스는 당시 썩은 사과로 불리며 조롱받던 애플을 혁신한다는 명분으로 불필요한 사업과 제품들을을 정리하고 대대적인 구조조정으로 3천명 이상의 직원들을 해고했다. 당시 애플의 직원들은 엘리베이터에서 잡스를 마주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는데, 잡스가 돌발적으로 회사와 업무에 대한 각종 질문을 던지고 마음에 들지않는 대답을 한 직원들을 곧바로 해고 통보를 날렸기 때문이라는 일화가 전한다.

사실 잡스의 인성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어두운 일화들이 전해진다. 공동 창업자이자 은인이었던 워즈니악 조차 스티브 잡스에게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그중 하나는 그가 무자비하고 사람들을 나쁘게 대했다는 것이다. ‘저렇게까지 해야하나?’ ‘어쩌면 사람이 저런 짓을 할수 있지?’ 제 자식은 절대 저렇게 키우지말아야지라고 생각했다. ”고 저격했다.

또한 라이벌이자 마이크로소프트 빌 게이츠는 잡스같은 개자식(Asshole)을 흉내내는 것은 쉽다.”고 평했으며, 기업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게리 베이너척은 오늘날 실리콘밸리의 많은 사람들은 비열하게 회사를 운영한다. 스티브 잡스를 존경하기 때문에 그의 방식이 옳다고 따라하는 것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잡스는 본인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친절했지만, 그렇지않은 사람에게는 지극히 무례했다고 한다. 심지어 직원을 면접하는 자리에서도 사생활에 관한 무례한 질문을 쏟아내거나 인신공격성 발언도 서슴지않았다. 이밖에도 부적절한 관계로 혼외딸이 있었음에도 그 존재를 부정하는가 하면, 장애인 주차구역에 무단으로 주차해놓고 벌금을 내지않으려고 번호판을 달지않았다는 등, 잡스의 비열하고 추접스러운 면모를 드러내는 일화들도 다수 전해진다.

그럼에도 잡스는 사업적인 측면에서는 애플의 부활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하면서 오늘날 혁신의 상징적인 아이콘으로 거듭났다. 잡스가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브랜딩이었다. 잡스는 경쟁사인 IBM의 슬로건인 ‘Think’를 응용하여, “자신이 세상을 바꿀수 있다고 생각하는 미친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라는 메시지를 담은 ‘Think different(다르게 생각하라)’라는 슬로건과 광고를 선보여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슬로건은 잡스 본인의 천재성에 대한 과시욕과, 경쟁사에 대한 콤플렉스에 복합적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해석된다. ‘Think different’라는 메시지는 오늘날 제품을 넘어 애플 회사와 스티브 잡스라는 인물을 상징하는 정체성으로 자리매김했다.

잡스는 애플 복귀 이후 1년만인 1998년부터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 검정 터틀넥-청바지-운동화 패션을 고수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또다른 흥미로운 뒷이야기가 있는데, 잡스는 직원들에게 단결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동일한 유니폼을 입을 것을 제안했으나 거부당했고 한다. 평소 그렇게 다양성과 창의성을 강조하던 잡스의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일화다.

아쉬워하는 잡스에게 평소 친분이 있던 일본인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가 너만의 유니폼을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하여 수백장의 검정 터틀넥을 만들어준 것이 오늘날 잡스의 상징이 됐다. 그리고 이러한 잡스의 패션은, 그의 지적인 이미지와 함께 애플이 단순하고 합리적인 브랜드라는 것을 강조하는 상징적인 이미지로 자리매김하는 뜻밖의 효과를 불러왔다.

잡스의 두 번째 혁신은 아이팟(휴대용 음악기기)’의 탄생이었다. 히피 출신답게 젊은 시절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잡스는 작은 기기안에 많은 음악을 담을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왔고, 일본 여행을 하다가 휴대용 플레이어를 들고 있는 현지인들의 모습에서 우연히 영감을 얻어 아이팟 개발이라는 아이디어를 시작하게 됐다.

아이팟은 음악 시장의 판도를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워크맨 시대를 벗어나 MP3 시대를 맞이하여 카세트나 CD에서 디지털 기기 위주로 음악 소비의 수단이 달라졌다. 여기에 아이팟과 함께 음악서비스 스토어인 아이튠즈의 등장으로, 저렴한 가격에 언제든 원하는 노래를 인터넷으로 다운로드받아 들을수 있게 되었다. 모두가 잡스하면 당연히 컴퓨터 개발만 생각했던 많은 대중들의 허를 찌른 아이디어이기도 했다. 잡스는 애플의 존재 이유를 드러내는 제품이 있다면 바로 아이팟이라고 할만큼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리고 잡스의 마지막 혁신은, 바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스마트폰의 개발이었다. 2007년 아이팟, 휴대전화, 인터넷 통신기기의 기능이 모두 결합된 세상에 없던 아이폰의 등장은, 오늘날 디지털-모바일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얇고 심플하고 가벼운 디자인, 키보드가 따로 필요없는 터치스크린, 배터리 분리와 교체 없는 일체형 배터리, 컴퓨터에서만 가능한 기능들을 휴대전화에서 가능하게 한 각종 애플리케이션() 과 이모티콘 기술 등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수많은 애플리케이션중에서도 SNS(소셜미디어서비스) 기능은 모바일을 통한 전세계적인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 시대를 열며 선풍적인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아이폰으로 시작되어 스마트폰 전성시대와 확장된 팬덤 문화는 세대,국경, 이념을 초월하여 세계인의 사고와 생활방식을 바꾸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첨단 기계문명의 시대에 기계와 인간의 감성적 교감이 가능하게 했다는 것은, 잡스가 인류에게 남긴 최대의 유산으로 꼽힌다. 잡스는 이를 두고 "우리는 기술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기술에 인문학과 인간성을 결혼시켰다. 기술과 인문학이 만나니 비로소 고객의 심장이 노래하기 시작했다.”고 평하기도 했다.

잡스는 2010년에는 아이패드(태블릿)를 선보이며 발전과 혁신을 멈추지않았다. 이듬해 애플은 전세계 시가 총액 1위를 차지하며 IT기업의 상징으로 굳건하게 자리매김했다.

수많은 역경을 헤쳐왔던 잡스가 유일하게 극복하지 못한 것은 건강이었다. 잡스는 2003년 췌장암 진단을 받았고, 긴 투병 끝에 2011년 불과 56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잡스는 죽기 직전까지 새로운 제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안할만큼 일에 대한 열정을 놓지않았다고 한다.

잡스의 안타까운 사망 소식에 전세계적으로 추모의 물결이 이어지기도 했다. 언론들은 만평을 통하여 천국에 간 스티브 잡스가 신과 역사적 위인들의 환영을 받는 모습을 묘사하며 그 역시 한 시대를 변화시킨 위대한 인물에 등극했음을 묘사했다.

늘 갈망하고 우직하게 전진하라. 현실에 안주하지마라.(Stay hungry, stay foolish)” “여러분의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다른 사람들의 삶을 사느라 인생을 허비하지 말라잡스의 대표적인 연설이자 그의 삶을 관통하는 철학이기도 하다. 잡스가 우리에게 남긴 궁극적인 유산은 테크놀로지에 대한 혁신 자체보다는, 불굴의 의지와 도전정신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발전시킬수 있다는 것. 바로 인간 정신에 대한 확신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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