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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인물

바흐는 음악가의 아버지

by 자한형 2024.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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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는 음악가의 아버지(?)/ 이채훈

바흐는 2번 결혼하여 20명의 자녀를 둔 성실한 가장이었다. 1707년 결혼한 첫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와 52녀를 두었다. 둘째 아들 칼 필립 엠마누엘(1714~1788)은 어린 시절 자기 집이 비둘기집처럼생기가 넘쳤다고 회상했다. 바흐가 화를 내는 경우가 있다면 아이들이 진지하게 공부하지 않을 때뿐이었다. 그가 바란 것은 아이들이 노래를 좀 더 잘 부르고, 작곡을 좀 더 잘하고, 또 악기를 좀 더 잘 다루게 하는 것 뿐이었다. 1720년 바르바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바흐는 궁정의 젊은 소프라노 안나 막달레나와 재혼했다. 그녀는 남편의 음악을 잘 이해했고, 생모를 잃은 자녀들을 잘 보살펴 주었다. 그녀는 예쁜 패랭이꽃을 손질해서 새 가정을 아늑하게 단장했다. 안나는 남편의 악보를 사보하여 도움을 주었는데, 남편 것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필체가 비슷해서 후세의 바흐 연구자들이 애를 먹었다고 한다. 바흐는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클라비어 소곡집> 2권으로 아내에 대한 사랑을 표했다. 이 소곡집에는 바흐가 아내를 위해 직접 쓴 가곡도 하나 들어 있는데, 행복한 죽음을 꿈꾸는 내용이다. “그대가 내 곁에 있으면 난 죽음의 안식을 찾을 때까지 기쁘게 살 것이네. , 그대의 아름다운 두 손이 내 충실한 눈을 감겨 준다면 나의 마지막은 얼마나 즐거울까!”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란 칭호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음악가의 아버지임을 자랑스레 여겼다. 그는 두 차례의 결혼에서 20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차남 칼 필립 엠마누엘과 막내 요한 크리스찬은 뛰어난 음악가로 이름을 남겼다. 바흐와 모차르트의 시대, 그 사이를 이어준 징검다리는 바흐의 아들들이었다. ‘북독일의 바흐로 불린 둘째 아들 엠마누엘 바흐(1714~1788)는 생전에 아버지를 능가하는 명성을 누렸다. 그는 아버지 바흐의 '학구적 양식'(learned style)과 자신의 새로운 스타일인 갈랑 양식’(gallant style)을 구분하고, “아버지의 양식이 교회 음악에 적합한 반면, 극장 음악이나 실내 음악에는 나의 갈랑 양식이 제격이라고 했다. 아버지 바흐는 당시 계몽주의와 이에 따른 음악 양식의 변혁기에서 구세대에 속했다. 이 사실을 자각한 바흐는 신세대와 대립하기보다는 과거 예술의 집대성에 힘을 쓰게 된다. 만년의 걸작 <골트베르크 변주곡>, <평균율 클라비어 2>, <푸가의 기법>은 과거 건반음악의 집대성이었고, <미사 B단조>는 그의 종교음악을 총결산한 것이었다.

반면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는 진정한 예술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낭만적 예술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올바른 건반악기 연주 기법>(1753)에서 연주자가 스스로 감동받지 않으면 타인을 감동시킬 수 없다고 강조하고, “연주자는 기술만 갖춘 조련된 새에 그쳐서는 곤란하며, 영혼으로 연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입장은 하이든, 모차르트에게 직접 영향을 미쳤다. 모차르트는 하이든에게 그는 아버지고, 우리는 모두 그의 자식들이라고 말했다. 하이든도 엠마누엘 바흐의 피아노곡을 공부했다. “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엠마누엘 바흐에게 많은 신세를 졌고, 그를 잘 이해하려고 열심히 연구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엠마누엘 바흐는 28년 동안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정에서 일하며 많은 작품을 썼는데, <프러시아 소나타><뷔르템부르크 소나타>가 특히 유명하다. 그는 뚜렷한 제시부와 전개부를 지닌 소나타 형식을 개발했고, ‘빠르게-느리게-빠르게3악장으로 구성된 고전 소나타의 원형을 만들었다.

바흐의 막내 아들 요한 크리스찬 바흐(1735~1782)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762년부터 영국에서 활약하여 런던의 바흐로 불렸으며, 새로 개발된 포르테피아노를 대중 앞에서 연주한 최초의 음악가로 꼽힌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유려한 선율과 화음을 익힌 그는, 런던을 방문한 8살 모차르트의 음악 스타일에 큰 영향을 주었다. 물론 아버지 바흐가 직접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간과하면 곤란하다. 모차르트는 빈 도서관장 반 슈비텐 남작에게서 바흐의 악보를 빌려서 공부했고, 그의 푸가를 현악사중주로 편곡해서 연주하곤 했다. 베토벤의 어린 시절 스승인 네페는 베토벤에게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연습하도록 했다. 베토벤의 책상 위에는 만년까지도 늘 바흐의 악보가 있었다. 쇼팽도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직접 연습했을 뿐 아니라 제자들을 가르칠 때 이 곡을 교재로 사용했다.

음악의 아버지란 표현은 위대한 바흐에 대한 적절한 존경의 표현이다. 그러나 바흐 이전에 음악이 아예 없었다는 착시를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으니 경계해야 한다. 아버지 이전에 할아버지가 계셨던 게 당연하듯, 바흐 이전에도 수많은 음악가가 있었다. 심지어 기욤 뒤파이(1397~1474)나 조스켕 데 프레(1440~1521) 같은 옛 음악가도 음악의 아버지로 불린 바 있으니, 이 칭호는 수사적인 표현일 뿐,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게 좋겠다.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가 된 결과 남자인 헨델이 음악의 어머니란 별명을 갖게 된 것도 어색하다. 가발 쓴 헨델의 초상을 보고 그가 여자인 줄 알았다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바흐, 헨델과 동갑내기 작곡가인 도메니코 스카를라티(1685~1767)가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되는 현실도 아쉽다. 스카를라티는 로마에서 헨델과 만나서 연주 실력을 겨뤘는데 오르간은 헨델이 압도적으로 뛰어났지만 클라비어는 오히려 그가 헨델보다 낫다는 평을 받았다. 두 사람은 그 후 만나지 못했지만, 서로에 대한 존경을 평생 간직했다. 스카를라티는 포르투갈 공주 막달레나 바르바라의 음악 선생으로, 그녀가 스페인 여왕이 되자 세비야에 머물면서 555곡의 빼어난 소나타를 작곡했다. 그의 소나타는 바흐의 건반음악에 비해 훨씬 모던하게 들린다. 바흐와 헨델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거장 텔레만(1681~1767)의 음악에 투자할 시간이 줄어든 것도 안타깝다. 텔레만은 진보적인 음악가로 생전에는 바흐의 명성을 능가했으며 <타펠무지크>를 비롯한 엄청난 양의 작품을 남겼다. 바흐는 그를 존경하여 둘째 아들 엠마누엘의 대부로 모시기도 했다. 최근 텔레만의 음악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바흐는 정말 음악의 아버지일까?/ 엄신영 승

음악의 아버지는 바흐, 어머니는 헨델이야. 모차르트는 신동이고, 베토벤은 악성.”

살면서 한 번쯤은 들어본 말이다. 아주 어릴 적부터 우리는 바흐를 가리켜 음악의 아버지라 배우고, 또 그렇게 불러왔다. 나 역시도 초등학교 시절, 음악 선생님을 통해 처음 이 말을 접했다. 그리고 그 뒤로 한동안은 마치 이것이 절대적인 진리인 양 믿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음악 교과서의 첫 장은 아버지바흐의 얼굴과 그의 작품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 우리가 흔히 바흐하면 떠올리는 초상화 역시 이 믿음에 한몫을 했다. 굳게 다문 입술과 결의에 찬 듯한 강한 눈빛, 그리고 하얀 가발을 쓴 바흐의 모습은, ‘아버지라는 단어가 주는 굳세고 위대한 이미지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인물 그 자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믿어왔던 이 믿음에 ?’라는 물음을 던지게 되는 일이 일어났다. 처음으로 서양음악사 책을 사서 읽은 것이 그 원인이었다. 당연히 바흐가 나올 줄 알고 펼친 첫 장에는, ‘세이킬로스의 비문이라는, 생전 처음 보는 비석이 있는 게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부터 중세, 그리고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내가 아는 바흐의 이름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의 충격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찾던 바흐의 이름은 첫 번째 책의 절반 정도가 넘어간 후에야 비로소 찾을 수 있었다. ‘음악의 아버지라는 칭호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누군가의 아버지라는 말에서, ‘아버지는 그 누군가를 낳은 뿌리이자 시작점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었나? 바흐는 음악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것도, 악보를 발명해낸 사람도 아니었다. 그리고 바흐가 등장하는 바로크 시대 이전에는 그 이름에 가려진 중세와 르네상스라는, 또 다른 중요한 시대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 음악의 역사다. 내가 서양음악사 책을 읽으며 느꼈던 것은, 음악사를 길게 뻗은 직선이라 한다면 바흐와 그의 작품은 이라는 것이다. 바흐의 이전에도 수많은 점들이 모여 선을 이루어 왔고, ‘이후에도 다시 수많은 점들이 모여 선을 이어갔다. 물론 바흐가 위대한 작곡가이고 훌륭한 작품들을 여럿 남겼다는 점에서 그의 이 유독 크고 도드라져 보일 순 있을 수는 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음악의 아버지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그것이 옳은지는 의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양음악사 사건 이후, 나의 관심사는 한동안 음악에 관한 나의 편견에 머물렀다. 좀 더 정확히 하자면, 위대함이 당연시되는 작곡가들에 대한 나의 편견’, 나아가 우리 시대의 편견이다. 당연하다는 것들에 대해 그것이 왜 당연한지를 따져 묻는 것은 어느새 습관이 됐다. 생각을 하나하나 점검해 보는 일, 누가 본다면 참 피곤하게 산다라고 한소리 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더 많은 걸 배우고 느낄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습관 덕이었다. ‘바흐가 과연 음악의 아버지일까?’ 하는 물음은 무엇이 바흐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하는 물음으로, 왜 하필이면 바흐였을까?’ 하는 물음으로 다시금 나아간다. 이 질문들에 대해 딱 떨어지는 답은 할 수 없을지언정, 나는 그 과정에 이전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들을 고민해볼 수 있었다. , 음악사라는 것이 너무 특정 작곡가들 중심으로만 전개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참 재미있는 일이다. 당연시해졌던 사실을 한번 비틀었을 뿐인데, 그 속에선 새로운 생각들이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온다. 바흐에서 음악사로, 다시 음악사에서 사회와 시대로, 궁금증은 이곳저곳으로 뻗어져 간다.

만일 내가 서양음악사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직도 별다른 의심 없이,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라고 굳게 믿고 있을 수도 있다. , 서양음악사를 읽은 것이 내게는 큰 사건이었을지언정,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냥저냥 쉽게 읽어 넘기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직도 내가 인지하지 못한 편견들이 내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마음이 편하지 않다. 지금 하는 이런 말조차 어쩌면 편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나는 서양음악사 사건을 계기로 생각에 조금씩 거리를 두는 습관이 들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사고방식 또한 이 습관의 일환이다. 견고하게 짜여진 울타리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듬성듬성, 생각과 생각 사이에 틈을 벌려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야라고 단언하기보다, ‘왜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인가?’ 하는 물음으로 그 틈새를 벌려두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항상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말이다. 나는 알게 모르게 나의 범위를 옭아매는 편견에서 벗어나 조금씩 그릇의 크기를 넓혀나갔으면 한다. 더 넓은 세상과 많은 음악을 담는 사람이 되고픈 까닭이다. 이 글을 접하게 된 이들 역시 한 번쯤은 자신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편견을 의식했으면 한다. 더 많은 이들이 견고하게 짜여진 울타리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길 소망해본다.

바흐가 전하는 커피 한잔/나웅준

클래식 강연을 하러 가는 길엔 항상 챙기는 나만의 준비물이 있다. 바로 편의점 커피다. 게다가 2개를 사면 1개를 덤으로 주니 그야말로 양손 무겁게 강연하러 가는 셈이다. 강연 때 편의점 커피를 준비하는 이유는 참석자들에게 아주 특별한 경험을 전해주기 위해서다. 클래식을 마시며 클래식을 듣는 경험 말이다.

L사의 브랜드인 커피 칸타타는 독일 음악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작품에서 따온 명칭이다. 칸타타는 바흐가 살았던 시절인 1700년대 유럽에서 유행하던 성악 장르다. 그 당시 독일 라이프치히엔 치머만 카페 하우스라는 카페가 있었는데 매주 손님들을 위한 문화공연이 열렸다. 그곳에서 바흐에게 공연을 위한 음악을 부탁했고 그렇게 탄생한 음악이다. 원제목은 가만히, 떠들지 말고지만, 커피에 관한 내용이니 지금까지 커피 칸타타로 전해진다.

커피를 좋아하는 딸과 그걸 못마땅해하는 아빠의 이야기다. 아빠는 딸에게 커피를 끊으라며 이런저런 권유와 협박을 하지만 전혀 통하지 않는다. 용돈을 끊는다거나 예쁜 옷을 안 사준다는 내용이다. 지금이나 300여년 전이나 용돈은 자녀를 협박하는 큰 무기가 된다. 사람 사는 이야기는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어딜 가나 다 똑같다.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 없듯이 아빠는 커피를 허락하며 이야기는 즐겁게 끝난다.

작곡가 바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수식이 있다. ‘음악의 아버지.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표현이다. 물론 그의 음악적 상징은 음악의 아버지라 불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사실 그를 표현하는 가장 명쾌한 표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바흐의 음악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만나기엔 오히려 방해하는 요소다. 게다가 출처 또한 오해에서 비롯됐다. 모차르트는 어느 날 악보 하나를 발견하고 감탄하며 이분은 음악의 아버지며 우리는 그의 자손이다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그리고 악보를 보니 바흐라고 적혀 있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 악보의 바흐는 바흐의 아들이었다. 모차르트가 활동하던 당시는 바흐보다 그의 아들들이 더 유명했고 인정받았던 시기다. 그래서 나는 바흐를 소개할 땐 조금 바꿔서 표현하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 인()자를 사용해서 음악인 아버지바흐라고. 음악을 업으로 삼았던 아버지라는 의미다.

바흐는 살아생전 부와 명예를 누렸던 음악가가 아니다. 그저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자신이 맡은 바 묵묵히 작곡 일을 해야 했던 생계형 음악가였다. 그런데도 음악의 완성도는 지금까지 하나의 표본으로 여겨지며 위대한 음악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따라서 바흐의 음악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만나기 위해선 바흐의 삶을 더 정확하게 표현해줄 수 있는 수식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음악인 아버지라고 생각한다. 300년 전 치열하게 삶을 살았던 음악인 아버지 바흐가 현재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하는 음악, 나는 그 음악을 편의점에서 사고 마시며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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