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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화가 카라바조

by 자한형 2024.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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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화가 카라바조/최원형
‘카라바조’라 불리는 미켈란젤로 메리시 디 카라바조(1571~1610)는 바로크 회화의 선구자로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이탈리아 화가다. 카라바조의 그림을 한 점이라도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은 십중팔구 그의 그림을 도록의 표지로 쓸 정도로 서양미술사에서 그는 가장 추앙받는 화가로 꼽힌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올해 6월부터 영국 내셔널갤러리가 소장한 명화 50점을 들여와 전시회를 열고 있는데, 라파엘로,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등 기라성 같은 화가들의 그림 중 전시의 포스터를 장식한 것도 카라바조의 ‘뱀에 물린 청년’이었다.

1980년대 초 이탈리아 피사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시절 카라바조를 접한 미술사학자 고종희 한양여대 명예교수는 그에게 매료되어 이탈리아 북부에서 남부까지 그의 그림과 발자취를 찾아다니는 등 카라바조를 깊이 연구해왔고, 이를 집대성해 ‘불멸의 화가 카라바조’란 책으로 펴냈다. 카라바조의 삶과 작품 세계, 서양미술사에서의 의미까지 유기적으로 다룬 지은이의 노력에, 가로 24㎝, 세로 28㎝의 대형 판형으로 카라바조의 작품 73점을 포함해 전체 129점의 작품을 품은 책의 물성이 큰 힘을 보탰다.

첫머리에서 지은이는 카라바조의 출생지가 정작 카라바조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힌다. 2007년 한 미술애호가의 탐구로 카라바조가 밀라노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드러난 것이다. 어린 시절을 카라바조에서 보내긴 했으나, 밀라노라는 지역은 카라바조의 작품 세계 형성에 여러모로 큰 영향을 미쳤다. 카라바조 회화의 가장 큰 특징은 빛과 어둠을 극명하게 사용해 극적인 효과를 연출하는 것으로, 이 ‘테네브리즘’은 카라바조 이후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루벤스 등 바로크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지은이는 르네상스 명암법을 종합한 티치아노(티치아노의 제자 시모네 페테르차노가 카라바조의 스승이었다), 밀라노에 머무르며 빛의 효과를 실험하고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 정교한 정물화의 경지를 만들어 이탈리아에 소개된 플랑드르 회화 등 카라바조의 작품 세계 형성에 영향을 준 여러 갈래들을 상세하게 추적한다.
카라바조의 ‘세례자 요한’. 1602년. 로마 카피톨리노 미술관. 한길사 제공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경당 천장화’ 일부. 1508~1512년. 한길사 제공

“카라바조의 천재성은 기존의 작품을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여 완전히 다른 장르로 탄생시킨 데 있었다.” 지은이는 카라바조의 ‘모방’에 주목하는데, 그의 모방은 인물의 재현만이 아닌 “주인공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카라바조의 ‘성 베드로의 순교’는 미켈란젤로가 바티칸 바오로 경당 벽에 그린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에서 영향을 받았으나, 거꾸로 세워지는 십자가에 매달린 베드로의 모습을 마치 스리디(3D) 프로그램 다루듯 좌우로 반전시켰다. 40명 이상의 등장인물들을 단 4명으로 단순화하고, 배경을 검정으로 칠하는 등 극단적인 명암을 넣었다. 별다른 장식과 치장 없이, 관객들로 하여금 마치 연극 무대를 보듯 온전히 주인공의 이야기에만 집중시킨 것이다. 이처럼 카라바조는 이전 화가들의 성취들을 거리낌 없이 가져다 쓰면서도 이를 자기 식으로 독특하게 변형시켰다. 이미 1664년에, 비록 부정적인 의미로 쓰긴 했으나 카라바조의 전기를 쓴 피에트로 벨로리는 가식과 권위, 위선과 장식이 없는 그의 작품 세계를 ‘자연주의’라 일컬었다.지은이는 이 같은 카라바조의 작품 세계와 당시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 맞서 영성을 강조하며 청빈·금욕·구빈 등을 펼쳤던 가톨릭개혁 운동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 주목한다. 보로메오 가문과 콜론나 가문 등 카라바조의 주된 후원자들은 대체로 가톨릭개혁 운동에 앞장섰던 무리였다. 그의 핵심 후원자였던 밀라노 대주교 페데리코 보로메오(1564~1631)는 예수회를 창설한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오라토리오회를 창설한 성 필립보 네리와 함께 가톨릭개혁 운동을 이끈 3대 성인으로 꼽히는 카를로 보로메오와 사촌지간으로, 교회와 갈등을 빚기 전까지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를 후원하기도 했다. 화려한 장식 없이 단순하고 검은 배경에 가난한 사람이나 서민 등을 주로 그렸고, “주름진 얼굴, 더러운 피부, 마디진 손가락, 병자의 손발”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으며 성모마저도 몸이 퉁퉁 부은 모습으로 그린(‘성모 마리아의 죽음’) 카라바조의 ‘자연주의’는, 교회의 권위를 내려놓고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과 함께하려던 “가톨릭개혁 운동의 정신을 시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지은이가 주목한 것이 카라바조의 그림에 자주 등장해 눈길을 끄는 ‘맨발’이다. 가톨릭개혁 운동은 ‘작은형제회’를 설립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1~1226)를 모범으로 삼았는데, 작은형제회 수사들은 영성을 실천하기 위해 맨발로 다니는 등 극단적으로 가난한 삶을 살았다. ‘로레토의 마돈나’ 등 카라바조 작품 대부분에서 등장인물들은 주로 맨발로 그려졌는데, 이는 가톨릭개혁 운동의 정신이 반영된 대목이라는 풀이다.

 
 
카라바조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과일 바구니’. 1597~1600년. 밀라노 암브로시아나 미술관. 한길사 제공
카라바조의 ‘뱀에 물린 청년’. 1593~1594년. 피렌체 로베르트 롱기 재단. 한길사 제공
카라바조의 ‘뱀의 마돈나’. 1605~1606년.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한길사 제공

그러나 1605년 교황으로 선출된 바오로 5세는 개혁적 성향이던 이전 교황들과 달리 “현실의 화려함을 즐기는 성향”이었고, “이로 인해 미술에서는 카라바조의 사실적인 그림풍보다는 안니발레 카라치, 귀도 레니, 베르니니 등으로 대표되는 화려하고 역동적인 바로크 미술이 힘을 얻게” 된다. ‘뱀의 마돈나’, ‘성모 마리아의 죽음’ 같은 작품들이 원래 설치됐던 자리에서 철거되는 등 이전까지 로마에서 잘 나갔던 카라바조에게도 불행이 찾아왔다. 1606년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인 그는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팔리아노, 나폴리, 몰타 등으로 도피를 다니며 사면을 기다렸으나,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다치는 등 지속적으로 ‘사고를 쳤’다. 1610년 사면받기 위해 로마로 향하던 중 토스카나의 에르콜레란 마을에서 말라리아 또는 식중독으로 추정되는 이유로 38년의 짧은 삶을 마감했다. 카라바조가 씨를 뿌린 바로크 회화는 이후 루벤스,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같은 거장들에 이르러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

그림읽어보기: 도마뱀에 물린 소년(1595-1600)-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 스칼렛

17세기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를 연 화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도마뱀에 물린 소년(1595-1600)>. 어두운 화면 속 한 소년이 순간적으로 놀라며 살짝 찌푸린 표정을 짓고 있다. 그의 얼굴은 한쪽에서 들어온 빛으로 반쯤 환하게 반쯤은 그늘져 있어서 오히려 소년의 살짝 찌푸린 미간이 더 부각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가장 빛을 많이 받은 곳은 보는 이의 왼쪽으로 보이는 그의 드러난 어깨와 반쯤 벗겨져 보이는 하얀 옷자락이다. 그의 포즈는 소년의 것이라기보다는 어딘가 양성적인 이미지를 가져다 준다. 무엇보다 소년의 곱슬거리는 머리에 꽃힌 한송이의 꽃은 묘하게 눈길을 끈다. 화들짝 놀라며 왼손을 들어올리는 장면은 소년의 것이라기보다는 여인의 이미지를 풍긴다고 해야할까. 그래서 이 작품은 화가의 동성애적 코드를 담고 있다고 보여지기도 한다. 그림 속 소년의 오른손이 앞으로 뻗어있는데, 가운뎃 손가락만 아래로 구부러져 있다. 어둑해서 잘 보이지 않겠지만, 그 구부러진 손가락이 바로 도마뱀에게 물린 손가락이다. 하필 도마뱀은 왜 소년의 중지를 문 것일까. 해석에 따르면 가운뎃 손가락과 그것을 물고 있는 도마뱀, 그리고 그 아래 놓여있는 붉은 체리 열매는 성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카라바조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양성적 이미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작품의 경우에는 성적인 의미로 읽혀질 수도 있고, 단순한 감각의 표현으로도 읽혀질 수 있다고 한다. 카라바조의 이러한 양식은 17세기 네덜란드 바니타스 정물화에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정물화의 시작이 카라바조의 <과일바구니(1597)>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를 연 '새로운 미켈란젤로'라 불리는 화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는 밀라노 혹은 베르가모 근교 카라바조 출신이다. 밀라노에서 화가로 교육을 받고 로마로 갔으나 처음에는 가난하고 병약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델 몬테 추기경의 후원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으며 치밀하게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바로크 미술 양식을 확립하였다. 강력한 명암 대비로 극적인 효과를 가져다 주는 기법을 활용하였으며, 그의 영향을 받아 17세기 테네브리즘 화파가 형성되게 된다. 카라바조의 천재성과 함께 늘 이야기되는 것은 그의 괴팍한 성격과 기질. 매번 싸움에 휘말리고 폭음과 빚에 시달렸던 그는 결국 로마에서 살인을 저지른 후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거쳐 몰타에까지 도망가게 된다. 도망자 신세였어도 그의 재능을 사랑한 후원자들로 인해서 그는 작품 활동을 지속하게 되고, 교황의 사면을 받으려는 노력으로 몰타에서는 성 요한 기사단의 기사가 되지만, 다시 폭력을 행사하면서 기사단에서 제명되고 투옥된다. 탈옥한 그는 교황의 사면을 얻기 위해 그림을 제작하였고 나폴리를 거쳐 로마로 가던 중 열병에 걸려 사망한다. 이미 카라바조의 삶에 대해서는 이전에 다룬 작품에서 소개했으므로 여기에서는 간략한 소개로 마친다.

*이 작품은 영국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은 두개의 진품이 있는데 다른 하나는 피렌체 근교 론기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정보와 이미지는 네이버 검색을 참고하고 내려받았다.

*여담: 2024119일부터 2025327일까지 서울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빛의 거장: 카라바조 & 바로크의 얼굴들" 전시회가 열린다. 이번 전시의 메인 포스터에 걸린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카라바조/네이버지식백과

요약 이탈리아 화가. 기술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참신하고 대담한 자연주의로 채워 17세기를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다. 그 결과 '카라바지스티'라 불리는 그의 추종자들이 유럽 전역에서 생겨났다. 초상화, 정물화에 뛰어났고, 사실적인 종교화를 그렸다.

<병든 바쿠스>에서 카라바조는 자신을 포도주의 신으로 그렸다.

원어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출생-사망

1573~ 1610718

출생지-사망지

이탈리아 카라바조 - 이탈리아 포르테르콜레

예술양식

혁신적인 화가, 대담한 명암의 대비를 매우 극적이고 종교적인 상징으로 사용함, 종교미술에 강렬한 사실주의를 도입함

작품

미술작품 감상하기

현대의 시각에서 볼 때,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는 정서불안에서 비롯된 제멋대로인 성격과 천부적인 재능, 선술집에서의 폭음과 격렬한 싸움, 그리고 많은 빚과 음침한 친구들, 반복된 투옥, 살인 혐의, 수년간의 도주생활, 때 이른 죽음 등 천재 예술가가 갖추어야 할 항목들을 완벽하게 갖춘 가장 찬미 받는 회화의 반항아들 중 한 명이다. 그의 회화 양식은 부분적으로 서툴고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티가 났지만, 카라바조는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참신하고 강력하며 대담한 자연주의로 채워, 17세기를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다. 그 결과 '카라바지스티(Caravaggisti)'라고 불리는 그의 추종자들이 유럽 전역에서 생겨났다.

소년 시절에 살던 도시의 이름을 따서 카라바조라고 불린 그는 건축가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죽었고, 그의 어머니는 그가 젊었을 때 죽었다. 활동 초기, 카라바조가 베네치아와 크레모나, 밀라노, 볼로냐를 거쳐 로마에 도착했을 때, 그는 고아였고 빚을 진 상태였다. 그림을 그리는 기교가 뛰어났던 카라바조는 베네치아풍의 그림들을 스스로 익히면서 빛과 색채를 이해하게 되었다. 초기의 작품들은 수수께끼 같은 초상화가 주를 이루었다. 이 가운데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자화상 <병든 바쿠스>(1593~1594)가 있다. 이 작품은 인물뿐만 아니라 정물에도 뛰어난 그의 특별한 재능을 보여준다.

 

카라바조의 뛰어난 명암의 사용을 보여주는 <엠마오의 만찬>

전형적으로 잔인한 성서의 장면 <세례자 요한의 참수>

1600년에 카라바조는 많은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순수주의자들은 그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고 사전에 밑그림을 그리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는 캔버스에 직접 스케치를 하고 그 위에 바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매장>(1602~1603)과 같은 종교화들을 주문받아 제작했는데, 이 중 일부는 묘사가 지나치게 사실적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강한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명암법을 사용한 그의 독창적인 표현법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지녔고, 로마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적인 복음을 전파하려는 열의와도 조화를 이루었다. 1606년 카라바조는 결투를 벌이다가 상대방을 죽여 도주했다. 이 와중에도 그는 여전히 작품의 주문을 받았다. 이는 아마도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인 듯하다. 카라바조는 사면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로마로 가던 길에, 서른아홉이라는 이른 나이로 열병에 걸려 죽음을 맞았다. 그는 몰랐지만, 사면은 이미 내려진 상태였다.

 

끊이지 않는 추문

카라바조의 작품은 항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그림들은 종교적인 후원자들에 의해 불경스러울 만큼 '사실적'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동정녀 마리아의 죽음>(1601~1606)은 의뢰를 맡겼던 교회로부터 거절당했다. 이 작품의 여성 모델이 카라바조의 애인이던 매춘부였고, 성모 마리아의 죽음을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죽음으로 묘사했으며, 배를 불룩하게 그리고 다리를 노출시켰다는 이유에서였다. 최근에는 카라바조가 동성연애자였다는 가설이 힘을 얻고 있는데, 많은 학자들은 이를 과거에 대한 현대의 잘못된 재해석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