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세비야(Sevilla)출신 화가 '벨라스케스'/ 이광원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의 자세 '진정한 자신감'
세비야(Sevilla)에서 만난 화가 '벨라스케스'
스페인 남서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수도인 세비야(Sevilla)는 그 유명한 플라맹고 춤의 본고장이다.
스페인에서 마드리드 - 바르셀로나 - 발렌시아 다음으로 큰 도시인 세비야는 '세빌리아'라고도 불린다. 16세기에 신대륙을 발견한 콜롬버스가 그 곳의 보물을 들여온 곳도 마젤란이 세계 일주의 닻을 내린 곳도 세비야이다. 신대륙에서 들여온 막대한 황금과 은을 바탕으로 유럽에서 가장 발전했던 세비야는 17세기 이후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걸었고 1992년 엑스포를 개최하면서 다시 한번 세계에 이름을 널리 알렸다.
세비야는 콜럼버스의 항해가 시작된 곳이다. 대담한 항해계획으로 시작한 아메리카 대륙은 유럽인들의 활동 무대가 되었고, 에스파냐가 주축이 된 신대륙 식민지 경영을 꽃피우려고 했던 콜롬버스의 항해는 세비야 대성당의 무덤에서 일장춘몽(一場春夢)의 꿈으로 멈춰섰다.
세비야는 유명한 예술가를 배출한 도시로 벨라스케스가 이 곳 출신이고, 오페라 '비제'의 '카르멘'과 모차르트의 '돈 후안',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의 무대이다.
위대한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 DIEGO VELÁZQUEZ :1599년 ~ 1660년 ]는 고야, 마네, 피카소 등에게 영향을 주었던 에스파냐 세비야 출신의 17세기 유럽 회화의 거장이다. 펠리페 4세의 시기에 궁정 화가가 된 이후 평생동안 궁정 화가로 지냈다.
벨라스케스의 재능은 그의 고향 세비야에서 연마되었다. 그는 프란시스코 에레라의 공방을 거쳐, 열두 살에는 화가 프란시스코 파체코의 작업실과 아카데미에서 실력을 쌓았다. 벨라스케스는 1617년에 독립 화가로서 일할 세비야 길드의 면허증을 얻었다. 그는 이론가와 인문주의자로서 유력한 친구들을 둔 파체코로부터 문화적 교육을 받았고 지적인 르네상스 사상들을 소개받았다. 사실적이고 심리적으로 꿰뚫어 보는
초상화와 민첩하고 자유로운 자신감이 넘치는 거장의 화법으로 많은 서양화가들의 표본이 되었다.
펠리페 4세의 궁정 화가로 공직에 임명된 벨라스케스는 마드리드로 이사했고 평생 궁정 화가로 지냈다. 펠리페 4세는 자신의 초상화를 벨라스케스 외에는 아무도 그리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벨라스케스의 대표작품 중에서도 인물의 성격을 잘 표현한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초상화 중 하나이며, <펠리페 4세 일가를 담아낸 <시녀들(Las Meninas)>은 많은 수수께끼와 토론거리를 남기고 있는 명작이다.
<시녀들(Las Meninas)>은 1656년경에 제작된 벨라스케스의 대표적 작품으로 작품은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마드리드 궁전에 있는 큰 방을 그린 것이다. 스페인 왕실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들을 마치 순간적으로 포착한 스냅샷 사진을 찍은 것처럼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몇몇 인물들은 캔버스 밖을 바라보고 있는 반면, 다른 몇몇 인물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동작을 진행하고 있다. 어린 '마르가리타' 왕녀를 담당하는 시녀들, 샤프롱, 호위병, 그리고 두 명의 난장이가 에워싸고 있다.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에 보관되어 있는 이 작품은 오랫동안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들 중의 하나로 바로크 시대의 화가 루카 지오다노는 이 작품을 가리켜 '회화의 신학'이라고 표현했으며, 19세기 토마스 로런스 경은 이 작품을 '예술의 철학'이라고 말했다. 당당함과 자신감이 넘치는 "회화 방식이 가진 가능성을 가장 철저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감상평이 절로 나오는 걸작이다.
당당함 (堂堂함)과 자신감(自信感 / self-confidence)이 넘치는 벨라스케스의 세계적인 걸작을 바라보면서 우리 시대의 자신감을 떠올려 본다.
인생에서 여러 번 만나는 자신감은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자신감'은 스스로를 믿는 감정이란 뜻이다. 용기에도 포함된다. 자신감이 많은 사람은 대범하게 행동하는 편이어서 결과의 도출이 빠른 편이며 설령 결과가 좋지 않아도 금방 긍정적으로 바뀐다. 하지만, 남 앞에 내세울 만큼 모습이나 태도가 떳떳한 자신감만 넘치면서 상대방을 향한 배려나 예절이 없다면 '자만심'이 되고 자신감을 뒷받침할 현실적인 근거가 없으면 '웃음거리 꼰대'가 된다. 하지만 자신감과 함께 상대방을 향한 배려나 예절을 둘 다 지녔다면 그 사람은 범상한 인물이 아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국이 남북으로 쪼개지고 전쟁에 직면한 상황이 되어도 좌절하기는커녕 패전이라는 생각을 전혀 안 했다고 한다. 스스로 미국을 위해 희생하고, 희생하고 있는 군인들을 위해 늘 편지를 쓰고 위문하면서 병사 한 명 한 명의 손을 잡고 기도한 모습은 진정한 자신감을 발견하게 한다.
아일랜드의 극작가 겸 소설가인 조지 버나드 쇼는 자신감에 대해 "자신의 부족한 점을 더 많이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이는 더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라고 말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채워가면서 겸손한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자. 스스로를 연마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의 자세를 지닐 때 '진정한 자신감'을 완성할 수 있다.
세계 명화 100선 (11) 시녀들 Las Meninas / 디에고 벨라스케스&차일피일
시녀들 Las Meninas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Las Meninas, 1656)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는 스페인의 바로크 시대 화가이다.
그가 1656년에 그린 "시녀들" (Las Meninas)은 서양 미술사에 있어 매우 영향력 있는 그림의 하나로 평가되며, 가장 많이 분석되고 연구된 그림의 하나이다.
그림은 가로 276센티미터, 세로 318센티미터의 크기이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 (Museo del Prado)에 소장되어 있다. (사진 1)
(사진 1) 프라도 미술관 (Museo del Prado)
디에고 벨라스케스, 17세기 서양 회화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17세기 스페인의 가장 중요한 화가이다. 바로크 시대에 활동하였으며, 서양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위대한 화가로 평가된다.
그는 16세기 베네치아의 자연주의적 화풍을 기초로,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깊은 관찰력으로 대상 인물과 정물을 탁월하게 묘사한 그는 당시로서는 독창적인 시각적 효과를 창출하였다.
다양한 화필, 섬세한 색조의 조화로 그는 형태, 질감, 공간, 빛과 분위기에 있어 특징적인 효과를 이루어,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에 큰 영향을 미친 선구자로 평가된다.
그의 생애 동안 그린 그림은 120점 정도로 많은 편은 아니다. 19세기 이전까지는 스페인 바깥에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19세기 이후에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에두아르 마네, 제임스 휘슬러, 존 싱어 사전트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현대에 와서는 살바도르 달리, 파블로 피카소가 그의 작품을 모티프로 하는 그림을 그렸다.
1599년 세비야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 미술적 재능을 보였다. 매너리즘 화가 프란시스코 파체코 밑에서 공부하였다. 나중에 파체코의 딸과 결혼하였다.
벨라스케스는 초기에는 당시 스페인에서 유행하던 일상생활에서의 정물을 그리는 보데곤(Bodegon) 양식의 그림을 그렸다.
그가 19살 때 그린 "달걀 부치는 노파" (Old woman frying eggs, 1618)는 사실주의적 묘사에 뛰어난 그의 재능을 보여준다. (그림 1)
(그림 1) "달걀 부치는 노파" (1618)
그의 다른 그림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와 부엌 장면" (Kitchen scene with 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 1618)도 초기 작품이다. (그림 2)
(그림 2)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와 부엌 장면" (1618)
이 그림은 그림 속의 예수, 마르다, 마리아의 대화하는 장면이, 부엌을 통해 보는 실제로 일어나는 상황인지, 아니면 벽에 걸린 그림인지, 아니면 거울에 비친 광경인지에 대해 여러 해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림 "세비야의 물장수" (The water seller of Seville, 1618-22)는 보데곤 장르의 걸작으로 흔히 일컬어진다. (그림 3)
(그림 3) "세비야의 물장수" (1618-22)
스페인 궁정 화가, 초상화의 대가
1622년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가 죽었다. 왕실에서는 벨라스케스에게 국왕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위임하였다.
초상화 그림에 만족한 왕실에서는 그를 궁정화가로 임명하였고, 그 이후 국왕의 벨라스케스에 대한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국왕은 벨라스케스만 그의 초상화를 그려야 한다고까지 하였다.
벨라스케스는 34점의 국왕 초상화를 그렸다. "갈색과 은색 옷의 펠리페 4세" (Philip IV in brown and silver, 1635)와 "프라가에서의 펠리페 4세 초상화" (Portrait of Philip IV in Fraga, 1644)가 잘 알려져 있다. (그림 4-5)
(그림 4) "갈색과 은색 옷의 펠리페 4세" (1635)
(그림 5) "프라가에서의 펠리페 4세 초상화" (1644)
벨라스케스의 초상화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화" (Portrait of Pope Innocent X, 1650)이다. (그림 6)
(그림 6)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화" (1650)
이 초상화는 많은 미술 비평가들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잘 그려진 초상화라는 평가를 받는다.
벨라스케스가 1949년 이탈리아를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 교황은 그의 명성을 듣고 그에게 초상화를 의뢰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조심스러운 그는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기 전에 다른 초상화를 그려 보여줄 것을 요청하였다.
벨라스케스는 그가 수행원으로 데려간 노예의 초상화를 그려 보여주었고, 이에 만족한 교황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
"후안 데 파레하의 초상화" (Portrait of Juan de Pareja, 1650)가 그 그림이며, 이것 또한 초상화의 걸작에 속한다. 1970년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 / The Met)에서 당시로서는 세계 미술품 최고 거래가인 100만 파운드에 구입하였다. (그림 7)
(그림 7) "후안 데 파레하의 초상화" (1650)
시녀들 (Las Meninas)
그림 "시녀들" 은 벨라스케스의 걸작이며,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그림의 하나로 평가된다. (그림 8)
(그림 8) "시녀들" (Las Meninas, 1656)
이 그림에는 11명의 인물이 들어 있다. (그림 9)
(그림 9) 그림 속의 11명의 인물
(1) 중앙에 서 있는 여자아이는 5살의 마르가리타 공주이다.
국왕 펠리페 4세와 왕비 마리아나의 자녀 중에서 당시로서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딸이다. 나중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와 결혼하나, 21살에 죽었다. (그림 10 / 상세)
(그림 10 / 상세) 공주
(2) 2명의 시녀 중 하나인 이사벨 데 벨라스코이다.
당황하여 일어서면서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잡고 가볍게 무릎을 굽혀 '커치' (curtsy) 인사를 하고 있다. 국왕 부부에게 인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 11 / 상세)
(그림 11 / 상세) 시녀 1
(3) 2명의 시녀 중 하나인 마리아 아구스티노 사르미엔토이다.
공주의 왼쪽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금쟁반 위의 빨간 병에 든 음료를 권하는데, 공주는 관심이 없다. (그림 12 / 상세)
(그림 12 / 상세) 시녀 2
(4) 그림의 오른쪽에 있는 2명의 난쟁이 중 독일인 광대 마리 바르볼라이다.
(5) 2명의 난쟁이 중 이탈리아인 니콜라스 페르투사토이다. 발로 옆에 졸고 있는 개를 장난삼아 깨우고 있다. (그림 13 / 상세)
(그림 13 / 상세) 두 난쟁이
(6) 공주의 시녀장(chaperone) 마르셀라 데 우요아이다. 옆의 경호원과 이야기하고 있다.
(7) 경호원이 누군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림 14 / 상세)
(그림 14 / 상세) 시녀장과 경호원
(8) 멀리 뒤쪽 문 입구에 서 있는 사람은 여왕의 시종 호세 니에토 벨라스케스이다. 벨라스케스의 친척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림 15 / 상세)
(그림 15 / 상세) 여왕의 시종
(9) 벨라스케스 화가 본인이다. 붓을 쥐고 왼손에 팔레트를 들고 있다. 앞에는 그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큰 캔버스가 보인다. (그림 16 / 상세)
벨라스케스의 가슴에는 산티아고 기사단의 상징인 붉은 십자가가 달려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는 산티아고 기사단 작위를 받지 못했다. 그림이 완성되고 3년 후에 작위를 받았다.
따라서 붉은 십자가는 나중에 추가된 것이다. 일설에는 국왕이 직접 그려 넣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림 16 / 상세) 벨라스케스
(10) 거울에 비친 오른쪽 사람은 국왕 펠리페 4세이다.
(11) 왼쪽은 여왕 마리아나이다. (그림 17 / 상세)
(그림 17 / 상세) 국왕 부부
그림에는 11명의 인물이 있고, 그림의 제목은 "시녀들" 이다. 원래 제목은 "가족" 이었고, 1794년에는 "펠리페 4세의 가족" 으로 목록에 등재되었다. 1843년 프라도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시녀들" 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그림 속의 상황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제목은 "시녀들" 이지만, 그림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것은 마르가리타 공주이다.
하지만 그림 속의 화가 벨라스케스는 공주와 시녀들의 뒤쪽에 서 있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림 18 / 상세)
(그림 18 / 상세) 벨라스케스와 공주와 시녀들
따라서 벨라스케스가 그리고 있는 대상은 공주가 아니고, 거울에 비치고 있는 국왕 부부이다. 국왕 부부는 그림 바깥에 존재하며,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관람객이 있는 위치에 있다.
국왕 부부가 장시간 그림의 모델로 앉아 있기가 심심해 공주 일행을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어린 공주는 싫증이 나 있는 표정이고, 시녀가 다과 음료로 달래고 있다.
난쟁이들은 공주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와 있는 것으로 보이나, 공주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한 시녀가 무릎을 굽혀 인사하는 것은 그림 그리는 것이 끝나서 국왕이 자리를 뜨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벨라스케스는 공주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고, 국왕 부부가 궁금해서 화실을 찾아온 것일 수도 있다.
이 경우 화가는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보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된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공주의 다른 초상화에서는 모두 얼굴과 몸을 반대쪽으로 돌리고 있으며, 가르마 방향도 반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주의 모습을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보는 것이다.
거울을 이용하여 국왕 부부를 그림 바깥에 있는 관람객의 위치에 둠으로써 그림의 공간을 확장하는 효과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시도는 얀 반 에이크의 그림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 (1434)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림 19)
(그림 19)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 (1434년)
그림의 뒷면 벽에 거울 속에 비친 인물이 그려져 있다. (그림 20 / 상세)
(그림 20 / 상세) 거울에 비친 인물
그림 "시녀들" 의 뒤편 멀리 열린 문을 통하여 밝은 빛이 들어오고 있는 것도 그림의 공간을 확대하는 효과를 주고 있다. 오른쪽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과 함께 인물을 부각시키고, 그림 상단의 어두움과 잘 대비시키고 있다.
그림의 뒤쪽 벽에는 2점의 그림이 걸려 있다. (그림 21 / 상세)
(그림 21 / 상세) 뒤쪽 벽에 부착된 그림 2점
왼쪽의 그림은 루벤스의 "팔라스와 아라크네" (Pallas and Arachne, 1636)이다. 벨라스케스는 루벤스를 높이 평가하고 존경하고 있었다. (그림 22)
(그림 22) 루벤스의 "팔라스와 아라크네" (1636)
오른쪽의 그림은 야코프 요르단스(Jacob Jordaens, 1593-1678)의 "아폴론의 마르시아스에 대한 승리" (Apollo's victory over Marsyas, 1638)이다. (그림 23)
(그림 23) 야코프 요르단스의 "아폴론의 마르시아스에 대한 승리" (1638)
그림 "시녀들" 은 많은 현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사랑을 받았다. 여러 화가들이 이 그림을 모티프로 하여 그림을 그렸다.
특히 피카소는 1957년 "시녀들" (Las Meninas)이라는 제목으로 58점의 연작 그림을 그렸다. (그림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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