램브란트 /작은 비움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van Rijn, 1606-1669)은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화가 중 한 명입니다. 그의 작품은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한 감동적인 이야기와 뛰어난 빛과 그림자 처리로 유명합니다. 렘브란트의 삶은 예술적인 성공과 개인적인 비극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의 작품들은 이러한 경험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렘브란트의 주요 작품들과 그의 예술적 성취, 그리고 그의 삶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해보겠습니다.
렘브란트의 초기 생애와 예술적 배경
렘브란트는 1606년 네덜란드의 레이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제분업자였고, 렘브란트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대한 남다른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는 레이덴 대학교에서 잠시 공부했지만, 곧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했습니다. 이후 암스테르담으로 이동하여 당대 최고의 화가 피터 라스트만(Pieter Lastman) 밑에서 수련을 받았습니다.
독립 화가로서의 시작과 결혼 생활
렘브란트는 1631년 독립하여 자신의 화실을 열고 초상화가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뛰어난 기술과 독창적인 화풍은 빠르게 명성을 얻었고, 1634년에는 부유한 상인의 딸 사스키아 판 윌렌버그(Saskia van Uylenburgh)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이 결혼은 렘브란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사스키아는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모델이 되었습니다.
주요 작품 분석
야경 (The Night Watch, 1642)
'야경'은 렘브란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로,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민병대를 그린 대형 회화입니다. 이 작품은 독특한 조명 효과와 인물들의 생동감 있는 포즈로 유명합니다. 특히 빛과 그림자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인물들의 입체감을 강조하며, 작품 전체에 강한 에너지를 불어넣습니다.
돌아온 탕자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9)
'돌아온 탕자'는 렘브란트의 후기 작품 중 하나로, 성경의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포옹을 중심으로 한 이 작품은 깊은 감정 표현과 따뜻한 조명으로 관객에게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이 작품은 렘브란트의 인간 이해와 동정심을 잘 보여줍니다.
투르프 박사 해부학 강의 (The Anatomy Lesson of Dr. Nicolaes Tulp, 1632)
이 작품은 렘브란트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로, 네덜란드 의사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그린 작품입니다. 작품은 해부 실습 중인 시신을 중심으로 의사들이 모여 있는 장면을 묘사하며, 빛과 그림자의 탁월한 처리로 인물들의 사실감을 높였습니다. 이 작품은 렘브란트의 뛰어난 관찰력과 기술을 잘 보여줍니다.
유대인 신부 (The Jewish Bride, 1665-1669)
'유대인 신부'는 부부의 사랑과 애정을 담은 감동적인 작품입니다. 작품의 제목은 후대에 붙여진 것이지만, 그림 속 인물들은 실제 부부나 연인으로 추정됩니다. 렘브란트는 두 인물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그들의 깊은 감정을 표현하였으며, 따뜻한 색조와 부드러운 붓질로 작품의 분위기를 한층 더했습니다.
삼손의 실명을 초래한 달릴라 (The Blinding of Samson, 1636)
이 작품은 구약 성경의 삼손과 달릴라 이야기를 극적으로 재현한 작품입니다. 달릴라가 삼손의 머리카락을 자른 후, 삼손이 포로로 잡혀 실명되는 순간을 그린 이 작품은 강렬한 감정 표현과 역동적인 구도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렘브란트는 빛과 그림자를 통해 장면의 긴장감을 극대화하였습니다.
렘브란트의 중기와 후기 작품
렘브란트의 중기와 후기 작품들은 그의 인생 경험이 반영된 깊이 있는 표현과 인간적인 감동을 담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더욱 어둡고 내면적인 성찰을 담게 되었으며, 이는 그가 겪은 개인적인 비극과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사스키아의 죽음과 그 이후의 작품들
1642년, 렘브란트의 아내 사스키아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이 시기 이후 그의 작품들은 더욱 어두워지고, 깊이 있는 감정을 담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지만, 재정적인 어려움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렘브란트의 예술적 유산과 영향
렘브란트는 빛과 그림자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인간 내면의 깊이를 섬세하게 표현하는 새로운 화풍을 개척했으며, 이는 후대 화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렘브란트의 빛과 그림자의 사용, 붓터치의 자유로움, 색채의 풍부함 등을 배우고 발전시켰습니다.
렘브란트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으며, 그의 작품은 전 세계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의 예술적 유산은 그의 삶과 작품을 통해 계속해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영향과 현대 예술
렘브란트의 영향은 현대 예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작품은 빛과 그림자를 통해 인간의 감정과 내면을 표현하는 방법을 탐구하는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현대 예술가들은 그의 기법을 연구하고, 자신의 작품에 적용하여 새로운 예술적 표현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기법과 현대 예술가들
현대 예술가들은 렘브란트의 기법을 연구하며, 그의 빛과 그림자 처리 방식을 자신들의 작품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렘브란트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새로운 예술적 표현을 창조하며, 그의 예술적 유산을 현대에 이어가고 있습니다.
결론
렘브란트 판 레인은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대표적인 화가로, 그의 작품은 풍부한 감정 표현과 뛰어난 빛과 그림자 처리로 유명합니다. 렘브란트의 삶과 작품은 그의 예술적 성취와 인간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며, 그의 예술적 유산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의 대표작들은 미술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 예술가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렘브란트/네이버지식백과
[ Rembrandt Harmensz. van Rijn ]
출생 - 사망
1606 ~ 1669
스페인과의 독립 전쟁에서 승리해 개신교 공화국이 된 네덜란드의 17세기는 전무후무한 황금시대(The Golden Age)이자, (1970~1971년 파리에서 열렸던 전시 제목처럼) ‘렘브란트의 세기(Le Siecle de Rembrandt)’였다. 네덜란드 자체가 ‘렘브란트의 나라’로 불릴 정도이니, 렘브란트라는 이름은 한 시대와 나라를 상징하는 크기를 갖고 있다. 그는 역사화, 초상화, 풍경화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고 유화, 판화, 드로잉 등 회화의 모든 매체를 사용해 ‘렘브란트의 빛’으로 조명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렘브란트 하르멘스존 판 레인(Rembrandt Harmensz. van Rijn, 1606 ~ 1669)은 당시 네덜란드에서 암스테르담다음가는 공업도시이자 대학도시였던 레이덴의 중산계급 출신이다. 그의 조상이나 형제·자매 중 미술과 관련된 직업을 가진 사람은 없고, 부친과 조상은 제분업에 종사했다. 그는 라틴어 학교를 거쳐 레이덴대학에 등록했으나 얼마 다니지 않았고, 화가 스바넨부르흐(Jacob van Swanenburgh)에게 그림 수업을 시작하여 그의 도제(徒弟)로 3년을 보냈다. 이후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당시에 가장 유명했던 역사화가 피터 라스트만에게서 6개월간 그림을 배운 뒤, 1626년부터 레이덴에서 독자적인 작업실을 운영했다. 1631년에는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여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작업했다.
1630년대 초부터 그는 부친의 이름을 나타내는 ‘하르멘스존’과 집안의 제분소가 라인 강변에 있어서 만들어진 성인 ‘판 레인’을 빼고, 세례명인 ‘렘브란트’만으로 서명한다. 이는 그가 모델로 삼았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처럼 세례명으로 알려지기를 원했던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개신교 공화국 시민 계급의 초상
초기부터 렘브란트의 야심은 역사화가가 되는 것이었으나 개신교 공화국이었던 네덜란드에는 종교나 역사, 신화 주제의 대작을 주문할 교회나 궁정이 없었다. 미술품의 주요 수요자는 네덜란드의 시민, 즉 상인을 중심으로 한 중산계급이었다. 활동 초기의 렘브란트는 이러한 고객의 초상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렘브란트에게 처음으로 초상화를 주문한 니콜라스 루츠(Nicolaes Ruts)도 러시아와 모피 무역을 하던 사업가였다. 1631년에 그린 [니콜라스 루츠의 초상]에서 모델의 직업과 부를 상징하는 모피 의상, 편지를 들고 몸을 살짝 돌린 기민해 보이는 자세, 신중하고 능동적인 인물이라는 인상을 주는 표정으로 화가는, 그때까지 그려지던 왕이나 귀족의 위세 초상(swagger portrait)과 완전히 다른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 렘브란트는 새로운 계급 즉 부와 겸양을 함께 갖춘 프로테스탄트 부르주아 초상의 유형을 성공적으로 창조해 낸 것이다. 이 작품은 후에 J.P. 모건이 구입하여 ‘영웅으로 묘사된 사업가’의 이미지가 동업의 후예에게 가진 호소력을 증명하기도 했다.
[마르텐 솔만스 초상] 1634
캔버스에 유채, 207×132.5cm, 개인소장
[오프옌 코피트 초상] 1634
캔버스에 유채, 207×132.5cm, 개인소장
마르텐 솔만스(Maerten Soolmans)와 오프옌 코피트(Oopjen Coppit)의 초상은 렘브란트가 그린 개인 초상화 중 가장 큰 작품들이다. 남자는 (관람자가 보기에) 왼쪽, 여자는 오른쪽에 걸게 되어 있던 부부 초상화인데, 다른 중산층 부부 초상화와 달리 서있는 전신이 실물크기로 그려져 있다. 전통적으로 서있는 전신 초상화는 왕과 최고위층의 대신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기 때문에, 이 그림의 크기와 모델의 자세로 이 상인 부부의 막대한 부와 명성, 자부심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보이듯 인물의 사실적인 묘사, 음영의 뚜렷한 대조, 엄청나게 큰 솔만스의 구두 장식을 비롯해 다양한 옷감으로 이루어진 의상의 완벽한 재현은 당시에 렘브란트를 가장 주목 받는 초상화가로 만든 요인이었다.
역사화가 된 그룹 초상화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1632, 캔버스에 유채, 169.5×216.5cm, 마우리트하위스 왕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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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초상화가로서 렘브란트의 입지를 다지게 한 작품은 그가 처음으로 그린 그룹 초상화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Anatomy Lesson of Dr. Nicholaes Tulp]다. 직업 조합이나 자치 단체에서 주문했던 그룹 초상화는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의 정수를 드러내는 장르였다. 그룹 초상화를 주문받는 화가는 군주제에서의 궁정화가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암스테르담 외과 의사 조합이 주문한 조합원의 그룹 초상화인 이 작품에서 렘브란트는 비슷한 그림을 그렸던 당시의 화가들처럼 모델을 화면에 나란히 배치하지 않았다. 모델은 모두 그림의 왼쪽에 모여 있고 화면의 오른쪽은 해부대에 눕혀진 시신과 강의 중인 툴프 박사에게 할애되어 있다. 이러한 비대칭적 구도, 다양한 표정과 각도의 인물의 얼굴이 만드는 다이나믹한 구성은 관람자를 긴장감이 감도는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게 한다. 광원이 분명치 않은, 그림의 내부에서 스며 나오는 듯한 렘브란트 특유의 빛과 어둠의 대조도 원숙한 경지에 접어들어 깊숙한 공간감과 구성의 효과를 더욱 높이고 있다. 렘브란트는 그룹 초상화에 역동적인 구성과 이야기를 도입하는 혁신을 통해, 오늘날의 졸업사진처럼 인물을 의미 없이 배치했던 당대의 그룹 초상화 전부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바닝 코크 대장의 민병대(야간순찰)] 1642, 캔버스에 유채, 363×438cm, 암스테르담 국립 박물관
[바닝 코크 대장의 민병대(야간순찰) The Militia Company of Captain Frans Banning Cocq(Night Watch)]는 렘브란트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하고 가장 큰 작품으로, 그룹 초상화에 렘브란트가 불어넣은 역사화와 같은 역동적인 힘과 드라마를 잘 보여주는 걸작이다. 작품은 새로 지어진 화승총부대의 회관을 장식하기 위한 그룹 초상화들 중 하나이다.
모델은 바닝 코크와 부관인 반 로이텐부르흐, 그리고 16명의 부대원이었으나 렘브란트는 이들을 기념사진 찍듯이 같은 복장으로 나란히 세워 그리지 않았다. 그는 부대원 외에 십여 명의 외부인과, 민병대의 상징인 닭을 매단 소녀와 같은 우의적 인물을 추가했다. 화가는 저마다 다른 복장의 대원들이 각자 다른 동작으로 화면 뒤에서 앞으로 걸어나오면서 대열을 정비하는 혼란스럽고 시끄러운 순간을 화면에 담았다. 그는 이 행렬의 활력넘치는 생동감을 살리면서 강렬한 빛으로 화면을 정돈하고 있다. (밤 장면이 아닌 이 그림에 ‘야간순찰’이라는 제목이 붙은 것은 시민군이 야간에 순찰을 하기 시작하고 그림에 노란 유약이 칠해지면서 더욱 어둡게 변한 1800년경이다.)
암스테르담의 시민군은 14세기에 조직된 것으로 이 도시의 독립과 자부심의 상징이었다. 전통적으로 성문을 지키고 치안을 담당했던 이들은 17세기경에는 일요일마다 시가지를 행진하는 형식적인 모임이 되었다. 이 그림에는 귀족처럼 차려입은 사람도 보이나 시민군 대부분은 부유한 상인들이었다. 렘브란트는 이 작품에서 초상화와 우화, 그리고 역사를 결합하여 이를 이 시대 네덜란드를 기록한 역사화가 되게 한 것이다.
모델과 함께 느끼는 화가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종교화의 주문이 거의 없었음에도 렘브란트는 종교화를 끊임없이 그렸다. 초기에 그는 자신과 가족들을 모델로 한 트로니(tronie)를 많이 그렸다. 트로니는 당시 네덜란드 미술 고유의 장르로, 주문 받아 그리는 초상화가 아니라 화가가 제작하여 일반적인 제목을 붙였던 인물화다. 대부분 얼굴에 뚜렷한 감정과 특징을 드러내면서, 색다른 의상을 입고 있는 경우가 많다. 경매 중독이라고 할 정도로 열정적인 수집가였던 렘브란트는 이국적이고 진귀한 수집품을 트로니를 그리는 데 자주 사용했다. 렘브란트에게 트로니는 초상화와 역사화, 특히 종교화의 중간 지점에 있는 그림이었다.
[눈이 머는 삼손] 1636, 캔버스에 유채, 206×276cm, 시립미술연구소, 프랑크푸르트
[눈이 머는 삼손 Blinding of Samson]은 렘브란트의 종교화 중 이례적으로 ‘바로크적’인 격정을 담은 그림이다. 그는 구약 시대의 삼손이 데릴라에게 속아 힘의 원천인 머리카락을 잘리고 불레셋 군인들에게 눈이 뽑히는 순간을 포착했다. 잔인한 폭력의 묘사, 대각선의 구도,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비가 연극과 같은 효과를 내고 있다. 이런 극적인 양식의 그림을 다시는 찾아볼 수 없지만, 이상화되지 않은 현실적인 인물들과 등장인물의 감정을 화가가 함께 느끼는 듯한 친밀함과 인간애는 이후 렘브란트의 작품들에서 일관되게 발견되는 특징이다.
렘브란트의 누드화에도 이상화된 미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얼굴과 손발을 가리거나 생략한 다른 화가의 누드들과 달리, 그의 누드 속 여성은 대부분 얼굴이 공들여 그려져 있다. 구약 성서의 인물로 다윗 왕의 아내가 되는 밧세바(Bathsheba)를 그린 작품에서도 여성의 얼굴과 표정이 세심하게 그려져 있다. 목욕 중에 다윗의 편지를 받아 든 밧세바는 당시에 유부녀였던 까닭에 깊은 갈등에 잠겨 있다. 성서를 주제로 한 수많은 그림이 그려졌지만 이처럼 밧세바를 고뇌하는 여인으로, 여성 누드를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그린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목욕하는 밧세바] 1654
캔버스에 유채, 142×142cm, 루브르 박물관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NM)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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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살된소] 1655
목판에 유채, 94×69cm, 루브르 박물관 (부분)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NM)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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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장애인, 거지, 부랑자 등 결함 있는 인물들을 즐겨 그렸고 그 그림들에서 그려지는 대상에 연대감을 가졌던 렘브란트의 시선은 사람뿐 아니라 동물에게까지 미쳤다. 네덜란드에서 죽은 동물은 장르화의 부엌 장면에 자주 등장해 왔으나 렘브란트의 [도살된 소 Slaughtered Ox]에서처럼 단독으로 그림의 주제가 된 적은 없었다. 거꾸로 매달려 있는 황소의 시신은 잔인하다고 할 만큼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단순한 부엌 정물화를 대할 때처럼 그림을 편안히 감상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특징은 섕 수틴과 같은 표현주의적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비슷한 작품들을 낳기도 했다.
진실을 말하는 얼굴, 자화상
사람들이 렘브란트에 익숙한 이유 중 하나는 ‘그려진 자서전’이라고 할 정도로 수가 많은 그의 자화상 때문이다. 초기에 그는 표정 연습과 역할 연기적 성격의 자화상, 판매를 위한 트로니 성격의 자화상들을 그리다가 말년에는 오로지 화가로서의 자신을 탐색하듯 응시하는 자화상만을 그렸다.
[자화상(34세)] 1640, 캔버스에 유채, 93×80cm, 내셔널 갤러리 (부분)
ⓒ The National Gallery, London - GNC media, Seoul
런던 내셔널 갤러리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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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53세)] 1659, 캔버스에 유채, 84.4×66cm, 국립 미술관, 워싱턴
1640년에 그린 자화상은 성공한 30대 화가의 지위와 야심을 보여준다. 구도에서 라파엘로의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와 티치아노의 [루도비코 아리오스토]의 영향을 받은 이 작품은 렘브란트가 라파엘로, 티치아노뿐 아니라 그들의 모델과도 경쟁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르네상스 시대의 전형적인 궁중 대신 카스틸리오네와, 같은 시대의 시인인 아리오스토를 참조함으로써 화가는 자신이 초상화를 주문한 저명인사와 사회적 신분이 동일하고, 손의 예술로만 여겨져 왔던 그림이 정신적 예술인 시와 동등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자화상(62세)] 1668년경
캔버스에 유채, 82.5×65cm, 발라프-리하르츠 미술관, 쾰른
부와 명예를 누렸던 렘브란트는 규모 없는 생활로 1656년에 파산을 하고 만다. 집과 작품, 수집품들을 처분해야 했고, 자기 그림을 맘대로 팔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던 말년의 십여 년 동안 렘브란트는 정면을 향하고 있는 자화상을 집중적으로 그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려진 작품 중의 하나인 1659년의 자화상에서는 아무런 가장 없이, 얼굴과 눈빛만으로 위엄을 전달하는 화가의 모습이 화면 밖으로 살아 나올 듯 생생 하다.
1642년에 죽은 아내 사스키아 대신 아들 티투스를 키워주고 딸 코르넬리아를 낳았던 헨드리케도 1663년에 죽었고, 1668년에는 티투스도 세상을 떠났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갈수록 심해져 1662년에는 사스키아의 묘지터까지 팔아야 했다. 화가는 가족과 재산과 명예를 잃었지만 그림을 멈추지는 않았다. 1668년경 그는 자신을 화가로 묘사한 최후의 자화상을 그렸다. 이 작품에서 그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못생긴 노파를 그리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숨이 막혀 죽었다는 화가 제욱시스(Zeuxis)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림 표면은 거칠고 자유분방해졌고 화가는 웃음만 남긴 채, 어둠 속으로 휘발되어 사라져 버릴 듯한 모습이다.
평생 외국 여행을 한 적이 없었던 렘브란트의 작품과 명성을 암스테르담 밖으로, 네덜란드 너머로 알린 것은 그의 판화였다. 그는 에칭, 드라이포인트, 인그레이빙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채색된 드로잉이나 회화의 느낌이 날 정도로 자연스럽고 유려하며 풍부한 효과를 내는 판화를 제작했다.
고전주의적 규범이 지배한 18세기에 렘브란트의 거친 사실주의는 아카데미의 변방에 머물 수밖에 없는 규칙의 파괴로 보여 평가절하되었다. 19세기에 들라크루아 같은 낭만주의 작가들이 그를 재발견했고, ‘대중들로부터 외면받는 고독한 예술가’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현대의 대중이 선호하는 표현주의적 화풍을 가진 대부분의 예술가들처럼 렘브란트의 인생에 대해서도 근거 없는 ‘문학’이 많이 덧붙었다. 그러나 그의 삶에 대해서는 확실한 사실이 많지 않고, 위작이 너무 많아 정확한 작품 숫자조차 파악이 안 되고 있는 실정이다. 네덜란드 정부의 기금으로 1968년에 만들어진 ‘렘브란트 조사 계획(Rembrandt Research Project)’은 그의 그림으로 알려진 모든 작품을 대상으로 진위를 검토하고 그 결과를 [렘브란트 회화 전집 A Corpus of Rembrandt Paintings]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로 발표해 왔다. 2005년에 4번째 보고서가 나왔고, 그의 진짜 ‘전집’을 확정하기 위한 조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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