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신비로움 구스타프 클림트/아트랑
< 클림트 / 키스 (1907년) >
구스타프 클림트 / 1862년 7월 14일 ~ 1918년 2월 6일 (향년 55세)
- 찬란한 금빛으로 모두를 매혹시킨
구스타프 클림트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
작품세계
구스타프 클림트는 오스트리아의 상징주의 화가이며 아르누보 스타일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는 빈 분리독립운동의 중요 구성원 중 하나였으며 작품은 주로 초상화, 풍경화, 누드화가 많고 장식적이며 화려한 패턴, 금박, 에로틱한 이미지가 특징적인 독특한 스타일의 화가였습니다. 장식 회화가 교육을 받았으나 건축 장식 회화에서 벗어나 독자적 화풍을 만들어 갔으며 젊은 시절엔 사실적 회화에 매우 능했으나 장식과 구성이 독특하고 평면적 느낌의 작품으로 변모해 갔습니다.
독창적인 기법으로 황금을 사용했는데 그림에 금박을 넣는 것은 고도의 작업으로 귀금속 세공업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듯합니다. 클림트의 작품은 대담한 주제와 화려한 색채, 그리고 독특한 구성으로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였고 작품을 대하는 이들은 황금빛 화면과 장식에 매혹당하게 됩니다.
클림트의 작품에는 유난히 많은 여성들이 등장합니다. 인체의 표현이나 특히 다양한 연령층의 여성 누드를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완벽히 표현한 작가로 알려져 있고 성, 사랑,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관능적 여성 이미지와 함께 황금빛의 화려한 색채로 표현합니다. 한때는 그의 그림들이 포르노로 비판받으며 논란의 대상이 된 적도 있습니다. 생전에 유명 작가이긴 했지만 논란이 있었기에 사후 50년 동안 대중의 큰 관심은 받지 못하였었는데 1980년대 후반 클림트의 작품들이 조명되며 클림트는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화가가 되었습니다. 한때는 외설로 치부되던 것들이 지금은 아름다운 낭만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으로 확고한 명성을 얻은 클림트의 작품들은 상품화되어 우리 생활에서도 많이 접할 수 있으며 그 독특함과 상징성은 또 다른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생애 그리고 사랑
클림트는 1862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3남 4녀 중 둘째로 태어납니다. 아버지는 보헤미아에서 이민 온 금세공사였으며 어머니는 빈 출신으로 결혼 전에는 가수였다고 합니다.
1876년 14세 되었을 때 빈 응용미술학교에서 회화와 수공예적인 장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1883년 졸업 후에 남동생 에른스트 클림트와 친구 프란츠 마치와 함께 공방을 차려 공공건물에 벽화 그리는 일을 하였는데 빈에 새로 들어선 국립극장과 미술사 박물관에 장식화를 그려 건축 장식 미술의 대가로 알려지고 그들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892년 아버지와 동생 에른스트가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죽자 클림트는 충격을 받고 한동안 붓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운명과 구원에 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고 1895년 다시 작품을 시작할 때는 상징주의적 모습을 보입니다. 이후 빈대학교 대강당의 '철학', '의학', '법학'을 상징하는 천장 패널화를 의뢰받게 되는데 교수들의 비난을 받게 됩니다. 그림들을 교정하라는 제의를 거절하여 패널화는 대강당에 걸리지 못했으나 철학의 패널화는 훗날 제4회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금상을 수상합니다. 이후 클림트는 공공 작품은 의뢰받지 않았고 기하학적이며 추상적이며 평면적인 양식으로 나아갔습니다. 덕분에 <키스>,<다나에> 같은 황금빛 대작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1918년 1월 11일 뇌출혈이 있었고 그해 2월 6일 스페인 독감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5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둡니다.
그가 죽은 후 14명의 여인들이 친자확인 소송을 합니다. 클림트는 평생 혼인하지 않고 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어떤 여인과도 가정을 꾸리고 안주하며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사랑한 여인은 에밀리 플뢰게라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남동생 에른스트 클림트의 아내의 여동생이었습니다. 에른스트와 그녀의 언니가 결혼을 하면서 클림트를 알게 되었고 그 당시 클림트 29세, 플뢰게는 17세였습니다. 플뢰게는 클림트의 정신적 반려이며 육체적 관계가 없는 플라토닉한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녀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냈으며 클림트의 모든 행동을 지지해 주고 이해해 주고 그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 찾았던 단 하나의 여인이자 마지막을 함께해 준 여인이었습니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키스>는 에밀리 플뢰게를 모델로 한 것입니다.
에밀리는 클림트가 죽은 후 30년을 더 살았고 죽음 후 그의 무덤 옆에 묻힙니다.
예술적 성장과 추구
19세기 말에 영국,프랑스 등에서 상징주의 인상파와 같은 진보된 아방가르드 운동을 접하고 상대적으로 낙후된 오스트리아의 미술의 보수적이고 판에 박힌 사상에 반발하여 인간의 내면적 의미를 미술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빈 분리파'를 만들어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는 '여성'이라는 소재를 통해 여러 가지를 시사하였고 성, 사랑, 죽음 등과 같은 소재도 다루었습니다.
관능적이고 사실적으로 여성을 그려 여성을 가장 잘 표현한 화가로 알려졌으며 금박을 이용한 황금빛과 화려한 색채를 특징으로 합니다.
'빈 분리파'에서 탈퇴 후 장식적이고 화려한 패턴, 모자이크, 금 등을 사용하여 독창적인 양식을 발전시켰고 신비롭고 에로틱하며 화려한 상징주의를 추구하였습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유디트>, <프리차 리들러의 초상>,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키스>, <아담과 이브> 등이 있습니다.
아르누보
아르누보는 프랑스어로 '새로운 미술'이라는 의미이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일어난 유럽의 예술 사조입니다. 독일어권에서는 유겐트 양식이라고도 불리었으며 꽃이나 식물 덩굴에서 영감을 받은 장식적인 곡선을 많이 사용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아르누보는 고전주의적 미술에서 탈피하고 순수 예술과 응용 예술 사이의 전통적인 구분을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시작된 운동으로 공예, 포스터, 건축 장식, 직물, 보석 등 예술 분야 전반에서 널리 유행하였습니다. 아르누보의 특징으로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장식적이고 미녀가 주로 나오며 평면적이고 선과 면과 색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르누보는 그 당시 전 유럽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스트리아 분리파 작가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클림트를 해부하다/유임주 지음/ 주코코맘 ・
“클림트의 그림은 과학과 예술의 아름다운 통섭이다.의학박사가 펼쳐 보이는 예술의 경지가 놀랍도록 흥미롭다.”- 최재천(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생명다양성재단 이사장)‘클림트를 사랑한 해부학자’ 유임주 교수의 첫 책!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프리다 칼...
키스에서 시작하는 인간 발생의 비밀.
<키스><다니애><포옹>등에 빼곡히 그려진 작은 문양들이 정자와 난자에서 부터 인간 초기 발생 과정의 세포와 조직들을 형상화한 것인 줄은 몰랐다.
클림트가 활동하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합스브르크 제국이 몰락하고 입헌국가가 시작되던 시기였다.
망해가는 와중에 빈에서는 역설적으로 문화와 학술의 꽃이 만개했다.
1900년 당시 지성의 중심에 있던 의과 대학이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예술가 구스타프 클림트,에곤실레,오스카코코슈가등에 영향을 미쳤다는 내용 이었다
캔델교수는 클림트의 유명한 작품<아델리 블로흐바우어의 초상>과 <키스> 등의 그림에 정자와 난자의 아이콘이 장식되어 있다고 언급했다.
학술지<JAMA>에 게제된 논문<클림트의 키스와 인간초기 발생학을 근간으로 의과학적 관점에서 클림트의 작품들을 해부한다.
<키스>속 연인의 옷자락에 숨겨진 문양과 상징을 실마리로 삼아,클림트가 일생을 통해 추구했던 테마,
바로 '인간의 생로병사'를 어떻게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켰는지 해부학자로서 탐색한다.
<카스>에는 당시 의과학자들이 꾸준한 연구를 통해 밝혀낸 진실들이 숨어 있다.
수정란이 세포분열해 분화하는 2세포기와4세포기,8세포기 그리고 12~32개의 알갱이로 이루어진,뽕나무처럼 생긴 오디배로 발달하는 인간 발생의 모습등이다.
해부학자 관점에서 보면 클림트의 그림은 단순히 두 연인의 에로티시즘만을 보여주는 그림만은 아니다.
1900년대 전후의 과학적 성과를 기반으로 피부밑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생명의 아름다음을 드러낸 의과학적 예술 작품인 것이다.
클림트가 의학과 과학의 지식을 전수받을 수 있었던 배경인 살롱문화와,발생학 등 당시 의과학 분야의 연구 진행 상황 그리고 과학자들이 세포 수준에서 일어나는 이벤트를 포착할 수 있게 만든 현미경 기술의 발전 배경등을 알아본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활동한 시대는 오스트리아 역사에서 51년간 존재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시대였으며 합스브루크 군주의 정치의 마지막 단계이자 입헌정치가 시작되는 전환기였다.
184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2월 혁명의 영향으로 유럽 전역에 자유주의의 열망이 고조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는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유럽대륙에 전쟁이 없었던 벨 에포그의 평화로운 시절이기도 했다.
다민족 연합체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황실의 명맥을 유지하고자 했던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1세의 타개책이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오스트리아,헝가리,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 등으로 해체되었다.
클림트가 활동했던 당시에는 과학계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찰스다윈이 1859년 출간한 <종의 기원>의 영향으로 인간이 신의 창조로 나온 것이 아니라 동물로 부터 진화되었다는 진화생물학이 제시되었다.
다윈은 후속 저작들에서 생물의 일차적인 기능의 번식을 보았고 더 단순한 형태에서 진화한 존재인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에 주목했다.
인간 본성을 탐구하는 예술이 과학으로부터 자극 받아 인간을 새롭게 탐구하고 표현할 수 있는 토대가 이 시기에 마련 되었다고 볼 수있다.
프로이트도 이 시대에 독보적인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다. 유명한 젓 <꿈의 해석>을 통해 정신 탐구의 과학적 기반을 제시하였고 정신분석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개척하였다.
당시 빈은 세계 의학의 중심지였다.
많은 미국 학생들이 빈에서 유학을 했고 미국 의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의사로서 오슬러와 할스테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존스 홉킨스병원을 창설해였도 오슬러가 저술한 내과교과서는 40여년간 세계 각국에서 내과학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클림트의 출생과 성장
클림트의 삶은 그의 작품과는 달리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도서를 읽으며 보게 되는 중요 키워드.
1.오스트리아의 상징주의 화가
2.아르누보 화가
3.분리주의 운동
4.빈 공방
5.황금빛 작가
평소 과묵한 성격이었고 일기와 같은 기록도 특별히 남긴 것이 없으며 대중 앞에 나서기를 꺼렸고 스서로를 "나는 인간적으로 재미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매일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일정하게 그림을 그리는 화가일 뿐입니다"라고 밝혔다.
그는 실제로 매우 성실한 화가였다고 한다.
1862년 구스타프 클림트는 보헤미아출신의 금 세공업자인 에른스트 클림트와 뮤지컬 배우 지방생이었던 안나핀스터 사이에 7남매 중 들째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매우 가난했고 합스부루크 제국의 빈 세계박람회가 재정적으로 실패하고 주식 시장이 폭락 하는등 경기가 침채되면서 더욱 안좋아졌다
저렴한 집을 찾아 여러번 이사를 다녔다고 한다.
클림트 집안에는 미술에 재능을 보인 자녀가 여럿 있었다.
특히 중학교 시절부터 교사들로부터 재는을 인정받은 구스타프는 열네 살이 되던 1876년에 걸쳐 친척의 권유로 빈 공예 미술학교에 지원해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당시 학업을 끝내고 시립중학교 교사가 되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했다.
인물을 그리는 수업에서는 클림트의 재능은 더욱 빛을 발해 특별반에 선발되 다양한 기법을 훈련 받았으며,이탈리아의 르네상스 화가인 티치아노 베첼리노와 바로크 시대 제일의 화가 중 한명인 페테르 파울 루벤스등의 작품을 자세히 공부했다.
특히 빈 미술관에서 본 17세기 회화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작품들을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클림트는 반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화가 한스 마카르트의 작품에도 심취해 있었는데
학생의 신분이지만 마카르트의 화실 관리자에게 조르고 졸라 마카르트가 작업중인 그림을 보고 연구할 정도였다고 한다.
1879년 공예미술학교의 동료인 프란츠 마치와 동생에른스트와 함께 '예술가 컴퍼니'를 만들어 링스트라세에 건축중인 건물의 장식 작업을 하면서 명성을 쌓아갔다.
클림트는 전통적인 기법에 따라 주로 우의화를 그렸다.
1886년 마카르트가 사망하자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왔다. 예술가 컴퍼니가 '신부르크 극장'의 장식을 맡게 되었다.
클림트는 이곳에<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제단><
타오르미나 극장><테스피스의 수레><런던의 글로브 극장>의 작품을 남겼다.
이중 <타오르미나 극장>은 다 이상 고전적인 모티브에 만족하지 않고 사진처럼 정밀하게 그린 사실적 초상화로서 고전적 특성을 보충하고자 노력한 작품이다.
<타나그라의 소녀 빈미술사 박물관 프레스코>
클림트의 불후의 명작 <키스>의 여주인공으로 여겨지는 에밀리는 림트의 영원한 뮤즈로 남았다.
<사랑>빈 미술사 박물관 캔버스의 유채
<사랑>속의 두 연인은 눈을 감고 마주 보고 있다.
사랑의 키스를 곧 나눌 것 같은 기대감이 엿보이지만
윗쪽의 뿌연 배경 속에 나타난 인물의 형상들은 사람과는 거리가 먼'죽음'을 상징하는 표상들로 보인다.
의학,법학,철학은 안타깝게도 세계2차 대전 때 오스트리아 임멘도르프 성에 보관 되었다가 나치가 퇴각하면서 성에 불을 지르면서 소실되었다.
<의학>에는 의학을 상징하는 여신 히기에이아가 등장한다.
여신 뒤에 쌓여 있는 인간군상을 보면 신생아,영아,유아,어린이,청소년,성숙한어른,임신한여인.늙어가는 노인 그리고 해골로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도 인간의 생로병사라는 순환을 끊을 수 없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듯하다.
왼쪽에 공중 부양된 여인과 생명의 강을 사이에 둔 이가 맞잡고 있는 듯한 보습은 인류에게 비치는 희망으로 보인다.
바로 이 둘의 관계로 태어난 아이가 여인의 발치에 태아막이란 강보에 쌓여있다.
클림트는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을 방문한다
성당 안에서 보게된 황금빛의 찬란하고도 경이로운 모자이크는 클림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그 이후 직품에 금박을 더욱 강렬하게 사용하게 됨.
산비탈레 성당을 방문해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테오도라 황후의 모자이크를 보게 된 후에 새로운 영감을 주었다.
평면과 장시기을 이용해 새로운 메세지를 전달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전통적인 미술 작품에서 강조된 '3차원적 사실을 정학하게 2차원 평면에 표현하는것'에서 그 이후에는
2차원 평면에 표현된 상징을 통해 3차원 아래 숨어
있는 또 다른 진실을 표현 한 차원 높은 방법을 찾아냈다.
1905년 ~1910년 사이의 작품<아델리 블로호바우어의 초상><키스> <다나에><스토클레 프리즈>등이다.<죽음과 삶>그림 속에는 인간이 숙명적으로 겪게 되는 생로병사가 잘 표현되어 있으며 이러한 점을 인정 받게 되어 1911년 로마에서 개최한 세계미술 전시회에서 1등 상을 수상했다.
1918년 제 1차 세계대전의 종식을 앞두고 클림트는 뇌졸증에 걸린다.
갑작스런 독감에 걸려 1918년 2월6일 짧은 생을 마감한다.
부채를 든 여인 개인 소장 캔버스의 유채
사망 후 클림트의 화실에는 <부채를 든 여인>과 미완성 작품인 <신부>가 이젤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부채를 든 여인>은 최근 경매에서 8530만 파운드(약 1413억원)에 낙찰되어 클림트 작품중에 가장 비싸게 팔린 작품이 되었다.
클림트는 어느 날 의대 해부학 실습실을 방문하게 되었고 주커칸들 교수는 인체의 육안적 구조와 현미경으로 관찰되는 조직의 사진을 랜턴 슬라이드를 통해 소개 하였으며 특히 정자와 난자로 부터 발달하는 인간 발생에 신비에 대한 강의를 진행하였다.
클림트는 주커칸들 교수의 강의와 드와의 교류를 종해 해부학,발생학,조직학에서 표출된 이미지에 깊은 인상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를 자신의 그림 속 중요한 제료로 사용하게 된다.
이제 찰스 다윈,에른스트헤켈,에밀 주커칸들,구스타프클림트로 이어지는 과학자왕술가 간에 일어난 교류의 흐름을 따라가보자.
찰스 다윈/미술에 진화론 바람이 불다
다윈은 집안의 바람에 따라 에든버러 의대에 입학 했다가 적성에 안맞아 자퇴한다.
케임브리지 대학 신학과에 입학했지만 박물학에 관심이 많았던 다윈은 곤충학,식물학 및 지질학을 공부하게 된다.
다양한 학문을 종합적으로 공부한 인연으로 신학과를 졸업 후 영국 해군의 비글호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면서 많은 자료 수집을 한다.
이 모든 것이 진화론을 완성하는 중요한 지적 자사나이 된다.
다윈은 두가지 개념을 <종의 기원>에서 제시하고 있다.
1.모든 생명체는 실제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자손의 수를 낳는다.
2.같은 종에 속하는 개체들이라도 저마다 다른 형질을 가진다.
3.특정형질을 가진 개체가 다른 개체에 비해 환경에 더 적합하다.
4.그 형질 중 적어도 일부는 자손에게 정달된다.
이러 한 조건이 만독되는 특징 형질군이 많이 누적되면 어느시점에 개로운 종이 생겨난다. 것이 '자연 선택을 통한 진화'의 핵심이다.
다윈은 생물의 종은 정적인 것이 아니고 계속 조금씩 변화되고 있으며 그 변화가 충분히 커지면 새로운 종이 만들어 지는데 이것이 '종의 기원'이라고 설명한다.
즉 생물에 세계는 어떤 절대자의 의지에 의해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개최들에서 발생한 변이가 자연선택이라는 기전을 거쳐 종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인간 진화에 관한 내용을 처음부터 언급하지 않았다.
<종의 기원>을1859년에 출판한 이후 여러 판의 개정판을 내면서 사회적 반응을 주시하다가 1871년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을 출판한다.
이책은 <종의 기원>에서 주장한 진화심리학,진화윤리학,진화음악학등에 논의를 하였고 다양한 인종의 출현과 성의 차이 그리고 배우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여자의 우월적 위치등을 기술하였다.
<자연의 예술적형상>에 나온 방상충 그림
해켈이 낸 책 <자연의 예술적 형상>에는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운 생물 그림이 담겨있다.당시는 물론 21세기인 지금도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을 제공하는 그림들이다.
헤켈의 그림은 가구에서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실생활에 관련된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쳤다.
클림트를 비롯한 분리파는 이를 적극 수용하여 새로운 예술 활동을 개척해 나갔다.
양수를 어머니의 바다와 같이 넓고 따스한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엄마와 다기의 정서적 물리적 소통을 매개하는 장치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클림트의 <벌거벗은 진실>에 표현된 태아막과 함께
표현된 양수도 이러한 맥락에서 묘사되었다고 할 수있다.
<벌거벗은 진실>의 아래쪽에 보면 여인의 종아리를 감싸고 도는 검은 뱀 한마리를 볼 수 있다.
뱀은 현명함과 동시에 관능을 상징한다.
또 뱀이 허물을 벗으면서 새롭게 변하는 것처럼 기존의 것을 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의미가 부여되기도 한다.
즉 기존의 틀을 벗어나 그 시대에 맞는 자유로운 예술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클림트의 메세지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법학의 윗부분 확대 그림
클림트가 그린<철학><의학><법학>은 빈 사회의
엄청난 과심과 비평을 동시에 받았다.
이 그림들은 빈대학교의 천장에 설치하는 대신 신 국립 근대 미술관에 상설 전시할 것을 결정했다.
클림트는 클림트대로 자신의 작품 세계를 기존의 관념으로 재단하는 빈 사회에 분노하였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클림트는 선불로 받은 선불로 받은 의뢰비를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반납하고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돌려받았다.
후원자인 미술품 수집가 아우구스트 레데러에게 주었고 <의학><철학>은 친구이자 분리파 동료인 콜로만 모저가 구매하였다.
<키스 > 빈 벨베데레 미술관,캔버스에 유채및 금은박
꽂이 만발한 초원 위에 무릎을 끓고 막 입맞춤하려는 한 연인의 순간을 묘사했다.
이미 여자는 황홀경에 빠져 있고 그 황홀한 느낌이 관개에게도 전달된다.
남자의 망토를 보면 금색,은색,검은색의 직사각형이
세로로 배치되어 남성상을 보여주고 여자의 옷은 여성의 생식력을 상징하는 원형과 타원형의 문양들을 포함한다.
키스에서 발견되는 남성상 그리고 정자
그림을 확대해서 보면 남성상을 상징하는 부분은 남자의 옷에 표현되어 있다.
클림트는 세로로 긴 직사각형을 남성의 성기 모양의상징으로 써왔다
남자 옷에 표시된 검은 직사각형이 남근을 상징한다고 볼 수있다.
클림트는 정자의 형태를 스타일리시한 도식으로 표현하였다.
여자의 옷을 살펴보면 도라지꽃 같은 다각형이 많이 관찰된다. 자세히 보면 이 다각형에 물결치는 듯한 꼬리가 붙어 있는데 이것이 광학 현미경으로 관찰되는 200~400배에 확대된 정자의 모습이다.
이미 19세기에는 광학 현미경 기술이 충분히 발달되어 이 정도의 영상을 얻을 수 있었다.
정자의 이미지가 다른 곳에서도 포착되는데 이것은 매우 놀라운 발견이다.
다시 남자 옷 쪽을 살펴보면 일부 속이 비어있는 검정직사각형 주위에 휜색으로 둘러쌓인 검은 점들이 보인다.
얼핏보면 다양한 배경 처리용 무늬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전자현미경을 이용한 생물 조직을 분석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마치 '전자현미경으로 봤을 때 정자의
목 부분을 감싸고 있는 미트콘드리아와 같다'고 생각할 것이다.
<키스>에서 발견되는 이성상 그리고 난자
<키스>에서 여자의 옷에는 난자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황금색을 배경으로 파란색 경계가 그려지고 속은 노란색으로 채워진 원들이 많이 보인다.
이것이 난자의 형태이다. 마치 계란을 깨었을 때 보게 되는 형태와 유사하다.
정자들이 여자의 옷에 그려진 난자와 난자 사이에 공간을 채우고 있다고 설명한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 할수있다.
<키스>에서 발견한 수정 장면
생명체의 수정 과정에서 정자와 난자기 어떤 역활을 하는지 정확히 알게 된 것은 20세기가 시작되기 바로 전이다.
<키스>에는 다대의 의사들이 발견한 발생학에 대한 이해가 묘사되어 있다.
클림트는 어쩌면 <의학>레서 의학에 대한 한계를 꼬집었다면 <키스>에서는 의학 발전에 대한 존경심을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키스>에서 발견한 수정 후 발달 과정
통상 자궁관 끝부분에서 하나의 정자와 하나의 난자가 결합하여 접합자가 된다.
아버지로 부터 받은 반쪽의 염색체와 어머니로부터 받은 반쪽의 염색체가 만나,접합자는 온전한 수의 염색체를 가지게 된다.
사람의 경우 46개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고 이 중에 한쌍이 성별을 결정하는 성염색체이다.
어머니로부터 유래한 난자는의 염색체는23X만 있다.
아버지로부터 유래한 정자는X또는 Y염색체를 가지며 23X 또는 23Y 로 표시한다.
즉,어떤 정자가 수정에 참여하냐에 따라 수정란의 성별이 결정된다.
첫 번째 단계는 세포분열을 하여 숫자를 늘리는 것이다. 세포는 두배씩 늘어난다.
분활하여 늘어나는 세포를 분할알갱이라고 부르고 마치 뽕나무 열매와 같이 보인다고 해서 오디배라고 부른다.
놀랍게도 <키스>의 부분 그림을 살펴보면 다양한 원형 구조물로 구성된것이 오디배 시기의 표현으로 보인다.
클림트는 왜 ,키스>에서 인간 발생에 관한 내용을 그렸을까?
많은 작품중 이 책에서 현재까지 논의한 작품은 <벌거벗은 진실>,<의학>,<법학><베토벤 프리즈><키스>이다.
이들 작품의 공통잠은 인간의 삶이다.즉 터어나서 성장하고,사랑하고, 아이를 낳고,나이들어 병들고 죽어가는 새로병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들어 있다.
특히 <철학>과 <의학>속 나신의 군상들은 보면 클림트의 생각은 명확하다.
<벌거벗은 진실>과 <베토벤 프리즈>는 어머니의 자궁을 중요한 그림의 무대로 사용하고 있다.
<베토벤 프리즈>의 기사가 출정하는 장면의 실루엣과 마지막 포옹 장면의 실루엣도 자궁의 형상을 하고 있다.
<키스>에서도 남녀의 키스 장면과 배경 사이에 실루엣이 보이는데 전체를 연결하여 보면 자궁의 형상을 닮았다.
즉 <베토벤 프리즈> 마지막 장면이 <키스>에서도 재현된 것이다.
클림트는 인간이 자궁에서 태어난다는 상식 수준을 뛰어 넘어 발생학적 지식을 얻게 된 것으로 보인다.
주커칸들 교수와 함께한 워크숍을 통해 인체의 세포 수준에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화가와 해부학자의 공통점은 둘 다 형태의 습관적으로 잘 살피고 분석 했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으며 경험과 환경이 예술가로써 자신만의
세계로 풀어 나가는 과정을 본 것 같았고 산마르코성당에서 금박그림과 모자이크를 보고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을 알게 되면서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네요.
클림트에 사진을 보았어도 이런 표현이었는지 전혀 몰랐는데 알게 되어 저자에게 감사드립니다.
살면서 어릴적 환경 때문에 내면아이로 힘들어 하는것도 주의에서 많이 듣고 보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다른 인생을 택하고 성공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어요.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아름다운 제 2의 인생을 잘 살아 가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