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 미술의 대가 루벤스/ 아트랑
루벤스 / 십자가를 세움 (1610년)
페테르 파울 루벤스( Peter Paul Rubens) /
1577년 6월 28일 ~1640년 5월 30일 (향년 62세)
-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 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
작품세계
페테르 파울 루벤스는 벨기에의 화가로 17세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남유럽과 플랑드르로 대표되는 북유럽 미술을 종합해 바로크 미술 양식을 확립한 바로크 미술의 대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역동성, 강렬한 색감, 관능미를 추구하며 웅대한 구조와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입니다. 역사화, 종교화, 풍경화, 인물화 등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작품 모두 생기가 넘치고 색채 또한 풍부하고 화려합니다. 그러나 웅대한 구조나 힘찬 역동성에 비해 세밀함에 있어서는 뛰어나지 않다는 평이 있습니다.
17세기 내내 이어진 종교 전쟁으로 교회의 미술품들이 파손되어 미술 작품에 대한 수요가 많았는데 루벤스는 화가 초기 시절부터 제단화를 비롯한 가톨릭 주제 그림을 많이 그립니다. 강렬한 명암 대조와 역동적 구도, 강한 운동감, 과도한 근육 등은 루벤스 특유의 것으로 감정에 호소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또한 그는 고전 미술과 문학에 대해서도 해박하여 어떤 복잡한 주제라도 생생한 이미지로 내용을 풍부하게 표현해 낼 줄 알았습니다. 때문에 절대 왕정과 가톨릭교회에서 그의 그림을 원하게 되었고 전유럽의 궁전, 성당, 저택에서 그를 찾게 되었습니다.
1623년부터 외교관으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만난 유럽 각국의 왕과 귀족에게서 그림 주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자기주장과 과시를 원하는 절대왕정과 루벤스의 과장되고 화려하며 생동감 넘치는 양식은 잘 어울렸고 인품 또한 원만하고 따뜻하여 유럽 각국 왕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죽을 때까지 명성이나 재산이 흔들린 적이 없는 루벤스는 훗날 1830년 독립한 새로운 국가 벨기에의 국가적 상징이 됩니다.
대표 작품으로는 <십자가를 세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 등이 있습니다.
생애
루벤스는 1577년 독일의 베스트팔렌이라 불리는 지방의 지겐이라는 도시에서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온 개신교도였던 장 루벤스와 마리아 피펠린크스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아버지가 사망하고 1589년 형과 어머니와 함께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으로 이사하여 라틴어를 가르치는 가톨릭 학교를 다니게 됩니다. 이곳에서 루벤스는 인문학과 라틴어, 고전문학을 배웠으며 가톨릭이란 종교는 그의 작품 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14세 때 미술 공부를 시작하여 1598년 21세에 안트베르펜 화가 조합에 마스터로 등록합니다. 1600년 23세에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서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들을 모작하며 공부하여 이탈리아 미술을 흡수합니다. 직접 접하고 연구한 대가들의 영향과 재능으로 루벤스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사람이 됩니다. 큰 명성을 얻고 1608년 어머니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왔으나 임종을 보지 못합니다. 1609년 9월 플랑드르를 다스리던 오스트리아의 알베르트 대공과 그의 아내 이사벨라에 의해 왕실 화가로 지명받게 됩니다. 1609년 10월 3일 안트베르펜의 대표적인 인문학자 장 브란트의 딸 이사벨라 브란트와 결혼하고 안트베르펜에 자리 잡습니다. 1610년 루벤스가 직접 설계한 집으로 이사하는데 이탈리아 건축 양식에 영향을 받은 빌라로 현재는 루벤스 박물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당시부터 화실을 새로 지어 수많은 제자들과 실습생들을 두고 작품을 만들어 나갑니다. 가톨릭 신자였던 루벤스는 많은 제단화와 천장화를 그리는 북유럽 최고의 반종교 개혁주의자 화가이기도 했으며 자유롭게 구사했던 여러 외국어 능력과 능숙한 궁정 매너, 고전에 대한 학식과 교양으로 유럽 전역의 왕궁을 돌며 외교관 역할도 하게 됩니다.
1630년 아내가 죽은 뒤 4년이 지난 53세에 16세의 엘렌 푸르망과 재혼을 합니다. 엘렌은 그의 작품에 관능미에 대한 영감을 불어 넣어 줍니다. 1640년 5월 30일 루벤스는 통풍으로 6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자녀는 8명으로 3명은 이사벨라에게 5명은 엘렌에게 태어났습니다. 루벤스는 다작을 하던 화가로 유명했는데 생전 2천여 점이 넘는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스페인 왕실과 영국 왕실, 프랑스의 마리 메디치 여왕까지 왕실들의 후원을 받으며 큰 명성을 얻었던 루벤스는 바로크양식을 확립한 유럽의 대표화가로 인정됩니다.
바로크 미술
서양미술사에서 바로크(baroque)는 17세기라는 시기를 가리는데 그 안에는 다양한 지역과 양식의 미술을 포함합니다.
어원은 '일그러진 진주'를 의미하는 포르투갈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고전주의 르네상스 미술의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바로크 미술은 로마를 중심으로 제작된 가톨릭 미술 양식으로 이탈리아, 보헤미아, 오스트리아, 독일, 에스파냐로 이어져 라틴 아메리카까지 확대되었습니다. 가톨릭의 위상을 회복하고 이를 알리기 위한 반종교개혁 미술이며 웅대한 스케일, 화려한 장식, 환상적인 화면구성이 특징적입니다. 교황령 로마에서 시작된 이러한 미술 양식은 점차 하나의 국제 양식이 되어 유럽에 퍼지게 되는데 귀족들의 화려함을 과시하거나 장식하고 표현하는 수단이 됩니다. 최초의 바로크 미술가는 카라바조이며 루벤스, 렘브란트, 안토니 반 다이크,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베르니니 등이 유명합니다
루벤스, 유럽 왕실의 궁정화가/구윤숙
바로크의 열정과 풍요, 그리고 기쁨
바로크의 거장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는 고향인 플랑드르(Flandre) 안트베르펜(Antwerpen)에서 처음 미술을 시작했다. 약 6년여간의 도제 기간을 거치고 그가 향한 곳은 이탈리아였다. 루벤스는 그곳에서 고대의 유물과 르네상스 장인의 작품들에 매료되어 수많은 작품을 모사했다. 하지만 그는 고전주의를 답습하는 평범한 화가가 되진 않았다. 그에겐 사물의 표면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알프스 북부의 화풍과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이탈리아 고전주의의 특성이 모두 융합되어 있었다. 도저히 합쳐질 것 같지 않은 두 화풍이 이 위대한 화가의 붓으로 통합되어 빛나게 된 것이다.
이탈리아 회화의 양식을 종합한 종교화
루벤스의 고향 안트베르펜은 종교전쟁의 격전지였다. 하지만 그가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에는 안정을 되찾고 파괴된 교회들을 재건하고 있었다. 새롭게 단장을 시작한 교회는 대형 종교화가 많이 필요했기에 실력 있는 유학파 화가 루벤스도 주문을 많이 받았다. 그때 제작된 안트베르펜 대성당의 대형 제단화들은 루벤스 미술의 초기 양식이 잘 남아있다.
그림2. <십자가를 세움>,1610, 목판에 유채, 460 x 340 cm/ 그림2.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림>, 1612-14, 421 x 311 cm, 안트베르펜 대성당
그중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움>[그림 1]은 루벤스가 북부의 세밀화 전통과 이탈리아 고전주의를 어떻게 통합시켰는지를 잘 보여준다. 십자가를 들어 올리는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남자들은 미켈란젤로의 인체를 연상시키며, 십자가의 세부와 몇몇 구성은 틴토레토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하고, 빛과 색채는 베네치아 회화의 영향을 느끼게 한다. 한편 군인이 입고 있는 갑옷과 그림 왼쪽 하단에 그려진 강아지의 곱슬곱슬한 털의 세밀한 묘사는 알프스 북부의 것이다. 루벤스는 거기에 대각선 구성과 격정적인 동작, 강한 명암 대비와 피부 표면에서 일렁이는 빛의 움직임 등 자신만의 고유한 특징을 더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림>[그림 2]은 앞의 그림보다 정적이지만 역시 이탈리아 여행의 성과가 반영된 작품이다. 그리스도의 몸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조각 <라오콘>을 연구한 흔적이 보이고,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조법은 카라바조의 화풍을 느끼게 한다. 십자가에 매달려 천이 흘러내리지 않게 물고 있는 남자는 고귀한 성인이 아니라 평범한 노동자처럼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는데 이 역시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두 작품에 담긴 이상적인 인체 표현은 이탈리아 고전주의가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주제와 분위기는 다분히 바로크적이다. 만약 루벤스가 고전주의자였다면 십자가 세우기가 ‘완료’된 장면 또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시신’을 안고 있는 장면을 담았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크의 대가 루벤스는 어떤 상황이 '진행되고 있는' 과정을 담았다. <십자가를 세움>은 전체적으로 사선 구도를 취하면서 역동적인 움직임을 담고 있고, 비교적 정적인 분위기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림>도 천을 따라 흘러내려가는 예수의 시신이 고요함 속에서도 부드러운 운동감을 만들어 낸다. 이 같은 구성은 수난의 공포와 비통함을 극대화시켜서 신자들의 마음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감각적인 것으로서 반종교개혁의 취지와 맞닿아 있었다.
전 유럽의 왕실을 위한 그림 공장
루벤스는 끊임없이 주문을 받았다. 그의 작품으로 기록된 그림은 소묘와 판화를 제외하고도 1300여 점에 이른다. 이렇게 다작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공장 시스템에 가까운 작업실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벤스가 간단한 스케치와 작은 견본을 그리면 제자들이 그것을 거대한 화폭에 옮겼다. 그의 곁에는 실력이 뛰어난 동업자들도 있었다. 정물화에 탁월한 화가, 동물 그림에 재능 있는 화가 등 각종 전문가들이 루벤스와 함께하며 그림의 세부를 담당했다. 루벤스는 이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했는데, 그림의 값을 책정할 때에도 자기가 참여한 비율에 따라 가격을 달리했다. 이런 협업 과정의 마무리 작업은 루벤스가 맡았다. 그의 작업장을 방문한 사람들은 루벤스가 단 몇 번의 붓질만으로 그림에 생기가 돌고 활력이 넘치게 만드는 장면을 보고 찬사를 보냈다.
그림 3. <마리아 드 메디치의 생애 연작> 22개의 작품이 있는 루브르 박물관 전시실
루벤스는 무미건조할 수 있는 주제를 특별하고 완벽하게 구현해 내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마리아 드 메디치의 생애 연작>[그림 3]은 그런 그의 능력을 보여주는 장대한 기록화이다. 이 그림들의 의뢰자 마리아 드 메디치는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공주로 프랑스의 앙리 4세와 결혼하였는데, 앙리 4세가 암살로 사망하자 아들을 대신하여 프랑스를 다스렸다. 그녀는 루벤스에게 자신의 삶의 주요 장면을 기록해 달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업적이 없는 여왕의 삶에서 주요 장면이라 할만한 사건이 없었다. 탄생과 교육, 결혼식과 같은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 전부였다. 그런데 루벤스에게는 이렇게 평범한 일화들을 비범하게 그려내는 재주가 있었다.
그림 4. <마리아 드 메디치의 마르세이유 입항>, 1623-25, 캔버스에 유채, 394 x 295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프랑스
<마리아 드 메디치의 마르세이유 입항>[그림 4]은 마리아 드 메디치가 프랑스의 한 항구에 도착하는 장면을 신화와 우의를 동원하여 멋지게 윤색하고 있다. 황금으로 도금된 화려한 배에는 메디치가를 상징하는 여섯 개의 구슬이 있는 방패 문양의 문장이 달려있다. 공주가 배에서 내리자 군모를 쓴 남자가 영접을 한다. 백합문양이 새겨진 푸른 망토를 두른 남자는 ‘프랑스’를 상징한다. 선박 아래에는 바다의 신과 요정들이 마리아의 입항을 기뻐하고, 하늘에서는 명성을 상징하는 인물이 두 개의 나팔을 분다. 당당한 모습의 공주와 예를 갖춘 ‘프랑스’, 관능적인 요정들이 한데 어우러진 이 그림은 피곤한 항해를 마치고 하선하는 평범한 사건에 극적인 광휘를 입히고 있다.
사랑스러운 나의 가족, “오래 사는 것보다 즐겁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림 5. <아이의 얼굴>, 1615-16, 캔버스에 유화, 37 x 27 cm, 리히텐슈타인 미술관, 빈, 오스트리아
루벤스의 가장 사랑스러운 그림들은 그의 가족을 담은 작품들이다. <아이의 얼굴>[그림 5]은 그의 딸 클라라 세레나를 모델로 그려졌다. 루벤스는 이 작은 초상화에서 복잡하고 화려한 구성을 위한 아무런 기교도 사용하지 않고 순진무구한 소녀의 얼굴을 그려내고 있다. 소녀의 옷은 빠르고 거친 붓질로 채워졌고, 뒤로 묶은 머리는 한 올 한 올 금빛으로 빛난다. 반짝이는 눈망울, 미소를 머금은 윤기 있는 입술, 콧등의 하이라이트와 이마의 푸른 음영 등은 소녀의 얼굴에 생기발랄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안타깝게도 이 아이는 1623년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죽었다. 그리고 삼 년 뒤에는 사랑했던 부인마저 사망하게 된다. 실의에 빠진 루벤스는 슬픔을 이기고자 일에 몰두하게 된다. 이때 그가 맡은 일은 고향을 떠나 스페인과 영국의 평화를 위해 양국을 오가며 외교 활동을 하는 것이었는데, 뛰어난 예술적 재능과 교양을 갖춘 루벤스는 외교관으로서의 역할도 탁월하게 잘 완수하였다.
그림 6. <모피를 걸친 여인-헬레나 푸르망>, 1630년경, 나무판에 유채, 176 x 83 cm, 미술사 박물관, 빈, 오스트리아
아내를 잃은 슬픔은 깊었으나 그의 독신 생활을 길지 않았다. 1630년, 53살의 루벤스는 헬레나 푸르망이라는 17살 소녀와 결혼을 하여 행복한 두 번째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루벤스는 그녀를 지극히 사랑했으며 자신의 그림에 비너스 여신으로 자주 등장시켰다.
<모피를 걸친 여인>[그림 5]이란 제목으로 유명한 헬레나의 초상화는 그녀를 그린 여러 작품 중에서도 독보적인 작품이다. 욕실에서 막 나온 듯한 여인은 검은 모피만을 두른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외부에서 흘러드는 빛은 그녀의 피부를 부드럽게 비추고 카펫이 반사하는 붉은빛은 여인의 배와 팔꿈치를 분홍빛으로 물들인다. 고전 조각에서는 팔로 가슴을 가리는 동작이 정숙함과 겸손을 나타내는 표지였는데 루벤스는 비슷한 자세로 가슴을 드러내며 관능적이고 감각적인 자세를 만들어 내고 있다.
루벤스의 엄청난 대작들은 분명 뛰어난 것이지만 현대인의 눈으로 루벤스의 그림을 본다면 그리 매력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왕과 귀족들을 위해 제작한 초상화는 사치스럽고 관능적인 여인들은 너무나도 풍만하며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군상들은 화면을 뒤흔들고 어지럽힌다. 절제는 없다. 모든 것이 넘쳐흐른다. 하지만 당대의 사람들은 루벤스의 그림을 사랑했다. 그는 플랑드르 안트베르펜에 정착하여 평생을 살았지만 일개 지방 화가가 아니라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과 영국의 군주들을 위해 봉사한 전 유럽의 궁정 화가였다. 또한 그는 인문학적 소양이 있는 학자였으며, 거의 완벽하게 6개 국어를 구사하는 외교관이었고, 아름다운 외모와 열정적인 기질을 가진 기품이 있는 신사였다. 어떤 이들은 그가 너무도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그림 그리는 재주쯤은 가장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물론 루벤스의 그림 실력은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그림엔 밝은 빛과 기쁨이 넘쳐흐르고 사랑과 관능이 춤을 춘다. 주제가 무엇이든 간에 루벤스의 손을 거치면 그림 전체에 화사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것은 하루하루 고된 날들을 보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낯선 것이지만 “오래 사는 것보다 즐겁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했던 천재화가 루벤스와 바로크 시대의 풍요가 만난 순간에만 탄생할 수 있었던 위대한 예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