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회화, 미술사, 서양화가, 작품 등 한국화가 한국화 등

제리코

by 자한형 2024. 11. 26.
728x90

낭만주의의 선구자 제리코/ 아트랑

테오도르 제리코 / 메두사호의 뗏목 (1819, 루브르 미술관)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 1791926~ 1824126(향년32)

-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선구자인

테오도르 제리코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

작품 세계

테오도르 제리코는 낭만주의 회화의 창시자로 프랑스의 대표 화가입니다.

서양 미술사에서 낭만주의는 신고전주의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미술이라고 소개되는데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미술은 17세기 후반부터 유럽에 불어온 계몽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계몽주의가 일깨운 것은 미신과 종교의 힘을 거부하고 비합리적인 정치와 제도를 혁명으로 바로잡으려는 이성적 인간에 있습니다. 그러나 피로 쟁취한 혁명에서 인간의 광기와 두려움이 드러나고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며 인간 내면의 직관과 감성, 상상력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19세기 고전주의가 우세하던 프랑스에서도 낭만주의의 바람은 여지없이 흘러들어오는데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듀사의 뗏목>이라는 작품을 통해 프랑스의 낭만주의 미술이 등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사회를 비판하는 민감한 주제와 강한 명암과 색채, 대담한 구도, 박진감이 흐르는 정경은 그때까지의 회화에서는 볼 수 없던 극적 요소로 가득했습니다. 이 작품 이후로 많은 화가들이 인간의 드라마를 주제로 한 그림을 선보이며 낭만주의라는 새로운 화풍이 생겨났으며 그는 짧은 생애 동안 인간의 어리석음과 공포, 광기, 죽음 같은 주제에 몰두함으로써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습니다.

32세의 짧은 생이었지만 그의 명성은 대단하여 당시 후배 화가들은 그를 '낭만주의의 화신'이라 부르며 숭배하였고 사후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의 작품은 자유롭고 개인주의적인 특징을 보였으며 당시의 진보적 가치에 적극 참여하고 인류 보편의 관심사가 되는 이야기를 표현하였습니다.

생애

테오도르 제리코는 1791926일 프랑스 북서부 루앙에서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변호사였고 어머니는 담배 제조업에 종사하는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제리코가 4세 되던 해 아버지가 외가 쪽 담배사업 관련 일을 맡게 되면서 파리로 이주했습니다. 부모의 사업은 번창했고 제리코는 과거 귀족들이 주로 살던 곳에 거주하며 최고의 학교인 리세 앵페리알과 에콜 데 보자르에 다니며 미술 공부를 했습니다. 이 당시 프랑스 사회의 중심 계급은 부르주아 계급이었는데 제리코는 성공한 부르주아 계급의 삶을 살게 됩니다.

전쟁 중이던 제정 말기 징집 대상이 되자 돈으로 대신 군대 갈 사람을 샀고 왕정이 복고된 후에는 왕립 총사대에 들어가 귀족의 자재들과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부모가 일찍 돌아가시지만 유산을 모두 물려받아 평생 돈 걱정 없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는 위험에 도전하고 힘과 용기를 과시할 수 있는 남성적인 일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승마를 할 때도 가장 거칠고 사나운 말만 골라 타곤 했으며 평생에 걸친 그림의 중심 주제도 말이었습니다. 그가 첫 미술 선생으로 베르네를 선택한 이유도 그가 말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1808년부터 베르네 화실에서 수업을 받은 후 1810년에는 역사화를 그리던 화가 게랭의 화실에 들어가 1811년 게랭의 학생으로 에콜 데 보자르에 등록합니다. 제리코는 4년간 루브르에 자주 가서 르네상스와 바로크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자신의 개성을 만들어 갑니다.

181221살의 제리코는 <돌격하는 샤쇠르>으로 살롱에서 금메달을 받으며 화단에 데뷔합니다.

1814<전장을 떠나는 부상당한 흉갑기병>을 그리고 왕실 총사대에 들어갔다가 군대에 환멸을 느끼고 총사대에서 나와 다시 그림에 몰두합니다. 1816년 로마상 경연에 응시하여 로마 유학의 기회를 잡으려 했으나 시험에 떨어지고 자비로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납니다. 이탈리아 대가들의 작품을 공부하고 돌아와 1819<메두사호의 뗏목>으로 다시 메달을 받습니다. 이 그림은 실제사건을 소재로 하였는데 프랑스 정부에 의해 부당하게 은폐되었던 선박 침몰사고를 사실주의에 고전주의적 장엄함을 결합하여 그려내었습니다. 이 작품은 프랑스 낭만주의 확립의 출발선이 됩니다. 혼신의 힘을 쏟았던 대작이 살롱에서 찬반이 엇갈린 반응이 나오자 1920년 영국을 순회하며 전시를 하고 호평을 받습니다. 그러나 일찍부터 폐를 앓은 그는 영국의 기후로 몸이 나빠졌고, 1822년 세 번의 승마 사고와 척추 종양으로 수술을 받게 됩니다. 잠시 건강이 회복되는듯했으나 1823년 종양이 재발하여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18241월 사망합니다. 말년의 질명과 불운 속에서 정신과 의사의 의뢰로 광인 초상화들을 남기는데 냉정한 사실주의로 평가됩니다. 그의 생이 짧았기에 알려진 주요작은 많지 않으나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들도 사후 화가들에게 영향이 컸고 낭만주의 화가들이나 사실주의 화가들에게 지속적 영향을 끼칩니다.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선구자인 제리코의 삶도 낭만주의와 닮아있습니다. 낭만주의 미술은 개성을 존중하고 정서적으로 자유를 구하며 지성보다 감정을, 객관보다 주관을 중시했습니다. 또한 형식보다 표현이 먼저이며 형태보다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느낌, 색채를 우선시하며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라 추한 것까지도 그려내었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에 예술가로서 편한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으나 사회 비판적 시선으로 불편한 주제를 선택하고 열정과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예술혼을 불태운 제리코는 낭만주의 미술의 위대한 예술가입니다.

테오도르 제리코(Jean Louis André Théodore Géricault, 1791-1824)/ 꼬로로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선구적 화가

인간의 격렬한 감정과 자신을 둘러싼 제도에 대한 모순을 주로 그렸음

32살에 낙마하는 바람에 일찍 세상을 떠남/ 살아생전 대중에게 공식적으로 선보인 작품은 3

외젠 들라크루아에게 큰 영향을 미침

전쟁터를 떠나는 부상당한 기갑병/ 358*294/ 1814/ 루브르박물관, 파리

제리코는 직접 전쟁의 체험을 느껴보기위해 왕실 기병대에 입대했음/ 전장의 끔찍한 모습을 보고는 전쟁의 참화와 인간의 갈등을 표현하기 시작했다고

남성 누드 습작/ 1815/ 보나미술관, 바욘, 프랑스

세 명의 사랑/ 1818/ 22.5*29.8/ 폴게티미술관, 로스앤젤레스

부부와 그 한쪽의 애인이 함께 있는 이 그림은 세간의 물의를 일으킨 파격적인 주제였다

흰 옷을 입은 여인의 한쪽 양말은 어디로 간거냐??/ 누워있는 여인이 부인인지 안겨있는 여인이 부인인지?? 아님 둘 다 아닌가?

메두사 뗏못을 위한 모델 습작/ 1818-9/ 46.7*38/ 폴게티미술관, 로스앤젤레스

눈빛이 살아있네...ㅎㅎ

메두사호의 뗏목/ 491*716/ 1818-9/ 루브르박물관

당시 서민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는 일은 유례가 없었기에, 이 작품은 새로운 회화의 시작을 알렸다고 함

1816년 프랑스의 대형 선박, 메두사호는 식민지 세네갈로 가던 중 난파됨/ 배에 타고 있던 권세가들은 무사히 탈출했으나 150명의 보통사람들은 구명선에 밧줄로 이은 뗏목에 의지해야했음/ 그나마도 구명선에 탄 승객이 밧줄을 끊어버리는 바람에 이들은 13일을 바다에서 표류하다 간신히 구출되었음/ 구출당시 생존자는 겨우 14

무능력한 선장의 과욕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이 사건은 왕당파에 의해 어둠속에 사라질 뻔 했으나 생존자 중 리더 역할을 한 외과의사 앙리 사비니가 정부에 한 증언이 어느 신문사에 유출되면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됨/ 어떤 책에서는 난파일기가 책으로 출간되었다고도 함

선장은 고작 3년형을 받는데 그쳤다고 함

제리코는 생존자들을 찾아다니며 상황을 듣고, 시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자 병원과 시체 안치소를 찾아 실제 환자와 사체를 스케치했다고 함

구성을 위해서만 1년 넘게 고민하며 수많은 스케치를 시도/ 준비와 제작기간만 총 16개월

1819년 살롱전에 걸렸을 때 제목은 <난파 장면>/ 정부에서 숨기고 싶어하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검열을 피하기 위해 제목을 바꿨으나 그림을 본 모든 사람들이 메두사호를 떠올림

외젠 들라크루아 같은 후배들은 작품에 크게 감동했으나, 고전주의 작품을 선호하던 사람들로부터는 비난을 받았음

격한 논쟁속에서도 최고상인 금메달 획득/ 그러나 정부는 소장을 거부했고 구매자를 찾지 못한 제리코는 친구집에 작품을 맡기고 시골로 돌아갔다고 함

다음해인 1820년 영국으로 작품을 들고가 전시한 제리코는 대성공을 거둠

1882년 런던에서 돌아와 좋아하던 말을 타다 낙마했고 병세가 악화되어 182432세에 사망

엡섬 더비 경마장/ 92*122/ 1821/ 파리 루브르박물관

엡섬 더비는 영국 남부의 엡솜에서 열리는 경마 대회

제리코는 화가가 된 이래 늘 말에 매료되어 있었고 다수의 말 그림을 그렸다

화가가 사망한 지 약 50년 후 영국의 사진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는 말이 달리는 모습을 찍기 위해 24대의 카메라를 경주 트랙에 설치한 뒤 촬영했는데 말은 전력 질주를 할 때도 늘 한 발은 바닥을 향하며, 네 발이 땅에서 다 떨어져 있는 순간이라해도 다리가 안으로 오므라들지 밖으로 펴지는 일은 없다고 함/ 제리코는 죽을때까지 이 사실을 몰랐다고 함

말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말에서 떨어져 입은 부상을 입었고 그 후휴증과 결핵으로 사망했다고 함

도박에 미친 여인/ 1819-1922/ 패널에 유채/ 루브르박물관

제리코는 인간의 정신세계와 광기에 관심이 커 일련의 불안한 사람들을 소재로 연작을 그렸음

제리코는 직접 살페트리 병원의 정신병원을 출입하며 대상을 관찰하고는 했다고 함/ 이 병원은 파리5구에 있는 종합병원으로 1885년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 연구를 위해 유학 온 병원이기도 하다고..

도벽있는 사람의 초상/ 1820-24/ 61.2*50.1/ 켄트미술관

*참고문헌

- 1페이지 미술 365/ 김영숙/ 빅피시

- 기묘한 미술관/ 진병관/ 빅피시

- 미술관에 간 인문학자/ 안현배/ 어바웃어북

- 그림수다/ 김영숙/ 아트북스

- 나는 미술관에 간다/ 김영애/ 마로니에북스

- 1000개의 그림 1000가지 공감/ 이경아/ 아이템하우스

- 사랑과 욕망, 그림으로 읽기/ 스테파노 추피/ 김희정/ 예경

- 그림이 보인다/ 리즈 리딜/ 안희정옮김/ DnA

- 남자, 그림이 되다/ 가브리엘레 툴러/ 박광자 옮김/ 예경

 

 

'회화, 미술사, 서양화가, 작품 등 한국화가 한국화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3) 2024.11.26
에콘 실레  (0) 2024.11.26
드가  (3) 2024.11.26
루벤스  (5) 2024.11.26
라파엘로  (2) 2024.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