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후 60년 대한민국의 생존 조건/김태윤
격화하는 글로벌 경쟁
인재 모여드는 플랫폼 돼야
과학기술 영역이 최대 승부처
국가전략 조율할 기구 필요
효율 높인 '작은 정부'는 필수
억압 규제 걷고 민간 역량 키워야
향후 60년 대한민국의 생존 조건우리는 1960년대 국가의 생존을 걸고 뼈를 깎는 노력 끝에 오늘의 성공을 이뤄냈다.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던 시대에 국민 모두가 각자 자리에서 절박하게 버텼고, 이를 통해 기적 같은 성장을 이끌었다. 그 치열한 시간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이제 우리는 다음 60년을 준비해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 과연 지금 우리에게 그때만큼 자신감과 절박함이 남아 있는지 자문해보고 체계적인 성장 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지금 상황을 잘 이해해야 한다. 글로벌 경쟁과 공급망 개편, 국지 분쟁 시대다. 가장 구조적인 것은 글로벌 경쟁이다. 삼성에 취직하려면 인도 젊은이와 경쟁해야 한다. 동네 치킨집도 세계 최고 이탈리안 레시피와 경쟁해야 한다.
인재를 채용하면 구글, BYD와 경쟁해야 한다. 경쟁이 치열하니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 개인 하나하나가 역량을 키우고 국가가 그 과정에 힘을 보태야 한다. 국가 차원에서는 플랜 A, B, C까지 준비해야 한다. 다만 최근 들어 미·중 간 전략적 갈등이 한국 산업과 지정학적 상황에 어느 정도 숨통을 트여줄 듯하다. 그나마 한시적인 이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한다.
둘째, 자원을 총동원해야 한다. 과거와 미래, 국내외 모든 자원을 말이다. 미래 자원을 끌어 쓰기 위해서는 유연한 교육제도가 필요하다. 어린 영재를 최고로 교육·훈련하고 상호작용하게 하는 영재 교육 시스템을 시급히 도입해야 한다. 아이들의 역량을 대학 입시에 소진시켜서는 안 된다. 청년이 고용될 수 있도록 노동시장 경직성을 풀어야 한다. 우수한 노인의 식견과 혜안을 인공지능(AI)과 함께 활용할 수 있는 재교육 인프라, 제도도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대 AI 인재 유출국이다. 적극적으로 전 세계 인재를 유치할 수 있는 플랫폼이 돼야 한다. 과거 전 세계에 흩어진 우리나라 인재들이 고국으로 몰려들었듯이 우리나라가 전 세계 인재의 고국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셋째, 전략적 선택을 해야 한다. 기술 발전 격변기에 과학기술 영역에서 승부를 내야 한다. 액션플랜도 잘 짜야 한다. 매우 교활하고 똑똑해야 한다. 방향과 속도를 예민하고 정교하게 조율해야 한다. 아무거나 덥석덥석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결정을 제일 잘하는 당사자는 기업·사업가, 과학기술 연구자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외눈박이 전문가와 선동가를 조심해야 한다. 툭하면 튀어나오는 무모한 규모의 투자, 몇만 명 양병, 세계 몇 위 달성 운운은 비양심적인 구호일 뿐이다. 다음 정부에서는 미래전략부 같은 국가전략 기획 담당 조직이 신설되기를 기대해본다. 물론 지금의 관료 제하 부처가 아니라 매우 혁신적이고 데이터에 기반한 플랫폼으로서 말이다.
넷째, 돌파를 위한 리더십이 중요하다. 선택과 집중을 구성원에게 설득하는 리더십 말이다. 선택에 따라 피해를 보거나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그룹을 위로하고, 모두모두 미래 보상을 위해 각자 노력하며 그에 대한 보상을 신뢰하게 말이다. 작금의 정치 현실을 보면서 안타깝고 절망적이기는 하다. 희망을 잃지 말고 서로서로 격려하는 동료 리더십이라도 지켜내야 한다.
다섯째, 작은 정부는 필수다. 한국 정부는 통계상으로 그리 큰 정부가 아니다. 그러나 거대하고 촘촘한 규제, 정부 의존 관행, 부조리·부패 탓에 정부가 사실상 결정하는 자원 배분이 국내총생산(GDP)의 60% 이상일 것으로 필자는 추정한다.
실제로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발표한 2024년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한국은 67개국 중 종합 20위를 기록했다. 기업 효율성은 23위, 기업 민첩성은 9위, 국민의 유연성·적응성은 14위였지만 정부 효율성은 39위로 그중에서도 재정은 38위, 기업 여건은 47위로 특히 뒤처졌다. 가장 비효율적인 집단이 가장 효율적인 시장과 민간을 억압하고 있는 셈이다. ‘개선’이나 ‘혁신’이라는 말장난으로는 이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 감세와 건전 재정을 통해 민간이 활용할 수 있는 재원을 애초부터 넉넉히 마련하고, 규제를 혁명적으로 철폐해 민간의 자율성과 창의가 넘치게 해야 한다
소프트 파워의 시대는 끝났나/신연수
'소프트 파워(soft power)'의 개념을 정립한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석좌교수가 지난 주 별세했다. 강압이나 물질적 보상을 통해 상대방의 행동을 바꾸는 능력이 '하드 파워'라면, 매력이나 설득을 통해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이 소프트 파워다.
미국이란 나라가 냉전 이후 세계 원 톱이 될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물론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 덕분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라는 보편적 가치와 문화, 외교적 매력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긴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3선 출마를 거절함으로써 민주적 정권교체 전통을 확립한 것이나,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한 사례는 수많은 책과 영화를 통해 세계인들의 머릿속에 미국의 문화와 가치를 새겨 넣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연합(UN) 설립을 주도하며 지금의 국제질서를 만든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랬던 미국이 스스로 소프트 파워를 파괴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멋대로 다른 나라를 협박하고 불안하게 한다. 미국의 가치관을 세계에 퍼뜨리는 하버드, 스탠퍼드 같은 명문 대학들에 대한 지원을 끊고, 다양성과 포용성 정책을 폐기하라고 압력을 넣고 있다.
트럼프 정부는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해외 원조를 중단하고, 담당 부처인 국제개발처 직원들을 해고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미국의 국익이 우선이라고 하지만, 단기적인 시야로 국익을 챙기다가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국익을 잃게 될 지도 모른다.
중국은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 이후 국력이 무척 커졌지만 국제사회에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2030년이면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이 미국을 추월하리라는데, 미국은 소프트 파워조차 버리고 무엇으로 중국을 이기려고 하는지 의아하다.
소프트 파워의 결핍은 국제 정치 뿐 아니라 국내 정치에서도 두드러진다. 국내 정치야말로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소프트 파워의 경연장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동안 거대 양당이 벌인 행태는 실망스러웠다.
자기네 대장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고 대법원장 탄핵을 외치는 민주당에는 독재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삼권분립이라는 것이 이제 막을 내려야 될 시대가 아닌가"라며 아예 대놓고 삼권분립을 부정하는 말까지 한다. 다수당의 힘을 내세워 장관들과 검사들을 줄줄이 탄핵한데 이어 법관들도 탄핵할 참이다.
민주당이 국회 다수당으로서 입법권을 장악한데 이어 행정권, 사법권까지 갖는다면 브레이크 없는 독주 체제가 될까 걱정이다. 이재명 후보는 “복수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지난해 총선에서 '비명횡사' 공천으로 '뒤끝 작렬'을 보여준 바 있다. 반대파를 포용하기보다 확실한 보복으로 모두 엎드리게 만든 노골적인 '하드 파워'였다.
국민의힘도 더하면 더했지 나을 게 없다. 김문수 후보는 경선에서 단일화를 외쳤지만 당선된 뒤에는 공식 후보라는 '권력'을 믿고 약속을 저버렸다. 당 지도부는 자신들이 뽑은 대선 후보를 한밤중에 날치기로 바꾸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단일화를 관철하려 했다.
무엇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령이야말로 소프트 파워를 무시한 전형적인 사례다. 윤 전 대통령은 3년 전 대선 때 야당과의 협치, 국민 통합을 외치며 당선되었다. 그러나 집권한 뒤에는 소통하고 설득하기보다 야당과 강 대 강 대치를 이어갔고, 결국 군사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대착오적인 계엄령까지 선포했다.
미국의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는 저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가 민주주의의 탈선을 막는 가드레일 역할을 한다고 했다. 정치적 상대를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고, 주어진 권력을 행사할 때 자제심을 발휘하는 관행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지키는 보루라는 것이다. 관용과 절제의 미덕을 저버리고 극단적 대립을 일삼는 정치인들이 새겨야 할 말이다.
엊그제 공식 선거운동을 시작한 대선 후보들은 모두 계파를 초월한 화합과 국민 통합을 외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권력을 쥐게 되면 소통과 타협보다 제도적 강제력을 앞세울까 걱정이다. 어느 후보가 약속을 잘 지킬지 눈 밝은 유권자들이 승리하는 대선이 되길 바란다. 나이 교수는 떠났지만 소프트 파워의 중요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머니, 이 절절한 그리움의 이름/이동순
나를 낳고 10개월 만에 돌아가셔
젖을 먹던 기억도 없는 어머니
늘 삶의 중심이자 그리움의 대상
74년간 쓴 사모곡들 담은 시집 내
어버이날 맞아 당신 영전에 바쳐
어버이날을 앞두고 시집 한 권을 세상에 내놓는다. 제목은 ‘어머니’(도서출판b, 2025). 이 시집에는 내가 평생토록 써온 어머니에 대한 시들, 그리고 새로 쓴 시 여러 편이 담겨있다. 한 권의 시집이자, 내 생의 가장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절절한 사모곡(思母曲)이다.
어버이날이 다가오면 어머니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럴 때면 한 해의 끝을 정리하는 기분마저 든다. 어릴 적, 동네 골목에서 친구들이 하나둘 어머니의 부름에 돌아갈 때, 나는 홀로 남겨졌다. 집에 들어서면 적막만 가득한 방 안에서 어머니 없는 저녁을 맞곤 했다. 품에 안겨본 기억도, 젖을 먹은 기억도 없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나를 사무치는 그리움에 빠져들게 했다.
나는 어머니를 뵌 기억이 없다.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어머니는 피란지에서 나를 낳고 병을 얻어 줄곧 앓으셨다. 그리고 이듬해, 내가 생후 10개월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와 이승에서 함께한 시간은 고작 20개월. 열 달은 뱃속에서, 열 달은 세상에서였다. 그래서 늘 말하곤 했다. ‘내가 어머니와 함께한 시간은 스무 달뿐이었다’고.
어머니가 병약하셨기에 나는 젖도 먹지 못했고, 품에 안겨본 기억도 없다. 당연히 얼굴도 모른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내 삶의 중심이었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내게 결핍이자 그리움이었고, 그리움은 시가 되었다.
그리움은 내 인생의 중심이었다. 어머니는 존재했지만 기억할 수 없는 분이었고, 나를 낳았지만 안아주지 못한 분이었다. 누군가는 첫사랑을 시의 모태로 삼았다지만, 내게는 ‘어머니’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돌아가신 지 74년이 지났다. 오랜 세월 동안 나는 어머니에 관한 시를 꾸준히 써왔다. 봄이면 꽃 속에서, 겨울이면 바람 속에서 어머니의 숨결을 느꼈다. 그것은 신비로움이 아니라 아픔이었다. 존재했지만 기억할 수 없고, 나를 낳았지만 품어주지 못한 어머니. 나는 그 부재를 시로 채우며 살아왔다.
봄이면 꽃 속에서, 겨울이면 찬바람 속에서 어머니의 숨결을 느꼈다. 그것은 신비로운 체험이라기보다 가슴 아픈 감각이었다. 실체는 없지만 존재하는 듯한 그리움. 그 애틋함이 삶 속 깊이 스며들어 내 일상을 이끌어왔다.
내게는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해준 사람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품에 나를 안고 동네를 돌며 젖을 구했고, 누나들은 내 젖병을 삶고 이불을 갈며 어머니 몫의 보살핌을 나눠주었다.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에 나오는 열 가지 은혜 가운데 몇 가지는 그들 덕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살아남았다. 세월이 흘러 벌써 74년. 나는 여전히 아침마다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 오늘 하루도 당신을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이 고백을 할 때마다 문득 생각한다. 어쩌면 그리움이야말로 오늘까지 나를 살아있게 한 힘이 아니었을까 하고.
이번 시집 ‘어머니’는 그런 시간들의 결실이다. 이미 쓴 시들을 모았고, 새로 몇 편을 더 썼다. 이 시집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오래 망설였다.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너무 개인적인 슬픔은 아닐까. 그러나 어버이날을 앞두고 문득 마음을 다잡았다. 이 책은 내게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어머니를 향한 노래일 수 있다고.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이 시집에는 ‘속썩은풀’이라는 시가 실려 있다. 슬픔 많고 고단한 삶을 살아낸 이 땅의 어머니들을 상징하는 시다. 그 시에 담긴 보라색 꽃의 이미지를 표지 색으로 삼았다.
나는 당신 앞에 발길 멈추고 서서/ 이날까지 모든 것 참고 삭이며 살아오신/ 그 세월의 내력을 생각합니다. 시 ‘속썩은풀’ 중에서
나는 시집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어머니의 영전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어머니는 이 아들의 시집을 받아 들고 무엇이라 하실까. 늦은 고백에 가슴이 아리실까, 당신 그리움이 담긴 시작품마다 눈물을 흘려서 책장을 적실까. 돌아가신 지 일흔 네해, 그리움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이 시집을 통해 내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다. 함께하지 못한 시간들이 얼마나 긴 그리움이었는지, 그리고 그 그리움이 어떻게 시로 쌓여왔는지를 세상과 나누고 싶었다. 그 애틋함 덕분에 나는 이날까지 살아올 수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지금도 내 삶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식민지 건설에 성공한 K-매운맛의 역설/ 김봉성
한식의 세계화가 과학을 설득했다. 과일이지만 채소로 분류된 토마토처럼, 매운맛은 과학적으로 통각이지만 어차피 입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어서 문화적으로 미각으로 분류되었다. 매운맛의 미각 수용체는 항문에도 있다. 우리가 매운 걸 먹을 때, 몸의 입구와 출구에서 두 번 맛보는 셈이다. 변기 위에서 맛보는 화끈한 복습, ‘맵다’가 전세계 화장실에 펼쳐진다.
‘맵다’는 한국이 독보적이다. 언어의 위상이 다르다. hot이 매움과 뜨거움을 구분하지 못한 건 음식 문화 때문이라고 추측했지만, 매운 음식이 발달한 나라에서도 ‘맵다’는 드물었다. 멕시코에서 쓰이는 스페인어 picante는 혀를 찌르는 통각이다. 중국어 辣(là)는 강한 맛이나 기운으로 해석되며, 화끈거림은 뜨겁다(热)와 섞여 표현된다. 인도네시아어 pedas는 매운맛을 지칭하긴 하지만 혀에만 머무르고, 다른 감각 기관으로는 확장되지 않는다. 태국어 เผ็ด(phèt)는 통각성 자극을 분리해내는 예외적인 단어지만, ‘맵다’처럼 ‘달다’, ‘짜다’와 동등한 종류의 위계 감각은 아니다.
한국어 ‘맵다’는 ‘개새끼’ 같은 찬탈자다. ‘개’는 본래 ‘가짜’, ‘쓸모없거나 하찮은’을 의미했지만, 지금은 동물 개가 멸칭된 접두사처럼 쓰인다. ‘맵다’라는 감각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고추로 들어왔다. 나물과 김치에 침투해 일상적으로 쓰였다. 매일 꼬박꼬박 입 안에 박히는 통증은 맛으로 스몄다. 이제 ‘눈이 맵다’, ‘날씨가 맵다’고 할 때, 고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어졌다. ‘맵다’의 중심을 맛이 차지해 ‘맵다’의 모든 비유를 거느린 것이다.
어휘의 역사 감각까지 뒤집은 ‘맵다’는 세계로 침투 중이다. ‘맵다’는 이제 감각이 아니라 코드다. 불닭볶음면과 먹방 콘텐츠를 타고 전 세계로 퍼진 이 통각적 자극은, 다른 언어가 설명하지 못하는 고통과 쾌감의 혼종을 지시하는 단어로 쓰이기 시작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Korean spicy”라는 말이 따로 등장해 hot이나 spicy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을 구분하려 들고, 멕시코, 인도네시아, 태국처럼 매운 음식 문화가 있는 나라들조차 ‘맵다’라는 감각어의 정밀도에 주목하며 ‘불닭레벨’, ‘K-spicy’라는 단어를 빌려 쓰기 시작했다. 영어와 스페인어 일부 사용자들은 “maepda”라는 발음을 그대로 옮기며 새로운 감각어를 수입하고 있다. 천주학을 받아들였던 작은 나라가 ‘맵다’를 통해 ‘새로운 맛’을 전도하는 셈이다. - 보고 계십니까, 김구 선생님.
작금의 ‘맵다’는 도파민을 닮았다. ‘맵다’는 본래 엔도르핀의 일이었다. 매울 때, 몸은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엔도르핀을 분배했다. 그러나 더 매운맛을 찾는 것은 중독, 도파민의 일이었다. 1986년 매워서 ‘사나이 울리는’ 신라면은 1300SHU였다. 신라면이 대중화 되면서 신라면은 ‘맵다’의 기준이 되었다. 신라면보다 매워야 매웠다. 그러다 2012년 붉닭볶음면이 4400SHU를 들고 나오면서 ‘맵다’의 천장을 높였다. 이후는 확실히, 맛이 아니라 SHU 높이의 경쟁으로 변했다. 2025년, 붉닭볶음면으로도 모자라 라면은 13000SHU(핵불닭볶음면), 15000SHU(틈새라면 극한체험)까지 치솟았다.
맵부심은 지나치게 한국적이다. 숫자와 경쟁이 노골화된 품위 없음보다 그 안에 감춰진 ‘견딤’이 그러했다. 인간을 숫자로 쉽게 평가하는 천박함은, 숫자로 평가되기 위해 고고하게 견딘 심리적 자격의 공감대였다. 국영수와 선행학습의 쓸모를 납득하지 못한 채 막연히 견딘 영광이 학력이었고, 학력은 매웠다. 인공지능시대 학력이 쓸모없어짐이 확실시 되어가는데도 아이들은 학원에서, 여전히 매웠다. 도파민과 매운맛의 동맹이 만들어낸 현대의 감각 정치다. 도전해야 했고, 극복해야 했고, 증명해야 했다. 취업시장도, 연애시장도, 결혼시장도 매웠다. 상처뿐인 맵부심에 도파민을 들이부었다.
물론, ‘달다’도 중독된다. 오히려 위로와 보상의 영역에서 도파민과 직결된다. 그러나 ‘달다’는 죄의식을 동반한다. 가깝게는 충치와 체중증가, 멀게는 당뇨를 비롯한 대사질환을 알고 있어 적정 수준에서 통제된다. 그러나 ‘맵다’는 이 죄의식이 없다. 견딤은 미덕이므로 나는 나를 마음껏 가해한다. 통증을 참아내는 비교 우위의 쾌감까지 일석이조의 매커니즘은, 똥구멍의 비명을 듣지 못한다. 화장지로 닦아내면 그뿐이다. 그래서 ‘맵다’에서는 혐오와 냉소의 냄새가 난다. 장기 점막 손상을 차곡차곡 적립 중이다. 체념의 냄새도 난다.
‘맵다’의 세계화에서 ‘나의 쓸모없음’의 세계화로 읽어 본다. 한국인은 경쟁 속에서 ‘나’는 쓸데없이 존재했고, 고로 쓸모 없었다. 스스로를 번식에서 탈락시킨 0.75의 출산율로 증명한다. 한국이 압도적일 뿐, 전세계가 도긴개긴 심리적 개판이다. 개판의 어원도 개(dog)와 무관하듯, 도파민은 ‘개새끼’처럼 힘이 세다. 희망을 말하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맵다’는 속수무책의 고육지책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쓸데없이 존재한다. 그리고 인간을 대체할, 인공지능이 온다. - 도파민 식민지에서, 독립 의지는 있을까.
누구를 위한 정년 연장인가/김도영
정년 연장 불지피는 노동계
청년층 불이익 우려 애써 회피
정년제 기업 비중 21% 불과
노조 없는 中企엔 실효성 부족
일률적 법정 정년 연장 대신
퇴직 후 자율 재고용 고려해야
누구를 위한 정년 연장인가조기 대선을 앞둔 시점에 노동계는 정년 연장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현재 60세인 법정 정년을 65세로 5년 연장해 달라고 한다. 정치권도 원론적으로 정년 연장에 찬성하는 분위기다.
정년 연장은 퇴직과 연금 개시 간 시차로 발생하는 퇴직자들의 소득 공백으로 인해 그 필요성이 대두됐다. 2025년 현재 국민연금 개시 연령은 63세(1962년생)고 1969년생부터는 65세로 늘어난다. 또한 초고령사회로 진입한 한국에서 노동력을 확보하는 방안으로 정년 연장의 필요성이 거론되기도 한다. 이같이 적당한 명분이 있는 정년 연장을 정치권이 거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한국에서 정년 제도의 시작은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먼저 공공기관이 적용했고 민간 기업이 뒤를 따랐다. 처음에는 55세로 시작해서 58세로 늘어났다. 관행에 따라 자율적으로 적용하던 정년 제도는 2016년 고령자고용촉진법을 통해 법제화되면서 동시에 정년도 60세로 늘었다.
한국의 정년은 정규직 및 호봉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나이를 우선시하는 문화에서 근속 연수에 따라 월급이 올라가는 호봉제는 자연스러운 임금체계였다. 하지만 호봉제는 나이가 들수록 생산성에 비해 임금이 높아 기업의 비용 부담이 크다는 점이 문제다. 이에 기업은 일정 나이가 되면 근로자의 고용을 종료하는 정년이 필요했고, 대신 근로자는 정년까지 해고로부터 자유로운 정규직의 안정성이 필요했다.
경제가 고도로 성장하는 시기에는 정년, 호봉제, 정규직으로 대변되는 한국의 경직적인 노동시장 구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경제 상황에 맞게 인력을 조정할 수 있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필요해졌다. 그렇지만 한국은 이 문제를 비정규직 도입으로 비껴가며 정년제 정규직의 근간은 그대로 유지해 노동시장의 이중구조가 시작됐다.
문제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아래 정년 연장은 기업보다도 잠재적 근로자인 청년층에 피해를 줄 소지가 크다는 점이다. 기업이 정년 연장에 따른 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정규직 채용을 줄이고 대신 비정규직으로 대체하면, 청년이 원하는 정규직 일자리는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정년 연장은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더욱 심화한다.
그와 같은 일은 2016년 정년 연장에서 실제로 벌어졌다. 최근 한국은행의 ‘초고령사회와 고령층 계속근로 방안’ 연구에 따르면 2016년 정년 연장은 청년 고용을 심각히 위축시켰다. 특히 정년 연장으로 고령 근로자 한 명이 늘어날 때 청년 근로자는 약 한 명이 감소했고, 이런 효과는 대기업과 같은 청년층이 선호하는 일자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한다.
물론 정년 연장은 기존 정년제 근로자들에게 혜택을 준다.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심화라는 문제를 차치하고라도, 이 혜택이 청년층 피해를 상쇄하고 남는다면 정년 연장을 고려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정년 연장의 혜택을 실제로 받을 수 있는 근로자는 주로 노조가 있는 대기업 근로자에 국한한다. 지난해 고용노동부의 ‘사업체 노동력조사 부가조사’에 따르면 정년제를 실질적으로 운용하고 있는 사업체는 21%에 불과했고, 이들 중 상당수는 노조가 있거나 근로자가 300명 이상인 대기업이다. 노조가 없는 중소기업에서는 정년제가 유명무실하다.
정년 연장으로 청년층 일자리가 감소하고 대신 대기업 근로자의 생애 소득이 증가한다면 소득의 한계효용 체감을 고려할 때 사회 후생은 감소한다.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심화에 따른 양극화와 불평등 악화까지 고려한다면 현시점에서 정년 연장은 득보다 실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새로 들어설 정권이 기득권층보다는 청년층을 보호하고자 한다면, 일률적인 법정 정년 연장은 청년층의 희생으로 고연봉 노조원이나 대기업 근로자인 기득권층의 이권을 강화하는 정책임을 주지하기 바란다.
한국의 노동시장이 정년제 정규직을 유지하는 한 평균수명 증가와 인구 노령화의 물결 속에 정년 연장에 대한 논의는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한국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와 경직성을 오히려 강화하는 정년 연장 방안은 지양해야 한다. 일률적인 법정 정년 연장보다는 퇴직 후 자율적 재고용을 유도하는 것이 부작용을 줄일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미래를 위한 제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탄핵이 끝이 아니라고? 이후의 과제 (1) | 2024.12.25 |
---|---|
해방80년 제 7공화국 시대를 열자 (2) | 2024.12.23 |
MZ가 만난 MZ세대 속 이야기 (15) | 2024.08.27 |
일론 머스크 비만약 위고비 열풍 다음 과제는 요요 없는 약 (0) | 2024.08.01 |
명품 소비와 소확행 공존 사회, 좌절 혹은 행복 (0) | 2024.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