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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단편 소설

내일의 경이

by 자한형 2021.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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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흥길

 

 

어떤 퇴물 복서

 

남향한 창문에 드려진 어둠발로 보면 엔간히 한참 자고 난 뒤끝인 듯했다. 그러나 아직도 온몸 골골샅샅에 깝북 밴 채 응어리로 남아도는 한 주일의 피곤의 양으로 보아서는 이제 겨우 막 눈을 붙이려던 참인 듯도 싶었다. 고놈의 텔레비전이 노상 말썽이었다. 텔레비전에 관한 한 아내와 아이는 물과 불이었다. 아내는 쫄쫄 쥐어짜는 연속극과 어느새 죽고 못 사는 처지였다. 고놈의 바보상자가 코허리가 시큰하게 울려주는 동안이면 아내는 주부 입장에서 마땅히 긁어야 할 바가지도 까맣게 잊기 일쑤였다. 반면에 아들녀석은 또 스포츠 중계방송 쪽을 군것질 이상으로 즐겨했다. 중계 중에서도 특히 권투를 무지무지하게 좋아해서 닭싸움같이 싱겁게 끝나는 국내 순위 결정전이건 국제적인 대시합이건간에 권투 중계라면 밑 모르게 빠져드는 것이었다. 반년 이상을 더 기다려야 취학 통지서가 나올 나이인데, 어찌 된 녀석인지 서로 치고 패고 겨루는 걸 그렇게도 즐길 수가 없었다. 색종이처럼 분분히 쏟아지는 관중들의 환호와 강렬한 조명 속에 누군가의 손이 번쩍 들리면서 승자와 패자의 구분이 확연해지는 순간을 지켜보는 그런 재미 때문이리라. 녀석의 세계에서는 무조건 이긴 사람이 우리 편, 진 사람은 적이었다. 아내의 눈엔 그게 늘 못마땅해서 교육상의 해독을 들어 슬그머니 연속극 쪽으로 채널을 바꾸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이지만, , 나로서는 치고 패는 것과 쫄쫄 쥐어짜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얼마만큼 유익하고 또 유해한지 따져본 적이 없다.

 

영락없이 그날도 그랬다. 서로들 자기 나이를 잊고 별안간 동년배 사이가 된 두 모자가 맞대거리로 다퉈쌌는 소리를 나는 한참 전부터 듣고 있었다.

"그럼 나 찻길에 나가서 뛰어놀 거야."

아들녀석이 제 어미를 위협하는 소리였다.

"맘대루 하렴."

"그럼 나 유괴될 거다, 시이. 모르는 아저씨가 과자 사주면 막 따라갈 거다, 시이……"

어른 같은 아이나 아이 같은 어른이 한치 양보도 없이 빡빡 우기고 악지세우는 그 소리가 휴일 오후의 낮잠을 여간만 헤살하는 게 아니었으나 나는 당최 거기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내겐 그 아무개처럼 한 집안을 옴쭉 못 하게 단속하고 잡도리하는 재간이 없는 탓이기도 했다.

 

잠결에 들어봐도 아들녀석의 외고집 쪽이 승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결국 레프트 훅에다 라이트 어퍼를 외치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졸음 속을 비집고 드는 중계 방송 소리는, 그것의 본색이 몹시나 격렬하고 긴박감 넘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한가하고 태평스럽게만 들렸다. 어렴풋한 상태에서 나는 그걸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또다시 잠의 늪 속에 느긋이 잠기고 말았다.

그래서 아내가 냅다 내지른 맨 처음의 소리는 새겨들을 겨를이 없기도 했다. 다만 그것이 노골적으로 나를 지목하고 쏟은 말이란 것만을 막연히 깨닫는 정도였다. 그리고 무엇엔가에 호되게 놀란 나머지 마치 연애 시절에 내가 맨 처음 기습적으로 자기 입술을 훔쳤을 당시같이 새가슴마저 할딱거리고 있음을 얼핏 눈치채는 그런 정도였다.

 

"맞았어요, 문씨가 틀림없다니깐요!"

그러자 아내의 두번째 외침이 내 잠을 완전히 결딴내버렸다.

"저것 좀 봐요, 여보!"

"방금 뭐라구 그랬지?"

"문씨라구요! 문씨란 말예요!"

그렇다면 나를 잠에서 깨운 첫번째 소리가 어떤 것이었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 어머머, 저게 누구야, 하면서 한바탕 오도깝을 떨었을 것이었다. 텔레비전을 두고 하는 말이 분명한데, 고놈의 바보상자 속에서 엉겁결에 뭔가를 끄집어내고는 그걸 들고 있어야 할지 버려야 되는 건지 몰라 쩔쩔매는 꼴이었다.

"문씨가 뭘 어쨌다는 거야?"

"있잖아요, 왜 당신 친구 문씨…… 그 양반이 지끔 텔레비에 나왔다구요!"

절대로 반갑다거나 희한해서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또 모른다. 하지만 아내가 얘기하는 사람이 어김없는 문씨---그러니까 내 옛날 친구 문명남(文明男)이 그 녀석임에 틀림없다면 이건 확실히 놀랄 만한 가치가 충분한 일이었다. 나는 텔레비전 앞으로 바싹 다가들었다.

그러나 우리집 알량난 12인치 화면 속에서 내가 본 것은 엉뚱하게도 권투 시합 광경이었다. 여태껏 중계가 계속 중이었다. 눈에다 버팀목을 대고 화면 전체를 이잡듯이 훑어봐도 비슷한 사람조차 안 보였다. 결과적으로 화면 속에서 내가 확인한 것은 아내가 말하는 문씨---그러니까 나하고는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내리 12년 동기동창인 문가 그치가 아니었다. 권투와는 눈곱만큼도 안 어울리게 그저 나긋나긋하게만 생긴 아나운서와 역시 입담이나 말발과는 거의 인연이 안 닿도록 짝없이 험상으로만 생겨먹은 해설자의 얼굴이 화면에 그득했다. 그리고 언제 봐도 한 대 콱 쥐어박아주고 싶은 꼽사리들의 모습이 보였다. 주로 민대가리 꼬마동이나 학생들인데, 개중에는 제법 차린다고 차려입은 신사분도 끼여 있어서 더 좀 유리한 각도를 잡을 속셈으로 애들 틈바귀에서 알게 모르게 밀고 당기며 모니터와 카메라 쪽을 번갈아 기웃거리다가, 만족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드시 불만이어서도 아닌 애매한 웃음을 실실 흘리다가, 이번에는 주머니에서 휴대용 빗을 꺼내어 슬그머니 하이칼라 머리를 손본 다음 전보다 더 유리한 각도를 향하고 아나운서와 해설자 사이로 쓰리꾼처럼 파고드는 어른도 눈에 띄는 것이었다. 아무려면 설마 그런 부류들 속에 내 고향 친구 문명남이가 섞여 있을 성싶지는 않았다.

"당신 혹시 잘못 본 거 아냐?"

"천만에요, 화면이 바뀌면 인제 또 나올 거예요. 틀림없대두요."

미상불 아내의 장담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화면은 바뀌었다. 그러나 아내의 예측과는 달리 이번에는 링 위였다. 10이라고 쓴 나무판대기 하나가 링을 한 바퀴 돌다가 내려가는 순간이었다.

"정신 바짝 차리고 보셔야 돼요. 아 글쎄, 저도 첨엔 감쪽같이 못 알아봤지 뭐예요."

한결 맥이 풀린 말씨였으나 아내는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그것이 마지막 라운드임을 아나운서는 특별히 강조하고 있었다. 이강민 선수가 과연 마지막 라운드 종료의 공이 울리는 그 순간까지 훌륭히 버텨낼 수 있을 것인지 어떤지 자못 궁금하다고 떠들었다. 이선수가 과연 앞으로 몇 번째의 다운을 딛고 몇 번째로 일어서는 몇전몇기의 기록을 세울 것인지 시청자 여러분과 함께 다 같이 기대해 보자면서 그는 사뭇 치를 떨었다. 그는 근무자로서 보기 드물게 공정을 잃어 있었다. 자기에겐 다운을 뺏는 선수권자 따위는 애시당초 안중에도 없으며 오직 수없이 다운을 당하는 도전자만이 관심의 전부라는 듯 매우 편파적인 중계를 서슴지 않았다. 이윽고 공이 울리고 두 선수가 동시에 링 중앙으로 내달아 나왔다. 곧이어 접전이 벌어졌는데, 상대하는 두 선수의 모습이 얼른 느끼기에 무척 희극적이었다. 널리 수소문해서 일부러 짝을 맞춘 것같이 하나는 땅딸보고 다른 하나는 꺽다리였다. 그래서 흡사 절구통과 절굿대의 춤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나가 때리면 다른 하나가 맞고, 하나가 다가서면 다른 하나가 재빨리 뒷걸음질을 쳤다. 권투라는 게 원래 그런 것이고 어느 시합에서나 물리게 보아온 풍경이었다. 그저 그랬다.

"에이, 시시해."

여섯 살박이 아들녀석이 시시해서 못 보겠다고 연신 투덜거렸다. 녀석이 시시하다면 정말 시시한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설마 저 땅딸보보구 문씨라고 그런 건 아니겠지? 설마 저 꺽다릴 보구 문씨라고 그런 건 또 아니겠지?"

"원 당신두, 누가 문씨 그 양반을 모를까봐 그러우?"

"없잖아, 눈에다 쌍심지를 켜고 봐도 없는 게 분명하잖아."

"글쎄 조금만 더 기다려보세요."

"당신 눈이 밝다 치자. 그래 문가 그 친구가 텔레비에서 뭘루 나오더노? 권투 선수 아니면 그럼 매니저야? 쎄컨드로라도 나왔단 말인가?"

"매니저 아니야! 쎄컨드 아니야!"

"옳지, 엄마보단 네가 낫겠다. 너 문씨아저씨 앨범에서 본 적 있지? 그 아저씨 정말 텔레비에 나오데?"

"문씨 아저씨 누군지 몰라. 엄마가 괜히 그래. 엄만 순 공갈이야."

녀석이 심통을 부렸다. 아들녀석의 지청구에 아내는 대척하지 않았다. 다만 텔레비전이 소원대로 제꺼덕 문씨를 내보내주지 않는 게 안타깝다는 표정이었다.

"전 지끔두 머가 먼지 통 모르겠어요. 뜨개질하다보니까 사람들이 별안간 죄 일어나더니 와 와 괌을 질러대지 않겠어요. 키가 큰 쪽이 바닥에 벌렁 나자빠져 있고 심판이 그 앞에서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보였어요. 그때였어요. 웬 남자가 부르르 앞으로 달려나가더니 손바닥으로 마룻바닥을 탕탕 때리면서 쓰러진 사람한테 머라고머라고 막 괌질을 치는 거예요."

"그 사람이 문씨더라 그 말이지?"

"그래요, 문씨였어요. 첨엔 저두 몰랐는데 카메라가 눈깜짝할 새 그 사람을 주연 배우처럼 키워놓더니 계속 붙잡고 있잖아요.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싶은데 얼른 생각이 안 나요. 저게 누구더라, 저게 누구더라 하면서 조바심치는 참인데 쩍 벌어진 입 속에서 뻐드러진 송곳니가 드러나더군요. 그제서야 깨달았죠. 그 토끼 같은 겁쟁이 눈하며 걀쪽하게 흐른 턱하며, 갈데없는 문씨 그 양반였어요."

나는 풀썩 웃고 말았다. 그렇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문씨란 걸 믿게 하려고 끝내 진지해지려는 아내나 잠시나마 덩달아 흥분했던 나 자신이나 그 모두가 한낱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역시 아내는 아무데나 집어던져도 무방한 허접쓰레기를 주워들고는 내내 쩔쩔매고 있었음이 거의 명백해졌다. 증거로 뻐드렁니를 내세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아내의 눈을 일단 우습게 알아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문명남이를 꼭이나 문명남이답게 소개할 요량이었다면 텔레비전은 그 뻐드렁니 쪽보다는 차라리 참외 모양으로 톡 볼가져나온 그의 배꼽노리께를 중점적으로 비치는 게 한결 생색 있을 뻔했다. 원래 그는 운동 종류라면 맨손체조에도 서툰 위인이었다. 운동엔 소질도, 그렇다고 취미조차도 없는 그가 부러 권투 시합장에 나타나 더군다나 일선 관계자나 되는 양 불운한 선수를 상대로 만좌중에 수작을 건넬 지경이라면 여지껏 나는 그를 헛 알아왔던 셈이 된다.

 

스포츠 중계가 아닌 다른 프로에 나왔다면 혹시 또 모른다. 그는 시인이었다. 치고 패는 장면보다는 가급적이면 그가 무슨 교양 프로 같은 데 어엿한 초대손님 자격으로 등장했기를 은근히 바라는 심사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지 그는 일찌기 그 재질을 인정받은 바 있는 한 사람의 기성 시인이었다.

"시시하다, 시시해!"

내 보기엔 만판 시시하기만 한 것도, 그렇다고 또 전혀 시시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들녀석은 늘 입에 발린 소리가 시시해서 못 봐주겠다는 것이었다. 공정히 얘기해서 그것은 서로 지겹지 않을 만큼 적당히 소강을 유지하다가 후다닥 맞붙어 알맞게 한바탕 싸우고는 물러나기를 번차례로 하는 그런 시합이었다. 특별히 이쁨받게 잘하는 선수는 꺽다리였다. 수없이 나자빠지긴 했을망정 그의 동장은 여전히 기민했다. 누가 보든지 틀림없이 복부를 겨냥하고 치는 것 같은데 정작 상대박이 맞는 자리를 보면 면상이었고, 물새마냥 긴 다리를 재게 놀려 요리조리 내빼는가 하면 어느새 껴안을 듯이 다가들어 이번에는 면상을 노리는 척하면서 실상은 복부를 있는 힘껏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무용이 아닐 수 없었다. 예삿 재주 가지고는 몇 차례씩 다운까지 당해가면서 그렇도록 유연한 몸놀림을 지니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는 우아하게 때리고 우아하게 도망쳤다. 심지어는 속임수마저도 매우 우아한 방식으로 수행하곤 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쓰러지는 장면만큼은 결코 우아하게 연출해내지 못했다. 원채 맷집이 약한 탓이리라. 그토록 유리하게 전세를 이끌어나가다가도 불시에 들어오는 한 방 주먹에 속절없이 나가떨어져 추태를 보이곤 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꼴이었다. 그의 마지막 다운은 그 자신이 상대방을 향해 마구 소나기 편치를 내리꽂던 유리한 상황 속에서 실로 눈깜짝할 새 이루어졌다. 등신처럼 얻어터지고만 있던 땅딸보가 그 피투성이 얼굴로 한 차례 씨익 웃고 나더니 별안간 깡총 뛰면서 턱을 명중시켜버린 것이다. 어찌 보면 자신의 비참함을

 

한껏 돋보이려고 짐짓 그러는 듯한, 참담하기 그지없는 자세였다. 흡사 동바리가 빠져버린 갱정(坑井)처럼 그가 삽시간에 와그르르 허물어져내리자 곧 주심의 카운트가 시작되었다.

"저기 저기 저 사람예요!"

실은 나 역시 꺽다리가 쓰러지는 그 순간부터 행여 하는 마음으로 링 주변에서 낯익은 얼굴 하나를 뒤져 찾고 있던 참이었다.

"문씨 그 양반이 지끔 또 달려나가구 있어요!"

아내의 지적이 있기 진즉 전에 벌써 나는 그 인물을 주목하고 있었다. 허리가 꾸부정히 휘인, 장발에 가깝게 더부룩한 뒤통수의 사내였다. 거기에다 가죽잠바 차림이었고, 좀 야해 보이는 금속테의 안경까지 처억 하니 걸치고 있었다. 조금 전 아내의 말마따나 맨 앞줄 좌석에 앉아 있었을 그는 처음에는 발딱 일어서는 뒷모습만을 보이더니 청 코너 쪽을 돌아 중립 코너, 즉 꺽다리가 나자빠져 있는 곳으로 눈부시게 뛰면서 옆모습과 앞모습을 차례로 드러내었다. 곧이어 사내의 몹시 서둘러대는 듯한 얼굴이 캔버스와 로프 사이 좁은 공간으로 디밀어졌고, 그는 쓰러진 사람을 향해 큰 소리로 그리고 아주 빠른 말씨로 뭐라고 거듭 외치는 입 모양을 했는데, 때마침 소란의 절정에 다다른 장내 분위기가 그의 말소리를 죄 삼켜버려 마치 무언극 속의 한 장면인 듯 요령부득이었으나 대충 짐작컨대 그것은 약자에 대한 격려 아니면 강하지 못한 자에게 던지는 야유 혹은 비난일 것이었다.

그 사내의 모습이 화면에 비치기는 그 대목까지가 전부였다. 역시 아내의 말마따나 전번처럼 주연 배우 규모로 키워놓기를 은근히 기대했는데 카메라는 그를 묵살한 채 카운트를 끝내고 막 일어서는 찰나의 주심한테로 급작스레 회전해버렸다. 다음은 주심에 의해 땅딸보의 손이 번쩍 들리는 장면, 그 다음은 누가 옆에서 거들어주지 않아도 제가 스스로 알아서 양팔을 번쩍번쩍 치올려가며 링을 몇 바퀴씩 도는 승리자의 득의만면한 표정이 소개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꺽다리 쪽을 다시 주연 배우 삼아 엄청나게 확대시켜놓았는데, 비록 들러리 자격으로나마 가죽잠바에 금속테 안경의 그 사내를 장면과 장면 사이에 끼워주는 일에조차 카메라는 끝내 인색했다. 관중들이 웅성웅성 일어나 자리를 뜨는 그 동안에도 꺽다리 선수는 관 속에 든 모습 그대로 캔버스 위에 매우 반듯이 누워 일어날 줄을 모르고 있었다.

"아깟번에도 가죽잠바 차림이었었나?"

내가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던진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가죽잠바요?"

순간 아내의 눈이 호동그래졌다.

"글쎄요, 보긴 분명히 봤는데……"

나는 더 이상 아내의 미욱함을 탓하지 않았다. 그리고 방금 전에 눈이 뭣 같고 턱이 어떻더라던 사람의 대답이 기껏 그 모양인데도 나는 웃고 싶은 생각이 아니었다. 결국 그것으로 우리 내외의 문답은 다 끝난 셈이었다. 가죽잠바에 금속테의 그 사내는 얼마든지 문명남일 수 있었고 또 얼마든지 문명남이 아닐 수도 있었다. 겨우 증명판 사진만하게 잠시 비치다 만 그 얼굴 가지고는 뭐라 단정을 내리기 어려우나 전에는 안 걸치던 그 야한 생김새의 안경을 제거해버린다면 대체나 문명남이 그치이지 싶기도 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만약에 그 사내가 틀림없는 문명남이 그라면 문제는 꽤나 복잡해진다. 지금쯤 어디서 얌전히 들어앉아 시나 긁적이고 있는 줄로만 알아온 그가 도대체 이강민이란 이름의 권투 선수와 어떤 이해 관계가 있기에 그처럼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서 고래고래 악을 쓴단 말인가. 아무래도 그 해괴에 가까운 광적인 태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저런 이유로 내 생각은 점점 문명남이가 아닐 거라는 쪽으로 기울어갔다. 적어도 내가 아는 문명남이는 그런 짓이나 하고 다닐 사람이 아니라고, 웬일인지 절대로 아니라고 강력하게 믿고 싶은 심정이었다. 과거에 많이 불우했고 이제도 별로 형편이 나아지지 못한 한 박행한 친구에게 보내는 한 오라기 나의 우정으로서는 그렇게 힘껏 믿어주는 편이 백번 옳을 성싶었다. 북새통 한복판에 천둥개처럼 뛰어들어 상식 이하의 참견을 서슴지 않는 그런 사람이 처음부터 내 친구일 리 없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문명남이의 근황에 관해서 나는 별반 아는 게 없다. 만난 지도 오래일 뿐더러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소식 또한 별로 없다. 다만 몇 달 전엔가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구독하는 모일간지의 신춘시란에 실린 그의 작품을 읽은 적이 있다. 벌써 제목도 잊었고 내용도 정확한 기억이 못 되지만 그는 그 작품을 통해 단편적이나마 자신의 근황을 밝히고 있었다. 자기는 요즘 조반으로 우유와 빵 대신에 한 대접의 부끄러움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점심에도 저녁에도 그 부끄러움을 늘 주식으로 삼고, 그래도 남아돌아 턱에까지 차는 부끄러움으로 마치 벽에다 똥칠하는 망팔의 할망구처럼 밤마다 셋방 벽에 도배를 하면서 기진할 때까지 혼자 킬킬킬 웃는다는, 대충 그런 줄거리의 매우 과격한 작품이었다. 그걸 마지막으로 그에 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이 까맣게 잊은 채 지내온 셈이다. 어쩌면 나는 오래 묵은 고향 친구인 문명남이 쪽보다는 오히려 생판 일면식도 없는 한 권투 선수에 대해서 더 많은 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맞다. 이강민이란 한 인간의 어제와 오늘에 대해서 나는 제법 많은 걸 시시콜콜 알고 있다. 물론 모두가 들은 풍월로, 권투 전문인 아들녀석의 귀띔 덕분이었다. 거듭 말하거니와, 아직도 한참을 더 기다려야만 겨우 국민학교에 들어갈 나이인데 어떻게 된 건지 녀석은 권투라면 그저 사족을 못 쓰는 형편이었고, 그냥 폼으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경기 용어 및 규칙은 물론 유명 무명의 선수 개개인의 장기 혹은 결점까지를 웬만한 해설가 따위는 그야말로 저리 가도록 뜨르르 꿰는 것이었다.

역시 아들녀석의 귀띔에 의할 것 같으면, 이강민 그는 링 캐리어가 풍부한 선수임에 틀림없으나 풍부한 그만큼 이기기보다는 지는 도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선수였다. 매시합마다 거의 맡아놓고 그것도 넉아웃으로 지키만 하다가 어느덧 늙어버렸고, 그래서 이젠 권투 선수치고는 환갑 진갑 다 넘겨 마땅히 은퇴해야만 할 나이인데, 그러면서도 아직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그 권투라는 걸 버리지 못하고 틈만 나면 기를 써가며 선수권에 도전해서 또다시 보기 좋게 나가떨어지기를 끼니를 맞든 되풀이하는 사람이었다. 아마 괴짜라는 말 이상으로 더 적절히는 그를 설명할 수 없으리라.

그것은 말하자면 자살 행위나 매한가지였다. 매우 교묘하고도 혹독한 수법으로 자기 자신을 한쪽에서부터 차근차근히 죽여가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일종의 살인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시합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가장 근원적인 의문 같은 것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대체 저런 사람이 뭣 때문에 권투 같은 험한 싸움 마당에 애당초 발을 들이게 되었을까, 그리고 설령 얼김에 잘못 뛰어들었다 해도 이제 그만하면 실컷 뜨거운 맛을 보고도 남았을 텐데 왜 여태껏 그 구렁에서 발을 빼지 못하고 빌빌싸는 것일까 하는 그런 의문 말이다. 취미삼아 얻어맞고 재미로 져주는 게 권투가 아니라는 것쯤 알 만한 사람이면 아마 누구나 다 그런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우선 생긴 모양부터가 어쩌면 권투에는 부적격인지도 모른다. 흑백 화면으로만 봐도 허여멀쑥하게 생긴 외모를 대뜸 느낄 수 있고, 어디라 한 군데 맺힌 구석 없이 새댁처럼 그저 얌전스럽게만 생긴 위인이었다. 어느 국영 기업체의 경리 담당이나 에누리없이 정찰제로만 판매하는 전문품 상점의 주인으로 앉아 있기 땍 십상인 그런 인상이었다. 그 심성 또한 외모 닮았는지 남들같이 실수인 척 우연인 척하면서 반칙을 저지른다거나 한창 위기에 몰렸을 때 비열 행위로 곤경을 모면해 나온다거나 할 줄도 모르고 고스란히 당하기 예사였다. 오직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님 말씀이나 교과서에 적혀 있는 그대로 원리 원칙에만 좇아서 경기 전반을 꾸려나갈 뿐이었다. 그의 그런 면을 빗대어서 사람들은 더러 육사생이란 별명으로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어림 서푼어치도 없을, 꼭 이강민 그의 경우에 한하여만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승부의 세계에서는 치명적이라 할 패배의 기록의 점철인 그 육사생을 사람들은 항상 너그럽게 용서해주고, 용서로 그치는 법 없이 외려 전보다 더한, 카시미론 모포 같은 사랑으로 두툼히 감싸 그가 일차 더 재기해서 다시 한번 링 위에서 만좌중에 보기 좋게 뻗을 그 동안까지 탈없이 보호하고 성원을 아끼지 않는, 흡사 학부모 집단 비슷한 역할을 언제나 기꺼이 담당해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와 같이 해줌으로써 득을 보고 재미를 느끼게 되는 쪽이 정작 누구인가를 따지려는 게 아니다. 자기 스스로는 결코 흘릴 수 없는 피, 또 흘려서도 안 되는 피를 남에게 대신 흘리도록 조처해놓고는 환호작약하는 사람들의 저 본성 따위에 언급하려는 의도도 아니다. 나는 다만 궁금할 따름이다. 똑같은 상황 아래인데도 다른 선수에겐 불가능한 그 일이 어째서 유독 육사생 그의 경우에만 가능한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대관절 어째서일까.

중계 방송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그의 시합 장면을 두어 차례 구경한 적이 있다. 문외한의 안목으로 봐도 그의 폼은 늘 잽싸고 매끄럽기 짝이 없었고, 변주곡이라도 타듯이 전혀 예측지 못한 대목에서 천부의 재질 아니면 감히 흉내도 못 낼 갖가지 주먹들이 짭짤히 튀어나와 관중들로부터 크게 기쁨을 사곤 했고, 점수면에서는 그럴 수 없이 유리한 시합을 치러나가곤 했다. 그러나 거의 다 손에 넣은 듯이 보이던 그의 유리는 언제나 물거품 그 이상의 것이 못 되었다. 역시 아무도 예측 못 한 대목에 가서 몬심 잔뜩 먹고 치는 상대의 일격에 허망하게 드러눕고 마는 것이었다. 개중에는 배반감을 맛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더러는 측은지심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었다.

문제는 언제나 그 다음이었다. 요란 떨며 쓰러질 그 임시에는 아주 골로 가는가 싶게만 보이던 사람이 어느 겨를엔지 무섭게 용을 쓰면서 되일어나 보이는 그것으로 관중들은 또 한 차례 그에게 이쁨을 선물하곤 했다. 감상 같은 걸 죄 떨어낸 머리 가지고 생각한다면, 도대체 쓰러질 때는 언제고 일어설 기운은 또 어디서 솟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광경이기도 했다. 그만한 기운이라면 처음부터 쓰러지질 말든지, 그렇게 무참히 쓰러질 바에는 아예 끝까지 일어설 생각조차 말든지 할 일이지.

사람들을 사로잡는 그의 매력의 포인트가 주로 어느 구석에 감추어져 있는지 나로서는 족집게처럼 집어낼 재간이 없다. 보는 관점에 따라 그것은 섬광인 양 순간순간마다 번뜩이는 그 화려를 극한 기교일 수도 있고, 쌈패치고는 많이 상식을 벗어나게 단정한 용모와 교양의 냄새일 수도 있고, 또는 정한한 의지로 똘똘 뭉쳐진 그 오똑이다운 정신일 수도 있겠다. 오똑이 얘기가 났으니 망정인데, 사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기회를 잡아 선수권에 도전해 가지고는 그만 풀기 없이 나가떨어져 하위 랭킹으로 멀찌감치 밀려났다가 또다시 죽살이를 쳐 도전권을 얻기를 이날 입때 되풀이해온 것으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아무튼 그는 번번이 지기만 하는 복서이면서도 변함없는 인기로 고정된 수의 팬들을 유지해나갈 줄 아는 매우 특이한 존재였다. 그런저런 이유로 그 나이에 그 같은 전적인데도 아직은 은퇴를 권유하는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눈치였고, 그의 시합이 있을 적마다 경기장은 늘 초만원 사례의 대성황을 이루곤 하는 거였다. 이기는 선수를 보려는 게 아니라 지는 선수를 보겠다는 별난 취미의 인간들로 자리가 메워지는 셈이었다. 그러는 그네들의 심보는 터놓고 말해서 다른 엉뚱스런 데 두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누가 알랴, 묘기가 어떻고 의지의 매력이 어떻고는 다아 나발 같은 수작이며 실상은 애시당초 그가 한 마리 희생의 짐승이었는지를. 처음부터 아주 몰캉히 보였기 때문에 사람들에 의해 그는 손쉽게 제물의 일종으로 택해진 것으로서, 일단 점찍어놓은 그 짐승이 부정탐이 없이 통통히 살찌고 있는지 어떤지를 확인할 요량으로 사람들은 매번 그렇게 우리에 들르는지도 알 수 없다. 그의 매력에 끌려서 그를 동정해서건, 아니면 일종의 희생물 신세이건간에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그 책임의 거개가 육사생 이강민 그 자신에 있음은 더 말할 나위 없겠다.

 

그림자의 사람 저지르고 용서받기 變貌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몇 마디 얘기 끝에 나는 지나가는 말처럼 친구에게 물었다.

"자네 혹시 권투 좋아하나?"

지척의 거리에 있으면서도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친구의 목소리가 수화기 속에서 성난 오빠시떼처럼 잉잉거렸다.

"권투? 물론 구경하는 쪽 얘기겠지? 뭐 좋지도 싫지도 않은 편이야. 그런데 건 또 왜?"

"그저 한번 물어보는 거야. 어젯밤 텔레비에서 혹시 중계 방송 보지 않았나 해서……"

"이노옴, 설마 그런 시시한 거 물어볼라고 이렇게 영감 죽고 처음 전화하는 건 아니겠지? 이래봬도 나 정명록 그렇게 한가한 몸 아니다. 퇴근하기 무섭게 술 끼얹으러 다니느라고 고따윗 거 구다볼 틈 없어."

토목과를 나온 후로 행정관서의 각종 건설 공사를 감독하고 준공 검사를 도맡아 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근래 솔찮이 재미보는 것으로 소문난 정명록이 그 친구는 실은 나만큼도 권투에 조예가 없음을 쉽게 드러내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 동창 사회에서 소식통으로 통하는 그 친구에게 간밤의 권투 시합과 문명남이를 결부시키려는 내색 없이 그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문명남이란 놈 근황에 관해서 뭐 최근에 들어온 뉴스 같은 거라도 없을까?"

"오래 살다보니 별 소릴 다 듣는군. 그치 얘길 왜 기분 나쁘게 나한테 묻는 거지? 옛날부터 자넨 명남이 그치한테 매달린 끈이었잖아, 이 친구야."

대화중에 문득 느껴지는 건, 우리가 어느덧 그런 나이에 와 있는가 하는 감상이었다. 전엔 모두 상대방 친구를 가리켜 일률적으로 너라고만 부르던 것이 어느새 ''와 약간 고풍을 느끼는 '자네'를 중구난방으로 섞어 쓰는데도 별로 어색잖게 생각되는 그런 어중간한 나이에 우리는 벌써 와 있는 것이다.

"말 조심해라. 명남이가 내 끈이었다."

"어느 쪽이 끈이 됐건 좌우간 각별한 사이였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겠지. 그래서 다른 사람 다 몰라도 자네만은 오늘날도 유일하게 연락이 닿는 줄로 알았는데."

"나 역시 끈 떨어진 지 이미 오래야. 생사조차 모를 정도니까."

"엄살하지 마라. 얼핏 들으니까 아직까지 죽진 않았나보더라. 죽기가 다 뭐냐. 오늘날도 한양에서 어깨에다 잔뜩 힘주고 포옴재면서 지낸다는 소문인데."

"알량난 그 싯줄 빼고 나면 지까짓 게 잔뜩 잴 폼이나 있을까."

그러는 순간 정명록의 목소리는 갑작스레 한 옥타브 뚝 떨어지면서 정색스런 가락을 띠기 시작했다.

"너 정말로 진짜로 오늘날까지 아무 소식 못 듣고 지냈냐?"

"글쎄 그렇다니까."

"그 거짓말 믿어주기로 하지. 허지만 진짜로 금시초문이라면 아마 불원간에 너한테도 연락 갈 거다. 한양 바닥에서는 만나본 친구도 여럿이고 직접 당한 친구도 여럿인 모양이더라만, 문명남이 그치가 오늘날 요상스런 방향에서 정말 묘하게 한창 출셋줄을 타고 있다는 사실쯤 세상이 다 안다."

"나만 모르고 있는 새 무슨 일이 있었던 게로군. 도대체 무슨 일이지?"

나는 나도 모르게 갑자기 한 걸음 바싹 다가앉는 목소리를 했다. 그러자 저쪽의 목소리도 내게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너 정말 진짜로 모르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내 귀띔해주지. 명남이가 유력한 정부 모기관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소문이다. 시 쓰던 거 죄다 때려치우고 말야."

정명록의 목소리는 재차 한 옥타브나 떨어지면서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까지 되었다. 그러나 그러는 한편, 이번에야말로 옳게 낚을 걸 낚았다는 듯이 매우 신중하고도 진지한 가락을 담았다.

문명남에 관한 얘기가 본격적이 되면서 우리의 통화는 꼭 설거지도 잊은 채 양쪽 전화통에 매달린 여편네들 꼴이 되어 아연 활기를 띠면서 끝 모르게 길어졌다. "오늘날……" 하고 말하면서 우리의 소식통은 그 동안 친친 감아두었던 뭉텅이 말꾸리를 솜씨 있게 슬슬 풀어나갔다. 우리는 간간이 혀를 차기도 하고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하는 쪽이나 듣는 쪽이나 다 같이 놀라고 분개하고 거의 동시에 탄복하기도 했다. 아울러 우리는 우리로부터 멀리 있는 문명남이란 인간을 안심하고 죽일 놈도 내고 때로는 살린 놈도 내가면서 한참 원 없이 흥분된 마음으로 질주해나가다가 별안간 낭떠러지 끝에 서버린 듯한 느낌 속에 잠겨 느닷없이 허전해지고 몹시 부끄러워진 상태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주 황황히 수화기를 던지고 말았는데, 그 바람에 나는 간밤서부터 품어온 정작의 궁금증을 풀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만에 일이라도 혹 문명남이 프로 복싱 같은 것에 관계하는 듯한 단서는 없더냐는 그 물음을 끝내 끄집어내지 못한 것이다. 정명록하고의 긴 대화를 결산해본 나머지 얻어낸 감정이란 결국 한 움큼의 떫디떤 그 무엇이었다.

문명남의 일신상에 관한 문제라면 세상에서 나보다 더 빠삭이 아는 사람은 없으리라고 자부해왔다. 누가 누구의 끈 운운하던 정명록의 언급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의 친부모라도 나보다 더 그를 소상히 이해하지는 못했으리라. 적어도 몇 해 전까지는 그와 같은 자부심 아닌 자부심이 아무 앞에서나 간단히 통할 지경이었다. 기껏 뛰어봤자 문명남이가 손오공이라면 나는 가령 그가 제아무리 버둥질쳐도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없는 거대한 손바닥의 부처님인 셈이었다.

하긴 그가 실제로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흉계를 꾸미던 적이 몇 번인가 있긴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더욱더 단단히 덜미를 잡죄여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도 하게 되었던 것이고, 이런 상태는 그가 어느 날 돌연히 한 사람의 어엿한 시인으로 등단되어 금의환향하듯 눈부시게 내 앞에 나서기 그 직전까지 여일하게 지속되었다. 내 올가미에서 그를 완전히 해방시켜놓은 것은 실로 그의 문학이었다. 오직 문학 그것만이 그의 편에 서서 그로 하여금 자기 스스로를 되찾도록 강한 팔로 부축해주는 원군이자 또한 새로운 형태의 올가미였던 것이다.

이제도 나는 그를 네거리 한복판에 홀랑 발가벗겨 세워놓을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맘만 먹으면 나는 아무 때고 그의 오른 눈을 찌를 수 있고 그의 왼쪽 뺨을 갈길 수 있다. 문명남에 관한 내 기억은 언제나 어렸을 적 음침하고 갑갑했던 우리 집 그 두억시니 창고로부터 출발한다.

그 무렵 우리 집은 시내를 통틀어 몇 집 안 되던 서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이제 막 학교에서 돌아오는 참인 나를 형이, 대학 시험에 미끄러지고 가게 일이나 돕는 척하며 빈둥거리던 작은형이 손짓으로 부르는 것이었다. 작은형은 연방 입아귀로 실실 웃어가며 꼭 보여줄 게 있다고 점포 뒤꼍 책을 쌓아두는 창고 속으로 나를 끌고 갔다. 거기에서 나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고는 그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무엇인가 꼼질꼼질 기어다니는 것이 있었다. 반품해버릴 묵은 책들로 잔뜩 어지럽혀져 있는 더러운 창고 바닥을 먼지투성이 피투성이 꼬마 하나가 불불 기어 내게로 오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더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 꼬마의 입에서 퍼뜩 내 이름이 불려져 나온 때문이었다.

"형필아, 용서해줘. 형한테 말해서 날 용서해줘."

멍청히 서 있는 내 무릎을 쓸어안듯이 한 채 꼬마는 자꾸만 비질비질 울어도 쌓는 것이었고, 핏물이 고랑지어 흐르는 입술을 끊임없이 달막거려가며 번갈아 두 얼굴에 대고 용서를 비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나는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같은 반의 꼬마였다. 맨 앞줄 좌석에 앉아 언제 봐도 말이 없는, 수업 도중에 손 한번 드는 법 없고 누구하고 어울려 쉬는 시간을 보내는 것도 본 적이 없는, 가녀리기 비길 데 없는 앤생이었다. 꼬마가 누구라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 내가 느낀 건 작은형에 대한 무조건의 분노였다. 그래서 형한테 항의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 우선 꼬마의 이름을 들이대면서 따지고들 필요가 있었는데, 우스꽝스럽게도 그애 이름이 제꺼덕 떠올라주질 않아 나는 잠시 애를 먹어야만 했다. 저애 이름이 그래 뭣이더라……

"모두 해서 세 놈이었지. 그런데 큰 놈들은 뺑소니쳐버리고 재수 없는 우리 문명남씨 하나만 붙잡혔단 말씀이야."

꼬마의 이름을 일깨워준 것은 우연하게도 형 쪽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항의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고 난 뒤였기 때문에 나는 그저 잠자코 작은형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형은 갑자기 자기가 무슨 탐정소설에 등장하는 민완 형사라도 된 것처럼 으스대며 거드름을 피워가며 경과를 얘기했다.

"도망친 두 놈 이름 대기 전엔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녀석들 아주 지능적이야. 책보로 덮으면서 슬쩍해가는 수법을 쓰는 거야. 돌아서서 나가려는 걸 꽉 붙잡았더니 대뜸 니 이름부터 대잖아. 학교에다 연락해 가지고 이놈들 당장에 퇴학시켜버릴 작정이다."

얘기 더 들으나마나 다아 알 만한 사건이었다. 사건이란 말을 좀 함부로 쓴 느낌인데, 한 군데서 오래 서점을 경영해온 우리의 경험에 의할 것 같으면 그런 정도는 매일이다 싶게 겪는 항다반사이기도 했다.

"무슨 책이야?"

"제엔장, 다른 무슨 참고서 종류라면 또 한 번쯤은 봐줄 수도 있지.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란 말도 있으니까. 그런데 이건 마빡에 아직 피도 안 마른 녀석들이……"

하면서 우리 작은형은 호주머니에서 손바닥만한 책 한 권을 꺼내더니 그걸 내 발 아래로 홱 던지는 것이었다.

"봐라. 유행가책이다, 유행가책!"

놀랍게도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진짜 유행가책이었다. 주머니 안에 넣고 다니면서 심심할 때마다 우리 작은형 같은 건달꾼들이 수시로 꺼내어 흥얼거리기 딱 알맞게시리 손 안에 마참하게 드는, 맨 첫장을 넘기면 '전선에 달밤'이란 노래가 나오는, 최신판 소형 포켓용이었다. 이제 겨우 국민학교 5학년 나이에 도대체 유행가책이 무슨 소용에 닿기에 훔칠 생각까지 들었는지 내 두뇌로는 아무래도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었다, 그것은.

달아나 버린 두 공범의 이름을 수단껏 알아낸다는 조건부로 작은형의 허락을 얻어 명남이를 창고 밖으로 빼내기까지는 무진 애를 먹었다. 길거리로 나오자 난생 처음 맡아보는 것 같은 참으로 신선 무쌍의 바람이 코끝에 후욱하니 끼얹혀오는 바람에 그때까지 우리가 그 얼마나 끈끈하고 친덕거리는 어둠 안에 감금당해 있었던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걷는 동안 나는 우선 명남이 얼굴에서 우선 볼썽사나운 피얼룩부터 지워주고 옷의 먼지도 떨어준 다음, 마지막으로 한사코 싫다고 사양하는데도 불구하고 창고에서 주워들고 나온 문제의 그 유행가책을 우격다짐하다시피 그의 손에다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근처 풀빵집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호주머니를 털어 빵을 사먹였는데, 길거리서부터 조금씩 내비치기 시작하던 감사의 빛이 이때는 거의 그 절정에 이르러 밀가루 냄새와 소다 냄새 풀풀 나는 풀빵을 더금더금 감식하는 그 사이사이에 그의 커다란 두 눈엔 이를테면 나에 대한 존경의 빛 비슷한 것이 그득 괴어 돌았다. 그것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가외의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다만 우리 작은형의 난폭한 손찌검에 대해 대신 사과하는 심정으로 잠시 그래 봤을 뿐이었다.

"너 참 이상한 애구나. 그 많은 책들 중에서 하필 왜 그런 책을 골랐는지 모르겠다."

나는 일단 내 손아귀에 들어온 우월감이 손상당하는 일 없도록 매우 조심스럽게 즐겨가면서 공들여 어른스런 말투를 시늉해내었다. 그러나 명남이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단지 먹는 일을 잠시 중단하고는 수줍은 듯이 한 차례 웃어보였을 뿐이었다. 꾀죄죄하고 잔약스럽게만 보이던 그의 얼굴에서 소리 없이 웃을 때의 눈매가 가시내의 그것만큼이나 아름다운 줄도 그제서야 처음 발견해낸 사실이었다.

그날 나는 달아난 두 사람이 누구인지 그에게 한마디 추궁도 하지 않고 곱게 그냥 돌려보냈다. 헤어져 돌아가는 마당에서 그는 내가 보인 친절에 거듭거듭 고마움을 표시한 다음 끝에다 이렇게 토를 달아 신신당부하기를 잊지 않았다.

"형필아, 내일 학교 가서 내가 도둑놈이란 말 아무한테도 하지 말아줘, 꼬옥 응?"

그날 밤, 나는 몹시 흥분에 달떠가지고는 잠도 제대로 못 이룰 지경이었다. 그것은 앞으로의 내 학교 생활이 전에 비해 몇 배는 더 뻑적지근하고 충실해지리라는 예감을 가능케 하는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남들이 흔히 말하는 그 꼬붕이라는 게 드디어 내게도 하나 생겼음을 확신케 해주었다.

물론 나는 그 이튿날 학교에 가서 문명남이가 책도둑이란 사실을 귀머거리라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으리만큼 아무 때 아무 자리에서나 까발리고 다녔다. 적어도 문명남한테만은 다소 함부로 구는 한이 있더라도 이젠 뱃병없게 되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작용한 탓도 있긴 하지만, 그러나 그런 이유가 아니라도 그따위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만큼한 재미를 버릴 정도로 나는 애당초 순진한 바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랬는데, 더욱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은, 내 입방아 하나로 벌써 소문이 학교 안을 한 바퀴 돌고 난 뒤끝인데도 명남이가 내 앞에서 아무런 내색을 보이지 않는 그 점이었다.

내가 남다른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명남이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결국 그런 일이 있고 난 그 직후부터의 일이었다. 사실 명남이는 그때까지 너무나 평범한 아이였다. 평범함이 지나쳐서 외려 지독히 특징 없는 그 점이 그의 특출한 개성을 대변하는 듯한 그런 아이였다.

명남이는 있으나 실상은 없는 그런 아이였다. 공부할 때나 놀이할 때나 그가 바로 곁에 있는데도 아무도 그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았고, 어떤 협동작업에도 그는 도움이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다못해 걸리적거리는 방해물 푼수도 되지 못했으며, 그가 듣는 자리래서 당연히 봐야 할 남의 흉이나 비밀 얘기를 꺼리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냄새도 없이 무게도 없이 바람에 까불리는 새털 자격으로 가벼이 공중을 떠다니다가 아무데나 소리 없이 불시착하여 애들 노는 뒷전에서 완연한 병색의 창백한 얼굴에 대둣병 마개만한 두 눈알만을 꿈적이며 앉았기나 하는, 참으로 그림자 없는 아이였다.

그런 애를 언제까지고 계속해서 관찰해낸다는 건 여간한 인내로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유행가책 사건 이후로 유령처럼 기분 나쁘게 그가 내 꽁무니만 밟고 다니는 데도 진력이 날 대로 나 나는 일시 그에게 향했던 관심을 모지락스럽게 회수해버리고 말았다. 아마 그 이후 사건이라면 또 하나의 사건인, 오후의 변소 소동만 없었더면 나는 전처럼 다시 그의 이름조차 이따금씩 까먹을 정도의 무심한 동급생인 채 졸업을 맞고 말았을 것이다.

소동은 아무도 눈치 못 채는 사이에 무려 서너 시간이라는 예비 단계를 거쳐 매우 은밀히 진행되었다. 청소 시간이면 교실 바닥에 물걸레질하기가 끔찍스러워 공연히 꾀를 피우던 무렵이니까 그것은 가을이라도 겨울과 바짝 이웃해 있는 가을이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명남이가 교실에서 없어졌다는 사실이 뒤늦게 옆자리의 짝꿍에 의하여 알려진 것은 오후 수업이 시작되고 나서도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누가 없어진 줄도 모르고 수업을 진행하는 불찰을 범한 선생님께서는 고학년 말썽꾸러기 가운데 종종 있는 사보링쯤으로 치부해버리면서, 내일 아침 등교하는 그 즉시로 단단히 혼구멍을 내주겠다고 한바탕 엄포를 놓고 나서 그냥 수업을 계속해나갔다. 물론 우리는 명남이의 행방에 대해 그리 오래 궁금해하지는 않았다.

그랬었는데 다음 쉬는 시간에, 우리 학급 몫으로 배당되어 있는 대변용 변솟간이 안에서 문이 잠긴 채 열리지 않는다는 하소연이 들어왔다. 그 다음 쉬는 시간에는, 분명히 누군가 안에 들어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다급한 소리를 해도 자리를 비켜주기는커녕 숨소리마저 잠잠하다는 보고가 잇달아 들어왔다. 안 열리는 변소와 안 보이는 명남이를 한데 묶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책가방은 고스란히 놔둔 채 몸뚱이만 빠져나간 점이 비로소 수상쩍게 보였던 것이다.

결국 일이 이렇게 되어 선생님은 갑자기 수업하다 말고 뒷자리의 큰 애들 몇을 이끌고 변소로 달려가는 소동이 벌어졌다. 몇 차례 노크해봐도 반응이 없자 선생님은 한 아이를 시켜 벽을 타넘어 들어가서 문고리를 따도록 조처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렇게 애를 먹은 끝에 문이 열리는 그 순간, 우리는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기가 콱 질려 모두들 벙어리가 돼버렸다. 그 속에서 쿨쿨 잠을 자고 있었다. 문명남이가 그 비좁고 냄새 등천하는 속에서 가녀린 몸뚱이를 앙바틈히 접어 벽 구석에 풋볼처럼 말린 채로 새우잠을 자는 중이었다. 선생님이 호통을 치면서 그를 깨워 밖으로 끌어내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이던 그는 얼굴에 새겨진 천생 바보의 멍멍함을 풀어버리면서 느닷없이 표독스럽게 굴기 시작했다. 한사코 변소 속에 다시 들어가겠다고 길길이 뛰는 것이었다. 엄마 품으로부터 강제로 떼어지는 젖먹이나 할 법한 행동이었다. 선생님이 번개 같은 솜씨로 이쪽저쪽 뺨을 갈겨대자 그는 울음보를 터뜨렸다. 변소 바닥에 퍼지르고 앉아서 달기똥 눈물을 뚝뚝 쏟아가며 그렇게 언제까지고 구슬픈 목청으로 울고 있었다.

그 후부터는 그야말로 사건과 사건의 연속이었다. 한 조그만 음모꾼에 의해서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말썽이 꼬리를 물었다. 작문 끝에 일어난 일도 그 중의 하나였다.

마치 허리춤에서 비수라도 꺼내들 듯이 명남이는 어느 날의 작문 시간에서 천만 뜻밖에도 날카로운 글재주를 보임으로써 우리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우리 어머니'라는, 선생님이 임의로 지정해준 단일 제목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얼굴이 어떻고 맘씨가 어떻고, 그래서 세상에서 우리 엄마가 최고, 운운하는 천편일률의 작문들 속에서 오직 문명남의 글만이 아침 햇살을 받는 전봇대의 사기애자처럼 희디희게 빛났다. 혹시 누가 대필해주지 않았나 의심이 갈 정도였다. 그만큼 어른스런 생각들을 거미줄 치듯 빈틈없이 엮어나간 글인데, 특히나 감동적인 것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그 질펀한 문장이어서 나중에 선생님이 우수작으로 뽑아 일동 앞에 낭독시킬 때 그 거미줄에 걸려들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의붓어머니라는 것이었다. 아버지 역시 의붓아버지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다는 것이었다. 자기는 세상에서 외롭기 그지없는 고아나 마찬가지 신세라는 것이었다. 얼굴이나 성격이 자기와는 전혀 딴판인 형제간들 틈새에서 의붓어미로부터 그리고 언제나 의붓어미 편인 아버지로부터 갖은 구박을 받을 때마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가 계신 친엄마를 생각한다는 것으로 그의 글은 끝을 맺고 있었다.

그날 우리 모두가 느낀 감동은 그런 정도의 선에서 그렇게 간단히 끝나지는 않았다. 이튿날 아침 일찍 명남이네 아버지가 학교로 찾아왔던 것이다. 같은 동네에 사는 누군가가 고자질이라도 했던 모양으로, 명남이 아버지는 전날의 작문 건에 관해 그 내용까지 훤히 알고 있었다.

"아 글씨, 요 쌔려죽일 자석이 말입니다……"

옆구리에 꿰차고 들어온 명남이를 선생님이 서 있는 교탁 쪽으로 와락 집어던지면서 건장한 체격의 털복숭이 명남이네 아버지는 다짜고짜로 이렇게 왜장을 치는 것이었다.

"효도는 못 헐망정 고생고생 저를 나서 키워준 지 친에미보고 의붓에미라니…… 요 주리댈 자석이, 요 단매에 요정을 낼 자석이……"

그러면서 명남이를 발길로 단단히 걷어찼다. 이미 집에서도 안 죽을 만큼 두들겨맞고 왔는지 명남이는 얼굴 전체가 부황난 사람처럼 퉁퉁 붓고 여러 군데 퍼렇게 피멍이 잡혀 있었다.

그때 우리는 보았다. 잔뜩 화가 났을 때의 친아버지의 권위라는 게 그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대단한 것인가를 우리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바로 그걸 보이기 위해 그는 그처럼 아침 일찌감치 황소처럼 콧김을 불며 달려온 것이었다. 선생님이 사이에 들어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의붓아비 떡매치는 솜씨 바로 그대로 명남이네 친아버지는 모두들 지켜보는 가운데서 아들을 절반쯤이나 죽여놓고야 물러갔다. 명남이네 아버지의 그 서슬 푸른 분노는 우리들로 하여금 명남이가 거짓말했음을 의심하지 않도록 만들어주기에 족한 것이었다. 문명남 그 애는 빨간 모자를 쓰고 역에서 수화물을 나르는 아버지와 생것장수를 하는 어머니를 친부모로 모신 일곱 남매 중의 둘째임이 저절로 밝혀지게 되었다.

꽃병에 얽힌 이야기---그것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일은 아마 달리 또 없으리라. 그 일을 계기로 비로소 나는 문명남에 관한 모든 것을 그 뿌리부터 이해하게 되었던 셈이다. 아니다. 이해한다기보다 그 음흉한 속셈을 속속들이 알아차려 동정을, 경우에 따라서는 노골적인 경멸을 보낼 수도 있게 되었다. 그가 서울에서 회사 공금을 횡령한 직후 시골 나한테로 피신해온 첫날 밤에 대뜸 내 뇌리를 스쳐간 생각도 바로 그 꽃병이었다. 저 꽃병을 박살내던 날에 내가 교실에서 목격한 귀기어린 장면이었던 것이다.

그에게도 제법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재주 같은 게 갖추어져 있었나보다. 이를테면 그에게도 가끔씩은 뜨거운 피가 흐를 때도 있어 그 피가 그로 하여금 헛발질하듯 난생 처음 이성이라는 걸 그리게시리 꼬드겼던 모양이다.

그는 시골에서 어렵게 고학으로 대학을 마친 후 곧장 서울로 진출해갔다. 그는 공개 경쟁을 치른 끝에 경기가 꽤 괜찮은 것으로 알려진 어떤 회사에 경리 사원으로 취직이 되었다. 거기까지는 지난날의 그답지 않게 절차와 과정이 아주 순탄해서 축하했으면 했지 결코 시기할 일은 아니기도 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그는 이상한 조짐을 보였다. 결코 지난날의 그답지 않은 야릇한 내용의 편지를 불쑥 내밀어온 것이다. 같은 사무실에서 맞춤복처럼 써억 마음에 맞는 여성을 발견했노라고, 그쪽에서도 자기가 그리 싫지는 않은 것 같은 기색이더라고 그랬다. 그뒤로 편지가 뻔질나게 와쌌는 사이에 어느덧 그 여성은 구원의 여성상 운운을 거쳐 심각하게 장래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대상으로까지 급진전을 보았으며, 자기는 시방 너무도 행복---그렇다, 그는 분명히 행복이란 단어를 사용했다---에 겨운 나머지 하루면 몇 차례씩이나 졸도할 것만 같은 순간들을 경험한다는 따위 얘길 꼭꼭 꼬리에다 매달아 보내오곤 했다. 편지 문맥으로 미루어볼 것 같으면, 벌써 저지를 것 다 저지르고 인제 남은 일이란 전셋방에 양은솥 정도 마련할 돈이나 장만하는 그런 단계에 와 있다는 인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생판 모르는 여자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고 무척이나 곤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문명남이가 구원의 여신상으로 미화시키던 그 여자였다. 여자는 말했다.

미스터 문한테서 선생님 얘기 수없이 들어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뵌 것 이상으로 선생님을 잘 알고 있다고, 미스터 문은 앉기만 하면 노상 하는 말이 선생님 얘기라고, 그래서 누구보다도 문씨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분으로 사료되어 감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필을 들게 되었노라고, 제발 자기를 좀 도와달라고, 한 남성의 순간적인 잘못 판단으로 아무 죄 없는 자기는 지금 곤경에 빠져 몹시 난처한 입장인데 서로가 불행---그렇다, 그녀는 불행이란 말을 서슴없이 사용했다---에 빠질 일은 되도록 일찍 회피하는 것이 문씨나 자기를 위해서 두루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그러니 하루 속히 문씨가 마음을 돌리도록 선생님께서 부디 영향력을 행사해주시라고, 그러면 그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노라고, 선생님한테도 만약 자기 같은 여동생이 있다면 지금의 자기 심정 충분히 이해해주실 거라고, 그럼 좋은 결과를 기다리면서 소녀는 이만 난필을 줄이겠노라고, 내내 안녕하시길 빈다고……

나는 앉은자리에서 곧바로 편지를 써서 서울로 부쳤다. 말할 나위 없이 문명남이한테였다. 인륜대사가 그렇게 한쪽에서 먹은 일방적인 생각만으로 성사될 일이 아닌 줄 우리는 이제 알 만한 나이에 이르지 않았느냐는 투로서였다. 그러고는 잠자코 결과를 기다렸다. 내가 예측했던 그대로 그 편지에 대한 답은 정확히 당도했다. 대충 계산해서, 내 편지 받은 후 지체없이 써서 보낸 답장이 다시 내 손에 들어올, 꼭 그만큼의 간격을 두고서였다. 실제의 문명남이가 삐주룩이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명남이는 아가씨 문제에 관해서는 숫제 입을 봉한 채 엉뚱한 얘기부터 꺼내었다. 자기가 보관중이던 회사 공금 전액을 뭉뚱그려 갖고 도망쳐 나오는 길임을 고백하면서, 스스로도 깜짝 놀랄 그 거액을 어떻게 처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며 사뭇 떨고만 있었다. 나는 결국엔 그렇게 되고야 말 가장 최후적이면서 또 유일한 처리 방안을 내 쪽에서 먼저 제의하지 않고 맨 나중으로 아껴두었다. 그가 내게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나는 너무도 빤히 꿰뚫어보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래서 단지 이렇게만 말해주었다.

"그런 문제라면 넌 길을 잘못 든 거야. 내가 아니라 경찰서를 찾아가야만 했어. 방법은 딱 하나지. 이 길로 곧장 경찰에 달려가서 방금 나한테 했던 것처럼 솔직히 자백하는 거야. 아주 간단해. 정상을 참작 받아서 몇 달 짧게 살다 나오면 그걸로 다 끝나는 거니까."

문명남이는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꽃병만 해도 그러했다. 나는 그날의 그 일을 아무래도 잊을 수가 없다.

늦게껏 남아서 놀던 아이들마저 죄 돌아가고 난 교정은 텅 비어 그저 고즈넉하기만 했다. 나는 철조망에 뚫린 개구멍을 통과한 이후부터는 동작을 한껏 더 신중히 가져 플라타너스가 줄지어선 운동장 가상이를 잽싸게 달리기 시작했다. 짝귀란 별명을 가진 상이용사 출신 수위한테 들키는 날이면 경을 치기 때문이었다. 규정 시간이 지난 후까지 학교 안에 남아 있는 아이를 짝귀아저씨는 언제나 각다귀 이상으로 성가시게 아는 성미였다. 나는 책상 속에 놔둔 채 깜빡 잊고 나온 대짜배기 말굽자석이 생각나서 거의 집에까지 다 갔다가 부랴부랴 되찾으러 되짚어오는 참이었다. 보기만 하면 누구나 탐내는 그걸 그새 하마 누가 집어가지 않았나 싶어서 이튿날 아침까지 나로서는 진득이 참아낼 도리가 없었다.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았다. 우리 반 교실을 바로 눈앞에 보면서 잠시 숨을 돌렸다.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다음 동사 모퉁이를 막 꺾어 돌기 그 직전이었다. 발소리를 들었다. 분명히 내 것이 아닌 다른 또 하나의 발자국 소리였다. 누군가 아주 가까이에서 나처럼 발소리를 잔뜩 죽인 채 살금살금 접근해오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만 괴이쩍은 기분에 사로잡혀 엉겁결에 동사 벽에다 몸을 찰싹 붙이고 말았다. 그러자 발소리의 임자가 불숙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순간 나는 하마터면 상대방의 이름을 소리쳐 부를 뻔했다. 책보서껀은 어디다 팽개쳐두고 왔는지 소풍갈 때처럼 차림이 아주 간편해 보였다. 책보 대신 손에는 검정 고무신 두 짝이 각각 나눠 들려 있었다. 문명남이었다. 미처 나를 보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명남이는 다람쥐처럼 잽싸게 출입구 쪽으로 달라붙는 것 같더니 어느 틈엔지 문안으로 삼켜져 안 보였다.

그 당시 나는 온전한 내 정신이 아니었다. 내가 무엇하러 되짚어 학교로 왔는지조차 까맣게 잊고 있을 정도였다. 방금 전 명남이가 디딜 때는 그렇게도 얌전할 수 없던 복도가 이번에는 단단히 조심을 하는데도 요란법석으로 쿵쾅거리며 자꾸만 일러바치는 듯싶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그놈의 심장의 고동 소리였다. 낡은 목조 건물 전체가 모조리 명남이 편짝이 되어 나를 거부하는 것만 같은 생각이 문득문득 일곤 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기어코 봐야만 했다. 이번에는 또 명남이 녀석이 무슨 꿍꿍이 수작을 부리려는 것인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그냥 돌아설 수 없었다. 동사 모퉁이에서 그를 대하던 순간부터 나는 틀림없이 무슨 일이 저질러지리라는 걸 확신하면서 뒤를 밟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단언해도 좋다. 분명히 그는 평소의 문명남이가 아니었다. 이를테면 한 범죄자가 있어 그를 문명남이의 탈을 빌어 쓰고 등장해서 바야흐로 사건을 저지르는 찰나였다. 그는 수업중에 선생님이 늘 그랬듯이 다소 거만스런 자세로 교단 위에 서서 실내를 휘이 둘러보았다. 그의 눈은 분명히 무엇인가를 향해 있지만 실상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있음이 확실했다. 왜냐면, 그의 시선이 유리창 너머로 열심히 엿보던 내 시선과 맞부딪혀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음을 느꼈으나 그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냥 지나치고 만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한동안 무수히 방황하던 그의 시선이 마침내 꽃병에 가서 정착했다. 이윽고 그는 교단을 내려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그 걸음걸이라는 게 또 말할 수 없이 망측했다. 분단과 분단 사이 통로를 걷는 동안 처음에는 매우 좀상맞게 조심조심 시작하더니 차츰 보속을 빨리 그리고 보폭은 넓게, 마치 호젓하게 넓은 교실 한 칸을 몽땅 제 개인 소유로 착각하는 듯한, 흡사 분열행진 때의 모습으로 옹색한 통로를 조금도 옹색하지 않은 것처럼 아주 씩씩하게 걸어다녔다. 걸을 때의 시선은 꽃병에 고정되어 있었다. 꽃병을 축으로 해서 통로와 통로를 쳇바퀴처럼 도는 셈인데, 걸음걸이가 자꾸만 빨라지다가 나중에는 거의 뜀박질을 하다시피 되었는데도 결코 시선만은 꽃병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참으로 기괴한 광경이었다. 그 고유한 걸음걸이 속에는 다분히 이야기로만 들어온 몽유병자다움이 섞여 있어 나를 갑자기 춥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는 헐떡이기 시작했고 두 볼에는 벌겋게 홍조까지 띤 채였다. 그는 걷기를 그만두고 꽃병 앞에 가 섰다. 그는 꽃병을 사려는 사람처럼 벽면의 받침대 위에서 그걸 조심스럽게 집어들었다. 그러고는 주인과 흥정하기 전에 트집거리가 될 만한 무슨 흠집이라도 없나 찬찬히 살피는 시늉을 했다. 그의 얼굴에서 드디어 그걸 사기로 결심했다는 표정을 이제 막 읽어내는 그 순간, 실로 상상외의 일이 눈앞에 전개되었다. 정말 눈깜짝할 새에 그가 꽃병을 들어 마룻바닥에 태질을 쳐버린 것이었다. 묵은 자기제의 꽃병이 산산이 바스러지면서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김과 동시에 나는 아! 하고 짧게 부르짖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아주 태연했다. 태연한 정도를 지나쳐 차라리 그는 맛좋은 음식을 양껏 포식하고 난 사람의 표정으로 한창 만족감에 젖어 느끼해 있었다. 그래서 이미 박살이 나버린 꽃병 앞을 떠나기가 아쉬워 언제까지고 그렇게 그 자리에 눌러 섰을 작정인 듯했다. 그런데 정작 그가 꽃병의 잔해 앞에 머물러 있었던 시간은 극히 짤막했다. 그가 늑장을 부린 것은 발부리로 마룻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의 위치를 수정하는 등 약간의 뒤처리를 하는 데까지만이었다. 그 다음은 도로 민첩해져가지고 그가 후닥닥 뛰어 교실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복도 한편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미처 몸을 숨길 생각을 못 했기 때문에 당황해서 잠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구태여 그럴 필요가 조금도 없는 일이었다. 내 곁을 바짝 스쳐가면서도 그는 나를 거들떠도 안 보았던 것이다. 두 주먹을 발끈 쥔 채 눈에다 쌍불을 켜고 똑바로 앞만 쳐다보면서 마치 무인지경을 가듯이 그렇게 나를 지나쳐 가버렸던 것이다. 그는 나를 복도 벽의 일부인 양 취급해버리면서 몹시 서둘러대는 걸음으로, 그러나 그러면서도 공중에 뜬 새털처럼 발소리 하나 내는 법 없이 은밀하게 동사를 빠져나가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 달려올지 모르는 짝귀아저씨에 대한 두려움도 잊은 채 나는 그가 사라진 쪽을 멀거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조회 전부터 선생님의 표정은 분노로 하얗게 굳어 있었다. 그 꽃병으로 말할 것 같으면, 높은 곳에서 귀한 손님들이 우리 학교를 시찰하러 오신다는 날짜에 맞추어 각 분단별로 할당해서 임시로 꾸어다 비치해놓은 몇 가지 장식품 중의 하나인데, 공교롭게도 높은 양반들의 시찰 일정이 며칠 연기되는 바람에 미처 되돌려보내지를 못하고 있다가 그런 변을 당하고 만 것이다. 학급 조회가 열리자마자 선생님은 범인을 색출해내려고 우리를 성급하게 잡죄기 시작했다. 누가 그랬느냐고, 깬 사람은 나와서 솔직히 자백하라고, 그러면 다 용서해주겠노라고 약속하는가 하면 만약 십 분이 지나서까지 자백하는 사람이 없을 경우, 선생님은 자기만이 사용할 수 있는 비상하고도 독특한 수단으로 간단히 범인을 가려내어 처벌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생님의 그 불그락푸르락하는 표정이 사실은 자수의 길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는지도 몰랐다. 솔직히 자백해봤자 용서해줄 것 같지 않은 기미가 얼굴에 농후했다. 내가 아는 한 명의 진범인도, 그리고 그를 제외한 모든 무고한 아이들도 그 서술에 다 같이 주눅이 들어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관망하면서 몰래 여유 있게 즐기는 사람이 있다면 오직 그것은 단단히 믿는 구석이 있는 나 혼자뿐이었다. 정해진 십 분이 지나자 분이 꼭뒤까지 오른 선생님은 마침내 실력으로 나왔다. 출석 번호 1번부터 차례로, 누군가가 자백하는 사람이 나설 때까지 지시봉과 회초리 겸용의 플라타너스 가지로 계속 종아리를 갈겨대는, 별로 비상할 것도 없는 강압적 수단인데 나는 그것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첫번째 매가 내 종아리에 닿기 전에 어제 방과 후 교실에서 내가 목격했던 광경을 죄다 불어버릴 심산이었다. 그런데 출석 번호 1번 꼬마가 바짓가랑이를 걷고 교탁 위에 섰을 때였다. 그제까지 시침을 떼고만 있던 명남이가 쪼르르 달려나가더니 선생님의 아랫도리에 처억 감기면서 징징 울기 시작했다. 전에 우리 집 책 창고 안에서 내 무릎을 쓸어안고 울던 거나 똑같은 장면이었다

그러는 순간 말로 할 수 없는 기쁨이 내 가슴을 무섭게 때리며 왔다. 그렇다. 문명남 그는 다른 사람 다 속인다 해도 결코 내 눈마저 속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일단 저질러놓은 일에서 언제나 용서를 받곤 했다. 꽃병의 건에서도 그랬고 공금 횡령의 건에서도 그랬다. 구태여 두 가짓것 사이에서 차이점을 찾는다면 그것은 용서를 받고 난 후의 처우일 것이다. 꽃병을 가지고는 자기 잘못을 뉘우칠 줄 아는 착한 사람이라고 칭찬까지 덤으로 받았으나 공금 횡령으로는 겨우 형사 책임만을 면했을 뿐 직장도 여자도 한꺼번에 잃는 등 단단히 출혈을 한 그 점이라고나 할까.

문명남에 관해서 내가 가장 자신 없어하는 부분이 바로 그 다음 대목부터다. 한 여자 덕분에 생긴 기나긴 실직 기간을 그는 적절히 활용했던 모양이다. 그래가지고 일찍 전에 잠시 쌉빡 보이고 만 적이 있는 그 숨은 재주를 딴에 피나게 갈고 닦았었나보다. 어느 날 갑작스레 시인으로 등장함으로써 그는 적어도 우리 동창들 사이에서는 오늘 같은 무명의 시대에 그래도 제법 이름깨나 남길 만큼은 성공한 본보기의 하나로 지목받는 한편 그간 여러모로 질기에도 맺어져 왔던 나한테서도 실질적으로 아주 멀찌막이 물러앉아버렸다. 그리고 간간이 들려오는 소문이 그 방면에서는 착실히 실력을 다져가고 있는 중임을 입증해주는 것이어서 갈수록 더하는 거리감을 그에게 느끼곤 했다.

그런데, 그러던 그가 득의의 그 시를 하루아침에 때려치우고는 요즘 한창 묘한 방향에서 출셋줄을 타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은 무엇 하나 확언할 단계는 아닌 성싶었다. 어느 것이나 다 소문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가 또 한 바퀴 재주를 넘어 새롭게 변모하려는 의도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유력한 기관에 종사하고 있는 자기 위치를 광고 돌릴 속셈으로 서울바닥에서 알 만한 고향 사람들을 일삼아 차례차례 방문하고 다닌단다. 본인의 입으로 한번도 밝힌 적이 없어 그 유력한 기관이 꼭 집어 어디인지조차 아직은 아무도 모르지만, 직접 그의 언동을 본 사람이면 백이면 백 다 그렇게 지레짐작해버린단다. 정확한 신분을 안 밝히는 그 점을 들어 더러는 그에게 '사칭 빙자'의 혐의를 두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누구한테 공갈이나 사기를 쳐 눈에 보이는 어떤 이득 따위를 노리는 것도 아니며, 다만 적당한 기회를 틈타 자기가 결코 아무렇게나 업신여겨도 무방할 과거의 문명남이가 아니라는 사실만을 상대방에게 무슨 수로든 증명해보이는 그런 선에서 선선히 물러서버리는 그를 가리켜 딱히 공무원 자격을 사칭하고 다닌다고 막말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은 뭐가 뭔지 나로서는 판단을 내리기 거북한 단계였다.

 

펀치 드렁크

너한테도 아마 곧 연락이 갈 거라던 정명록의 예언은 보기 좋게 빗나가 그해 겨울이 다 가고 봄이 올 때까지 문명남으로부터는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가 없었다. 나 역시 노상 그만을 생각하고 지낼 만큼 한가한 처지가 아니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향한 관심도 흐지부지 묽어지고 말았다.

일요일이었다. 밖에서 실컷 뛰놀다 들어온 아들녀석이 들이당장에 밑도 끝도 없이 한다는 소리가 권투 구경시켜 달라고 그랬다. 처음에는 텔레비전 얘기인 줄 알고 그러마고 무심코 대답했는데 아들녀석의 얘기는 그게 아니었다. 돌아오는 토요일 저녁에 도립 체육관에서 진짜 복싱 시합이 열린다는 것이었다. 어디서 들은 얘기냐니까 녀석은 큰 애들끼리 하는 말을 듣고 제놈이 직접 가서 시내 곳곳에 영화 광고하고 나란히 붙은 권투 선수 사진을 여러 장 보았다면서 토요일이면 아직 멀었는데도 쇠뿔을 단김에 뺄 요량으로 아예 딱정이를 떼고 달라붙었다.

"아빠가 안 보여주겠다면 너 또 찻길에 나가서 뛰어놀겠구나, 그렇지?"

녀석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르는 아저씨가 과자 같은 것 사줘도 막 따라갈 테지, 안 그래?"

제놈도 속은 있는지라 그제서야 히죽이 웃어 보였다.

"그래, 구경시켜주지. 그 대신 너 담부터는 엄마 말 아빠 말 잘 들어야 된다?"

우리네 시골 같은 데서는 그리 흔치 않은 구경거리라서 나는 아들녀석의 청에 순순히 응해주었다. 그러면서도 겨우 도청 소재지까지 내려와서 벌이는 시합인데 오죽하랴 싶어 그것이 누구하고 누가 싸우는 무슨 시합인가 묻지도 않았다.

그런데 월요일 아침 출근하는 길에서 나도 우연히 그 선전 벽보를 보게 되었다. 이강민이란 사람의 얼굴이 얼핏 눈에 들어왔다. 그에 맞서 싸울 상대자는 내가 가진 상식의 범위에서는 이렇다 하게 기억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이강민 그가 분명했고, 그가 싸우는 것으로 보아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는 제법 비중이 큰 시합인 것 같았다. 선전 벽보에 큼지막이 나붙은 두 얼굴 중의 하나가 바로 텔레비전으로만 보던 이강민 선수인 줄을 깨닫는 순간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들녀석과의 약속을 꼭 지키기로 새삼스레 마음을 다져먹었다. 뭔가 은밀히 와지는 예감 같은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기다림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혹시 수업에 들어가고 없을 때 나를 찾는 전화가 걸려오면 상대방의 연락처를 꼭 메모해두도록 교무실 사환한테 단단히 일러놓았다. 그리고 수업 중에도 운동장을 가로질러 현관 쪽으로 걸어오는 남자의 모습이 창 너머로 보일라치면 가르치다 말고 유심히 내려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나를 찾는 전화도 직접 찾아오는 사람도 없이 그럭저럭 시간만 흘러갔다. 어느덧 금요일 오후가 되었으나 그때까지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다섯 시가 넘은 걸 확인하고는 교무실을 나왔다. 교문을 빠져 나와 시내 쪽으로 한참 걷고 있는데 뒤에서 학생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어떤 손님이 저쪽에서 나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음을 나는 직감했다. 정명록이란 친구로부터 얘기들은 이후로 나는 그날 텔레비전에서 본 사람이 어쩌면 문명남 바로 그치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을 갖게 되었으며, 다음번 이강민의 시합 때면 아마 또 나타날 거라고 혼자서 예상해오던 터였다. 그랬는데 별 뾰죽한 근거도 없이 이렇듯 막연히 시작된 예감이 드디어 적중하는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나는 학생을 따라 뜀 반 걸음 반으로 오던 길을 되짚어갔다.

이게 얼마 만의 해후인가. 그는 학교 앞 전봇대 아래 수줍은 듯이 웃으며 서 있었다. 만나지 못하는 동안에 그는 늘 동안이던 얼굴이 내 형님뻘이나 되게 폭삭 늙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다행인 것은 소문대로 그악스럽게 변모해버린 구석 전혀 없이 전에 내가 알던 수줍은 문명남의 모습 그대로 나타나준 점이었다.

"한 발짝만 늦었어도 못 만날 뻔했군. 퇴근 시간에 대서 오느라고 급히 서둘렀는데도 벌써 저만큼 가고 있잖아. 그래서 학생을 시켜 부르게 했지."

그가 옛날처럼 주뼛거리면서 내 앞으로 다가와 역시 옛날 버릇 그대로 속삭이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나는 고닥새 감격해버리고 말았다. 겉으로야 늘 흉보고 욕했던 사람이지만 속새로는 그래도 아우처럼 아끼고 사랑한 것이 내 진심임을 스스로 확인해보는 신선한 즐거움이 그와의 오랜만의 대면에서 느낀 최초의 감정이었다.

내 쪽에서 먼저 서둘러 얘길 꺼낼 필요는 없었다. 나한테 얘기할 만한 건더기가 있는 일이라면 그는 할 것이고, 정히나 얘기할 게 없다면 그것으로 또 그만이었다. 입에다 넣기만 하면 대번에 속이 뉘엿거려지는 그 사카린 맛 같은 소문 따위는 나는 될수록 믿고 싶지 않은 심정이기도 했다. 그것보다도 오랜만에 만난 사내끼리의 정해진 절차는 당연히 술이 먼저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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