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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단편 소설

어른들을 위한 동화

by 자한형 2021.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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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흥길

 

 

먼저 우연한 계제에 인물 잘나고 몸 좋은 여노(女奴)를 시가보다 훨씬 저렴한 값에 구입하게 된 이야기. 그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실천하고자 했던 작은 미거(美擧)를 그 자신에 의해 기록된 일종의 인간성의 승리로까지 치부하고 있었다.

다음 그는 당황했다. 많이 후회도 했다. 새 주인에 향하는 계집종의 충성을 그로서는 뿌리칠 재간이 없었다. 결국 두엄자리에 앉아 신선 놀음하는 생활이 시작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생활에도 차츰 익숙해지는 사이에 도끼 자루는 어느덧 썩어버렸다.

그렇다고 칠칠한 위인은 못 되지만, 무슨 요일인가마저 까먹을 정도로 솔봉이는 아니었다. 아침에 출근할 당시만 해도 그걸 알았고, 회사가 파하는 즉시 집에 일찍 들어가겠노라고 마누라한테 약속까지 주고 나온 처지였다. 그런데 그걸 깜박 잊게 만든 사건이 일과 중에 사무실 안에서 툭 불거졌다. 사건치고는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백 배나 나은 사건이었다. 나온다, 안 나온다---오십 프로다, 아니다, 백 프로다---로 그간 사원들간에 추측이 분분하던 연말 상여금이 싸가지 없도록 불쑥 지급되었던 것이다. 사원 일동을 모아놓고 봉투를 나눠주는 자리에서 사장은 일장의 연설을 토했다. 마치 사면초가에 빠져 마지막 탄알을 분배하고는 전원 옥쇄할 것을 명령하는 지휘관의 노호처럼 비장미 넘치는 채찍질이었다. 사장은 최근 무역업이 수지가 맞고 또 사세가 괄목할 만하게 확장됨에 따라 구어박은 평민 출신에서 귀족으로 지체가 급격히 향상된 사람이었다. 그 너구리같은 사장이 신년도부터는 더욱더 심하게 밑엣사람 기름을 짤 포석을 까느라고 그처럼 일찌감치 엄살을 떠는 중이란 걸 유리대롱 속 들여다보듯 빤히 알고 사원들 모두는 요노옴, 하며 속으로 코방귀를 뀌었다. 그러나 거기에 오직 한 사람 예외가 있었으니, 그는 연설을 경청하는 동안 뺨이라도 얻어맞은 듯 얼얼한 감동으로 얼굴이 사뭇 화끈거렸다. 한 달치 봉급과 그것에 맞먹는 상여금 봉투를 받아 넣으면서 그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한 일도 없이 빈둥빈둥 놀기만 하다가 남의 피와 살로 뭉친 값진 재물을 도둑놈처럼 착복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마침내 그는, 어제 부실했으면 오늘 충실하고, 오늘 충실했으면 내일은 그야말로 헌신하기로 단단히 작정한 바 되었다. 그러다보니 반공일 근무가 오전만으로 끝난다는 사실조차 하마터면 잊을 뻔해가면서 주판알 퉁기기에 고부라져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일과 끝이 가까웠음을 그에게 일깨워준 사람은 같은 사무실 맞은 바래기에 앉은 미스였다. 그녀는 주말만 되면 어떤 청년---비록 선조 대대로 평민 신분이긴 하나 그래도 제법

배워 비교적 쓸 만한 직장을 가진 최신식 청년과 그렇고 저렇게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사내에 소문이 자자했다. 그녀가 얼굴에 물감을 칠하고 가짜 속눈썹을 다는 걸 보며 그도 책상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어디로 갈까. 어디 가서 무슨 선물을 살까. 무슨 선물을 사서 아내를 한 길쯤이나 뛰게 해줄까. 사무실에서 나와 그는 잠시 망설거렸다. 보도를 메운 인파에 휩쓸려 걸으면서 그는 거의 습관적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조붓이 위축되어 간단없이 유동하는 도시의 하늘이 잿빛의 층운(層雲)을 두껍게 거느린 채 사흘 굶은 시어미상으로 하계를 굽어다보고 있었다. 뭐라도 한바탕 이내 쏟아 내릴 듯한 암상궂은 날씨였다. 어깨를 한껏 움츠린 채 행인들은 당장 아무한테나 시비를 걸 것 같은 표정으로 바쁜 걸음을 더욱 채치고 있었다. 그러나 손끝에 간질간질 매만져지는 두툼한 봉투의 질량감을 두 개의 호주머니에 나누어 담은 그는 그다지 추운 줄 몰랐다. 한겨울 혹한을 얼굴마다 고드름처럼 달고 다니는 저 수많은 남녀들 호주머니 속엔 시방 상여금 봉투가 들어 있지 않을 것이었다. 제아무리 추우려 해봐야 추울 재주가 없을 정도로 역시 돈이 좋은 세상이었다. 마누라 앞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이봐, 하고 큰소리치게 만드는 것도 또한 그 육실하게 좋은 그놈의 돈이었다. 돈의 효용가치가 그저 단순히 물품 내왕의 원활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에만 머물던 소박하고도 딱한 시절이 과거에 있긴 있었다. 그때 그 시절을 살던 세상의 남편들은 과연 무엇으로써 한 달에 한 번씩이나 마누라쟁이의 콧대를 납작 누를 수 있었을까. 지금은 인격이나 권력, 또는 양심이나 정조 따위 무형의 것들까지 눈깔사탕이나 세탁비누와 대동소이한 유통 경로를 밟아 자연스럽게 거래되는 개명천지였다. 구식이라고 늘 핀잔먹는 그마저도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이 세상 어딘가에 아직도 존재한다는 일부 궤변에 코를 동으로 두르리만큼 황금만능은 이미 일반에 통념화된 미덕이었다. 어디 가서 무슨 선물을 사야만 그걸로 다시 아내의 보다 개선된 내조정신과 물물교환을 할 수 있을 것인지, . 아직도 뚜렷한 행선지를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는 무턱대고 마냥 걸었다. 걸었다기보다 사실은 이리 밀고 저리 밀리는 인파의 소용돌이가 대낮에 대로상에서 방황하는 커다란 미아 하나를 백화점이 밀집해 있는 번화가까지 실어다주었다.

백화점을 서너 군데나 순례하는 동안도 그는 방황하는 상태에서 여전히 깨나지 못했다. 여기저기 기웃거려봐야 아내의 비위에 합당할 만한 상품이 눈에 안 띄었다. 아내는 물건을 보는 눈이 몹시 까다로운 여자였다. 빛깔이 난하거나 투박함은 물론 포장이 요란스럽다거나 헐직해 보여도 안 되었다. 특히나 가격 문제를 가지고 가탈을 부리는 성미였다. 비싸도 안 되고 그렇다고 내용이 부실한 싸구려도 아내한테 가는 선물로는 영락없는 미역국이었다. 그래서 간혹 비싸게 사는 한이 있더라도 집에 가면 거의 공짜나 다름없게 산 듯이 꾸며대 왔다. 값싸고 맵시 좋고 내용이 충실한 물건---산더미처럼 채화된 엄청난 물동량의 홍수 속에서 생광스런 선물 하나 고르기가 그렇게도 힘이 들었다. 물론 아내의 성미 탓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보다 원초적인 결함은 그의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의 왜소함이었다. 최신의 설비나 어떤 번화한 구조물 종류 앞에 섰을 때, 그와 같은 문명의 이기에 익숙지 못한 자신의 취약성이 만인 환시리에 들통나지 않을까 늘 노심되는 것이었다. 종업원들의 친절 그역 매일반이어서 웃음 저쪽에 도사린 악덕의 상혼이랄지 간지(奸智) 등속을 싸잡아 넘겨다보며 만약 중도에 흥정을 작파할 경우 그네들이 자기 뒤통수에 먹일 쑥떡감자에 지레 오금부터 저리고 보는 것이었다. 유년 시절에 이미 다 체득해버린 몸을 사리는 버릇, 우유부단에 가까운 신중성, 결벽 따위의 서글픈 착종(錯綜) 아니면 그런 것들로부터 비롯되는 지나친 반사 작용 탓일 것이었다. 어른들 눈치만 보며 보낸 째지게 곤궁했던 유년의 잔재가 지금도 살아 이젠 남루를 벗을 만큼 셈평이 펴인 성년의 나이까지 완강히 지배하려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이 세상에서 돈만으로 해결 안 되는 그 무엇이 아직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셈이었다. 도회 복판에 있으면서도 그는 여전한 시골호박이었다. 백화점 구내 이곳저곳을 장시간 쏘다니면서도 흥정다운 흥정 한번 제대로 못 했을 뿐더러 여태껏 품목조차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본의 아니게 방황을 계속했다. 결국 그는 거기서도 쇼핑하는 인파가 거저 실어 날라주는 대로 몸을 내맡겨버렸다.

어쩌다 잠깐 정신머리란 것이 외출을 나갔었나보다. 별안간 허전한 느낌이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놀랍게도 자기는 번화가에서 멀리 벗어나 문명과는 전혀 동떨어진 웬 누추하고 조잡한 골목길을 지나는 중이었고, 자기 혼자 달랑 외돌토리로 남겨진 채였다. 순간적으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지브기중기 집게삽 닮은 거대한 해동청 발톱에 달칵 물려 산마루를 넘다 실수로 시골집 마당에 떨어뜨린 쥐새끼 모양으로 머릿속이 온통 휑뎅그렁했다.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쓰레기 너부러기 위로 희끗희끗 성긴 눈발이 덮이고 있었다. 앞으로 나갈수록 자꾸만 석이어 흐르는 눈으로 길은 형편없이 질척거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놈의 냄새였다. 월척의 강설량으로도 덮지 못할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축 우리 같은 데서나 맡을 수 있는, 불결하기 짝이 없는, 문명의 밝음에 역행하는, 그믐밤처럼 시커먼, 괴상야릇한 냄새였다. 하늘은 여전히 사흘 굶은 시어미상이었고, 일몰이 가까움을 알리는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한 무더기의 바람이 달려들어 그의 전신을 강타했다. 다른 한 무더기의 바람이 재차 달려들어 가정과 직장 사이를 시계불알처럼, 혹은 배드민턴 셔틀콕처럼 육장 왔다갔다하던 그의 판에 박힌 일상을 간단히 뒤흔들어놓았다.

 

오직성실한가지로입신하고야말겠다는조촐한야망세계적긴장완화와공해문제에관한그나름의소견오입에대한끊임없는욕구와동경그리고거기에따르는지칠줄모르는공상조국의장래에대한잿빛우려오래눈독을들여온전기세탁기쪽으로향하는왕성한구매욕빙하기로다시한발한발다가서고있다는지구의운명불황타개책이십년월부상환의주택자금미래에태어날자식들의교육문제---등등으로 뒤죽박죽 얽히고 설킨 하나의 소우주를 말끔히 파괴해버렸다. 어찌 된 영문인지 그는 갑자기 오장육부를 낱낱이 해체 당한 기분이었고, 무대 위에 세워진 채 불가항력의 어떤 세력에 의하여 하나씩 하나씩 옷가지를 벗기우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무리 봐도 자기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그는 곧바로 돌아서서 나오려 했다. 그런데 이때 웬 고함 소리가 높은 벽돌담으로 가려진 골목 저쪽에서 길게 울려나왔다. 단말마의 무서운 외침이었다. 전신을 타누르는 고통의 무게를 고스란히 혓바닥 위에 올려 잇새로 뿌적뿌적 밀어내는 것 같은 사내의 비명이 잇달아 들렸다. 사내의 비명이 그로 하여금 내처 앞으로 걷게 충동질하는 것이었다.

냄새와 소리의 진원지는 공교롭게도 같은 방향이었다. 지저분한 골목길이 다 끝나는 곳에서 지저분한 광장으로 통하는 철책의 지저분한 입구가 눈에 띄었다. 한 차례 더 사내의 고함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행인들 몇 사람이 거지반 뜀박질하다시피 서둘러 그 철책의 입구로 빨려 들어갔다. 그 또한 비상한 호기심에 이끌려 걸음을 재촉했다. 광장 안에 발을 들여놓고서야 비로소 거기가 어떤 데라는 걸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이름하여 노예시장이었다. 그런 것이 도시의 어딘가에 생겼다는 얘긴 그도 들음들음으로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자기 눈으로 확인하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한 번쯤 가서 구경할 만하더라고 권하는 친구들이 있었어도 자기가 신봉하는 주의주장 때문에 여태까지 의식적으로 백안시해온 터였다. 정처없는 라걸음 끝에 노예시장을 구경하게 된 것도 정말 우연한 일이거니와 그로서는 사람과 집짐승을 한데 섞어 판다는 사실도 거기 와서 비로소 처음 알게 되었다.

"그렇게 짐승을 다룰 줄 몰라서야 어디 이런 장사 해먹겠네!"

고객임이 분명했다. 중절모에 콧수염에 단장까지 짚은, 바위처럼 체격이 단단해 보이는 중년의 신사가 사람 허리 높이로 세워진 기다란 판매대 바로 곁에 서서 소리를 질렀다. 어지간히 화가 나 있는 표정이요, 태도였다.

"여보게, 그 채찍 이리 내게!"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요, 나리. 허지만요, 헤헤, 워낙 고집이 쎈 놈이라서요, 나으리."

꼽추 방불하게 허리가 굽은 늙수그레한 노예상인이 연방 아첨을 물찌똥처럼 흘려가며 두 발은 실히 넘을 채찍을 신사의 손에 건넸다. 젊디젊은 수컷 노예 하나가 우너숭이 본새로 노예상의 발치에 웅크려 앉아 흰자위 승한 눈알을 사방으로 표독스럽게 굴리고 있었다. 눈발이 흩날리는 날씨에 손바닥만한 헝겊쪼가리로 간신히 사타구니만 가린 꼬락서니였고, 온통 살가죽이 물러나 난도질당한 수육 못지 않이, 어떻게 보면 한 뭇의 구렁이가 엉겨붙은 것처럼 전신이 피멍과 생채기로 어지러이 무늬져 있었다.

"족쇄를 풀어줘!"

신사의 입에서 명령조의 말이 떨어졌다.

"아아니 나으리, 어쩔라고 이러십니까요. 승냥이같이 날쌉고 싸난 놈입니다요."

"잔말 말고 어서 풀라면 풀어!"

호통치는 서슬에 그만 상인은 찔끔해버렸다. 상인은 한참을 망설이고 주저했다. 그러다가 도리 없다는 몸짓을 하며 노예의 두 발을 묶은 사슬을 철커덕 벗겨놓았다. 하지만서도 미덥지 않아 하는 표정이 내내 얼굴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신사가 모피로 깃을 장식한 고급의 털외투를 벗더니 그것과 단장을 암냥해서 상인의 손에 맡겼다. 그리고는 별안간 광장이 산으로 가게시리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 이 쥐새끼 같은 종놈아! 네놈한테 자유를 줬으니까 어디 여기 서 계신 이 어르신네를 네놈 배짱대로 한번 요리해봐라!"

사슬에서 풀려난 젊은 수컷 노예는 제 손발에 붙은 뜻밖의 자유가 차라리 거대한 티눈처럼 설익고 어색하다는 듯 한동안 미심쩍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네놈 배짱 꼴리는 대로 해보라니까!"

신사의 콧수염 밑에서 거푸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노예의 얼굴 위에 가래덩어리가 카악 뱉어졌다.

"그 냄새 나는 더러운 손으로 어서 이 어르신네의 목을 비틀어보란 말야!"

마침내 노예의 눈에 불이 확 켜졌다. 그렇다고 느껴지는 순간 몸을 솟구쳐 머리로 신사의 배를 들이받았다. 그러나 신사 쪽이 더욱 빨랐다. 중년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굉장히 민첩한 동작이었다. 머리가 와서 닿기 전에 벌써 옆으로 빙글 돌아서며 어느 열가에 딴죽을 걸었는지 상대를 땅바닥 진창 위로 서너 바퀴나 재주를 넘기는 것이었다.

"자아, 일어나서 다시 덤벼봐!"

일어나서 다시 덤볐다. 이번에는 무릎을 세워 내지르는 일격에 정통으로 면상을 받혀 쿵하고 짐짝처럼 떨어졌다. 도저히 상대가 안 되었다. 신사 쪽에서 두어 수쯤 접어주고 다시 붙어도 결과는 뻔할 것이었다. 비틀비틀 일어나 앉으며 침을 뱉는 노예의 입에서 시뻘건 타액에 섞여 옥수수알 같은 이빨이 한 움큼이나 되게 쏟아졌다. 증오와 분노로 흰자위 승한 눈을 번뜩이며 노예는 마구잡이로 날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정한 간격을 유지해가며 몸에 밴 솜씨로 휘두르는 채찍질에 목이 친친 감겨 어쩔 도리가 없었고, 반항의 기미가 보일 적마다 신사는 채찍을 불끈불끈 당겨 함부로 자빠뜨리기를 몇 차례고 거듭했다. 드디어 노예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골목길에서 듣던 예의 그 비명---고통의 무게를 고스란히 혓바닥 위에 올려 잇새로 뿌적뿌적 밀어내는 단말마의 비명이 광장을 하나 가득 메웠다. 탈진 상태에 들어 이미 저항할 의욕조차 상실해버린, 노예의 목에 채찍을 휘감아 양쪽 끝을 힘을 다해 옥죄이면서 신사는 속삭이듯 낮은 소리로 이야기했다.

"네놈 복을 네놈 발로 찬 셈이다.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말을 잘 들을 것 같으면 끼니 때마다 상으로 날고기를 주려고 했는데 이젠 이빨이 그렇게 몽창 나가버렸으니 억울하게 된 건 네놈 혼자야."

그리고 상인으로부터 외투를 돌려 받아 젊은이 뜸떠먹게 튼실한 상체 위에 걸치면서 신사는 다들 들으라는 듯이 목청을 돋우어 설명하는 것이었다.

"여기 이 우직스럽기 짝이 없는 짐승을 벵골산 호랑이하고 한우리에 넣어서 맨몸으로 격투하는 재간을 가르칠 작정이오. 좀 비싸게 친 감이 없지 않지만 틀림없이 제 값어치를 하게 만들 테니까 여러 선생님들 많이 기대해주십시오."

물건을 인수하는 절차가 대금을 치르고 받는 것으로 신속히 끝났다. 이제 자기 소유가 된 노예의 손목에 다시 쇠사슬을 채워 앞장세우고 신사는 구경꾼들 틈바귀를 헤집으며 출입구 쪽으로 나아갔다. 상인을 포함하여 모든 구경꾼들이 한결같이 던지는 감탄과 경악의 눈초리를 신사는 충분히 계산하는 것 같았다. 신사의 모습이 득의에 찬 걸음걸이로 멀어져가자 누군가 앞발뒷발 바짝 들었다는 투로 끌끌 혓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신사의 솜씨도 솜씨려니와 그토록 광포스럽던 노예가 양같이 온순해졌다는 사실이 아닌게아니라 믿어지지 않았다.

"대체 저 사람 뭐하는 사람이우?"

그는 아까부터 내내 궁금히 여기던 걸 끝내 옆 사람에게 묻고 말았다. 묻고는 젊은 수컷 노예와 중년 신사가 사라져간 방향을 턱으로 가리켰다.

"곡마단 단장이라나요."

"곡마단 단장요?"

어쩐지 예삿솜씨가 아니더라니……

"그렇다오, 곡마단 단장이래요."

옆 사람이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방금 목격한 충격적인 광경에 그자도 어지간히 얼이 나간 모양이었다. 감탄의 빛이 얼굴에 여실히 나타나 있었다.

"맹수를 사람처럼 길들여서 열두 마당씩 재주를 넘기는 곡마단 주인이래요."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한산해 보이는 풍경으로 미루어 파장에 가까운 시간인 듯했다. 그러나 여기저기 무더기로 남겨진 쓰레기의 양과, 당장 눈에 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 미지근하게 살아 주위에 감도는 시장바닥 특유의 어쩐지 술렁이는 분위기가 조금 전만 해도 이곳 경기가 자못 흥청거렸음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거개가 노약자거나 아니면 젖먹이가 딸린, 다시 말해서 아무래도 상품 가치가 희박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한결같이 오들오들 떨면서 무리의 가운뎃자리를 차지하려고, 또는 이미 확보한 가운뎃자리를 빼앗겨 바깥쪽으로 밀려나지 않으려고 서로를 몸으로 밀고 부딪쳐가며 무언의 다툼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적어도 욕지거리와 함께 노예상의 채찍이 휘익 바람을 가르고 나서 다음에 또 휘익 소리가 울릴 때까지는 내내 그랬다. 그것들이 제복처럼 걸치고 있는 마대 비슷한 천의 내리닫이 겉옷만 가지고는 엄습하는 추위를 물리칠 수 없는 게 너무도 당연했다. 항상 강자 편에서만 행세해온 하늘이 무력하게 타고난 대죄를 범한 것들에게 내리는 무서운 형벌과도 같은 눈발이 보일락말락 점점 송이를 키우면서 노예들 몸뚱이 위로 쌓이고 또 쌓였다.

곡마단 단장이 아주 떠나버리자 판매대를 에워싼 구경꾼들도 하나씩 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하여 광장 안은 더욱 한산해졌다. 사람들을 붙잡아 둘 심산으로 노예상이 갑자기 목청을 돋구어 입짓을 뽑기 시작했다. 있는 숫기 없는 숫기 죄다 떨어 긴 사설을 까발리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봤자 사람들이 일단 내친 걸음을 되돌릴 기미가 안 보이니까 이번에는 무리 가운데서 암컷 노예 하나를 끄집어내어 판매대 중앙에 세웠다. 그것의 존재를 처음으로 발견한 그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지닌 용모의 빼어남에 이 아침을 받아 다른 것들은 하나도 눈에 안 들어올 정도로 인물이 볼 만했다.

"자아, 싸구려요, 싸구려. 그냥 가면 후회돼요. 평생을 후회헐 테니 두고 보소. 장담허고 허는 말이지만 백년 만에 하나 나올까 말까, 기똥차게 생겨먹은 요년 한번 구경허소."

눈요기만으로도 본전이 아깝지 않을 거라는 그 여노를 말하면서 노예상은 입에 거품을 물었다. 사설 자체는 과장스러운 가락을 담고 있으나 그렇다고 그 인물 됨됨이까지 심하게 과장하는 건 결코 아닌 성싶었다. 여노의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요모조모 뜯어 살피며 그는 은근한 감탄을 했다. 눈은 둘이요, 코는 하나였다. 입도 하나요 귀는 둘이었다. 양민에 조금도 뒤질 게 없는 완전한 하나의 인간 형태를 고대로 유지한 채였다. 외려 어떤 면에서 보면 범상한 인간들이 자기네의 범상함을 자인하는 유력한 방증으로 집에서나 거리에서나 늘 쓰고 다니는 평범의 너울을 훌쩍 벗어버린 모습이었다. 얼굴을 이룬 이목구비 개개의 것들이 서로 긴밀히 협조하고 단결하여 주인의 미를 한층 돋보이도록 경쟁하고 있는 듯했다. 그 중 인상적인 것이 눈이었다. 크기에 비례하는 다량의 우수를 수용한 시원스러운 눈이었다. 그것은 주위의 사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가슴 내부의 사정을 밖으로 나타내는 초감도의 감광판과도 같았다. 때로는 가슴 내면에 인 반응의 농도를 누그러뜨리거나 희석시키기를 자유자재로 해내는 여과망, 혹은 셔터이기도 했다. 또 때로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긍휼지심이나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게 함으로써 흥정을 자기 쪽에 유리하게 이끄는 일종의 무기로서도 적절히 이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빼어난 몸매였다. 매우 건강하면서도 암컷의 성징을 제대로 간직한 몸매가 꼴불견인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내리닫이 마대천 속에서 우아한 곡선으로 살아 작은 움직임에 큰 율동으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는 수컷들이 흔히 변변하게 생긴 암컷을 대할 때 갖기 쉬운 저열한 사심에서 뚝 떠나 다만 공정하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의문을 느끼기 시작했다. 저만한 인물이라면 다른 것들보다 훨씬 먼저 팔렸어야 옳다. 파장에 가까운 시간까지 안 팔리는 무리에 끼여 두고두고 싸구려로 홋가될 허섭쓰레기는 아무리 봐도 아니었다. 거의 필사적이다 싶게 떠벌이는 노예상의 입담에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게 더구나 이상했다.

"허허, 이 양반 소식이 영 깜깜이군."

그 의문에 대답해준 사람 역시 먼젓번의 그 사내였다.

"발꿈치로 지근지근 밟아서 만든 것들까지 다 날개돋쳐서 팔렸다오. 그런데 저것만은 감히 누가 손을 못 대고 있어요. 고객들 모두가 침을 바르면서도 어떻게들 캐냈는지 저것의 과거를 알고 난 뒤로는 도무지 겁이 나서 사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는 거죠."

"과거라니, 도대체 어떤 과거관데 그래요?"

"나서부터 여태까지 귀족 집안으로만 돌았다나요. 누구라고 대면 삼척동자라도 다 알아들을 만큼 유명한 귀족 집 우두머리 하녀 출신이래요."

"그렇다면 더욱 이상하군요. 매매하는 데 유리했으면 유리했지, 그게 뭐 흠이 될 건 없잖아요? 일도 잘할 테고, 눈치도 빠를 테고……"

", 답답도 허슈. 누가 그걸 모르나요? 아니까 더욱 겁난다는 거죠. 우리네 평민 형편으로는 감히 꿈조차 못 꿀 호화판 살림에 푹 젖어서 살아온 종년을 데려다가 대체 뭐에 써먹겠소? 저걸 부리고 유지 관리하려면 아마 배보다 배꼽이 더 클 거요. 그나 그뿐인 줄 아슈? 손버릇이 아주 고약하대요. 생김새는 저렇게 멀쩡해도 선천성 도벽이 있어서 전에 귀족 집에 있을 때 가보로 내려오는 노마님 패물을 훔쳤더랍니다. 그래서 노마님의 분노를 사가지고 평민용 노비로 등급이 깎여서 시장에 내돌려졌대요. 애당초 우리네 같은 평민들 생활 수준으로는 엄두도 못 낼 그림의 떡인 셈이죠."

광장 안에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노예상은 완연히 초조하게 굴었다. 부르는 값도 조금 전에 비해 많이 헐해져 있었다.

"나리, 나으리! 높으신 나으리! 여길 좀 보십쇼, 여길!"

그를 지목하고 서두르는 소리였다. 노예상의 간교한 눈에 신참의 그가 마침내 물봉으로 비쳤음이 분명했다.

"여기 이 머리를 보십쇼."

노예상은 한 손으로 젊은 암컷 노예의 머리털을 껴들어 뒤로 바싹 젖혔다.

"꼭 비단 같습죠. 아니, 비단 이상입죠. 저녁때 피곤해서 들어오시면 나으리의 발을 이 비단보다 더 부드러운 머리털로 씻겨드릴 수도 있구요."

다음은 때꼽이 누룽지처럼 덮인 시커먼 손가락을 노예의 입아귀에 넣어 양쪽으로 팽팽히 당겼다.

"인정이 많으신 나으리, 요년 잇속도 좀 보십쇼. 요렇게 이빨들이 곱고 튼튼해서 아무거나 주는 대로 잘 처먹고 잘 새긴답니다."

이번에는 채찍 손잡이로 노예의 내리닫이 겉옷을 쑤욱 걷어올렸다. 그리고는 달덩이처럼 허연 알궁둥이가 드러나자 철썩 소리나게 손바닥으로 갈기는 것이었다.

"어떻습니까, 젊으신 나으리. 요 정도 몸뚱이라면 일년에 한 배씩은 어김없이 새끼를 쳐서 시장에다 내놓을 수 있습죠. 그 수입만 해도 본전쯤은 금방 건져질 겝니다."

추위조차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젊은 암컷 노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상인의 극성이 그처럼 우심한데도 몸을 깡그리 내맡긴 채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그저 담담한 눈으로 어둠발이 덮여오는 먼 하늘만을 올려다볼 따름이었다. 그는 노비의 얼굴에 내려앉는 눈송이를 보고 비로소 닿자마자 녹아 흐르는 자기 얼굴의 눈송이도 의식했다. 그는 얼굴에 와 닿는 감촉이 매우 차가움을 느끼면서 저도 모르는 새 무척 상기되어 있음을 퍼뜩 알아차렸다. 그 사이에 노비의 몸값은 더욱 떨어져 있었다. 그런 추세로 떨어져가다가는 결국 막판에 이르면 노예상이 되려 자기한테, 사례감 암만을 줄 테니 제발 가져가 달라고 애걸복걸할 듯싶어 슬그머니 겁이 날 지경이었다.

"젊으신 나리! 젊고 인정이 많으신 나으리! 언제까지 주저만 하고 계실 작정인지요? 자아, 이래도……"

상인이 별안간 노비 앞으로 달려들어 오지랖을 움켜쥐더니 아래로 주욱 훑어버렸다. 이미 탄성을 잃은 마대천이 찢기면서 내는 무력한 음향과 함께 두 개의 탐스런 젖둔덕이 눈앞에 툭 불거졌다. 그래도 노비는 동요하지 않았다. 잠시 후에 느릿느릿 손바닥을 펴 어설피나마 젖가슴을 감싸긴 했는데, 그것도 수치심 때문이 아니라 엄습하는 추위로부터 자신을 다소나마 보호하려는 본능적인 동작처럼 보였다.

"보시다시피 몸이 아주 고만입지요. 잠자리에서 사내 다루는 솜씨는 더 기맥히답니다. 자아, 어떡할깝쇼?"

꼽추처럼 허리가 잔뜩 휜 그 노예상은 대고 음탕한 웃음을 흘렸다. 노예를 향한 자기의 관심이 분명히 오해를 사고 있는 것 같아 그는 얼굴이 시뻘개졌다. 차라리 외면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상인은 거의 울상을 지으며 몸값을 한 계단 더 낮추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부디 자비를 베푸십쇼. 인정 많고 기품이 넘치고 장차 크게 되실 젊으신 나으리, 제발 이놈을 더 나쁜 놈으로 만들지 말아주십쇼. 나으리마저 외면하신다면 저는 이년을 더욱 학대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마침내 그는 마음속으로 한 가지 위험천만한 결심을 해버렸다. 시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런 모든 행위는 그가 오늘날까지 신봉해온 주의주장에 전적으로 위배되는 온당치 못한 처사였다. 그리고 아무리 둘러다봐야 이 추악한 놀음에 종지부를 찍을 만한 사람은 자기 말고 더는 없는 성싶었다. 그는 잠자코 결정적인 순간의 도래를 기다렸다. 기다린 보람이 있어 상인이 부르는 값과 자기 호주머니 사정이 일치되었을 때 그는 마침내 오른손을 번쩍 추켜들었다.

"사겠소!"

외침과 동시에 두 개의 봉투를 꺼내어 판매대 위로 던졌다.

"쇠사슬 따윈 일없소!"

구속에 사용되는 두어 점 기구와 노예증선지 뭔지도 마다며 땅바닥에 팽개쳐버렸다. 그는 이제 자기 소유가 된 여노를 이끌고 거반 도망치다시피 구경꾼들 틈서리를 비집어 뚫었다. 간신히 광장을 벗어 나와 인적이 뜸한 골목길에 다다르자 그는 여노의 팔을 놓아주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당신은 인제 자유의 몸이오. 누가 보기 전에 어서 아무데로나 도망치시오!"

그러나 딱하게도 여노는 말귀를 전혀 못 알아듣는 것이었다. 그저 커다란 눈을 백치처럼 꿈벅이면서 "주인나리……" 하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알아듣겠소? 지금부터 당신은 자유란 말이오. 인제는 아무도 당신을 돈으로 사고 팔 수 없단 말이오. 그러니 빨리 달아나시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뒤에서 따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는 냅다 뛰기 시작했다. 뛰면서 들으니 발자국 소리는 여전했다. 으늑한 구석을 찾아 숨어도 보았으나 역시 허사였다. 용케도 찾아내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다소곳이 서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이 어린애 장난 같은 숨바꼭질에 진절머리가 나고 부아가 치밀었다.

"대관절 어쩌자고 이러는 거요?"

"주인나리……"

"그 주인이란 소리 좀 거두시오! 난 당신의 주인도 무엇도 아니오! 단지 당신이 수모와 고통을 당하는 게 하도 딱해서 작은 선심을 베풀었을 뿐이오!"

그러자 여노가 쪼르르 내달아 발아래 엎드리면서 그의 구두코에다 대고 수없이 입을 맞추었다.

"바라옵건대, 나리께서는 소녀더러 제발 당신이라고 부르지 마시옵소서. 소녀는 그저 주인나리의 어리석고 천한 종이옵니다. 소녀의 몸도 마음도 모두 나리의 소유이옵니다. 버리지 마시고 거두어 주시옵소서."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는 계집종이 가진, 골수에 박힌 노예근성에 치를 떨었다. 괜한 짓을 했다고 처음으로 후회를 느끼게 만든 건 바람이었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들어올 때와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불어오는 눅눅하고 차디찬 저녁 바람이 한나절 미궁 속을 헤매다 나가려는 그에게 옷을 입혀주었다. 잠시 벌거숭이로 백주의 대로를 배회하던 그의 마음에 현실의 두꺼운 의상을 도로 입히는 것이었다. 그는 후회와 분노와 낙담과 곤혹 따위 크고 작은 옷가지들을 차례로 주워 걸친 다음 실로 오랜만에 마누라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누라는 마누라고, 여노는 여노였다. 새로 맞은 주인 앞에서 거듭 충성을 다짐하는 그 어리석은 여노한테는 어떻게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그는 집으로 데려갈 수 없는 사정을 여노에게 납득시키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우려했던 것보다 한결 더 심했다. 아내는 그의 어리석은 행동을 단연코 용서하지 않았다. 여러 말로 변명도 해보고 본의가 순수함을 주장도 해봤으나 말짱 헛일이었다. 때 없고 철없이 그가 인간애를 발휘하는 걸 아내는 원치 않았다. 원치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아예 믿으려조차 하지 않았다.

"이제 두고 보면 알 거요. 내 진심이 어떻다는 걸 행동으로 증명하는 길밖에 없소."

"그렇게꺼정 수고허실 필요 없어요. 당신 뱃속이 검다는 건 이미 증명이 끝났으니까."

더구나 아내의 눈에 부쩍 쌍심지를 돋우게 만든 건 여노의 그 충성스런 봉사였다. 그의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깎아 세운 목상처럼 등뒤에 시립해 있다가 그가 움직이려는 기척만 보여도 눈치 빠르게 의도를 간파하고 성냥불을 그어 댄다거나 휴지통을 찾아 대령하는 등으로 번번이 앞질러 손을 쓰곤 했다. 안주인이 옆에 있건 없건, 무슨 소리를 하건 말건 일체 구애받지 않고 소신껏 시중을 들었다. 그가 오른쪽 등갈비 부근이 가렵다고 느끼는 순간이면 어느 겨를에 귀신이 곡하게시리 알아차리고 정확히 오른쪽 가려운 등갈비 위에 옥수수 등긁이 같은 손을 갖다 얹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분이 꼭뒤까지 오른 안주인한테 머리채를 꺼들려 방바닥에 함부로 나뒹굴기를 수없이 되풀이했지만, 다아 소용없었다. 아프다든지 하다못해 야속스럽다는 표정 한번쯤 지을 법한데도 끽소리 한마디 않고 일어나서는 다시 그의 등뒤에 그린 듯이 시립해 선 채 봉사할 다음 기회를 탐탐히 노리는 것이었다.

"좀 참고 기다려봐요. 수소문해봐서 적당한 임자만 나서면 곧바로 내보낼 작정이니까 너무 심하게 굴지 말아주구려."

그만큼 안존한 말로 다독거려놓았는데, 그래도 그가 없는 틈을 타 단단히 손을 보는 모양이었다. 회사에서 돌아와 보면 할퀴이고 꼬집힌 자국이 여노의 전신에 장님이라도 얼른 알아보게 끔찍했다. 밤마다 내외는 티격태격 줄다리기를 벌였다.

"옛날을 생각해봐요, 옛날을. 허리끈을 졸라매 가면서 고생하던 일을 벌써 잊어버리진 않았겠죠. 지금 요만치라도 살림이 는 게 다아 누구 덕인데……"

아내는 비장의 눈물을 한꺼번에 쏟기도 했다.

"저 계집년이 나보다 인물이 반반하다든지 몸이 좋다든지 하는 따위는 크게 억울할 게 없어요. 허지만 저년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가외로 비용이 나가는 건 도저히 못 참겠어요."

아내는 이렇게 생짜로 악지를 세우기도 하면서 별의별 수단을 다 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로서는 실로 천만의 말씀이었다. 아내의 오해나 객없는 그 질시나 모두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였다. 그래서 며칠에 걸친 긴 싸움 끝에 아내가 보따리를 챙겨 가지고 친정으로 훌쩍 떠나는 것도 공들여 말리진 않았다. 지가 가면 몇 날이나 묵을라고, 좀이 쑤셔서 오래 못 배기고 도로 슬슬 기어들 테지.

아내가 없어진 집안에서 여노의 알뜰한 시중이나 받으며 마음 편히 지낼 그는 아니었다. 그림자처럼 잠시도 등뒤에서 떠나지 않는 여노의 존재가 육장 마음에 걸렸고, 그가 움직이는 대로 졸졸 뒤따라 행동하는 바람에 홀딱 벗김을 당한 듯 사실상 자신의 사생활은 이미 빼앗긴 바 된 셈이어서 그 또한 유쾌한 기분일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거북한 것이 말끝마다 붙는 그놈의 낯간지러운 호칭이었다.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소. 제발 그 주인이란 소리 좀 빼시오!"

"하오나 주인나으리……"

"거듭 이르겠는데, 당신은 이제 남의 종이 아니라 자유를 가진 한 사람의 떳떳한 인간이란 말이오. 그런데도 개나 돼지처럼 취급당하던 노예생활에 뭐가 그리 미련이 커서 아직도 스스로 천한 지경에 빠지길 고집한단 말이오?"

"태어나면서부터 소녀는 줄곧 복종과 충성만을 배웠사옵니다. 주인을 위해서는 목숨도 버려야 한다는 가르침 속에서만 자랐사옵니다."

"도대체 어떤 육실할 녀석이 그런 걸 가르칩디까?"

"소녀의 어미이옵니다."

"딸을 그런 식으로 교육시키다니, 그게 곰이지 어디 사람이오?"

"맞사옵니다. 저의 어미는 곰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소녀의 어미를 가리켜 웅녀라 불렀사옵니다."

정색을 하고 진지하게 털어놓는 말에 더 이상 화를 낼 수도 없었다. 하릴없이 그는 실소를 하고 말았다.

"허허, 이거 원 기가 막혀서…… 만약 당신 어머니가 곰이었다면 우리 어머닌 호랑이였겠소."

"맞사옵니다. 모두들 그렇다고……"

"시끄럽소! 밤도 늦었으니 저쪽 방에 건너가 잠이나 자시오!"

참으로 미련하고 불쌍한 인종이었다. 여노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참으로 가망 없는 서글픈 인종이었다. 주인이 먼저 잠드는 걸 본 다음 종은 나중에 자리에 드는 게 옳은 순서라면서 언제까지고 부동자세로 서서 버틸 심산이었다. 그의 내부에서 울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그토록 학대받고 구속당해도 시늉으로나마 한번 저항할 줄 모르고 오로지 맹종만을 일삼는 그네들의 저열한 본능에 치가 떨렸다. 남의 도움에 힘입어 어렵게 얻은 자유마저 주체를 못 해서 잘못 배달된 우편물처럼 간단히 반송해버리는 그네들의 헐수할수 없는 생리를 차라리 저주하고 싶었다. 노예 시장에서 그네들의 참상을 맨 처음 목격했을 때,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에 소문으로 들어 알았을 때부터 그가 느껴온 동정과 연민은 이미 그의 마음속에서 떠나 있었다. 여노를 물리치기 위하여, 아니 속박이나 매일반인 여노의 그 지긋지긋한 충성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하여 짐짓 그는 주인나리의 권위를 엄숙히 행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인으로서 너에게 명령한다. 이제 그만 물러가 자도록 하라!"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자 희열의 빛이 여노의 얼굴에 넘치고 넘쳐 흘렀다. 비로소 저를 하나의 노예로 대접해준 데 대해 수없이 머리를 조아려 감사를 표하면서 여노는 홀가분한 걸음으로 자리를 물러갔다.

이튿날 아침, 출근하기에 앞서 그는 한동안을 망설여야 했다. 말직의 무관을 지낸 조상 적부터 내려오는 몇 가지 알량난 세전지물과 최근에 아내가 구입한 시쳇 귀금속 약간이 집안에 있었다. 그걸 한군데 몽똥그려 장롱에 넣고 쇠를 채울까 하다 그만두었다. 도벽이 있는 것으로 듣긴 했지만 천성이 착하게 보이고 충성스럽기 그지없는 여노를 의심한다는 게 좀 무엇했던 것이다.

믿었던 대로 저녁에 회사에서 돌아와보니 여노 혼자 덜렁한 집채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집 안 꼴이 아주 엉망이었다. 그가 아침에 나가면서 어지러뜨린 것들이 하나도 정리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만한 일쯤 마땅히 해놓았을 것으로 기대했던 저녁밥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가까운 음식점에서 그리 비싸지 않은 것으로 이인 분을 시켜다 나누어 먹은 다음 그는 어이가 없어 물었다.

"진종일 집에서 혼자 뭐하고 지냈소?"

"죄송하옵니다, 주인나리. 예삿 집안 일은 통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럼 당신 재주로 익히 할 수 있는 일이란 어떤 것들이오?"

"주인나리를 즐겁고 편안하게 모시는 일이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사옵니다."

여노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지는가 싶더니 곧 신명이 오른 몸짓과 함께 자기 숨은 재주를 자랑하기 시작했다. 그 자랑에 의할 것 같으면, 여노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개가 되라면 개가 되고 소나 말이 되라면 소나 말이 되어 완전히 벌거벗은 스무 명의 노예가 상여처럼 떠메고 선 침상 위에서 정사를 벌이는 일에 가장 능했다. 여노의 이야기 중에서 그가 가장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귀족들의 의식주 생활이었다.

"그분들은 인피를 벗겨 옷을 마르고 신발을 삼기도 합니다. 그분들은 진주를 먹여 돼지를 기르고 돼지를 먹여 사람을 기르고 사람을 먹여 개를 기르고 마지막으로 그 개를 당신들의 식용으로 삼습니다. 그분들은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닌 곳에다 요지경을 꾸며놓고 사람의 몸 위에 번쩍번쩍 도금을 해서 집안 구석구석에 울타리로 혹은 벽으로 혹은 가구로 진열해놓고 즐깁니다.

그것은 그 나이 되도록 세상을 일일이 자로 재가며 꼼지락꼼지락 살아온 그의 일상을 파괴하기에 충분한 위력을 가진 증언이었다. 귀족들의 호화를 극한 사치와 자신의 꾀죄죄한 생애를 견주어보는 데서 생기는 까마득한 거리감이 그의 이성을 강타했다. 그것은 이제껏 그가 노예들에 대해서 품어온 동정과 연민을 너끈히 누르고도 한 자락은 남을 정도로 크고 강력한 충격이었다.

그날 밤도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이제는 아주 하잘것없는 것이 돼버린 자신의 인생을 통하여 느끼는 엄청난 외로움을 여노로부터 위로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충성스런 여노의 봉사를 구태여 물리치지 않았다. 그날 밤 그는 두 번 세 번 거듭 성의 있는 봉사를 받고는 곯아떨어졌는데 곯아떨어지기 전에 의식주에 관한 지금까지의 관념을 약간 수정해놓았다. 내일 아침 한 끼 정도 음식다운 음식을 불러다 먹는다 해서 설마 하늘이 무너지지야 않겠지……

이튿날 그는 회사를 결근해버렸다. 입사 이래 주욱 개근하면서 할 만큼 해줬으니까 며칠쯤 푹 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여노에게 술시중을 들게 했다. 그날도 아내한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당분간 별거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외려 연락이 없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

"이리 오너라!"

난생 처음 여노를 큰 소리로 격식에 맞게 부른 것도 그날 밤의 일이었다. 물론 술김이긴 했지만 그는 옷을 홀랑 벗도록 여노에게 명령했다. 거추장스런 누더기를 벗고 집안에서는 나체로 기거하도록 명령한 다음 그 자신도 그걸 실천에 옮겼다. 명령을 내리는 자의 기쁨이 복종만 일삼는 자의 그것보다 질과 양에서 훨씬 우월하다는 걸 그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 다음날부터 그는 목수를 불러 가옥 구조를 뜯어고치는 한편 번쩍번쩍 도금을 올린 새로운 가구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겨울이 지나고 어느새 봄이었다.

신통찮은 봉급장이의 여축을 한쪽서부터 차근차근 조져먹는 데는 그다지 긴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파산에 직면했음을 자각한 그는 어느 날의 짧은 궁리 끝에 묘책을 발견하여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알량난 세전지물과 아내의 귀금속을 꺼내어 방바닥에 늘어놓았다. 그리고는 여노를 불러 엄숙히 명령했다.

"이 가운데서 아무거나 하나 훔쳐라!"

녹슨 화살촉과 엄심갑(掩心甲)과 단검, 그리고 목걸이, 귀걸이, 팔찌…… 방바닥에 늘어 놓인 물건들과 주인을 번갈아 보며 여노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뭘 꾸물거리는 거야! 훔쳐, 당장에 훔쳐! 아무거나 훔치란 말야!"

여노는 엉겹결에 단검을 집었다.

"좋아, 네년은 분명히 주인집 가보를 훔쳤다. 그 죄로 네년을 다시 노예 시장에 내다 팔아버리겠다."

집어든 단검을 그야말로 값진 희귀한 보물인 양 두 손으로 감싸 가슴에 품어보는 어리석은 여노를 내려다보며 그는 음흉스런 미소를 지었다.

이른 아침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요즘 세상에 좀처럼 보기 힘든 희한한 광경을 구경하려고 마을 골목길을 가득 메웠다. 한 노예 상인이 인물 잘나고 몸 좋은 여노의 손에 오라를 지워 시장으로 끌고 가는 참이었다. 겨우내 꼭꼭 닫혀 있던 무역회사 경리사원네 대문에서 나온 그 노예 상인은 얼굴이 온통 주름살투성이였고 꼽추나 다름없이 등이 굽어 일흔은 실히 돼보이는 추악한 몰골이었다. 금시초면인 그자가 에워싼 구경꾼들을 둘러보며 "안녕하세요, 반장부인? , 식료품점 아주머니도 나오셨군요……" 운운하며 괜시리 아첨 섞인 웃음을 흘리자 아낙네들은 질겁을 해서 서너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는 재수 옴붙었다는 듯이 가래를 카악 뱉으며 쏘아붙이는 것이었다.

"저놈의 늙은이가 날 언제 봤다고, 쟁그럽게시리!"

"누가 아니래요. 그런데 저 종년 앞섶에 삐죽이 보이는 게 뭐죠?"

"어머나, 저거 칼 아냐? 원 세상에, 어쩌자고 저런 위험한 물건을 가슴에다 품고……"

"저거저거 저러다 큰일날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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