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흥길
내용물보다 그걸 담는 그릇 쪽이 외려 더 행세하고 우대 받는 경우를 요즘 들어 왕왕 본다. 그래서 사람들에 우선하여 먼저 문제의 그 건물부터 설명해 둘 필요를 느낀다. 따지고 보면, 실로 그곳의 종업원들은, 그리고 그곳을 단골로 이용하는 손님들은 신분의 귀천이나 연령의 고하에 관계없이, 연놈 구별도 없이 모두 다 그 건물의 부속물 아니면 기껏해야 장식물 푼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알 만한 사람은 엊그제 이미 죄 알고 있는 얘기다. 우리의 그것은 시(市)의 복판도 아니고 그렇다고 변죽도 아닌, 참 어정뜬 곳에 자릴 잡고 있다. 도시의 미관을 잡친다는 이유로 시 당국이 세 차례에 걸쳐 시한부 개수를 명령할 만큼 아주 낡을 대로 낡은 건물인데 낡아 보이는 그만큼 역사가 오래라는 사실은 시민뿐만이 아니라 시 당국에서도 넌덜나게 인정해 오는 터이다.
장구하다고 얘기해도 거의 무방할 긴긴 세월을 그 동안 용케도 버티어 왔다. 그 자신을 향해 항상 적대적인 별의별 인간들 틈서리에서 내내 그것은 별의별 시련을 다 겪어야만 했다. 또한 그것은 제 몸체를 밑뿌리부터 야금야금 먹어 들어오는 자연과 끊임없이 겨루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신세의 고단함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아 지금도 소송에 계류중이다. 세 번째의 개수시한도 그냥 넘겨버리자 이번엔 철거 명령으로써 시당국이 관의 위엄을 보였고, 거기에 맞서 시비가 법정에까지 번지기에 이른 것이다.
시청의 강제는 사실 많이 정당성을 띤 것이긴 했다. 그러나 기왕 정당할 바에는 좀도 철저히 정당했더라면 시민들에게 훨씬 생광스러울 뻔했다. 해쳐지는 도시의 미관보다 아흔아홉 배 더 무서운 것이 혹 건물이 도괴할 경우에 있을지도 모르는 인명의 손상이고, 그렇기 때문에 개수나 철거를 명령하지 않을 수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망루에 높이 앉아 사타귀나 득득 긁는 것으로 한여름 오후의 무료를 달래는 젊은 소방관의 모습이 똑똑히 보일 정도니까 바로 지척이다.
길 건너 저 만큼에 소방서가 자리하고 있다. 그 소방서 망루와 키재기라도 하듯 임립한 몇 채의 고층 건물들 사이를 지나노라면 농기구 제작소 하나가 눈에 띄는데, 순연히 인간의 어깨와 팔뚝심만으로 우격다짐하다시피 철판을 두들겨 분무기 등속을 만들어내는 그 영세성이 심히 측은해 보일 거다. 농기구 제작소와 바로 이웃해 있는 목조 건물의 아래층은 싸구려 여인숙이다. 얼마 전만 해도 여인숙 다음은 왜식을 전문으로 하는 대중 식당 이었으나 지금은 그 자리에 신축 양옥이 들어서서 인근 김외과 병원의 안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병원 안집 대문 앞을 지나쳐 가다가 사람들은 뭔가 개운찮은 기분에 이끌려 대개들 한번쯤 뒤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거개의 사람들은 자기를 방금 수고스럽게 만든 것의 정체를 고대 알아차리게 된다. 아랫도리 부분의 여인숙이 무리를 해 가며 떠받치고 선 목조 건물 윗도리 부분의 꼴불견은 장님조차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정도다. 더구나 시력이 좋은 사람일 것 같으면 이내 간판도 찾아 읽을 수 있게 된다.
아무리 고가라지만 명색이 그래도 집인데, 사면 벽이 없을 수 없다. 애당초는 묽은 반죽이 흘러내리다 굳어버린 형태의 투실 무늬에 분홍색 페인트를 올려 한껏 모양을 부린 회벽이었다. 그러나 세월이란 것이 그 동안 멋대로 조지고 제겨놓아 지금은 석회는 석회대로 페인트는 또 페인트로 퇴색하고 변색해서 그 겉노는 모양이 흡사 늦잠에서 깬 논다니의 화장기 도망간 낯바닥 마냥 민주주의로 생겨먹었다. 특히 우리가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도로 쪽으로 둘린 벽면이다. 거기에 손바닥만한 창문 하나가 한 줄기 숨통처럼 아슬아슬하게 뚫려 있기 때문이다. 아무려면 손바닥만이야 할까마는 하여튼지 옹색하기 그지없는 네 쪽의 유리창이 위아래 각각 둘씩 양편으로 어울려 유일한 창문 구실을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유리창 칸 칸마다 푸른 빛 선팅을 하고 그 위에 다시 금박으로 <산> <호> <다> <방> 넉 자를 공평하게 배치 해 넣었다. 이것이 바로 시 당국으로부터 잇따라 개수 명령을 받아가며 최근에 손을 본 유일한 자리이자 집채를 통틀어 가장 때깔이 훤한 부분이다.
그것은 그것의 개폐 여부나 여닫는 방식의 차이에 따라 본래의 창문 구실 혹은 그에 버금가는 간판 역할을 번차례로 수행하곤 한다. 창문이 외출할 때면 간판이 보초 서고, 마찬가지로 간판이 외출 나갈 경우엔 창문이 보초서는 꼴이다. 그런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창문은 대개의 경우 꼭꼭 쳐닫힌 상태로 있다. 어쩌다 그것이 열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사람들은 <산다>와 <호방> 두 절름발이 가운데서 어느 한 쪽만을 구경하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찻집임을 알리는 신호라곤 그런 따위가 전부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우리 시의 시민들은 여간해서 착각이나 혼동을 일으키는 법이 없다. 이왕 내친 걸음이니까 우리의 산호다방 내부도 마저 보아주기 바란다.
입구로 들어설 때는 되도록이면 오른쪽은 외면한 채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는 것이 이롭다. 여인숙과 함께 쓰는 남녀 공용의 화장실은 그것이 닫혔건 열렀건 상관없이 언제나 마수부터 비위를 상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곧바로 층계가 눈에 띈다. 정확히 스물 일곱 단의 높이를 가진, 목조 계단인데, 기울기가 워낙 가파른 데다가 중간에서 잠시 쉬어 꼬부라지는 층계참조차 베풂이 없이 단숨에 곧장 치올려 세운 구조의 그 멍청스러움 덕분에 만약 여자라도 동반했을 경우 당신은 엉큼한 마음 없이도 기사도 정신을 발휘할 수 있게 될는지 모른다.
더구나 목조의 수명까지 다 된 상태여서 위태롭기조차 한 것이다. 맨 아랫단에서 위쪽으로 오를수록 밟힘을 당한 층계가 지르는 신음이 점점 고조된다. 그 기분 나쁜 소리는, 밝은 세상에 다시 나갈 수 있을지 어떨지를 점치면서 수술실로 들어서는 중환자만큼이나 초행의 당신을 불안스럽게 만들 것이다.
층계의 마지막 단을 딛고 서면 거기에 영락없는 또 하나의 다른 당신이 미리감치 도착해 있어 뒤미처 허덕이며 올라오는 당신을 환영하고 있을 것이다. 비록 다른 당신이 실제의 당신의 모습에 비길 때 크고 살찌고 약간은 한쪽으로 이지러져 보이고, 그리고 한꺼풀 망사천 너머로 흘겨보듯 망측스런 추남으로 비친다 해도 그리 신경 쓸 필요 없다. 등신비(等身比)의 대형 거울의 장난인 것이다. 거울의 상단에는
祝 發 展
그리고 하단에는
永生高女第七回달맞이會員一同
라는 글씨가 각각 새겨져 있다. 원래 고르지 못한 표면에다 뒷면의 수은 가루마저 군데군데 벗겨져서 기능의 일부를 착실히 얌질하고 있다. 그 점이 외려 더 분위기에 착 들러붙는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숨 가삐 올라서는 회사원이면 회사원, 절도범이면 절도범들의 면면을 곧이곧 극명하게 되쏘지 않는 것만도 여간만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제는 다 됐다. 거울을 한옆으로 비끼면서 출입구 손잡이를 잡아당기는 그런 정도의 수고로 당신은 인제부터 산호의 한 식구가 되는 것이다. 먼저 굴 속 같은 어둠이 당신의 전신을 휩싼다. 그 어둠 속에서 사금파리처럼 하얗게 웃으며 섰는 가지런한 치아가 우선 눈에 띈다. 그 웃음은 바로 그것이 당신으로 하여금 선뜻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만들 것이다.
여느 날과 똑같았다. 시골 국민학교 교사 김시철을 입구에서 반긴 것은 하얀 이빨 하얀 웃음의 손 마담이었다. 카운터 옆에서 마담을 상대로 판에 박힌 인사를 건네고 어쩌고 하는 사이에 장벽처럼 막아서던 실내의 어둠도 서서히 물러갔다. 어둠을 대신하여 어느새 좌석들의 행렬이 서서히 공간을 차지해 나가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창문을 열고 소방서 망루를 바라볼 수 있는 오른쪽 끝에서 두 번째 자리는 역시 비어 있었다. 저절로 비어 있다기보다 실은 마담의 배려로 일부러 비워놓은 자리였다. 김시철은 제 단골 좌석에 가서 아무렇게나 몸뚱이를 부렸다.
「그래, 오늘도 사표를 품에 넣고 출근하셨었나요?」
뒤따라온 손 마담이 맞은편에 앉으면서 이렇게 말을 걸었다. 오십 고개를 저만큼 앞에 둔, 그 나이에 흔히 보는 비만형 몸집인데도 퍽 곱고 정갈하게 늙은 인상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의 그런 면을 보고 미륵보살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그거야 물어보나마나죠, 뭐」
귀찮다는 내색을 구태여 감출 필요 없이 김시철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구식의 목제 의자라서 궁둥이를 붙이면 앉은키가 형편없이 낮아지는 반면 팔받이의 위치는 또 턱없이 높아진다. 그래서 사용하기에 다소 불편한 점이 없지 않지만 그 대신 단골 자리에 정좌했을 때의 김시철에겐 바로 그 의자의 기이한 구조 덕분에 선천적으로 없던 위엄이 혹처럼 갑자기 붙으면서 시골 국민학교 교사치고는 좀 과람스럽지 싶은 거만한 앉음새를 본의 아니게 취하게 되는 것이었다. 적어도 산호다방 안에서, 더구나 상대가 손 마담이라면 웬만한 무례는 다반사로 통하는 줄을 김시철은 익히 아는 터였다.
「적당한 기회가 없었던 모양이군요?」
「훈장 자리 하나 내놓는 데 어찌 기회가 없었겠어요. 눈 딱감고 내던지는 그때가 바로 기회죠. 사람이 모자란 탓입니다. 사표를 내던질 만큼 변변한 위인이 못 된다는 걸 마담은 처음부터 아셨을텐데요」
「참는 김에 더 참고 견디셔야죠. 요즘 들으니까 교사들 봉급이 많이 오를 거라고들 그러는데 그렇게 되면 지내기가 한결 수월해질 거 아녜요」
「그까짓 봉급 몇 푼 오른다고 나무주걱이 쇠주걱이 되나요.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적 지위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네 사윗감으로 혹은 신랑감으로 국민학교 선생한테 어떤 점수를 매기느냐에 달린 겁니다」
「마음을 느긋이 가지세요. 그러기 전에 무엇보다도 우선 쉬셔야 돼요. 댁의 안방처럼 생각하고 한잠 주무세요」
마담은 갔다. 김시철 쪽에서 생각할 때 마담은 언제나 앉아 있어야 할 시간의 길이를 정확히 알고 또 언제쯤 일어서야 하는가를 정확히 아는 여자였다. 그는 잘 익은 배를 베어먹듯 사근사근 울리는 마담의 목소리를 상당히 즐기는 편이었다.
시철이 잠에서 깼을 때는 이제 막 밤일을 시작한 농기구 제작소에서 철판을 두들겨대는 소리가 한창이었다. 꽈당꽈당 울리는 소리에 섞여 손 마담 목소리가 옆자리에서 들렸다.
「첨엔 누구나 다 그러죠. 하지만 이제 곧 아무렇지도 않게 돼요. 규칙적인 소리는 금방 몸에 익숙해지니까요」
멋모르고 들어온 뜨내기 손님 한 쌍이 되게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다방이 뭐 이래. 일루미네이션은 영점이고 데코레이션은 마이너스로군」
「그러게 말야. 뮤직은 또 어떻구? 아직두 십구 세기를 못 벗어났어」
자기는 산호를 구성하는 하잘것없는 비품(備品)의 하나라고 늘 자처해 온 손 마담으로서는 그런 종류의 공박은 사실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도 손 마담은 만면에 보살 같은 미소를 띠면서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로 젊은이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예요. 물론 그림자보다야 빛쪽이 훨씬 낫죠. 그렇다고 또 세상이 온통 빛만 있어 가지고는 곤란해요. 사람이 피곤하고 밭아서 견딜 수가 없어요. 빛 뒤엔 반드시 그림자가 따르는 게 정상예요. 도시일수록 특히나 더 그래요. 그런 의미에서 저희 산호는 그늘인 셈이죠. 오늘날 우리 시에 남아 있는 유일한 그늘예요. 온종일 불볕 속에서 부대낄 대로 부대낀 사람들이 쉴 곳을 찾아 지친 몸을 이끌고 저희 산호로 온답니다. 이곳에서는 허례허식이나 체면 따윈 모두 필요 없어요. 약간은 상식에서 벗어난다 해도 탓할 사람 없어요. 신사복을 준비하지 않았다고 너무 섭섭해하지 마세요. 풀밭에서 뒹굴기엔 작업복이 훨씬 간편하고 좋답니다」
마담의 찰떡같은 신념이었다. 빛과 그림자 운운의 그 지론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반평생을 오직 산호를 지키는 데 몸 바쳐온 괴짜였다. 그 신념 때문에 그녀는 자주 수세에 몰려 곤경을 당하곤 했다. 그러나 몇 차례에 걸친 영업 정지와 개수 명령 뒤에도 산호가 크게 다치지 않은 채 거의 원형 그대로를 유지해 나갈 수 있었던 것 또한 그 신념 덕분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다방 운영을 영업 행위로 생각한 적은 꿈에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명실상부한 하나의 사회사업이었다. 언제나 실패의 잔만을 마시는 꾀죄죄한 일생들을 마치 어미닭이 병아리를 품듯이 자신의 그늘에서 마음놓고 쉬게 할 수만 있다면 그녀는 그것으로 족했다.
「커피 드시겠어요?」
주문을 받는 게 아니라 시비를 걸 작정인 듯 미스 현이 끼어 들었다. 미스 현은 고개를 천장 쪽으로 향하고 사람을 콧등으로 내려다보는 버릇이 있었다. 마담이 누차 주위를 주었는데도 산호를 출입하는 손님 모두를 싸잡아 깔아보는 그 태도는 쉬이 고쳐질 기미가 안 보였다.
「자기는 뭐 마실래?」
여자가 물었다.
「난 커피」
남자가 대답했다.
「커피하구 토마토 주스!」
여자는 미스 현이 지른 불을 훅 불어 끄는 기세로 간단히 처리해 버렸다. 주문을 받자 미스 현은 잠자코 돌아섰다. 그리고 훼훼 내저으며 걷는 미스 현의 엉덩이가 비좁은 통로를 꽉 메웠다. 뒤늦게 마담이 깜짝 놀라는 얼굴을 했다.
「아가씨는 토마토 주스를 주문하셨나요?」
「왜, 안 되나요?」
「그럴 리가 있겠어요. 토마토 주스, 좋죠, 여성들 미용에도 좋고 또……」
미스 현이 전표를 주방 창구에 밀어 넣으면서 한입 가득 비웃음을 물었다. 마담의 그 설득조 음성이 되이어졌다.
「하지만 차 종류라면 뭐니뭐니 해도 커피가 제일이죠. 특히 저희 산호가 자신 있게 내놓을 만한 것은 커피랍니다」
그러면서 손 마담은 커피 예찬론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커리 놔두고 주스 시키면서 어떻게 현대 여성 축에 낄 수 있느냐는 투였다. 마담의 말이 끝남과 거의 동시에 차가 배달되어 왔다. 두 잔의 커피였다. 젊은 남녀는 귀신에라도 홀린 듯 어안이 벙벙해서 아무 소리 못 하고 그저 바라만 보았다. 그것 보라는 듯이 미스 현이 실쭉 웃으며 그들먹한 엉덩이로 통로를 빼곡 메우고 갔다.
산호다방 커피라는 게 당최 엉망이었다. 되는대로 설설 헹궈 낸 개숫물 맛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검지도 붉지도 않은 애매한 빛깔에 들척지근한 냄새만 풍겨 그걸 목구멍으로 넘기고 나면 단박에 속이 닝닝해 오는 것이었다. 어른이 되다 만 것 같은 장발의 주방장 녀석이 장담하고 만들어내는 유일한 차가 예의 그 커피였다. 듣는 데서 혹 누가 커피 맛이 형편없다고 불평이라도 할라치면 녀석은 까놓고 대거리질을 해대곤 했다. 백이면 백다 식성에 맞는 차를 만들 줄 알면 어떤 개아들놈이 이런 삼류 다방 구석에서 여지껏 썩고 있겠냐는 것이었다. 그러니 본격적인 커피를 맛보고 싶은 사람은 허구한 날 산호에 죽치고 앉았을게 아니라 관광호텔 커피숍 같은 데나 나가 보라는 얘기였다. 뿐만 아니었다. 녀석은 손님이 약간 뜸한 시각이면 주방에서 홀로 진출하여 짬짬이 단골들과 맞상대를 하면서 감히 담배 한대 꾸자고 손을 벌리는 것이었다.
손 마담한테는 주방장 못지 않은 또 하나의 애먹이로 미스 현이 있었다. 미스 현은 그녀의 직업용 성명이 가짜이듯이 마음보 또한 가짜였다. 그녀는 자신의 미모에 대해 얼토당토않은 과신을 품고 있었다. 손님들이 객관적인 눈으로 평가해 주는 제 용모와 제가 스스로 평가하는 그것 사이엔 엄청난 격차가 있는데도 그녀는 좀처럼 자숙하려 하지 않았다. 주방장 녀석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짜 민주주의로 생겨먹은 얼굴이어서 이목구비가 다 제멋대로였다. 미스 현이 자신의 인기를 측정하는 방법은 그 날 그 날 손님들로부터 뺏어 마시는 찻잔의 수였다. 손 마담 눈을 피해 가며 요령 좋게 만만한 단골들을 협박해서 매상을 올리는 그 한잔에 그날의 희비가 엇갈렸다. 이를테면, 어제는 열 잔을 얻어먹어서 백 퍼센트 살맛이 났는데 오늘은 다섯 잔뿐이니 자살이라도 하고 싶다는 식이었다. 누구나 다 마찬가지일 테지만, 그녀의 원래 희망은 다방 레지가 아니었다. 앉으나 서나 지금도 그녀는 일편단심 가수에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거개의 철딱서니 없는 레지아이들의 실속 위주의 소원으로, 어떤 돈 많은 늙다리 하나 물어서 하루아침에 주인 마담으로 껑충 도약하여 손수 다방을 경영해 본다는 따위 생각은 그녀에게 경멸을 받아 마땅했다. 그녀는 틈 나는 대로 화려한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전신에 받으며 만원 사례의 관중을 상대로 그들의 애간장을 낱낱이 녹이며 섰는 자신의 모습을 시커먼 천장 위에 다 그리곤 했다. 그녀는 자신이 일류 가수로 출세한 직후 곧바로 한 고학생과 사귀어 몸과 마음을 다해 그를 뒷바라지하게 되기를 소원했다. 그리고 재주는 있으나 환경이 몹시 불우한 그 고학생이 자신의 도움에 힘입어 대학을 마치고 판검사가 되는 그 순간에 가서 자기를 본때 있게 배신해 주기를 소원했다. 그가 당연히 그래 줘야만 자기는 마지막 고별 리사이틀에 당하여 청중들의 열화 같은 재청에 대한 답례로 윤심덕의 「사의 찬미」를 부르다가 무대 위에서 숨을 거둘 수가 있었다. 마지막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 그녀는 필히 음독(飮毒)할 각오였다.
밤도 어지간히 깊었다. 김시철은 홀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매일 저녁 개근하다시피 하는 단골들의 모습이 저마다의 지정석을 차지하고 게게 풀린 몰골들을 한 채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카운터에서 제일 가까운 자리에 앉은 건 전직 신문지국장 경력의 채씨였다. 금전 관계든가 여자 관계든가의 모종 사건에 얽혀 몇 년 전에 은퇴한 후 지금까지 오직 현역 기자들의 패기 없음만을 한탄하면서 세상을 사는 초로의 홀아비인데, 요즘 손 마담을 감히 어쩌려 한다는 소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꼭꼭 카운터 바로 앞자리에 턱알받침을 하고 앉아서 될수록 손 마담 쪽은 거들떠도 안 보는 척하면서 실은 일거 일동을 죄 훔쳐보고 있었다.
김시철과는 맞은편 구석에 대칭을 이루고 앉아 있는 건 늙은 대학생 최씨였다. 군대 복무 기간 삼 년을 합쳐 시방 구 년째 재학중이라는 그는 일 년을 둘로 쪼개어 한 학기는 벌고 한 학기는 등록하는 형편인데, 지금은 휴학원을 내고 학비를 장만하는 중이고, 꽁초를 찾아 늘 이쪽 주머니 저쪽 주머니를 부스럭 부스럭 뒤져 쌓는 그 궁상맞음으로 하여 역설적이게도 다른 사람 아닌 미스 현한테서 몹시 괄시를 당하는 상태였다.
김시철이 오다가다 눈인사라도 건네는 사람은 그들 둘이 다였다. 그러나 그 밖의 손님들에 관해서도 미스 현이 좌석을 일순하며 참샛짓으로 물어 나르는 말과 말이 있어 거의 모든 것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산호에서 낯익은 사람이라면 개개일자로 이미 현역에서 은퇴했거나 혹은 아직도 때를 못 만나 재미가 뭔지 모르고 세상을 사는 그런 부류였다. 그네들은 어찌 보면 밤이 이슥해서 마담으로부터 문 닫을 시간이니 오늘은 그만들 돌아갔다가 내일 다시 오라는 그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 그처럼 기를 쓰고 꾸역꾸역들 산호로 모여드는 것 같기도 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철판을 꽈당꽈당 두들겨 패던 소리는 그쳐 있었다. 그리고 그걸 대신하여 역시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사내들의 언쟁하는 소리가 점점 열도를 더해 가며 벽을 타고 이층까지 또렷이 살아 올라오고 있었다. 죽일 놈 살릴 놈 해가며 고래고래 왜장 치는 소리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지자 김시철은 마침내 영사실 암막만큼 두껍고 무거운 커튼을 들치면서 창문을 열었다. 디귿자 모양의 키 낮은 슬레이트 지붕 처마 밑에 달린 고촉의 백열등이 빈 드럼통과 철봉들로 너저분한 농기구 제작소 안마당을 용서 없이 내리비치고 있었다. 웃통을 훌렁 벗은 두 사내가 쏟아지는 불빛을 받아 땀에 젖은 근육을 번들거리며 한참 쫓고 쫓기는 중이었다. 쫓는 자는 손에 목침덩어리만한 해머를 거머쥐었고, 쫓기는 자는 맨손인 채였다. 쫓는 자나 쫓기는 자나 다 같이 서로를 저주하고 욕설을 퍼부으면서 드럼통 사이를 빠져나가고 기둥을 돌았다. 네댓 명의 동료가 곁에 있었으나 그들은 팔짱을 낀 채 실실 웃어가며 구경만 하고 있었다.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 몰려 맨손의 사내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게 되었다.
「좋다. 쳐라! 쳐라!」
맨손의 사내가 대갈통을 디밀면서 한 발짝 해머 앞으로 다가들기 시작했다. 다른 사내가 해머를 머리 위로 번쩍 추켜세우면서 험악한 눈초리를 했다. 그 순간 오랜만에 맛보는 신선한 긴장이 김시철을 압도해 버렸다.
「오오냐, 그러잖어도 빌빌대고 사느니 차라리 죽고 싶던 참이다. 마침 잘됐다. 쳐라, 어서 쳐!」
금방 내리칠 듯한 그 동작만도 가위 살인적이었다. 꽝 소리와 함께 골통이 으깨지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시철은 다음 순간을 목마르게 기다렸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사내는 등등한 기세가 무색하게 결행을 자꾸 망설이더니 끝내는 해머를 동댕이치면서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만이었다. 공장장쯤으로 보이는 작달막한 체구의 사내가 나타나 카랑카랑한 소리로 두 사람을 호되게 나무람하기 시작했다.
「이 개도야지만도 못헌 놈들아, 비싼 밥 먹고 그래 헐짓들이 없어서 맨날 쌈질들이냐, 이놈들아! 똑같이 고생살이허는 불쌍한 종자들끼리 이놈들아, 서로 위해 주지는 못헐 망정 이놈들아, 허구 많은 날 치고 패고 지랄발광들이나 허고 이놈들아……」
김시철은 창문을 닫았다. 커튼도 도로 내려버렸다. 끝장을 보지 못한 긴장감이 아직도 체내를 돌며 아쉽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하숙방에 가면 식은 밥상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스스로의 의지로 발딱들 일어설 생각을 못 하고 문 닫을 때까지 궁싯궁싯 시간만 보내는 산호의 떨거지들을 둘러보면서 김시철은 두 번 다시 이놈의 다방에 출입하지 말자고 벌써 습관이 돼버린 맹세를 새삼 되씹어 보았다.
여느 날이나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사표는 제출하지 못한 채 여전히 안주머니에 찔려 있었고, 먹밤 같은 카운터 앞에서 사금파리처럼 하얗게 웃는 손 마담의 이빨도 여전했다. 김시철은 오른쪽 끝에서 두 번째 좌석을 차지하고 앉아 대뜸 커피를 주문했다. 산호다방 커피 수준이 어떻다는 것 속속들이 알지만, 그렇다고 다른 것 주문해 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사실 또한 익히 아는 터여서 그는 차 주문에 곤혹을 느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이윽고 차가 배달되어 나왔다. 그런데 찻잔을 내려놓는 미스 현의 입가에 전에 없던 웃음이 잠깐 내비쳤다.
「아마 김 선생님도 깜짝 놀라실 거예요」
「글쎄 그러잖아도 방금 놀라고 난 참이야. 미스 현이 아마추어 노래자랑에서 장원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런 일 말고는 당장에 놀랄 일이 없을 성싶었다. 미스 현이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는 기색인데 이때,
「현양아!」
카운터에서 손 마담이 기숙사 사감 같은 표정으로 엄한 눈짓을 보냈다.
「인제 곧 아시게 돼요」
이렇게 소곤거리며 돌아서는 미스 현의 눈꼬리에 이번엔 어렵쇼, 장난기마저 해낙낙히 묻어 있질 않나. 그러고 보니 그새 산호다방에 뭔가 변화가 있긴 있었던 게 분명해졌다. 변화도 이만저만한 변화가 아닌 듯했다.
그 변화가 무엇인지를 김시철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비로소 눈치챌 수 있었다. 어제까지 마시던 개숫물 맛이 아니고 이건 진짜 커피다운 커피여서 그는 하마터면 도로 뱉을 뻔했다. 그가 깜짝 놀라기를 기다려 마담이 다가왔다.
「커피가 어떻게 마음에 드셨는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된 일이죠?」
「주방장이 새로 갈렸어요. 마침 좋은 사람이 있길래 전에 있던 이군보고 그만두라고 그랬죠」
김시철은 주방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찻잔이 드나드는 반달 모양의 창구 저쪽에 여자처럼 희고 가는 팔 하나가 슬쩍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지는 게 보였다.
주방장이 갈린 그 이튿날부터 산호다방은 무섭게 변모하기 시작했다. 우선 음악부터 바뀌어서 전에는 미스 현이 따라 부르기 딱 알맞게시리 쫄쫄 쥐어짜는 뽕짝조이던 것이 밝고 경쾌한 팝송 경향으로 크게 변했다. 다음은 커튼이었다. 진록의 두꺼운 나사천에서 연둣빛 얼멍베로 시원하게 바뀌고 창문들은 경우지게 한가운데 위치로 활짝 개방되었다. 조명도 대폭 보강되어 실내는 눈부실 정도로 밝아졌고, 하다못해 벽에 거는 액틀이나 시트커버에 이르기까지 달라지지 않은 게 없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가장 충격적인 변화는 손 마담의 그 딴 사람처럼 돌변해버린 태도였다.
「곤경에 처했다고 꼭 움츠리고만 살란 법은 없어요. 그럴수록 우린 우리대로 한정된 범위에서나마 즐기는 방법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돼요. 바깥이 너무 눈부시다면 거기에 적응해 나갈 힘을 안에서부터 차츰 길러나가는 거예요. 그런 노력마저 포기해버리면 우리는 영영 낙오되고 말아요」
미스 현의 귀띔에 의해 사람들은 그와 같은 모든 변화가 주방 속에서 흘러나오는 지시에 의한 것임을 곧 알게 되었다. 정신을 못 가눌 만큼의 새로운 환경에 이끌려 가느라고 수고가 많으면서도 산호의 오랜 단골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십여 년이 넘게 고수해 온 전통적 분위기를 불과 며칠 사이에 굴뚝이 아궁이가 되고 아궁이가 측간 되게 일신해 놓은 주방장이란 인물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미스 현은 대답 대신 실실 웃기만 하다가 혹 실수라도 저지르지 않았나 두려워하는 표정으로 느닷없이 손 마담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었다.
새로 온 주방장은 보름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홀 안에 코쭝배기조차 비치지 않았다. 아침 일찍 문을 열어서 밤 늦게 문을 닫을 때까지 주방밖에 얼씬하지 않음은 물론 소변보고 대변보는 꼴 한 번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반달 모양의 주방 창구로 찻잔을 들이고 내기 위해 감질 나게 내보이는 여자처럼 희고 매끈한 팔로써 사람들의 궁금증을 더욱 불을 당기는 것이었다. 손 마담과 미스 현이 전에 없이 똘똘 뭉치고 단결하여 주방장에 관한 한 성씨도 출신지도 심지어는 나이까지도 숫제 모른다고 딱 잡아떼는 판이었다. 더욱이나 행여 누가 주방 안을 불시에 기웃거리기라도 하는가 해서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교대로 감시하는 것부터가 어쩐지 수상쩍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주방장은 산호다방 단골들에게 점점 불가사의한 인물이 되어갔다. 목소리를 전연 들을 수 없는 점으로 미루어 벙어리일시 분명하다는 소박한 농담들이 손님들 간에 오갔다. 화상을 입어 남에게 보이기 꺼릴 정도로 흉측스런 얼굴일지 모른다는 억측도 나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주방장 일로 잠시 사표건을 잊을 만큼 세상이 약간 재미있어지기 시작한 김시철은 뜻밖의 소문을 들었다. 만년 대학생 최씨가 홀을 건너 김시철의 지정석까지 멀리 나들이를 와서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김 선생도 소문 들으셨습니까?」
「글쎄요, 어제 누가 그러는데 서울에서 일류 대학을 다니다 말았다고 그러더군요」
「그게 전분가요?」
「그렇습니다만……」
「아직도 김 선생은 그믐달이시군」
「네?」
「도망자래요」
「뭐요?」
「쉬잇! 목소리가 너무 커요. 경찰에 지명 수배된 인물인데, 여기서 지금 은신해 있는 중이래요」
「누가 그럽디까?」
「정확한 출처는 아직 아무도 몰라요. 전에 왜 사방관리소 서기를 지냈다는 김씨 있잖아요? 그 사람이 자기도 누구한테 들은 얘기라며 슬쩍 귀띔해 줍디다. 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건 소문 그것이지 출처가 아닙니다」
최씨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스스로 도망자나 된 기분이 드는지 여차하면 아무데로나 내뺄 듯한 자세로 엉거주춤 안절부절을 못했다. 비단 최씨뿐만이 아니라 다방 전체가 아연 흥분의 도가니였다.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 앉아 연신 주방 쪽을 흘끔거려 가며 수군거리기에 여념이 없어 영업이 전혀 안 될 지경이었다. 손님들의 그런 꼴을 손 마담은 잔뜩 부어터진 얼굴로 감사납게 쏘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미스 현은 아까부터 카운터 뒤에 들어박혀 침 먹은 지네처럼 옹송그린 채 나올 줄을 몰랐다. 산호다방 유사이래 손님들이 이렇게 활기에 넘쳐 보기는 아마도 처음 일인 듯싶었다.
나중판에는 전직 신문지국장 채씨까지 와서 합세하여 일행이 셋으로 불어났다. 하루하루를 넘기기가 그저 지겹고 끔찍스럽기만 하던 그들에게 주방장에 관한 소문 일습은 말하자면 영감 죽고 처음의 재미였다. 너무 살판이 난 나머지 그들은 자기네가 소문의 진부를 아직 확인도 해보기 전에 그대로 믿어버린 우를 범하고 있음조차 깨달을 여지가 없었다. 그들 세 사람은 마치 누에가 뽕잎을 먹듯 되도록 이야기의 중심은 아껴두고 가장자리부터 차근차근 갉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먼저 서두를 꺼낸 사람은 김시철 그였다.
「무슨 죄를 저질렀을까요?」
「틀림없이 누명을 썼을 거야」
채씨가 자신 있게 말했다.
「아내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무기징역 언도를 받아 복역하다가 진범을 잡으려고 기회를 봐서 탈옥했을 거야」
「에끼 여보슈, 그건 텔레비에 나오는 리처드 킴블 얘기 아니유?」
최씨가 핀잔을 주자 채씨는 허허허 하고 멋쩍게 한 차례 웃었다.
「내 짐작엔 말입니다, 우리 주방장은 살인범이 분명합니다」
고 늙은 대학생이 자신 있게 말했다.
「글쎄 그렇다니까!」
고 채씨가 토를 달았다.
「사회를 좀먹는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 부당한 방법으로 선량한 사람들의 재물을 착취하는 걸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추악한 전당포 노파를 손도끼로 쳐죽였다 이겁니다」
「그것도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 같은데」
「들으셨다니 별수 없군요, 허허」
「두 분 생각이 너무 통속적인 데 실망했습니다」
「그럼 김 선생의 그 비통속적인 생각은 뭡니까?」
「난 좀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고 싶습니다. 흑백이 분명하게 구체성을 띤 것보다는 사건을 약간 상징적인 방향으로 추리해 봤습니다. 요컨대 우리 주방장은 사실은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모종의 혐의를 받고 이곳 시골 다방에 은신중인 인물입니다」
「지금 무슨 얘길 하시는 거죠? 그는 무고하다, 다시 말해서 누명을 썼다 이 말입니까?」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죠. 그는 분명히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 잘못이란 게 남보다 특출나게 우월하게 타고난 그것입니다. 남보다 우월한 그것은 초능력일 수도 있고 양심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별 해괴한 소릴 다 듣는군요. 도대체 양심이나 능력이 어째서 죄가 된다는 겁니까?」
「되다마다요, 얼마든지 죄가 되죠. 남달리 탁월한 능력, 혹은 남달리 밝은 양심에 가려서 주위 사람들은 여간해서는 빛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아무리 스파이크를 신고 쫓아가도 그를 따라잡을 수 없는 평범인들이나 밑이 구린 속인들 편에서 생각할 때 그가 지니고 있는 것은 조만간에 결정적으로 자기네를 해할 흉기로 보일 게 당연합니다. 흉기를 소지한 그런 사람을 최형 같으면 안심하고 한 배에 태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난 구체적인 걸 좋아하는 편입니다. 강간이면 파렴치범, 공산당이면 사상범, 그러니까 너는 사형, 너는 무기징역―이렇게 때려야 얼른 이해가 가지, 남보다 우월하니까 죄가 된다는 그런 이론은 솔직히 말해서 좀 곤란하군요. 차라리 난 자부심을 가지고 통속적인 쪽을 택하겠습니다」
늙은 대학생 최씨와 시골 국민학교 교사 김시철은 서로 자기 짐작이 틀림없을 거라고 채반이 용수 되게 우기면서 저녁 시간을 보냈다. 때마침 손 마담이 여느 날보다 시간을 훨씬 앞당겨 일찌감치 문 닫을 것을 통고해 왔으므로 두 사람은 아직도 턱없이 미진한 상태인 채 그만 막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주 소소한 것이긴 하지만, 그들 두 사람은 자리를 일어서기 직전에야 비로소 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주방장의 죄질과 죄량에 대해서인데, 정확히 뭔지는 여전히 모르지만 아무튼 그가 불문율로 보나 성문율로 보나 사회에서 도저히 용납 못 할 엄청난 중죄인이기만 하다면 그들은 그가 휘두른 것이 손도끼거나 양심이거나 간에 더 이상 따지지 않을 심산들이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가 중죄인이냐 아니냐였다. 그가 반드시 중죄인이라야만 그 자신의 은신 생활이 한결 의의 있어질 것이고 또 그래야만 그를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들도 더욱 생생한 현장감을 만끽할 수 있어지기 때문이었다.
하숙방에 들어와서도 김시철은 전연 밥 생각이 나질 않았다 산호다방에서의 흥분이 고스란히 하숙집에까지 묻어와 가지고 가슴을 벌렁벌렁 놀게 만들었다. 저녁을 빽빽히 굶은 채 그는 시장한 줄도 모르고 다방에서 흐무진 결말을 못 본 자신의 공상에 기어코 끝장을 내고 말 작정으로 밤 늦게까지 혼자 안간힘을 썼다. 철든 이후로 그렇게 흥분하고 긴장해 보기는 생판 처음 일이었다. 여태까지 한 달 이상을 바로 지척지간에 두고 생활해 나왔지만 사실 주방장의 정체에 대해서 그가 아는 지식이란 백지나 마찬가지였다. 소문이 분분했지만 어느 것이나 확인된 건 한 건도 없었다. 아직껏 이름도 성도 모르고 개뼉다귄지 쇠뼉다귄지도 몰랐다. 먼발치로나마 얼굴을 보거나 음성 한 번 들어본 적조차 없다.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이라곤 반달 모양의 그 창구 안에서 사위스럽다는 듯 잠깐씩 나타났다가 꺼지는 여자처럼 가늘고 희고 도도한 팔이 고작이다. 소문과는 전혀 달리 그 친구는 실은 대학생 신분도 뭣도 아닐는지 모른다. 생각해 봐라, 그토록 철저히 차일을 치고 들어앉아서 도둑괭이마냥 오줌도 똥도 숨어 싸는 판인데 어디서 뭘 해먹던 잡놈인지 누가 무슨 재주로 안단 말인가.
그러나 김시철은 소문을 곧이곧 믿고 싶었다. 그 친구가 뒷전에 머리카락도 안 보이게 꼭꼭 숨어서 손 마담을 앞장세워 제 수족 부리듯 맘대로 조종하고, 그리고 손 마담이나 미스 현이 마치 신주단지 위하듯 그 친구를 시종일관 싸고도는 데는 분명히 뭔가 그럴 만한 속내가 있을 성싶었다. 그래서 김시철은 다소 무리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가 대학생이며 경찰이 시방 지명수배중인 피의자라는 소문에 전적으로 동감하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밤이 깊어갈수록 주방장의 존재는 김시철의 머릿속에서 뻥과자처럼 사뭇 크기를 달리해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정 무렵에 이르러서는 엉뚱하게도 애들 만화에 나오는 우주소년 아톰 같은 존재로 크게 탈바꿈해 버렸다. 아무리 봐도 그는 초능력의 무서운 인간이었다. 그가 산호다방 같은 데서 잠시 썩는 것은 단지 그 스트론튬인가 뭔가 하는 연료가 떨어져서 아무데나 불시착한 결과이며, 주방장의 형태를 빌려 은인 자중하면서 힘을 기르다가 오래지 않아 다시 하늘을 훨훨 나는 날이 올 것이었다. 그는 다시 악의 무리와 대결하여 번번이 승리할 것이며, 그렇게 되는 날이면 그것은 곧바로 김시철 그 자신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김시철 그 자신이 하고 싶은, 그러나 자신의 힘 가지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그가 형식적으로 대리해 주는 과정에 불과했다. 그가 있음으로 해서 김시철 저는 구원이 가능했다. 만일 그가 실패한다면 덩달아 저도 실패할 것이었다. 입때껏 길가 구멍가게에서 눈깔사탕 하나 못 훔치고 시험 때 커닝 한번 못해 본 약심장으로, 국민학교 선생이란 직업에 환멸을 느껴 진작부터 사표를 휴대하고 다니면서도 선뜻 내던질 배짱이 없는 졸장부로 말뚝이 박혀 산호다방 신세를 영영 못 면하게 될 것이었다.
너무도 흥분이 지나친 나머지 김시철은 그날 밤을 온전히 설치고 말았다.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분위기가 이튿날의 산호다방을 지배하고 있었다. 직장이 없는 채씨와 별로 하는 일도 없이 휴학중인 최씨가 일찌감치 나와 앉았고 그 밖에 다른 단골들도 더러 눈에 띄었으나 모두들 한결같이 우중충한 표정들로 도통 말이 없었다. 어딜 갔는지 손 마담의 얼굴이 안 보였다. 마담 없는 다방 안을 미스 현 혼자서 맘껏 휘젓고 다니는 중이었다. 미스 현은 산호다방 커피 맛이 개숫물 맛이던 당시의 버릇을 되찾아 어느새 도로 싸가지 없이 굴고 있었다. 주방장이 갈리면서 눈에 보이게 사람이 달라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미스 현이었다. 손님들에게 그럴 수 없이 싹싹해지고 고분고분해졌다. 단골들한테서 강제로 차를 뺏어 마시던 버릇이나 손가락질 받던 여러 악취미는 물론이며 말씨가 변하고 걸음걸이까지 달라져서 자주 얼굴을 붉힌다거나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등으로 제법 수줍어 할 줄을 다 알았다. 이를테면 비로소 처녀다워지기 시작한 셈이었다. 그녀는 세상을 완전히 다른 눈으로 보는 눈치였고 뭔지 모르게 하루하루가 행복에 겨운 기색이었다. 가슴 저 밑바닥에 새록새록 기쁨을 솟구쳐 올리는 화수분 같은 샘이 있어 그 차고 넘치는 기쁨을 밖으로 퍼낼 구실을 찾지 못해 몸이 달아 있는 듯했다.
그러던 것이 어느 틈에 도로 민주주의가 된 것이다. 하루 가운데 손님이 가장 많이 들 그런 시각에 미스 현은 벌써 취해 가지고 해롱거리며 좌석을 누볐다. 낯익은 단골이면 아무 자리에나 퍽석 주저앉아서 위스키 티 한 잔 사달라고 딱정이를 떼고 조르는 것이었다.
「남자가 너무 쩨쩨하게 굴면 못써요. 딱 한 잔만 더 마시구 끊을래요. 어때요, 전표 써넣을까요?」
마침내 김시철한테도 차례가 왔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미스 현은 뽀르르 주방으로 달려가 전표고 나발이고 없이 제 손으로 직접 위스키 티를 만들어 홀짝거리며 마셨다. 주방장은 안에 있는지 없는지 드문드문 보이던 그 팔마저 전혀 볼 수가 없었다.
주방장이 내일 오전에 다른 곳으로 떠나기로 돼 있다는 얘기를 귀띔해 준 사람은 늙은 대학생이었다. 최씨가 김시철에게 말했다.
「우리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합시다」
김시철로서는 꼭 배반이라도 당한 듯한 기분이었다. 말로는 표현 못할 허망감이 그를 잠시 무중력의 상태로 몰아넣었다. 최초의 충격을 가까스로 견디고 나서 그는 잠자코 일어나 최씨 뒤를 따랐다.
두 사람 다 술집에서 통 말이 없는 가운데 무수히 대작만 했다. 소주 기운이 엔간히 올라오자 비로소 최씨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그 친구 비겁하게 자꾸만 도망쳐서는 안 됩니다.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지가 기껏 도망쳐 봤자 트자에 리을 놓는 거지 별수 있습니까. 죽으나 사나 여기서 끝장을 봐야 됩니다. 피해 다니면서 구차스럽게 연명하기보다는 차라리 붙잡혀서 할 말 하고 당할 것 당하는 편이 훨씬 더 떳떳하고 영웅적이죠. 남들이 알아주고 생각해 주는 그만큼 그 친구에겐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말아야 할 의무 같은 게 있잖겠습니까」
아톰 소년의 초능력에 빌붙겠다며 밤잠까지 설치던 자신이 생각할수록 같잖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두엄자리에 붙박고 앉아서 남의 옷소매에 매달려 감히 구름 쪽을 넘보는 꿈을 꾸다니, 될 법이나 한 일인가. 간밤의 공상이 그 얼마나 얼뜨고 허황된 것이던가를 깨달으면서 김시철은 저도 모르게 쿡하니 실소를 했다. 그는 최씨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않고 그저 술만 마셨다.
「그 친구의 장래를 생각해서 아니할 말로 밀고라도 했으면 합니다」
헤어지는 마당에 최씨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최씨를 보내고 나서 그는 터벅터벅 하숙집을 향해 혼자 걸었다. 얼마쯤 걷다 보니 잔뜩 취기 오른 눈에 길가의 공중전화 부스가 얼핏 들어왔다. 그 순간 아무런 결단이나 주저의 과정도 거침이 없이 불쑥 전화통 앞에 가 섰다. 그러고는 예정된 절차라도 수행하는 양 아주 천연스런 동작으로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1하고 다시 한 번 1하고 그러고는 2.
두어 차례 발신음이 떨어진 다음 그 문명의 이기가 이쪽과 저쪽 사이에 가로놓인 엄청난 장벽을 확 뚫어주는 순간이 왔다.
「네, 일일입니다」
뺨이라도 갈기듯 귓전에 울려오는 투박한 남자 목소리를 듣고 그는 갑자기 망연해져서 한동안 손에 들린 수화기를 멀뚱히 내려다보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는 침착을 가장하여 스스로를 기만하는 여유작작한 자세로, 다급한 소리를 토하는 살아 있는 하나의 생물체 같은 수화기를 원래의 자리에 도로 걸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전화 부스에서 나왔는데, 나와서 생각해 보니 자기가 전화통에 대고 무슨 얘길 한 것도 안 한 것도 같은 참으로 얼쩍지근한 기분이었다.
그날 밤이었다. 더 좀 정확을 기한다면, 그날 밤과 그 이튿날 새벽 사이의 일이었다.
그날 자정이 조금 못 되어 우리 시의 시민들은 해괴하기 짝이 없는 한 사건의 현장에 끼는 행운을 저절로 얻을 수 있었다. <심야의 노래 동산>이란 제목으로 지방 방송국에서 내보내는 젊은이들 상대의 전화 리퀘스트 프로였다. 체질적으로 잠이 없거나 특별히 잠을 못 이룰 만한 무슨 사연을 가진 극소수의 시민들이긴 하지만, 그들은 라디오를 켜놓고 있다가 무심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듣게 되었다.
「윤심덕의 부른 사의 찬미를 듣구 싶어요」
「사의 찬미라…… 본 아나운서는 제목만 듣고도 가슴이 이상해지는군요. 굉장히 옛날 노래를 신청하셨는데, 이 곡 특별히 누구한테 선물할 사람 있습니까?」
「아녜요, 그냥 저 혼자 들으면서 즐길래요」
「네에, 그러세요. 어디 사는 누구신지요?」
「그냥 세미라구만 밝히겠어요」
「그럼 사의 찬미 준비하겠습니다. 그런데 세미 씨는 이런 노래를 신청하게 된 무슨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나요?」
이 대목까지만 해도 얼마든지 예사로 들을 수 있는 대화였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부터였다. 약간은 흐트러진 어조의, 어딘지 모르게 단정치 못한 냄새를 풍기는 계집애 음성이 느닷없이 귀가 번쩍 뜨일 만한 말들을 팡팡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저 지금 동맥을 끊었어요. 피가 빨갛게 수돗물에 풀려 나가는게 기분이 그럴 수 없이 좋아요. 실연을 당했거든요. 어떤 고학생을 사랑했어요. 너무너무 사랑했어요. 학비두 대주구 생활비도 보태줘 가면서 열심히 뒷바라질 했어요. 그랬는데 학교를 나오구 출세를 하자마자 저를 배신해 버린 거예요. 음악 잘 듣겠어요. 마지막 가는 길에 장송곡으로 삼으면서 조용히 세미는 눈을 감을래요」
「여보세요, 세미 씨! 세미 씨! 잠깐만 내 말을 들어요!」
일이 이렇게 되어 인간애에 넘치는 그 아나운서는 우선 세미양과의 대화를 계속해 나가는 데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하는 한편 동료를 시켜 경찰에 연락을 했다. 신고에 접한 경찰이 전신 전화국의 협조를 얻어 통화자의 소재를 파악하기까지엔 무려 두 시간 이상이 소요되었고, 그 동안 내내 아나운서는 진땀을 쏟아가며 방송사상 전무후무한 대화 내용을 그것도 생방송으로 내보내는 곤욕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구경꾼들이 산호다방이 들어 있는 낡은 목조 건물 주위를 꽉 메우고 있었다. 아래층 여인숙 바로 앞 도로엔 사방으로 새끼줄이 쳐져 있고, 네모 반듯한 그 출입 금지의 영역 안엔 피 묻은 가마니때기 하나가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피는 가마니뿐만이 아니라 주변 길바닥에 작은 도량을 이룬 흔적을 남긴 채 햇볕에 검붉게 말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유리조각이었다. 산산이 부서져 나간 유리창의 파편들이 도로에 가득 널린 채 때마침 쏟아져 내리는 햇볕을 받아 앙증스럽게 반짝이고들 있었다. 시체는 이미 치워버린 뒤였다. 그러나 길 위에 굵은 백묵으로 그려놓은 동그라미와 화살표들이 아직도 선명한 채로 있어 시신이 놓였던 위치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시골 국민학교 교사 김시철은 구경꾼들 틈서리를 비집고 매일같이 드나들던 단골 다방으로 올라갔다. 경찰에 증인 자격으로 불려갔다 이제 막 돌아온 참이라는 여인숙 안주인이 혼자서 횅댕그렁한 다방을 지키며 창문의 커튼을 뜯어 내리고 있다가 때마침 들어서는 그를 허탈한 표정으로 맞았다. 오래 전부터 서로 안면이 있는 처지였다.
「너무나 끔찍해서 처음엔 기함할 뻔했다우. 와장창 소리가 나길래 뛰어나가 봤더니 아 글쎄,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지 뭐유. 주방 창문을 떠 안은 채 곧바루 뛰어내렸으니 더 말해 뭘 해요. 거꾸로 처박힌 걸 보면 도망칠 생각이 아니라 자살하려고 그랬던 게 틀림없다니깐요, 쯧쯧」
한바탕 혀를 차고 나서 여인숙 여자는 다른 커튼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왜 뜯는 겁니까?」
「경찰에서 함께 있다 나만 먼저 나오게 되니까 손 마담이 특별히 부탁을 하데요. 나가는 대로 카탱을 치워달라고요. 카탱뿐만이 아녜요. 전등도 사람을 사서 말짱 다 치우래요. 뭐라드라, 도시에는 역시 그늘이 있어야 된다나요……」
「미스 현은 그 뒤 어떻게 됐습니까?」
「마담하고 경찰에 같이 있는데, 현양 그년이야 뭐 지금도 느물느물하죠. 신고를 받고 경찰들이 디리닥쳐서 보니까 아 글쎄, 동맥을 끊긴커녕 술이나 따뤄 마셔가면서 그때까지 방송국에다 전화질하느라고 해롱해롱하고 있더래요. 현양 그년 지랄 바람에 아까운 생목숨 하나만 개평으로 잃었죠. 개썅년 같으니!」
「반드시 미스 현 탓만은 아닐 겁니다. 혹 누가 압니까, 따로 밀고한 사람이 있을지……」
여인숙 여자의 숙였던 얼굴이 곧추 들려졌다.
「설마……」
그 여자는 또 하나의 새로운 충격으로 하얗게 질리면서 저울질하듯 하는 눈으로 김시철의 아래위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는 곧 발길을 돌려 다방 출입문을 밀며 밖으로 나왔다. 삐거덕거리는 낡을 대로 낡은 층계를 밟고 내려가는데 문득 상의 안주머니에 넣어둔 사표 생각이 났다. 그는 마침 생각난 김에 그걸 꺼내어 갈가리 찢어서 층계 아래로 흩뿌려 버렸다.
사건 이후 시골 국민학교 교사 김시철은 며칠 동안 신문을 눈여겨봤으나 주방장의 투신 자살은 끝내 사회면 일단 기사에도 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