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死)의 예찬 - 박종화(朴鍾和)
보라!
때 아니라, 지금은 그때 아니라.
그러나 보라 !
살과 혼,
화려한 오색의 빛으로 얽어서 짜 놓은
훈향(薰香) 내 높은
환상(幻想)의 꿈터를 넘어서
검은 옷을 해골 위에 걸고
말없이 주토(朱土)빛 흙을 밟는 무리를 보라.
이 곳에 생명이 있나니
이 곳에 참이 있나니
장엄한 칠흑(漆黑)의 하늘 경건한 주토의 거리
해골! 무언(無言) !
번쩍이는 진리는 이 곳에 있지 아니하랴.
아, 그렇다 영겁 위에
젊은 사람의 무리야!
모든 새로운 살림을
이 세상 위에 세우려는 사람의 무리야!
부르짖어라, 그대들의
얇으나 강한 성대(聲帶)가
찢어져 폐이(廢弛)될 때까지 부르짖어라.
격념(激念)에 뛰는 빨간 염통이 터져
아름다운 피를 뿜고 넘어질 때까지
힘껏 성내어 보아라.
그러나 얻을 수 없나니
그것은 흐트러진 만화경(萬華鏡) 조각,
아지 못할 한때의 꿈자리이다.
마른 나뭇가지에
고웁게 물들인 종이로 꽃을 만들어
가지마다 걸고
봄이라 노래하고 춤추고 웃으나
바람 부는 그 밤이 다시 오면은
눈물 나는 그 날이 다시 오면은
허무한 그 밤의 시름 또 어찌하랴?
얻을 수 없나니, 참을 얻을 수 없나니,
분(粉) 먹인 얇다란 종이 하나로
온갖 추예(醜穢)를 가리운 이 시절에
진리의 빛을 볼 수 없나니.
아아, 돌아가자.
살과 혼
훈향 내 높은 환상의 꿈터를 넘어서
거룩한 해골의 무리
말없이 걷는
칠흑의 하늘, 주토(朱土)의 거리로 돌아가자.』
- [백조] 3호(1923. 9)-
【해설】
박종화의 초기시 세계를 가늠하게 하는 이 작품은 1920년대 낭만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퇴폐적이고 세기말적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탈리아의 작가 '다눈치오'의 탐미적 소설 <죽음의 승리>에서 영향을 받아 창작되었다고 하며, 작품 자체의 우위성(優位性)보다는 ‘백조류’의 '병적 낭만주의'의 전형으로 시사적(詩史的) 위치가 중요하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역사소설가로 더 많이 알려진 월탄 박종화의 시세계는 크게 두 경향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그의 초기(19세∼23세)의 작품으로 애매 모호한 말을 즐겨 사용하여 퇴폐적인 시풍을 보인 것이요, 또 하나는 민족사(民族史) 또는 문화유산에 대한 긍정적인 관심을 보인 시풍이 그것이다. 전자(前者)의 시는 시집 <흑방비곡>에, 후자(後者)의 것은 <청자부>(1946)에 각각 수록되었다.
【개관】
▶갈래 : 상징시, 자유시, 서정시
▶경향 : 상징적, 감상적(感傷的), 낭만주의, 퇴폐적, 역설적 표현. 무절제한 감정 표출
▶특징
(1) 영원 생명과 진리가 있는 죽음의 세계에의 동경은 오히려 강한 생(생)에의 긍정을 역설적 표현으로 나타난다.
(2) 병든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음 - 이탈리아의 다눈치오의 소설 <죽음의 승리>(1894)
(3) ‘검은 옷, 해골, 주톳빛 흙, 칠흑의 하늘, 무언’은 죽음을 상징한다.
(4) 이 시는 일종의 ‘현실 도피’라 할 수 있다. 즉 현실에 대한 정면 대결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5) 시어가 생경(生硬)한 상징적 수법을 구사함
(6) 무절제한 감정의 발로가 두드러져 조잡한 인상을 줌.
▶제재 : 죽음
▶주제 : 현실 부정과 예찬
▶발표 : [백조] 3호(1923. 9)
【감상】
이 시는 작품 자체의 우위성(優位性)보다는 [백조] 시대의 ‘멍든 낭만주의’의 한 정형으로서 문학사 위치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이탈리아의 탐미주의 작가이며 시인인 다눈치오(1863∼1938)의 소설 <죽음의 승리>(1894)에서 영향을 받은 염세적인 시로 알려져 있다. 당시 1920년대의 실의와 비탄에 잠긴 젊은 기질이 낭만주의 말기적 증세를 나타내어 현실을 떠나 죽음의 세계에서 진리와 영원을 희구하여 죽음을 예찬하게 된다. 즉, 영원한 생명과 진리가 있는 죽음의 나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을 노래하였으며, 생의 차원 높은 긍정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이 시는 이탈리아 유미주의 작가 다눈치오의 장편 소설 <죽음의 승리>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1연은 심상과 어조 면에서 격렬하고 화려하며 환상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제2연에서는 차분하기보다는 급격하고 자극적인 효과를 겨냥하고 있다. '해골! 무언!' 시적 화자는 죽음과 침묵을 찬양하고 있다. 제3연은 심상의 격렬한 분출이다. '격분에 뛰는 빨간 염통' 등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시어들을 구사함으로써 격정적인 죽음의 심상을 의도하고 있다.
이승의 삶에서 소망을 부정하는 이유는 제4연에 등장한다. 그것은 '허무'죠. 삶은 허무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어떤 노력의 결과도 얻을 수 없고, 따라서 삶도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일제의 쇠사슬에 묶인 망국의 현실은 곧 죽음(死)이었다. 그러나 그 죽음을 밟고 일어서는 곳에 '생명'이 있고 '참'이 있으니, 젊은이들은 궐기하여 조국의 광복을 부르짖자고 하였다. 이러한 민족혼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참'을 얻을 수 없을 때 차라리 죽음으로 돌아가자고 영혼의 세계를 찬미하고 있다.
이 시는 [백조] 시대의 멍든 낭만주의의 한 전형으로서 문학사상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작품이다. 1920년대의 실의와 비탄에 잠긴 젊은 기질이 낭만주의의 말기적 증세를 나타내, 암담한 현실보다는 차라리 영원한 생명과 진리가 있는 죽음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을 노래하였는데, 이는 현실과의 정면 대결을 피한 비겁한 현실 도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생에 대한 차원 높은 긍정의 역설적 표현이라고 하는 편이 좀 더 타당할 것이다. 곧 그가 희구하는 죽음의 세계는 '장엄한 칠흑의 하늘, 경건한 주토의 거리'로 '영겁' 위에 '생명'·'참'·'진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곳에서 참다운 생명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얻고자 하나, 그 곳은 구도 정신을 통해 생사를 초월한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차원 높은 경지이다.
1920년대의 실의와 비탄에 잠긴 젊은 기질이 낭만주의 말기적 증세를 나타내, 현실을 떠나 죽음의 세계에서 진리와 영원을 희구하여 죽음을 예찬하게 된다. 즉 영원한 생명과 진리가 있는 죽음의 나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을 노래하였으며, 생의 차원 높은 긍정을 역설적으로 표현하였다.
현실을 떠난 죽음의 세계에서 진리와 영원을 추구하고자 하는 이 작품은 현실 도피성 문학의 대명사로 지칭되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죽음에 대한 표면적 현상만을 예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본질적 성격을 노래함으로써 생의 부정이 아닌 생의 차원 높은 긍정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곧 그가 희구하는 죽음의 세계는 '장엄한 칠흑의 하늘, 경건한 주토의 거리'로 '영겁' 위에 '생명'ㆍ'참'ㆍ'진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곳에서 참다운 생명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얻고자 하나, 그 곳은 구도 정신을 통해 생사를 초월한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차원 높은 경지이다.
육신이 사는 현실을 부정하고 죽음의 세계를 예찬했다는 것은 일견(一見) 생의 부정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참ㆍ생명ㆍ진리’의 세계에 대한 추구로서의 ‘죽음의 세계’이기 때문에 오히려 적극적인 생의 긍정인 것이며, 그 영역 확대임을 유의해야 한다.
그것은 일종의 깨달은 세계이기도 하고, 생사를 초월한 자의 구도정신(求道精神)으로서 시적(詩的)인 경지이다. 인간의 생명과 진리가 육신의 좁은 세계를 벗어나서 영혼의 세계로 확대되는 것이다.
이 시의 언어는 생경(生硬)하고 소화되지 않은 상징적 수법이며, 시정(詩情)은 조잡한 인상을 준다. 당시의 병든 낭만주의의 격렬한 풍조에서 영향 받은 것으로, 이 시는 더욱 황량하고 거친 느낌을 준다.
[출처] 박종화 : 시 <사의 예찬>|작성자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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