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을 보며 -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누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갈매빛'은 짙은 초록빛.
'농울쳐'는 걷잡을 수 없이 너울치는 것을 의미.
'오후 때'는 고난의 때.
'쑥구렁'은 쑥이 자라는 깊은 구덩이.
'청태'는 글자 그대로 푸른 이끼, 앞행의 '옥돌'과 같이 삶의 품위와 지조를 나타낸다.
(봄날 무등산)
서정주는 1951년 6.25 전쟁 중 광주光州에 기거하며 조선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아 너나 할것없이 모두 궁핍窮乏한 때에 불가항력으로 당하는 물질적 궁핍 속에서 크고 의젓하고 언제나 변함없는 무등산無等山을 보며 이 시를 썼다고 한다.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고 당당히 서있는 무등산을 바라보며 미당은 남루한 자신의 처지를 차라리 떳떳하다고 생각하고 가난이란 한낱 우리 몸에 걸친 헌누더기와 같은 것이어서 우리의 타고난 순수한 마음씨(여름 산 같은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를 빛나게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속에서 찬란한 빛(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을 발할 수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
푸른산이 그 기슭에 향초香草를 기르며 살듯 아무리 궁핍하더라도 우리는 슬하膝下의 자식들을 소중하고 품위있게 기르며 (우리 새끼들을 기를)살 수 밖에 없다는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념에도 불구하고 삶이 순조롭지 않아 힘들고 괴로울 때(목숨이 가다 가다 농을 쳐 휘어드는 오후)가 된다고 해도 서로에 대한 사랑과 배려(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로 극복해 나갈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 시의 이런 내용 때문에 그런지 국가공무원 시험에 자주 출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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