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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해설

36. 사모

by 자한형 2021.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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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 조지훈

 

사랑을 다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할 말이 남아 있음을 알았을 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불러야 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며

 

당신은 멀리로 잃어지고 있었다.

 

하마 곱스런 웃음이 사라지기 전 두고두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잊어 달라지만

 

남자에게서 여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을 그려

 

혼자라도 외롭지 않을 밤에 울어보리라.

 

울어서 멍든 눈흘김으로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또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이 시의 해설

 

시인이 시를 쓸 때 상상력에 의지하기도 하겠지만 자신의 경험을 아름답게 정리하여 표현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이 사모思慕라는 시의 내용이 사실事實인지 허구虛構인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 느낌의 절절함으로 보아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시인이 사랑하였던 사람이 남의 사람이 되어 멀리 잃어지고 있음을 알면서 남자에게 여자는 자기 사람이 되면 기쁨이고 남의 사람이 되면 슬픔이라고 간명하게 사랑에 대한 정리를 자신의 마음속에서 하고 있다.

 

 

 

또 떠나버린 사람을 생각하며 다섯 손가락을 잘라 나오는 피로서 오선지五線紙를 만들어 울며 노래하면서 한잔은 떠나간 너를 위해, 한잔은 영원한 사랑을 위해, 한잔은 초라한 나를 위해, 마지막 한잔은 이렇게 만든 하느님을 위해 네 잔의 술을 마신다고 토로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과 그 운명조차 받아들인다는 시인의 처절한 몸부림과 독백獨白이 읽는 독자들의 가슴을 파고들어 사랑이 떠난 이별의 괴로움을 공감하게 만들고 있다.

 

 

 

조지훈 시인은 자신이 쓴 지조론에서 지조志操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精誠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라고 표현했다.

 

 

 

시인은 이처럼 사랑이라는 것도 지조와 마찬가지로 반드시 지키고 간직해야 할 소중한 인간의 감정이고 잃고 나면 눈이 멍들게까지 울면서 미워하려 노력을 해도 잊혀지지 않는 고귀高貴한 것임을 간절하게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지조를 지키려는 시인의 격조와 기질이 사랑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그대로 느껴지는데 정작 그 구체적인 사연이 무엇인지는 도저히 알 수 없다.

 

 

 

조지훈 시인의 시로서는 흔치 않은 소재와 경향의 시인데 유작遺作으로까지 남겨 두었다가 사후에 발표되는 사정들을 짐작해 보면 그 이별을 겪는 괴로운 사랑의 실체적 진실이 있었는지 더욱 궁금해진다.

 

 

 

조지훈 시인은 암울한 시대에 지조론으로 자존감을 세우고 격조格調 있는 아름다운 시로서 시인의 길을 갔지만 그의 시 에게에 나오는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둔 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동안을 뉘우치게 되네라는 구절처럼 결국은 자신의 오랜 친구인 병에게 자신의 생명을 넘겨주고 48세의 많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버리고 만다.

 

 

 

그가 떠나서 사모란 시에 나오는 사랑과 이별의 구체적 대상이 실재實在하는 존재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가 없으니 그냥 독자인 우리들이 사모라는 시를 저마다 자신의 인생에 대비對比하고 삽입揷入시켜 적절하게 감상하면서 판단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사와 연결된 감상으로 그 느껴지는 바에 따라 시인의 현실을 상상해보기도 하고 자기와 비교해서 유추類推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감상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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