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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2

13. 이 조용한 시간에

by 자한형 2022.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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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용한 시간에 김우종

별들이 조용히 흐르는 시간이 되면 당신은 누구를 생각합니까?

멀리서 새벽의 종소리가 울려오는 시간이 되면 당신의 마음속에는 누구의 얼굴이 그려집니까?

저 멀리멀리 퍼져나가는 종소리를 따라가보시지 않으렵니까?

저 아득한 별빛을 따라 당신의 상상의 날개를 펴보시지 않으렵니까?

그곳에는 당신이 잊었던 옛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곳에는 당신이 잊어버린 어머니, 당신이 잊어버린 착한 동생, 그리고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여인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저렇게 조용히 별빛이 흐르는 시간, 저렇게 새벽의 종소리가 울려 퍼져나가는 시간이 되면, 그들은 모두 당신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정으로 당신의 행복을 위하여 간곡한 기도를 올리며 그런데 당신은 지금 이 조용한 시간에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가요?

어제 만난 그 친구?

내일 파티에서 만날 그 여인을?

그러나 조용히 한 번쯤은 그들의 기억을 더듬어보세요. 당신이

먼 옛날에 잊어버린 그들, 지금도 여전히 당신을 위하여 기도드리고 있을 그들을 말이에요. 종소리가 멀리멀리 퍼져나가는 그 시간이 되면 당신은 누구를 생각하며 일기를 쓰시나요?

찬 서리가 가만가만 당신 집의 뜰 아래 내려앉은 그 시간이 되면, 당신은 누구를 위하여 그 일기를 바치나요? 종소리를 따라 멀리멀리 날아가 보세요.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랜 친구들, 이미 작고해버린 부모들, 그리고 당신을 못 잊어하던 그 사람, 그들을 찾아가서

창문 틈으로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그들도 아마 이 시간에는 일기를 쓰고 있을지도 모를 입니다. 당신의 행복을 빌며, 진정으로 당신의 영광된 내일을 빌어주며.

그런데 당신은 지금 누구를 위하여 일기를 쓰시나요?

당신의 일기책에는 한 번쯤이라도 그들의 이름이 기록된 일이 있는가요?

이렇게 조용한 시간이 되면,

한 번쯤은 그 종소리를 따라 멀리멀리 가보세요. 그리고 이미 잊어버린 당신의 그들을 위하여 당신도 한 장쯤 추억의 일기를 쓰세요. 그들의 행복을 빌어주며. 비록 그들이 땅속에 묻힌 사람일지라도.

흰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소복소복 장독대 위에 은가루들이 쌓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조용한 시간이 되면, 당신은 누구를 위하여 편지를 쓰시나요?

저 아득한 허공 위에서 내려오는 눈가루들. 그들에게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물어보실까요?

당신이 잊었던 부모들, 당신이 잊엇던 친구들, 그리고 지난해 하얀 영구차를 타고 망우리 고개로 넘어간 소녀, 그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가를. 하얀 눈이 소리 없이 내리는 이 시간이 되면 그들도 편지를 쓰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발 이 못났던 애비보다는 잘살기를 빌며. 제발 그대의 높은 뜻이 이루어지기를 빌며. 그리하여 그들도 촛불을 켜놓고 이시간에는 당신을 위한 편지를 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조용한 시간에 당신은 누구를 위하여 편지를 쓰시나요? 오늘 만난 그 아가씨요?

다음에 만날 동업자들?

소리 없이 내리는 눈송이들의 조용한 속삭임을 들어보세요. 거기서 당신이 잊어버린 그 옛 사람들, 그들의 소식을 들으세요. 그리고 한 번쯤은 그들을 위해서도 편지를 쓰세요. 잊어버린 그들을 위하여, 그들이 당신을 위하듯 당신도 한 번쯤은 그들을 생각하며 편지를 쓰세요.

나뭇잎은 다 떨어지고 앙상한 뼈대만이 오들오들 떠는 계절이군요. 이렇게 잎이 다 떨어지고 나면 그 대지의 생명들은 오랜 동면 속에 잠겨버립니다. 그리고 오는 봄의 그 찬란한 영광을 다시 기다리며 긴긴 추위를 견디어 나갑니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는 나무와는 다릅니다. 우리가 입은 옷을 다 잃어버리고, 돌봐 줄 친구와 자식들과 또는 사랑하는 애인마저 잃어버렸을 때, 그들에게도 역시 봄은 다시 찾아온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요?

잎이 떨어진 나무에는 대자연이 맺어주는 계절의 결속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추운 겨울을 지나면서도 인간은 나무들보다 훨씬 더 고독을 느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조용히 모든 것이 잠들어버리는 계절, 이 고독한 죽음의 계절에 받아보는 한 장의 편지, 이미 오래 전에 자기를 잊고 떠나버린 줄 알았던 자기 아들, 자기 친구,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이 보내주는 한 장의 편지. 그것은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 것이겠습니까? 나뭇잎이 다 떨어진 이 죽음의 계절, 이 고독한 계절에 당신은 그림 엽서 한 장을 띄우시지 않으시려나요? 비록 서투르나마 당신이 손수 그린 그림으로, 그리고 옛날의 그 낯익은 필체로. 이미 오래 전에 잊었버렸던 그를 위하여 당신은 그 그림 엽서 한 장을 띄우시지 않으려나요?

그들이 당신을 생각하듯이

당신도 그들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 모두의 내일의 기쁨을 약속해주기 위하여

이 조용한 시간에

편지 한 장을 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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