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손소희
벚꽃 하면 일본의 국화란 생각부터 먼저 든다.
장미나 목단이나 튤립이 다 각각 저명한 나라의 국화들이라 하지만
그런 꽃에서는 우리가 이내 그 나라들을 연상하지는 않는다.
장미는 장미로서만 아름다우며,
목단은 목단으로서만 그윽하며,
연꽃은 연꽃으로서만 슬프디 슬픈 것이다.
거기엔 영국이나 중국이나 인도가 와서 걸리지는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벚꽃에만은 어찌하여 일본의 국화란 것이
추근추근히도 와서 걸리는가?
여기엔 일식의 계절 '왜정 삼십육 년'이란
우리의 피눈물 맺힌 과거(過去)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국민성이니 국책 의식이니 하는 것을
우리들의 머릿속에 주입시키기 위하여
서른여섯 해 동안 애꿎은 벚꽃에다
소위 '야마도 다마시히'를 불어넣으려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벚꽃은 그 본래의 아름다운 생명을 잃고,
한갓 '야마도 다마시히'의 상징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꽃은 나라의 흥망보다 길고 강하다.
일본은 망(亡)해도 벚꽃은 해마다 핀다.
일제가 물러간 오늘의 벚꽃은 대자연으로서의 본래의 벚꽃이다.
여기엔 '야마도 다미시히'도 '닛뽄도오'도 상관이 없는
조물주에게서 타고난 그대로의 가련하고 화사한 생명이 있을 뿐이다.
벚꽃은 이제 저 본래의 생명으로 돌아온 것이다.
벚꽃은 한 송이 한 송이씩 떼어서 보면 볼 것이 없다.
한 가지씩 떼어서 봐도 대견치 않다.
한 나무를 따로 두고 본대도 역시 신통할 것이 없다.
그것은 수천수만의 나무가 어울려져 피었어야만 멋이다.
벚꽃은 또한 가까이서 보면 그 진가를 모른다.
수천수만의 나무가 구름같이 어우러져 피어 있는 광경을 멀리서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벚꽃이 풍기는 그 가련하고 화사한 생명이
우리에게 안타깝게 알뜰하게 어필하여 옴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현기증 같은 것이다.
그만큼 원경으로서의 벚꽃은
우리의 머리를 아찔하도록 흔들어 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또한 갈증과도 같은 것으로 온다.
그만큼 구름 같은, 아지랑이 같은 벚꽃은
우리의 생명에서 봄과 청춘을 가열하여 증발시키는 마력을 가졌다.
그것은 짧은 생명이기 때문에 더욱 애절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벚꽃의 아지랑이를 헤치고
그 속으로 들어가도 좋을 때는 드디어 온다.
그것은 그 구름 같은 아지랑이 같은 벚꽃이
드디어 비가 되고 눈이 되어 쏟아질 무렵이다.
이때에 우리는 서슴지 말고, 이 구름 속으로, 이 아지랑이 속으로,
이 빛 속으로, 이 짧은 생명 속으로,
이 가련하고 허망한 봄과 청춘의 몸부림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끝없는 눈물과 한강 같은 원한을 그 속에 묻어야 한다.
이제금 나는 벚꽃을 향하여 언제나 외면을 하다시피 하고 지내왔다.
일제 시대에는 일제 시대대로, 해방 이후에는 해방 이후대로
그것을 바라보기에 나는 너무나 가슴이 아팠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나도 벚꽃을 바라보기에 견딜 만한
인생의 고개에 다다른 것 같다.
이제는 나를 쓰러뜨릴 그 무서운 갈증도 현기증도
나에게서 이미 다 가셔졌을 것이다.
올해는 창경원에라도 가서 벚꽃이나 싫도록 바라보리라.
그리하여 얼굴을 젖히고 벚꽃을 향하여 물어 보리라.
지금도 너 오히려 나에게서 봄과 청춘을 증발시킬 마력을 가졌느냐고----.
- 손소희 -
* 손소희(孫素熙; 1917-1987)
여류 소설가. 함북 경성 출생.
함흥 영생여고보 졸업. 외국어대학 영문과 졸업.
1946년 [백민]에 '맥에의 결별'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초기 작품은 일본과 만주 등을 무대로 한 일제 하의 민족 의식과
남녀의 애정과 그 고민상을 극적으로 다루었으며,
이후의 작품에서는 여성 심리를 지적으로 추구하여
성격적인 유형을 제시하고 세태를 반영하는 작품과,
남성의 존재를 풍자하면서 그 내면상을 파고드는
인간의 행동과 성격, 심리 등을 다각적으로 보여 준다.
여류 문인들 중에서 가장 개성이 뚜렷하고
감정이 절제된 지성적인 문장을 쓰는 사람 중의 하나다.
작품집으로 [다리를 건널 때], [갈가마귀 그소리], [창포 필 무렵],
[그 날의 햇빛은], [태양의 계곡]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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