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문학다방], [율리안나]
스물 넷, 프랭크 체임버스는 떠돌이다. 길가의 건초 트럭에서 잠이 들고 담배 한 개비를 구걸하고 허기를 못 이겨 돈도 없이 식당에서 핫케이크를 주문할지언정 아직 살인자는 아니었던 시절이 코라를 만나며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는 그리스인 사장의 머리를 렌치로 내리친다. 실은 이게 두 번째 공모다. 인력난이 어지간했는지 사장은 신분증 한번 살펴보지 않고 프랭크를 고용했다. 사장의 젊고 아름다운 아내 코라와 프랭크는 눈이 마주치자 마자 뜨겁게 불 붙었다. 프랭크는 코라와 달아나고 싶었다. 떠나는 것만큼 손쉬운 선택이 어디있는가? 코라는? 그녀는 다른 선택을 한다. "당신과 나를 빼면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지."(p28) 프랭크는 교수형을 예감하면서도 푸른 별처럼 반짝이는 코라의 눈빛과 계획을 피할 수 없다. 코라를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교회에 있는 것만 같았다. 사랑이 그에겐 면죄부 같았을까?
1차 공모 때 그리스인 사장은 코라가 휘두른 쇠구슬 곤봉에 머리를 맞았다. 사장은 죽지 않았다. 자신이 살해 당할 뻔한 것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코라와 프랭크는 집을 떠나려 한다. 탄로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완벽한 살인은 없다는 깨달음, 프랭크를 향한 욕망, 남편에 대한 혐오, 코라는 용기를 낸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는 딱 3키로의 길을 걸을 동안만큼만 낼 수 있는 용기였다. "한 남자의 아내를 훔치는 건 별일 아니지만, 차를 훔치는 건 절도죄야."(p45) 집을 떠나면 남편의 차마저 자신의 것이 아니다. 집도 절도 없이 프랭크와 사랑만으로 살 수는 없다. 순진한 아가씨가 아니었던 코라는 프랭크를 버리고 되돌아간다. 프랭크는 돌아가지 않는 편이 나았다. 다시 만난 그들의 2차 범행은 허름하지만 완벽하게 성공하고 마니까. 능력있는 변호사는 차사고로 위장한 살인임을 알면서도 이들을 무죄방면 시킨다. 모든 사건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프랭크는 다시 한 번 떠나자고 말한다. 코라는? "당신은 상관 없어. 난 부랑자가 아니라고. 우린 떠나지 않아."(p133) 코라는 임신을 한다. 프랭크가 코라를 태우고 차를 몬다. 대형 트럭 앞을 추월한다. 배수로 벽이 나타나고 충돌한다. 자, 과연, 그들 중 누가 죽었을까?
함께이기 위해서 죄 없는 남자를 살해했던 남녀. 그들이 서로를 죽이기 위해 고민하기까지는 채 6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쩌면 사랑이 이토록 허무한지. 욕망은 또 어쩌면 이토록 끝이 없는지. 한숨은 깊지만 재미는 장난없는 소설이다. 읽고 나면 이게 정말 고전소설인가 싶을 정도? 완벽하게 통속적인 하드보일드 범죄소설이자 치정소설이라서 더 그런 의심이 든다.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익숙하다 못해 상투적인 구성인데 그 시대의 독자들에게는 센세이셔널 했던 모양이다. 1934년 출간 당시에 미국 출판업계 최초의 베스트셀러였다고 하니까 상상해 보면 진짜 어마어마한거지. 헤밍웨이의 아류라는 평도 있는 모양이지만 누아르 소설의 창시자로 또 미국 하드보일드 문학의 대표작을 쓴 작가로 영예를 누렸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도 이런 의의를 반영한 것 같다. 작가 자신이 책에 대해 잘 얘기해 놓은 부분이 있어서 옮겨 적는다. "도덕적으로는 충분히 끔찍하지만 살인이 사랑 얘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멍청한 남녀가 있고, 그런데 일단 저지른 다음 정신 차리고 보면 어떤 두 사람도 그렇게 끔찍한 비밀을 공유하고는 같은 지구에서 살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는 얘기야."(p175) 끄덕끄덕, 동감공감.
표지 그림은 후치다 쓰구지의 <커플>. 포스트맨의 첫제목은 바비큐. 포스트맨에 대한 아이디어 제공한 작가 로렌스에게 상 줘라. 제목이 바비큐였으면 아무리 누아르 소설 창시자라도 세계문학전집에 이름 올리지는 못했을 듯. 참고로 작가의 결혼 경력이 4번이다. 헤밍웨이도 4번인 걸로 아는데 하드보일드 초기 작가들끼리 뭔가 통했나??
율리안나
진부한 치정에 얽힌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는 인간 본연의 애욕에 관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결혼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여자, 묘한 매력의 낯선 남자의 등장, 급격하게 서로에게 빠져들어가는 두 사람,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의 남편, 그리고 남편을 살해하기로 한 여자와 남자, 불륜과 사랑사이에서 벌어지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이다. 너무나 많이 보아왔던 진부한 내용의 작품이지만 서로의 믿음과 사랑에 관해 적나라하게 작가 제임스 M. 케인은 서술하고 있다.
서로에게 끌려 사랑을 하고, 배우자를 죽이고, 결국엔 서로를 의심하며 파멸의 끝에 다다르지만 여자의 임신으로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되는 두 사람. 하지만 진정한 사랑의 시간은 너무나 짧았고, 예기치 않은 사고로 여자가 죽게 된다. 결국 남자는 이전의 사건과 더불어 여자의 죽음으로 인해 사형을 선고 받게되며 과연 내가 여자를 진정으로 사랑했는지 의심하게 된다.
여러가지 미사여구가 많은 작품이지만, 예를 들어 하드보일드의 고전이라든지, 누아르 소설 장르의 문을 열었다든지, 실존주의 문학에 영향을 미쳤다든지 하는 등의 곁가지들이 많이 있지만 결국 이 작품은 본능의 애욕을 그린 매우 사실적이며, 직접적인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진부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를 시공사 시그마 북스 시리즈로 소장하고 있는데, 최근에 민음사에서 세계문학 시리즈로 출간이 되었다. 시그마 북스 시리즈 번역본에는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외에도 <이중 보상>이라는 작품이 하나 더 실려 있는데, 두 작품의 풀롯은 유사하며, 단지 사형과 자살이라는 결론만이 조금 다를 뿐이다. 민음사 번역본에는 <이중 보상>이 실려 있지 않은 듯 하다. 확인해 보지는 않은 사실이다. 그리고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아쉬운 것은 국내에 제임스 M. 케인의 단행본이 몇 작품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그의 작품은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와 <나비>라는 작품이다. 이 <나비>라는 작품은 나중에 다시 소개하겠지만, 간단하게 표현하면 그의 다른 작품들보다 더 어둡고 적나라하며 불쾌한 작품이다. 어떤 면에서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는 전혀 아무것도 아닌 게 될 정도로 <나비>는 꽤 추악한 작품이다. 결국 다 파멸의 끝을 보지만, 역시 제임스 M. 케인은 인간의 내면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본능과 욕망을 끄집어 낼 줄 아는 작가임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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