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 윤형두
불가(佛家)에서는 현세에서 옷깃을 한 번 스치는 것도 전생에 천겁(千劫)의 인연이 있었다고 하거늘 그렇다면 어머님과는 전생에 몇 억 겁의 연분이 있었는지 모른다.
곱게 빗질하여 쪽진 머리에 흰 눈과 같은 행주치마를 허리에 동여 맨 어머니를 어머니로서 의식한 것은 어느 때부터였을까?
운명에 순응하기보다는 닥쳐오는 운명에 부닥치면서 한 아들을 위하여 일생을 살아오신 어머님은 한일합방 직후 일제의 탄압이 악마의 손길처럼 전국으로 번져 갈 때, 한 어부의 큰딸로 태어나셨다.
여수항에서 남쪽으로 다도해를 끼고 방동선을 타고 두어 시간 가면 돌산이라는 섬의 군내리라는 한산한 어촌에 이르게 된다. 그곳에서 일찍 아버님을 여윈 3남매 중 위로 오빠 한 분과 아래로 한 여동생을 돌보며 낮에는 바닷가에 나가 석화(石花)를 까면서 폐쇄된 섬생활을 해오셨다. 열여덟 되던 해, 중매장이가 일본에서 왔다는 사진 한 장을 가지고 온 것을 보고 나의 아버님과 혼약이 결정된 것이다.
나의 아버님은 몰락해버린 윤 감찰 댁 셋째아들로, 어머니의 고향마을에서 천하대장군의 장승이 양옆에 서 있는 벅수골이라는 고개를 하나넘어 10리쯤 가면 작은복골이란 마을이 있는데, 그곳에서 성장하셨다. 어릴 때 지나가는 탁발승이 “이 아이는 필시 단명하리라”고 한 단명론 때문에 아버지는 이 사찰에서 저 암자로 전전하다가 철이 들 무렵에는 현해탄을 건너 일분으로 가셨다.
그후 돈을 좀 벌어서 고향 처녀에게 장가가겠다고 세비로 양복에 넥타이를 비스듬히 매고 중절모를 쓴 사진 한 장을 보낸 것이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어머님의 일생을 결정짓고 만 것이다.
이국(異國)의 국제항인 일본의 고베(神戶)에 내린 어머님, 태어난 후 자전거 한 번 보지 못하고 육지에 발 한 번 디뎌보지 못하였던 어머니에게는 닥쳐오는 시간과 옮기는 장소마다 죄어오는 시련뿐이었다. 그곳에서 어머님은 체념과 인내를 배우셨으리라.
이역만리 낯선 곳으로 단 한 사람 믿고 찾아온 남편이 ‘다나카 철공소’라는 간판을 걸고 선반(旋盤) 한 대와 자전거포를 겸한 조그마한 가게를 보면서, 백만장자의 아들인 양 포커, 경마 등 온갖 도박에 빠져 몇 날 며칠이고 나타나지 않으셨을 때도 한없는 고독을 안으로 삼켜가며 가정을 지켜오셨다.
나는 그 고베 산노미야 역전(驛前) 다나카 찰공소 2층 다다미방에서 추운 겨울날 아침에 태어났다.
나에겐 형이 하나 있었으나 돌 전에 죽고 누나도 어려서 죽었다. 그래서 어머님은 항시 “나는 부모 복도 없고 남편 복도 없으니, 너나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을 보며 살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2차대전이 시작된 수 일본 제2육군병원이 있는 사가미하라(相模原)라는 곳으로 이사를 가서 병원에 청소도구 납품업을 하기 시작했다. 병원에 청소도구를 납품하기 위해서는 많은 손이 필요했으며 그 숱하게 소비되는 걸레를 깁기 위해서는 수십 명의 종업원을 다스려야만 했다.
그러나 아버님은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 방랑벽 때문에 후지산, 오야마, 하코네, 규슈, 홋가이도 등으로 주유천하를 하시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2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오오노(大野) 제일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학교 가는 도중엔 도쿠야마라는 노인 내외분이 사는 집 뒤뜰에 큰 계피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가을이 되면 동네 꼬마들이 떨어지는 계피 잎을 주워 먹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학길에 일본 아이들과 계피나무를 흔들어 떨어진 잎을 막 주우려 하는데, 도쿠야마 노인이 뛰어나오더니 “이놈의 조센징 새끼가 무엇하러 왔느냐?”며 마구 쫓아오는 것이었다. 나는 혼비백산하여 집으로 도망쳐 와서 어머니에게 그 사실을 여쭈었더니 “그건 무엇하러 주우러 갔다가 그런 봉변을 당하느냐?”고 하시면ㅅ허도 “그놈의 영감이 어린아이까지도 조선 사람이라고 경멸을 하는군”하고 언짢아하시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때 노을이 한없이 붉게 타고 어둠이 짙어질 무렵, 나는 성냥 한 갑을 호주머니에 넣고 낯에 조센징 새끼라고 욕하던 도쿠야마 노인의 농가로 달려갔다. 집 근처에 가선 슬금슬금 기어가 그 집 앞마당에 겨울땔감으로 준비해 놓은 나뭇단에다가 불을 지르곤 “불이야, 불이야!” 하고 소리 질렀다. 불은 삽시간에 하늘로 치솟았고 마을 사람들이 손과 손에 물을 들고 뛰어나왔다. 그 틈을 타서 뒤뜰에 있는 계피나무에 올라가 큰 가지 몇 개를 꺾어 질질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도쿠야마 영감이 쫓아와선 온갖 욕을 다 퍼붓자, 한참 후 어머님은 “모든 것을 다 변상하지요. 얼만지 청구를 하십시오. 그런데 영감님, 그렇게 조선 사람 사람을 천시하면 못 쓰는 거예요.” 하고 한 마디 하시는 것이었다.
이 일에 대해 그날도 그 훗날도 어머님은 나를 잘못했다고 한 번도 꾸짖은 일이 없으셨다.
그해 겨울이었다. 급우였던 다케야마(竹山)라는 신사(神社)지기 아들하고 무엇 때문엔가 싸움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왜놈들은 사소한 일에도 상대방이 한국인이면 “조선놈 바보새끼”, “조선놈은 다 죽어라” 하는 식으로 조센징이란 민족을 버러지처럼 천시하며 경멸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경멸을 당한 것이 분해 그놈의 멱살을 잡고 실컷 두들겨주었더니 코피가 터지고 얼굴에 상처가 나기도 하였다.
그런지 얼마 후 신사로 동백꽃 떨어진 것을 주우러 갔었다. 떨어진 동백꽃을 모아 꽃술을 떼어버리고 거기에다 실을 꿰어서 화환을 만들어 목에 걸기 위해서였다. 다른 때는 반갑게 맞아주며 “게이토(烔斗)짱, 많이 만들어라” 하고 친절하게 대해 주던 다케야마의 아버지가 그날은 더러운 조센징이라고 욕을 하며 쫓아내는 것이었다.
쫓겨온 후 하도 분해서 심술이라도 부리려고 다시 신사를 찾아갔더니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아 신사 지붕 옆으로 뻗은 동백나무에 올라가서 신사 지붕에다 오줌을 갈겼다. 처마를 통하여 오줌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신사당 안에 있던 다케아먀의 아버지가 비가 오는가 하고 뛰어나왔다가 신사 지붕에다 오즘을 싸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대경실색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나는 일약 유명해지고 말았다. 일본의 수호신을 모시고 있는 신사당, 신성불가침의 신역(神域)의 지붕에다 오줌을 쌌으니 오족을 멸해도 시원치 않다는 것이다. 매일 유지회(有志會)가 계속되었고 학교에 다간 퇴학을 시켜야 한다고 압력을 넣고 우리 공장은 몰수하고 가족은 추방하여야 한다고 난리들이었다. 그런데 이 야단이 나던 날 어머니는 나에게,
“왜 신사당 지붕에다 오줌을 쌌지?” 하고 물으시기에,
“신사 뜰에서 동백꽃을 줍는데 다케야마의 아버지가 더러운 조센징 나가라고 쫓아내기에 화가 나서….” 라고 말씀 드렸더니
“그래 알았어.” 하시고는 그 북새통에서도 한 마디의 꾸지람도 없으셨던 어머니다.
그 후 아버님은 몇 곳을 다녀오셨고 육군병원의 계급깨나 있는 분이 몇 번 왔다 갔다한 후 문제가 해결된 모양이었다.
'2022 -2021신춘 문예 단편소설 , 수필, 시 등 당선작 > 현대수필3' 카테고리의 다른 글
45. 돌이 나를 보고 웃는다 (0) | 2022.01.24 |
---|---|
44. 댓바람 소리 (0) | 2022.01.24 |
42. 녹음의 생명력 (0) | 2022.01.24 |
41. 나도 찔레 (0) | 2022.01.24 |
40. 꽃차를 우리며 (0) | 2022.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