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2 -2021신춘 문예 단편소설 , 수필, 시 등 당선작/현대수필3

44. 댓바람 소리

by 자한형 2022. 1. 24.
728x90

댓바람 소리/ 박영덕

여러 날째 마른 바람이 불었다. 그 놈의 밤이 되면 더욱 기승을 부리며 들녘을 누비고 다니더니 간밤엔 뒤란 대숲을 헤집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혼자 있을 때는 오히려 무심히 스쳐버렸던 그 댓바람 소리가 아들 내외까지 내려와 있는 지난 밤에는 왜 자꾸만, 눌러도 눌러도 새어 나오는 한숨소리같이 들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새벽이슬을 털고 아내의 묘를 다녀오니 아들 내외는 아직도 흥건한 잠에 빠져 있었다. 자정 무렵에야 도착한 그들이니 피곤함을 이기지 못한 탓이리라 작량은 하면서도 야속한 마음이 앞섰다. “그놈의 회사에선 지에미 제삿날에도 근무를 시키남! 월급도 쥐꼬리만큼 주는 주제에.” 마루 끝에 걸터앉아 궐련 한 개피를 뽑아 드니 새삼 아내가 생각났다. 식전에 담배를 피우면 해롭다고 말리는 아내 때문에 새벽이면 하릴없이 텃밭을 어슬렁거리며 눈속임을 했지만 이제는 그 잔소리마저 가슴 저리도록 그리웁다. 어느새 한 뼘이나 솟아오른 해가 마루 위를 거침없이 올라선다. 손수 씻어 마련해 두었던 떡살을 내어다가 화덕 위 시루에 앉히고 장작을 지폈다. 지난 해, 아내의 뒷자리를 쓰느라 벌목해 놓은 솔이 어느새 바싹 마른 장작이 되어 있다. “바보 같은 할망구. 벌써 흙이 되고 말았는가.” 탁탁, 타오르는 불꽃 사이로 아내의 얼굴이 너울거린다. 그날이 언제였던가. 아내의 옷고름을 처음 풀던 날이. 이슥토록 북적이던 초례청이 잠잠해질 무렵에야 쑥스럽게 잡아보았던 신부의 여린 손목. 사촌 누이가 들여 놓아 준 황국은 밤새 잠도 없이 향을 익히더니 새벽녘 들창을 새어나가 앞 모실 논둑 위에 무서리로 내려 앉았지. 불쑥 슬픔인지 분노인지 모를 눈물이 치솟았다. “몹쓸 사람! 무에 그리 바빠서 혼자 가!” 뒷산 따비밭에 오르면 어둠이 아물려서 돌아오는 그녀에게 두더지처럼 땅만 파고 투정을 하면 배시시 붉어진 볼을 감추던 새색시 적 아내. 마흔을 조금 넘어서였던가. 읍내 쌍과부집 작은 과부와 꽃바람을 일으켰던 시절, 뾰로통해져서 자기도 주막을 차리겠노라 앙탈하던 아내의 앵도라진 목소리가 다시금 싸한 그리움으로 번져온다. “못난 놈마구리 없는 한숨 속에 아들을 원망해 보지만 기실 서울살이를 조른 것은 아내였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내외가 아파트를 사는데 기왕 장만하는 김에 평수를 늘려 가고 싶다는 며느리의 하소연을 그냥 들어 넘기지 못한 때문이었다. 아들 하나 서울로 유학을 시키느라 젊은 시절 피땀으로 일군 전답을 하나 둘, 처분해 오질 않았던가. 한사코 반대했지만 마지막 남은 문전옥답을 팔아서 아들네 아파트 평수 몇 평 늘려 주고 시작한 서울살이를 아내는 무척이나 날숨을 쏟더니만 이번엔 고향행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때 이미 아내는 자신의 몸 속에서 서걱거리는 가랑잎 소리를 들은 것이었을까. ‘, 김 오른 떡살을 절구에 붓고 메를 치다 보니 살아 생전엔 농담 같던 아내의 말이 생각키운다. “나 죽으면 제상에 떡일랑 당신 손수 만들어 올려 주우.” 방앗간소리에 놀란 며느리가 늦잠이 면구스러웠던지 어설픈 웃음을 띠고 나오며

읍내 방앗간에 맡기면 금방 해 올 텐데 힘드시게 방아질을 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너희 어머닌 생전에도 방앗간 떡은 안 먹었다.”

퉁명스레 내뱉는 말에 며느린 애꿎은 바가지만 들고 단작대고, 그제서야 허리춤을 추스르며 나오던 아들이 메를 당겨 들었다. 하지만 고작 두어 번 내려치더니 계면쩍게 웃으며 허리를 펴고 만다. “오달진데라고는 감자 한 톨만큼도 없는 놈.” 아들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서울행을 들고 나올 것이다. 하지만 어림없는 일. 마당에 잡초가 우거질지언정 선영 발치에서 아내의 넋걷이라도 하면서 살아야지. 아들 손의 메를 투정하듯 나꾸었다. “, .” 대숲에 숨어있던 바람 한 줄기가 화들짝 놀라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2022 -2021신춘 문예 단편소설 , 수필, 시 등 당선작 > 현대수필3' 카테고리의 다른 글

46. 동백의 씨  (0) 2022.01.24
45. 돌이 나를 보고 웃는다  (0) 2022.01.24
43. 나의 어머니  (0) 2022.01.24
42. 녹음의 생명력  (0) 2022.01.24
41. 나도 찔레  (0) 2022.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