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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2021신춘 문예 단편소설 , 수필, 시 등 당선작/현대수필3

48. 돼지가 웃은 이야기

by 자한형 2022.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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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가 웃은 이야기 / 강호형

청계로변 Y동 어구에 오래된 순댓국집이 있었다. 허름한 유리문짝에는 붉은 페인트로 순댓국 전문이란 간판 겸 안내문이 씌여 있기도 했지만, 출입구 옆에 놓인 연탄 화덕 위에서 언제나 더운 김과 구수한 냄새를 내뿜고 있는 큼직한 국솥이 오히려 더 효과적인 간판 구실을 하는 집이었다.

손잡이에 기름때가 번질거리는 미닫이 출입문을 밀치고 들어서면, 역시 기름때가 밴 나무 탁자 두 개와 구멍 뚫린 칠판을 얹은 드럼통 두 개에 겨우 궁둥이를 붙일 수 있는 동그란 의자 몇 개, 그 한쪽 벽면에 걸린 선반 위에 상처난 뚝배기들이 엎여있고, 채반에는 이 집의 전문 메뉴인 순대와 내장과 돼지 머리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돼지 머리는 간단없는 식칼의 공격을 받아 참혹한 형상일 때도 있지만, 아직 손을 타지 않아 온전할 때에는 갓 세수라도 한 듯 멀끔한 얼굴에 살짝 눈웃음까지 치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덩달아 미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십여 년 동안을 줄곧 그 자리를 지키며 순댓국만 팔았다는 주모는 알맞게 뚱뚱한 몸매에 후덕하고 수더분한 인상이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다. 한 우물만 판 덕에 손님의 대부분이 단골이었는데, 단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는 몇 분의 바깥 노인들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정의가 두터워, 손님이라기보다 허물없는 친구처럼 지내는 터였다. 내가 기회 있을 때마다 이 집을 드나들게 된 것도 실은 이 노인들의 무사무욕(無邪無慾)한 우정을 엿보는 데 더 재미를 붙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드나들다 보니 노인들 모습이 보이지 않는 날은 모처럼 들른 것이 헛걸음이 된 기분이기도 했다.

그날은 마침 드럼통을 사이에 두고 둘러앉은 노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한쪽 자리에 순댓국 한 뚝배기에 소주 한 병을 받아 놓고 노인들의 화제에 귀를 기울인다.

저 돼지 눈웃음치는 상판 좀 보게, 꼭 주인마누라 소싯적 겉으네 그랴.”

부실한 치아 때문에 입에 든 머릿고기가 부담스러워 공들여 우물거리는 다른 노인들과는 달리, 그 중 기력이 있어 보이는 충청도 말씨의 노인이다. 말이야 짐짓 좌중에게 동의를 구하는 척했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걸려온 농지거리라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주모다.

앗다, 왜 조용한가 했더니 인제야 시작이구먼? 저 웬수…….”

그러나 말과는 달리 주모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저걸 좀 보라니께? 닮아도 죄끔만 닮은 게 아니구 아주 판에다 박았다니께.”

다른 노인들의 얼굴에도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돈다.

저 돼지가 어떤 돼진 줄이나 알구 하는 소리유?”

어떤 돼진 어떤 되지여, 홀애비 돼지길래 과붓집에 와서 선웃음을 치고 있지…….”

돼지두 당신처럼 과부라면 사족을 못쓰는 줄 아는 가배? 저게 처녀돼지라우, 처녀두 보통 처년가? 꼭 가둬 기른 숫처녀지…….”

노인들이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고 보니 과연 그럴 듯도 하다고 동의하는 노인들도 있었다. 또 다른 노인이 어조를 사뭇 누그려, 허긴 저 마누라도 젊어서는 꽤 쓸만한 얼굴이었느니 라고 회고하자 노인들은 웃음을 거두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잠시의 침묵을 깨고 어디선가 확성기 소리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내용인즉, 〇〇 선생의 연설회가 있으니 애국시민들은 모두 모이라는 것이었다. 마침 대권을 목전에 두고 노씨 한 분과 김씨 세 분이 모두 목이 쉬고 안구가 충혈되었을 때였던 것이다.

가두방송이 멀어져가자, 자연 화제는 누구를 찍느냐,’로 번지고 있었다.

오번(이번)에는 영샘이가 될 기라.”하고 자신의 의중을 제일 먼저 내보인 것은 한북바지에 양복저고리를 입은 노인이었다. 그러나 제일 먼저 농을 걸었던 노인이 나섰다.

나는 누가 뭐래도 죙필일 찍을 테요. 여태껏 경상도 사람이 해먹었으니 충청도서두 대통령 한 번 나얄 것 아닌감?”

어저니 저쩌니들 해두 될 사람을 찍어야지 무슨 소리들을 허는 거요. 누구니 누구니 허구 떠들어들 대지만 그 사람들 돼 봐야 허구헌 날 싸움질이나 허지 뭐가 될 것 같아?”

그 노인은 그곳 토박이로서 과거 여러 해 동안 통장을 지낸 일도 있는 유지라고 했다. 이리하여 갑론 을박이 한창일 때, 이제까지 침묵으로 일관하던 단정한 한복차림의 노인이 밭은 기침을 하며나섰다. 좌중에서는 가장 연장일 뿐 아니라, 허리춤에 달린 황소의 고환을 연상케 하는 안경집과, 코에 걸린 안경이며, 노안에서 풍기는 위엄이 출신가통의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방 자네들 뭔 야기들 허고 있는가? 누가 될 사람이고, 누굴 찍는다고? 선거는 허도 않고 어떡해서 될 사람은 벌써 정해졌단가?”

이제까지의 선비적 침묵과는 달리 노인의 음성에는 노기마저 깔려 있었다. 그리하여 일장의 훈시(?) 끝에 내려진 결론은 대중이 선생이 대통령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결론이 도출되기까지의 노인의 논리와 표정이 너무나도 정연, 진지하였으므로 감히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잠시 동안의 어색한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뜻밖에도 여전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주모였다.

그냥반두 잘한 것 읍지 뭘, 양보하기 싫다구 딴 살림 차려 나간 건 잘한 건가 뭐?”

그리고는 자신도 될 사람을 찍겠노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이었다.

노인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니 결판은 이미 난 셈이었다.

-노씨 두 표, 세 김씨 각 한 표

어쩔 수 없이 부동표가 된 나는 난감한 심사가 되어 문득 바라보니 선반 위의 처녀돼지는 여전히 웃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