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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2021신춘 문예 단편소설 , 수필, 시 등 당선작/현대수필3

50. 들판의 소나무

by 자한형 2022.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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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의 소나무 강돈묵

어느 산에 가든 소나무가 있다. 산밑 숲정이에 모인 활엽수와 같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내는 소나무도 있고, 산허리에 덜렁 주저앉아 산새들과 산바람의 대화를 엿듣는 소나무도 있고, 벼랑 돌 틈에 뿌리를 내리고 자신의 기품을 뽐내는 소나무도 있다. 소나무는 다른 나무들과 뒤엉키어 살기도 하고, 저희들끼리 무리지어 살기도 한다. 소나무는 사계를 두고 변하는 다른 나무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호사를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푸른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늘 정성을 다 하고 있다.

밤나무, 오리나무들과 뒤엉키어 사는 소나무는 키가 크지 않다. 주위의 친구들과 키를 맞추어 도란거리며 산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월등히 키가 크지 않은 대신 가지를 길게 뻗어 어깨동무하며 산다. 옆에 있는 다른 친구들의 처지를 감안하여 알맞게 자라고 같이 어울리기를 좋아한다. 절대 옆의 친구를 외면하거나 질시하지 않는다. 늘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같이 즐기기를 소망한다. 꽃 피는 봄날에는 풀꽃에 친구해 주고 비바람 몰아치는 여름날에는 옆의 친구와 어깨를 비비며 견뎌낸다. 아람 버는 가을이면 밤나무의 경사에 박수를 보내고 눈보라 몰아치는 겨울밤에는 오리나무의 알몸에 몰아치는 추위를 온몸으로 막아준다.

그에 비해 저희들끼리 모여 사는 소나무들은 키가 크고, 별로 가지를 뻗지 않는다. 몸매가 단조로우면서도 날씬하고 훤칠한 저희들끼리만 어울린다. 다른 나무들과의 대화보다는 저희들끼리의 대화가 더 즐겁기 때문이다. 저희들끼리 모이면 다른 주위의 것들에 대해서는 아랑곳없다. 다른 나무들이 같이 놀자 손을 뻗쳐도 무시해버리고 큰 키만을 자랑한다. 오히려 다른 나무들을 업신여기고 키만 키우고 팔을 벌려 주지 않는다. 심한 경우 모여 사는 소나무들은 제 주위의 다른 나무들을 내몰아버린다. 작은 풀꽃까지도 내몰아 그 밑에는 아무것도 없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키가 비슷한 저희들끼리 어울리면서 혼자 사는 소나무를 비웃고 손가락질한다. 혼자 떨어져 사는 친구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소나무들과 대화하며 살아가는 소나무를 비웃는다. 그래서 모여 사는 소나무들은 모양도 비슷하고 개성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냥 어울려 맑은 날의 햇볕을 즐기고 달밤의 우수를 같이 즐긴다.

어떠한 재난이 몰려온다 해도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함께 힘을 모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병충해가 밀려와도 함께 저항하면 되는 것이다. 여간해서 이들에게는 병충해도 오지 않는다. 힘을 합쳐 밀어내기 때문이다. 따사로운 햇볕이 비치고, 산바람이 시원히 불면 산새들과 어울려 무조건 즐기다가도 삶의 조건이 나빠지면 생식에 힘쓴다. 공해가 밀려오면 다음 세대를 위해 솔방울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도시의 변두리에 사는 소나무들은 시커멓게 솔방울 달고 있다.

자주 지나는 들판 한가운데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언제나 그렇듯 이 소나무는 내 눈에 쉽게 들어온다. 들판을 지날 때마다 이것은 들판의 다른 어떤 모습보다도 확실한 이미지를 가지고 서 있다. 논배미가 끝나는 둑에 뿌리를 내리고 섰다. 굵은 줄기가 옆으로 드러누운 듯이 비스듬히 뻗어 있으면서도 균형을 이루고 있다. 줄기에 켜켜이 붙어 있는 껍질의 층은 인고의 날을 말하는 듯하였으나 잎은 여전히 푸르다.

들판의 소나무는 혼다 서 있다. 그래서 더욱 나의 눈에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옆에 친구도 없이 외롭게 살아간다. 산에 있는 소나무들이 친구들과 다정히 대화를 나눌 때, 들판의 소나무는 외로움을 이기는 연습도 하고 자신의 내면의 성숙을 꾀한다. 들판이 사계를 따라 변하는 모습을 보일 때도 이것은 변하지 않는 것의 고통이 얼마나 처절한 것인가를 되씹는다.

산에 사는 소나무들이 개성 없이 친구들과 닮아가지만 들판의 소나무는 그렇지 않다. 소나무의 체신을 간직하려 노력한다. 혼자 체신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산의 소나무들은 되는 대로 살아가도 옆의 친구들과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지만, 들판에 홀로선 소나무는 모든 것을 저 혼자 해결해야 한다.

폭풍이 몰아치는 날에도 고풍스런 자신의 자태를 간직해야 한다. 서로의 힘을 함해 견디어 내는 다른 나무들과는 달리 혼자 이겨내야 한다. 설혹 산의 나무들이야 가지가 부러져도 별로 드러나지 않지만, 들판에 홀로 선 소나무는 가지 하나 부러지면 많은 이들에게 흉물로 드러난다. 조그마한 흠집이라도 많은 이들의 시선에 띄고 입에 오르내리기에 들판의 소나무는 그만큼 자신의 모습을 간직하기가 힘이 든다.

고고한 정취는 그래도 들판의 소나무에서 맛볼 수 있다. 다른 것들과 똑같은 잎과 줄기를 가지고 자신의 모습을 꾸미더라도 들판의 소나무는 다른 모습이다. 균형 없이 주위의 나무들과 어울리는 숲정이의 소나무와도 다르고, 짧은 팔을 가지고 답함하는 무리 진 소나무와도 다르다. 주위의 여건을 감안하여 가장 멋스럽고 고고한 모습을 간직한 채 소나무의 진수를 말하는 들판의 소나무. 그 가지 끝에 학() 부부라도 앉으면 더없이 멋스러움을 자아내는 소나무. 아무리 홀로 있어 외롭다하더라도 고독함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들판의 소나무. 이것은 자신의 위치를 잘 알기에 고통스럽고 견디기 어려운 날에도 내색함이 없이 꿋꿋하게 살아간다.

나는 산에 오르고 들에 나가면서 많은 배운다. 산 숲정이를 지나면서 옆의 다른 나무들과 어깨동무하며 살아가는 소나무의 지혜를 배운다. 그들은 베풀면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내게 일러준다.

저희들끼리 모여 사는 소나무 숲을 지날 때면 공감대를 가진 사람들끼리 어울려 이 각박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하라 강요한다. 그러나 나는 그 숲에 들어섰던 것을 후회한다. 견딜 수 없는 이기에 밀려나오고야 만다.

들판의 소나무 밑에 서면 진정 나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되씹게 된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모습을 꿋꿋하게 간직해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진정 나의 갈 길이 무엇인가를 터득한다.

별써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산과 들은 많은 말씀을 가지고 나을 맞는다. 오늘따라 들판의 소나무가 대견스럽게 눈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