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둘둘둘 구구구구/ 김용옥
지구상에 인류 출현 이후 얼마나 많은 날들이 지나갔을까? 가장 오래된 두개골 발견에 의하면 350만 년에 365일을 곱해야겠지? 그렇다면, 얼추 1억 2775만 날이 흘러갔다.
그동안 내내 우주 처처에 절대시간은 존재하고 있었고 잎으로도 주욱 있을 터이지만, 인간은 지(知)가 발달하자 해와 달을 기준 삼아 표준시간을 만들었고, 시간을 단위로 공평하고 편리한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 해가 돋아서 환하다가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고 달이 비치면 안식의 눈을 감고 죽음처럼 잠들었다가 태양이 다시 떠오르면 살아나기 시작하니, 비로소 ‘하루를 살았노라’고 한다. 그러나 우주역사의 시간으로 헤아려본다면, 어쩌면 인간의 일생인 생로병사란 한순간의 순환과정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어느새 하루, 한 달, 일 년 등 표준시간 주기에 길들여질 대로 길들여져 시간 따라 살아간다. 나도 그렇게 관념적 시간에 습이 되어 21세기의 문턱까지 걸어왔다. 허, 시간이 간다는 건 살았다는 거고 또한 죽어가고 있는 줄을 알지만 시간을 정지시킬 수가 없다. 다만 시간을 건널 뿐.
2002년 2월 22일 2시 21분을 내가 건너가고 있다. 시간은 아무런 발자취가 없이 공(空)이고 허(虛)다. 그런데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표준시간이 가리키는 시간에게 통제 당한다. 시간에 따라 생활습관과 양식이 변하기도 한다. 지금, 완산 칠봉의 서쪽자락에 고즈넉이 앉아있는 안행사 경내를 산책하며 모바일 폰의 디지털시계를 바라보며 전화를 건다. 그새 깝빡 깜빡, 22분 22초가 된다. 내가 살아있는 시간 중에서 ‘2’자가 가장 많이 줄줄이 들어있는 날 2002년 2월 22일 햇빛 찬란한 오후 2시 22분 22초!
“도원스님, 어쩌면 생애에 짝수 2가 가장 많이 들어 있는 시간 2천 2년 2월 22일 지금은 2시 22분 하고도….”
“막 22초네요. 잘 사시게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는 시간이지만, 이자 붙여가며 쓰고 살게요.”
이렇게 수많은 날들 중의 한 날이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다. 생애에 한 토막 특별한 의미, 특이한 추억을 장만한 것이다. 인간이 자기가 산 모든 날들을 기억할 수는 없으니까. 2라는 숫자의 겹치기가 아름다운 얘기를 남겼다.
수(數)는 아름답고 슬기롭다. 0, 1, 2, 3, 4, 5, 6, 7, 8, 9, 만물의 과학적인 척도 수. 허공과 유한대와 무한대를 표현할 수 있는 수. 철학적이고 미학적인 수, 수의 경제적 계산법엔 둔하지만 수는 내 삶의 의미부호이며 놀이도구이기도 하다.
0은 곱하기만 하면 아무리 거대한 수라도 0으로 만든다. 욕심이 들끓으면 나는 욕망에 얼른 0을 곱한다. 완전한 오용이고 동시에 공(空)이다. 나는 허욕에서 해방되고 자유로워진다. 0은 언제나 나 지신을 의미한다. 곱하기나 나누기는 천만 번을 해도 소용없고 더하기와 빼기만 허용된다. 나에게 한 가지씩 더하며 태산(泰山)의 내가 되기도 하고, 하나씩 버리고 비우며 철인(哲人)이 되기도 한다. 마지막 한 숟가락의 밥에 배부르며 한 섬을 더하면 99섬 가진 자의 욕망을 충족시킨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하고, 길어 100년을 사는 인생도 제 1일부터 쌓인다. 1은 시작이며 동시에 완성을 이루게 하는 수다.
1이 나라면 2는 너다. 네가 있어야 사랑은 완성된다. 그래서 2는 생명체의 짝수요 인화(人和)의 수다. 2인칭 없는 세상은 살 맛 없다. 절대고독은 어떤 2인칭과도 완전히 합일할 수 없음에서 깨달은 고독이다. 어머니의 태내에서 절대고독을 깨달을까?! 푸후.
그 세상살이엔 구경꾼인 제3자가 꼭 있어야 한다. 구경꾼 없는 인생극을 무슨 재미로 연기하며 살 수 있으랴. 그 3은 조화의 수요 진리의 수다. 천지인, 불법승,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수요 지정의, 진선미의 수다. 또 양극의 경계를 가로질러 타협과 소동의 다리가 되는 생각이 놓인 정반합, 삼단논법도 3단계로 완성된다. 그뿐인가. 바흐 베토벤 브람스 3B는 영혼의 위로자요 3익우(益友)는 사회의 소금이다. 재(財), 법(法), 무외(無畏)의 3보시(布施)를 행하고 덕(德), 공(功), 언어(言語)는 3불후(不朽)임을 명심하고 살아야 한다.
4는 만물의 형상을 포용하는 공간을 나타내는 4방위의 숫자요 완성을 의미하는 수다. 삼위일체에 아(我)를 합하여 비로소 우주실체를 완성한다. 내가 없으면 천지인들 성부성자성령인들 무엇에 쓰는 사상이며 존재가치이겠느냐. 네잎클로버처럼 3에 나 1을 합한 4는 비로소 완성수다. 나 없으면 우주 대자연이 헛되고 쓸데없다. 5, 6, 7, 8은 1, 2, 3, 4를 요령껏 합하면 만들어지는 수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지도 모르는 수다.
그런가 하면9는 다분히 동양적인 수다. 동양인의 느긋하고 9푼철학은 서양사고보다 인간적이다. 완벽보다는 여지 또는 여유, 빈자리를 남겨두고 기대한다. 인간은 늘 미완성의 존재이지 아니한가. 그렇다하더라 9는 스스로 가장 는 수다 그래서일까. 아홉수에 걸쳐지는 나이는 소위 삼재고개로 조심스레 건너야 한다. 꽉 찬 것은 기울기 미련이지 아니한가, 노름판에서야 아홉끗 가보를 잡으면 으쓱하지만, 인생이 잡기일 리 만무하니 9에 현혹될 건 없다. 수는 곧 사색이고 인생철학이고 생활지수다.
나는 이따금 추억의 숫자를 더듬으며, 추억 속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1999년 9월 9일 9분 9초, 이승에 필연의 인연이 예정된 이들이 소심란 난화주를 마신다. 부드럽고 다사로운 연주홍 촛불빛 속에서, 눈망울마다에서 아주 예쁜 촛불이 흔들리고 있다. 그들의 술잔마다에서 소심란화가 흔들리고 있다.
“우리의 우정은 깊게, 문학의 이상은 높게, 오늘의 만남은 천년 후에도!”
아침놀 같은 빛이 어슴푸레한 카페 ‘아름다운 이방인’을 둥글게 어루만지고 있다. 초가을의 약비가 조록조록 내리는 목요일 밤이었다.
‘아름다운 이방인’엔 인간적 관계의 만남이 있었다. 사르트르는 카페에 앉아 글을 썼다고 하지만, 보통사람인 우리는 허전한 내면 - 쓸게 간을 빼어주었으니까 ᄏᄏᄏ - 을 채우려고 저녁나절에 이따금, 세상의 다른 공간에 앉아 보는 것이다. 이방인이 되어 보는 것이다.
그 곳에선 술이 밥보다 맛나다. 무겁디무거운 대낮의 짐을 주(酒)를 만나 주(酒)안에서 내려좋고, 밥을 위해 죽인 자기를 되살려낸다. 각혈하던 저녁놀마저 눈을 감고, 지상의 전등불이 하려한 유혹의 은하수를 깔면 대화하고 싶은 사람이 그리워진다. 그리우면 만나고 만나진다.
그날에도 어우렁더우렁 어우러져야 하는 한낮의 나들이를 끝내고 제멋대로 약속도 없이 발길 닿아 모여든 곳이 ‘이방인’이다. 신록이 열여섯 춘향이 같은 오월 어느 날이었다. 둘러앉은 화안(和顔)이 모두 춘향(春香)에 젖어 있다. 우리는 엄마 앞에서 짝짜꿍하듯 이 일 저 말을 화기애애하게 나누며 의기상통했다.
“정말 좋은 사람들이다. 우리, 모임 만들어 다달이 만나자.”
“오월동인이라고 하면 어떨까?”
이구동성, 감정고조, 주기탱천, 열절발화 중이다.
“요즘사람들, 모임이 넘치지 않아요? 그냥 오늘처럼 우연히, 문학적으로 만나자.”
무슨 수로? 언제쯤? 어떻게? 누구랑? 어른은 꿈꾸기를 잃은 자다.
“지금은 1999년 오월. 어, 초가을 9월 9일 어때요? 아침엔 일터에서 놀고 밤 9시 9분에 만납시다. 기억하고 약속을 지키는 자에겐 복 있을 지어다.”
우리들의 약속은 챙, 술잔의 부딪힘으로 이워졌다.
그리고, 젊은이의 객기 같은 태양열과 태풍의 성하가 가고 9월이 왔다. 하루하루 해가 저물기를 기다리는 설렘이 고양이의 발걸음같이 가벼이 가슴을 밟고 간다. 기다림 속에서 나는, 집안을 향기로이 흔들던 소심란 꽃송이로 담근 난화주를 챙기고, 아름다운 후배 진숙이가 바티칸 성당에서부터 나를 생각하며 소중하게 안고 온 초를 챙긴다. 9일 오후엔 들깨송이를 튀기고 호박씨와 해바라기씨를 볶고 자잘한 안주거리를 챙겼다.
약속을 기억할까? 약속을 지킬까?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고 작은 일에 신실한 사람이 진실한 사람이지! 추억은 스스로 아름답게 만들어야지 누가 쥐어주는 게 아니지! 째깍째깍 시간이 바삐 흐르기 시작했다.
오후 7시 즈음부터 김장거리 채소에 꼭 필요한 가을비가 실실이 내리기 시작했다. 약간 서늘한 가을비가 이 날의 약속을 기억하는 사람의 감성을 촉촉하게 부추길 수도 있겠구나, 생활인의 메마른 계산법으로 귀찮은 장난말쯤으로 치부하게 될 수도 있겠지. 그런 생각이 오간다. 그리고 거세어진 밤의 빗길을 지나 9시에 ‘아름다운 이방인’에 나는 섰다. 그리고 우리는, 9시 9분 9초에 촛불의 빛에 감싸여 난화주를 높이 들었다.
“천년 후 2999년 9월 9일, 밤 9시 9분에도 우리 함께할지어라”
“누님, 그땐 초록별 안드로메다 성에서 만납시다.”
“천년 후의 해후를 꿈꿀 줄 모른다면 예술을 하지 말아야지요.”
“천년 전 999년은 고려시대, 동서애자 목종 때였지. 아름다운 여인들과 둘이 한 몸이 되지 못하여 자식도 생산하지 못한 왕이죠. 그때 어느 못 다 푼 사랑의 영혼이 내게 씌었기에 가슴 아픈 시인이 되었는지 몰라. 지금 이 땅에서 피 질질 흐르는 고난과 멸시를 벗고 부활한 내 21g의 영혼은 천년 후에는 음악이 혼으로 꽃피어날 것을 믿고 싶어.”
상기한, 고요한, 아늑한 얼굴 얼굴들이 미쁘다.
한 날이 가고 가버린 시간은 되돌아오지 아니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시간 1999년 9월 9일 밤 9시 9분 9초는 절대시간으로 정지되었다. 우연히도 우리 9인 - 소설가 감상휘, 대금산조 명인 강정렬, 시인 이현애, 수필가 엄숙례, 수필가 이숙자, 시인 심옥남, 수필가 김연주, 수필가 나희주, 시인 김용옥- 취했다. 동석한 한 사람 한사람의 정신애, 난화주에, 촛불에, 천년 후로 날아가는 영혼에.
시간과 공간과 사람의 만남은 필연으로 이루어진다. 두 번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시간이 맺은 인연. 우주공간에 먼지 같은 너와 내가, 우주생성 역사의 티끌 같은 시간 속에서 어떻게 만났을까! 필연이다.
먼 훗날 천년 후, 나는 어느 시인의 가슴에 뿌리내려 붉은 꽃으로 피어라. 너는 어느 마법의 손가락에서 흐느끼는 가락으로 돋아라. 2999년 9월 9일 밤 9시에 지구를 멀리 그리워하는 천태성 초록빛으로 비치어라.
'2022 -2021신춘 문예 단편소설 , 수필, 시 등 당선작 > 현대수필3'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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