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녘 하늘의 비행운 이 청 준
오후에 모처럼 바다로 낚시질을 다녀왔다.
며칠째 별려오던 망둥이 낚시질, 방마루로 나앉으면 낮은 블록 담 너머로 금세 파란 여름 들판이 내다보이고, 그 들판 끝의 방뚝 너머론 다시 하얀 바다가 떠올라 보인다. 어렸을 적 친구도 없이 부표처럼 혼자 떠돌곤 하던 바다... 한곳에 머무는 게 불편스러운 것이 이제 아예 몹쓸 체질이 된 것인가? 나는 왠지 나의 방구석 거처가 다시 불안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거처를 정하고 한곳에서 내처 눌러앉아 있는 게 까닭 없이 불편하다. 하루쯤 거처를 비워두고 싶어진다. 게다가 바다는 연일 말없는 손짓으로 나를 부르고...
하여 오늘의 점심을 먹고 나서 대나무 꼭지에 나일론 줄을 흘쳐 맨 낚싯대를 만들어 메고 그 바다로 들판을 건너갔다. 여름햇볕 속의 들판을 건너자니 아이와 새와 햇덩이가 나오는 장욱진의 그림 속이라도 움직여 가고 있는 느낌.
그런데 그새 바다는 어쩌면 물속 인심이 온톤 변해버린 것일까. 옛날 망둥이들이 씨가 말라버린 것인가. 낚시를 던지고 한나절을 기다려도 그 흔하던 망둥이 새끼들은 종자 한 마리 구경을 할 수가 없다. 썰물 때가 되도록 낚싯밥 건드리고 가는 놈이 없다. 썰물이 빠지고 개뻘이 꺼멓게 솟아 오른 다음부턴 아예 낚싯대를 던지고 게 잡이를 시작한다. 구멍에서 나와 어슬렁거리는 게들을 쫓아 빨밭을 개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뛴다.
하다 보니 그렁저렁 긴긴 여름 해도 어지간히 저물고, 문득 남쪽 하늘을 바라보니, 먼 수평선 쪽에서 베빨래가래처럼 하얀 비행운 한줄기가 물을 차고 치솟아 올라온다. 해가 설핏해질 때면 이곳 하늘을 지나가는 제주 공항발 서울행 여객기다. 아침이나 한낮엔? 항로가 다를까. 내가 보는 것은 언제나 그 저녘 녘의 비행기다. 그리고 언제나 바다에서 떠올라 서울로 가는 길뿐. 그것도 고도가 너무 높아서 소리가 들리거나 비행체가 먼저 눈에 뜨이는게 아니다. 어쩌다 문득 하늘을 쳐다보면 북쪽으로 뻗어가는 긴 비행운이 머리 위로 높다랗게 걸려 있곤 하였다.
오늘은 그 비행운의 모습이 사뭇 다르다. 그것은 그냥 남쪽하늘이 아니라 어느 먼 바다의 물굽이로부터 그리고 그것도 별반 소리도 없이 수평선을 박차고 치솟아 오르는 것 같다.
비행운은 소리도 없이 어느새 나의 머리 위를 지나 북쪽 하늘로 줄기차게 뻗어간다. 나는 엉거주춤 뻘 묻은 손을 늘이고 서서 하염없는 눈길로 그것을 뒤쫒는다. 저기 어쩌면 내가 아는 얼굴이 있을까... 서울에 두고 온 친지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환영으로 눈앞을 지나간다. 그리고 이내 혼자가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이 되돌아 보여진다.
내가 왜 여기 지금 이러고 있는가.
마치도 여기 이렇게 내가 혼자가 되어 있는 것이 나 아닌 다른 누구의 탓이기나 하듯이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와 숨어 살고 있기나 하듯이. 기분을 돌리려고 문득 다시 하늘을 보니 비행기가 어느새 북쪽 산 너머로 모습이 사라진 다음이다. 빈 하늘에 남은 흰 비행운만 한쪽으로 서서히 흩어져 흐른다.
나는 더 이상 게들을 쫓고 싶은 생각이 없어진다. 낚싯대를 버리고 그냥 뻘 묻은 발 채로 저녘 들판을 건너와 버린다.
그래 그놈의 비행운 따위가 사람을 이토록 허망스럽게 하다니... 망둥이 낚시질은 이제 다시 나가지 않을테다. 게 잡이도 다시 하러 가지 않을테다. 혼자 싱거운 다짐을 하면서.
하지만 마음속은 왠지 그래도 뿌듯하기만 하다. 오늘 저녁엔 친구에게 모처럼 안부 편지라도 한 장쯤 쓰고 싶다. 오랜세월 동안 잊고 살아온 유치한(?) 편지쓰기. 서울에서는 늘 함께 있으면서도 함께 있음이 아니던 친구들. 그 친구들을 이렇게 멀리 떠나와서 비로소 함께할 수가 있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모처럼 잊고 살아온 편지도 한 장쯤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 편지를 쓰기 위해 일부러 예까지 혼자 떠나온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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