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내면적 인간 김우창
우리는 윤동주의 생애의 지배적인 동기 중의 하나가 심미적·윤리적 자기 완성이고, 이러한 완성이 궁극적으로는 실천과 행동을 통하여 완성되는 것이라고 했거니와,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의 행동이 반드시 정치적 행동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윤동주가 조선 독립이라는 특정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행동을 원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정치 목표 그 자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그것이 삶의 완성에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 됨으로써였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윤동주에게 괴로웠던 것은 당대의 사회가 넓은 의미에서 자기 완성을 허용하지 아니한다는 점이었고, 그 결과는 현상 타파를 요구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윤동주는 직접적인 의미의 애국심과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 사이에 갈등을 느낀 경우도 적지 않았다.
내 생각으로는 <또 다른 고향>은 극히 애매한 시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갈등에 대한 윤동주의 의식을 잘 드러내 주는 시이다. 여기에서 그는 그의 추구가 괴테적인 '아름다운 혼'의 완성이고, 이것은 당대 사회의 주조(主潮)에 반드시 일치하는 추구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는 자신의 상황을 간략하게 요약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시인은 자기의 고향을 죽은 자신의 시신(屍身)을 만나는 음산한 곳이고, '어둔 방'으로 집약하여 표상할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또 역설적으로 이 좁고 어두운 곳은 넓은 움직임의 공간에로의 부름을 가지고 있다. 시인이 고향의 어두운 상황을 슬퍼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시인은 어떤 면에 비추어 그러한 질문이 발해지는 것인가? 시인의 자기 성찰은 자신 가운데 세 분신을 발견한다.
하나는 삶의 가능성을 죽음의 세계 속에 묻어 버린 과거의 자기. 고향에 남아 있던 자기요, 다른 하나는 이것을 반성하고 있는 현재의 자기이다. 세 번째의 '아름다운 혼'은 그때 그때의 감각적, 체험적 쾌락과 고통을 넘어서고 또 그것을 밑거름으로 하여 삶을 하나의 조화된 통일체로 완성해 가는 성장의 원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시인은 이러한 세 개의 분신 중 우는 것이 누구냐고 묻고 있는데, 우는 것은 이 세 분신 모두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중에도 다양하고 조화된 생의 통일성을 관장하는 영혼 - 좁은 방에 대하여 하늘에서 오는 바람 소리처럼, 현재를 초월하는 원리인 '아름다운 영혼'이 희생된 삶의 가능성을 생각하여 운다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흔히 이 시의 '지조 높은 개'는 시인 자신이 우러르는 충의와 애국의 상징으로 해석되어 왔는데, 이것은 그다지 타당성이 높은 해석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개가 충성스러운 짐승인 것은 사실이라 하겠지만, 개에 대한 일반적인 연상을 생각할 때, 윤동주가 하필이면 충의의 사표로서 개를 들었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사실 이런 구절의 의미는 붙이기 나름이고, 붙이기 나름이라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윤동주의 미숙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겠는데, 내 생각으로는 '지조 높은 개'는 아이러니컬한 뜻을 가진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즉 한쪽으로는 그것은 지사적인 인물로서 어둠의 증인이 되는 사람을 가리키고 다른 한쪽으로는 지사는 지사이되 '어둠을 짖는'- 즉 여기서는 어둠의 소리만 낸다는 뜻으로 '어둠을 짖는' 일 이외에는 하늘의 소리도 아름다운 혼의 세계도 알지 못하는 우직(愚直)한 존재, 아직 사람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동물적 존재를 가리킨다. '지조 높은 개'의 세계는 시인 자신의 '백골'을 담아 가진 세계이다. 적어도 이것은 현재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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