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속(土俗) 연구 여행기 손진태
3월 21일
조조(早朝)에 나는 겸이포역(兼二浦驛)에 내렸다. 도쿄(東京)서의 김군의 소개장을 가지고 중화군(中和郡) 어떤 춘중(村中)에 있는 '박사'를 조사하기 위함이었다.
'박사'란 것은 황평(黃平) 양도(兩道)와 홍원(洪原) 이북의 함경도 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남성 무당을 가리켜 이르는 명칭이다. '박사'에 관해서는 진진한 흥미가 많으나, 지금 그 대략을 말하면, '박사'는 박사(博士)가 아니요. 소 아시아 키르기즈 초원 지방에 있는 목축민의 남성 무당의 명칭과 일치하는 것이다. 키르기즈에서는 남성 무당을 '박사' 혹은 '박세'라고 한다. 이 무당을 함경도에서는 '호새애비'라고 한다. '호새애비'라는 것은 시베리아의 동해안과 카라후토 섬(樺太島) 일부에 사는 오로코 민족의 말인 '호새'와 일치하는 것이다. 지금 나의 생각으로서는 '박사' 또는 '호새애비'는 고려 중엽 이후에 만주(滿洲)와 시베리아로부터 함평(咸平), 황해도에 이주한 거란(契丹), 요(遼), 금(金), 여진(女眞) 민족들이 가지고 온 것인 듯하다. 무당은 물론 우리의 선조들이 유목민으로 대륙으로부터 반도내(半島內)와 만주 일부에 이주하여 촌락 국가를 형성하였을 시대부터 있었던 것이다.
함경도의 남성 무당[박사]은, 보통의 남자가 굿도 하고 춤도 춘다고 생각하면 고만이나, 황평도에 있는 '박사'는 이상한 무당이다. 그들은 생리적으로는 물론 남성이요, 결혼을 해서 자녀까지 낳고 하지마는, 외관상으로 그들의 성(性)을 바꾸고 있다. 즉, 머리는 황평도의 일반 여성 모양으로 트레머리를 하고 수건을 쓰며, 치마를 입고, 수염을 뽑아서 여성의 흉내를 낼 뿐 아니라, 음성이라든지 표정까지도, 심한 자는 여성적으로 한다. 어떤 박사는 처녀 모양으로 머리를 땋아 내리므로, 그것을 '총각'이라고 부르는 지방도 있다. 이것은 시베리아의 코오랴크 민족이 가지고 있는 남성 무당의 양식과 흡사하여, 무당과 함께 최남선(崔南善)씨의 소위 불함 문화(不咸文化) 연구상에 귀중한 재료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겸이포서 중화군 해압면(海鴨面) 흥문리(興文里)―나의 목적지―까지는 20리이었다. 그래서 나는 겸이포에서 아침을 먹기로 하였다. 음식점을 찾는 동안에, 나는 소위 '금줄'을 거기서도 발견하였다. 뒤에 물으니, 황평도에서는 아이를 낳은 뒤 첫 7일 간에는 이 금줄을 쳐 둔다고 하였다. 명칭은 역시 '송(松)침'이라고 하나, 보통 때에는 문간에 솔가지를 매달아 두는 것이 이 지방의 특색이다.
거리에서 서 있는 어떤 사람을 붙들고, 아침 먹을 음식점을 구해 달라고 하였더니, 그 사람은 친절하게도 나를 데려다가 주막 여주인에게까지 소개를 하여 주었다. 황평도 집이라, 물론 기다란 단간방이 한 개, 정지방 한 칸만이 있는 집이었다. 주인 마누라에게 세숫물을 달라고 했다. 마누라는 세숫대야에 물을 떠서, 방 안에 들여 놓았다. 남도(南道)에서는 기생이나 게으른 영감들이 방 안에서 세수를 하는데, 하고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원래 야단스럽게 세수하는 나이라, 방 안에서 세수를 하다가는 남의 방을 온통 물투성이를 만들어 놓을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대야를 들고 밖으로 나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순간에 나는 이렇게 고쳐 생각하였다. 서북도(西北道) 여행가의 말을 들으니, 어떤 지방에서는 나그네가 주인을 찾을 때에 바로 정지문을 열지 않고 밖에서 "주인 계시오?"라든지 "여보시오."라고 찾으면 못생긴 놈이라 한다고 하였다. 나도 방 안에서 세수를 아니하고 밖에 나가서 했다가는 혹 못생긴 녀석이라고 욕이나 얻어먹지 아니할까 하는 의심이 생겼다. 그러나 남의 방을 버려 줄 일을 생각하고, 나는 용기를 내어 대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세숫물은 더운 물이었으나, 양치물은 얼음같이 찬 물이었다. 내 성미와는 정반대이었다. 나는 겨울에 세숫물은 혹시 찬 물을 쓰나, 양치물은 반드시 더운 물을 쓰는 까닭이다. 나는 이번 황평·함경도 여행 중 간 곳마다 이 시린 물에 양치를 하게 되었다. 역시 서북의 일반 습관인 모양이다.
주인과 작별하고, 나는 흥문리를 향하였다. 뒤가 마렵기에 어떤 외떨어진 길가 뒷간을 찾아 들어갔다. 모래땅을 휘적휘적 파고 한 모퉁이에 봇돌을 두 개만 놓은 뒷간이었다. 울타리는 갈가리 떨어져 기둥만 겨우 남아 있었다. 오줌은 누는 대로 모래땅 속으로 흘러내려가고, 똥에서 나는 악취는 나와 볼 사이도 없이 바람이 그것을 몰아 멀리멀리 공중으로, 산 너머로 가지고 간다. 정말 한 점의 구린내를 맡아볼 수도 없는 일등 뒷간이었다.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싸늘하였다. 인적 적은 적막한 거리에, 발 벗고 콧물 흘리고 배 툭 나온 아이를 보아도 귀여운 생각이 난다. 그러나 그 귀여운 생각 가운데는 어쩐지 일종의 말하기 어려운 비애를 느끼지 아니치 못하였다.
겸이포 시가를 지나, 동북(東北)으로 있는 조그마한 등을 넘으면 묘지가 있다. 많은 묘 중에서, 나는 소위 '건폄'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건폄'이란 것은, 시체를 매장치 않고 관에 넣은 채 그냥 땅 위에 두고, 그 위에 가시나무 같은 것을 덮어둔 것이다. 이것은, 황평도같이 추운 곳에서는 겨울에 땅이 얼므로, 매장할래야 괭이가 땅에 들어가지를 아니하는 까닭이라고 한다. 그래서 익춘(翌春)에 해동(解凍)이 되면 매장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장법(葬法)은 전설상으로는 남방에도 많이 있고, 옛날 조선의 고유한 법장의 일종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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