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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2021신춘 문예 단편소설 , 수필, 시 등 당선작/현대수필3

95. 집에 대하여

by 자한형 2022.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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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대하여 박이문

사람이 사는 곳엔 반드시 집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집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집은 우리를 보호해 주는 곳이다. 집 속에서 우리는 추위와 더위, 눈과 비, 짐승과 타인의 침해로부터 잠시나마 생리적인 보호를 얻는다. 그래서 단단한 지붕이나 잘 둘러싼 벽은 믿음직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런 점에서 초가집보다는 기와집이, 목조보다는 석조가 더 신뢰감을 준다.

집은 생리적 보호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삶의 가장 핵심적인 요람이며, 확장을 필요로 하는 삶의 원심적 시점(始點)이기도 하다. 집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고, 그렇게 탄생된 우리들은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집 안에서 자라며 보낸 다음 다른 공간으로, 다른 사회로 뻗어 갈 준비를 한다. 낯선 남녀가 만나 자리를 함께하여 가장 근본적인 생리적 기능을 통해서 인류라는 피가 이어지는 곳은 집 안에서이다. 집 안에서 우리는 모두 어머니의 젖을 빨며 자랐고, 역시 집 안에서 말을 배움으로써 가장 원초적인 인간적 행위를 입증하고, 또한 집 안에서 부모와 형제 자매라는 관계 속에서 사회적인 동물의 의식을 배운다.

집은 또한 동물적 인간이 인간적 인간으로, 자연적 동물이 문화적 동물로 창조적 변화를 일으키는 모체다. 가장 깊은 명상과 사색은, 두터운 벽에 가려지고 믿음직한 지붕에 덮인 집 안에서만 가능할 것 같다. 가물거리는 등불 아래서 화롯불 옆에 앉아 깊은 명상에 잠긴 사색가는 상상될 수 있어도, 집 밖을 쏘다니는 사람에게 명상이나 깊은 사고를 느낄 수 없다. 집이라는 작은 공간 속에 숨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조용한 시간과 명상이나 사고의 여백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집은 어쩌면 정신의 전쟁터이며 전승지라 불리워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마도 더 중요한 것은 집이 행복을 상징한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아내와 남편의 사랑이 가장 구체적으로 절실히 표현될 수 있는 곳은 접에서이다. 식구들끼리 된장 찌개, 콩나물, 김치의 맛을 함께 나누는 곳도 역시 집이다. 어머니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느끼고, 아버지로부터 믿음직한 보호감을 체험하는 것도 집 안에서 만이다. 깔아 논 이불 위에 꼬마 형제들과 뒹굴며 깔깔거리던 시절을 잊을 사람은 없으리라.

등불 옆에서 바느질하면서 들려주던 어머니의 신기하고도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에서 느낀 마력적(魔力的) 황홀감은, 나이가 든 우리들의 기억 속에도 생생히 남아 지워지지 않는다. 집에서 우리는 진정한 육체적, 정서적 보호감을 느낀다. 집에서 우리는 서로가 진정으로 허물없는 관계를 가진다. 타산 없는 사랑과 배려의 경험은 집이라는 테두리를 떠나서는 별로 흔하지 않다. 역시 집에서 변변하지 않다 해도 아침, 저녁 배를 채우고 입맛을 돋구는 충족감을 느낀다. 그런 점에서 집은 가장 평범하면서도 절실한 뜻에서 행복을 마련해 준다.

이처럼 집은 여러 가지 뜻을 지니고 있지만, 집의 가장 절실하고 근본적인 정서적 의미는 휴식에 있지 않을까? 집은 무엇보다도 휴식의 상징이다. 삶은 언제나 활동을 요청한다. 우리는 누구나 밖에 나와 비바람을 맞거나 눈에 덮이면서 땅을 파고 논밭을 매면서 일을 해야 하고, 공장에 혹은 사무소에 가서 기계나 장부와 씨름해야 한다. 삶은 항상 땀, 때로는 피눈물 나는 노력을 강요한다. 우리는 생존을 위하여 남과의 관계를 떠나서 살 수 없다. 사람은 싫든 좋든 사회적으로만 존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경우에 따라 부득이 남들과 싸워야 하는 고달픔을 견디어야 한다.

1층 거실

모든 종교가 우주 혹은 영원과의 관계에서 인간에 대한 가장 궁극적인 견해를 반영하는 것이라 한다면, 그리고 모든 종교가 삶의 궁극적인 고통의 의식에다 바탕을 두고 그것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을 의미한다고 한다면, 그러한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쾌락, 웃음, 즐거움, 행복이 삶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곤 하지마는, 삶은 결국 고통스러운 것 아니면 고달픔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또한 그만큼 더 우리는 누구나 휴식을 갈구(渴求)한다. 만일 산다는 자체, 눈을 뜨고 있다는 자체가 긴장을 자아낸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눈을 감으며 조용히 잠들고 싶다. 육체적 혹은 정신적 삶의 피로와 긴장을 풀어 줄 수 있는 곳은 역시 집이다. 잠시 자연과 사회, 그리고 남들과 차단되어 혼자만으로 아니면 피부적으로 가장 가까운 가족 속으로 돌아가는 장소가 집이다.

어두운 밤 문이 잘 닫힌 집이 불을 밝히고 있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따뜻함을 느끼게 하고 포근한 휴식감을 자아낸다. 늦은 밤 홀로 켜져 있는 한 아파트의 불이 마지막으로 꺼질 때에도 우리는 조그마한 안도감(安堵感)을 느낀다. 그 집이 휴식에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뜻한 온돌방 혹은 푹신한 침대 속에 이불을 둘러쓰고 잠들 수 있는 축복감, 행복감, 휴식감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이 귀중한 보배, 삶의 최고의 가치가 아닐까?

집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기능, 다양한 의미는 사람에 따라, 사회에 따라 그리고 어쩔 수 없는 현실적 필요에 따라 강조되는 바가 달라진다. 살아 있는 동물로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생리적 보호가 필요하다. 생각하고 노동하고 활동하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조건이라면, 우리는 우선 집을 일하는 장소, 일을 준비하는 장소로 삼을 필요를 느낀다. 애정, 인간애, 가족적 유대감(紐帶感)을 필요로 하는 이상 우리는 집이 즐거움 혹은 행복의 자리가 되기를 원한다. 이런 것이 모두 충족된다 해도 우리가 궁극적으로 휴식, 삶의 긴장으로부터의 휴가를 원할 때, 우리는 집이 가장 따뜻하고 포근한 휴식처가 되기를 원한다.

돌집은 초가집에 비해 보다 든든한 보호감을 느끼게 하고, 고층 아파트의 궤짝 같은 집들은 초가집보다 활동이나 노동에서 효율적이며, 기와집은 초가집보다 여유와 행복을 더 느끼게 할지 모르지만, 뒷동산을 끼고 버섯같이 자리잡은 초가집에서 우리는 보다 흐뭇한 휴식감을 체험한다. 서양의 돌집 혹은 스페인의 흰 석회석 집에서 자연을 극복했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지만, 동양의 흙담집, 초가집, 기와집 등에서 삶의 대한 긴장이 풀림을 느낀다.

2층 거실

높은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선 큰 도시의 주택가가 삶의 삭막감(索莫感)을 보여 주지만, 여유와 풍족함을 엿보게 한다. 납작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대도시의 빈민가가 생존의 고달픔을 보여 주지만, 그것은 또한 성실한 삶의 밀도감(密度感)을 나타낸다. 외딴 산기슭 곡선과 색깔에 맞게 자리잡은 시골집이 삶의 고독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그 소박한 고독 속에서 한없이 깊은 휴식감을 실감한다.

어디서거나 언제이거나, 그리고 어떻게 생겼거나 모든 집은 다 같이 우리에게 삶의 고달픔과 삶의 즐거움을 말해 주고, 우리들의 근본적인 존재 형태, 우리들의 바람과 우리들의 역사에 대한 무한한 이야기를 속삭인다. 헐렸거나 무너진 집이 꿈의 패배를 의미할 수도 있다면, 새롭게 선 집은 삶의 확장을, 수리된 집은 삶의 알뜰함을 각기 의미할 수 있다.

어쨌든 고층 건물 창문을 열어 놓고 다닥다닥 붙은 도시의 지붕을, 뒷산 언덕에서 골짜기에 서로 이마를 대고 자리잡은 시골 마을을 바라 볼 때, 우리는 거기서 한없이 다양한 삶의 숨소리를 듣고 어쩔 수 없는 인간적 체온을 느낀다. 그것은 다 같이 살려고 하고, 행복해지려 하고, 삶의 고달픔을 풀고자 하는 우리들 모두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외부적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쥐구멍 같은 집이 필요할 때도 있다. 까치집 같이 소박하고 시원한 집을 원하는 때도 있다. 어떤 산새들같이 아름다운 색깔로 장식한 집을 필요로 하는 때도 있다. 그러나 겹겹이 여러 가지 보드라운 솜털로 속을 채우고, 겉은 이끼, 조가비 등으로 단단히 발라 작은 창문으로 드나들게 만든 깊숙한 새둥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깊이 사로잡은 것은, 그것이 무엇보다도 따뜻한 이불 속, 따뜻한 잠, 고요한 휴식을 상징해 주기 때문인 성싶다. 그것은 아마 우리들이 가장 편안했을 태아 시절의 우리들의 집, 어머니의 자궁을 연상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은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이 휴식 그 속에서만 체험될 수 있는 축복감이라는 사실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원하는 집은 솜털로 마련된, 산 속 나뭇가지 사이의 조화로운 새의 보금자리일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른 생물이나 동물과 달리 보호받고, 일하고, 사랑하고, 행복하고, 그리고 진정으로 휴식할 수 있는 우리의 집을 필요로 한다면, 우리들은 그러한 집을 진정 발견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 온 집은 영원한 것이 될 수 없다. 아무리 탄탄한 집도 언젠가는 허물어지고 폐허로 변하게 마련이다. 아무리 우리가 이상적인 집에서 휴식을 취한다 해도 우리는 다시 잠을 깨고 자리를 나서 집 밖으로 나와야 한다.

집 없는 설움을 우리는 알고 있다. 낯선 객지에서 그 많은 집들에 묻혀 있으면서 돈 한푼 없이 하룻밤 몸을 쉴 곳을 막막히 생각해야 할 때의 소외감, 고독감, 뼈저린 슬픔을 안다. 만일, 우리에게 우리의 영혼이 영원히 쉴 수 있는 집이 없다면, 우리의 절망은 그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가 잠정적(暫定的)으로 쉴 집만을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쉴 수 있는 집은 역시 새둥우리 같은 지구, 역시 새둥우리같이 둥근, 그리고 푸른 하늘일지 모른다.

우리는 편안한 아파트를 얻고자 한다. 우리는 멋있고 아담한 집을 조용한 산기슭에 혹은 해변가 시원한 언덕에 짓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는 우리 영혼이 영원히 쉴 수 있는 집을, 육체가 쉬는 집이 아니라 영혼이 쉴 수 있는 집을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