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수필4

36. 어떤 사진

by 자한형 2022. 2. 9.
728x90

어떤 사진/ 류경희

시어머님께서 쓰시는 안방에는 이색적인 인물사진 둘이 나란히 걸려 있다. 집안 사정을 잘 모르는 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바라볼까 하는 생각을 사진을 대할 때마다 하게 된다.

사실 사진 하나하나를 떼어놓고 보면 전혀 이상할 것도 없는 평범한 인물사진이다. 창쪽 가까운 벽에 자리하고 있는 액자는 40여 년 전 유명을 달리하신 시아버님의 모습을 흑백으로 담아 놓은 것이다. 필름의 원판을 확대한 것이 아니라 오래된 앨범 속에 붙어 있던, 빛이 많이 바랜 사진을 확대한 것이어서 아버님의 모습은 선명치가 않다.

비스듬히 포즈를 취한 아버님은 내 남편의 지금 나이보다도 10여 년은 젊어 보이는 풋풋한 모습이다. 아버님은 이 사진을 찍으시려고 퍽 신경을 쓰신 것 같다. 머리카락은 잘 손질되어 말끔하게 뒤로 넘겨져 있고 두 눈에는 약간의 미소가 어려 있다. 오래 전이지만 양복을 입으신 옷맵시 또한 현대감각으로 보아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단정히 입으신 멋스러운 양복과 세련된 무늬의 넥타이며 깔끔한 와이셔츠 칼라를 살피면 비록 생전에는 뵙지 못했지만 아버님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멋쟁이였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 사진을 어떻게 찍게 되셨을까? 무슨 기념이 될 만한 중요한 일 때문에 사진사 앞에서 한껏 멋을 부리시며 여유 있는 표정으로 서 계셨을 그 때를 상상해 본다.

요즘 같은 가을철의 한낮, 친구와 우연히 사진관 앞을 지나시다 무언가 남기고 싶은 감상에서 그 때의 모습을 기록해 두셨을까. 아니면 어느 연인에게라도 보내주시려고 그랬을까.

어찌되어든 40여 년 전 이 사진을 남기실 땐 태어나지도 않은 막내아들의 아내 될 내가 당신의 이 모습을 바라보며 별생각에 웃기도 하고 마음 아파하기도 하리라는 예상은 전혀 못하셨을 것이 아닌가. 더욱이 그 막내며느리가 당신의 사진에 대해 공연한 수다를 늘어놓으리라는 것은 상상조차 않으셨으리라.

때때로 사진을 올려다 볼 때면 비바람에 떨어진 낙과와도 같이 인생이 덧없게 느껴지지만, 자손의 피로 이어지는 끈끈한 가계에 연속 고리가 신비롭기만 해서 가슴이 벅차오른다.

아버님의 왼편에 걸려 있는 사진은 작년에 칠순을 넘기신 어머님의 모습이다. 몇 년 전까지도 아버님의 흑백사진만 쓸쓸히 벽에 자리했었는데 어머님은 칠순 기념으로 찍으신 당신의 커다란 독사진을 아버님 곁에 나란히 걸어 놓으셨다.

어머님의 사진은 근방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A사진관에서 제작한 것으로 색상이 곱고 장식 틀도 아름답다. 화사한 연분홍빛 한복을 입고 계신 표정은 풍상에도 의연한 푸른 소나무 같은 청정한 모습이시다. 나는 어머님의 이런 모습에 어떤 찬사라도 듬뿍 덧붙여 드리고 싶다. 외모에 늘 자신이 없어 하는 어머님이지만 이 사진만은 당신이 보셔도 아마 흐뭇하셨을 것이다.

그렇긴 해도 칠순을 넘기신 지금의 초상은 사진사가 정성을 들여 곱게 수정한 흔적이 보이지만 이마나 눈 가장자리에는 노인의 골 깊은 주름살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나 보인다. 깨끗한 동정에 목도 피부가 늘어져서 젊었던 시절 어머님의 모습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삼십도 채 안 된 젊은 아버님과 칠순 어머님이 나란히 걸린 사진은 상대적으로 대비가 되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서글픈 느낌을 준다. 이렇게 두 사진 사이에는 흘러간 40여 년의 한 많은 세월이 함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속 모르는 어머님 친구들은 맏아드님과 모습이 많이 흡사하신 아버님의 사진을 보고 큰아들의 사진과 나란히 걸어놓아 아주 보기가 좋다면서 어머니를 꼭 닮아다며 칭찬을 한다.

아버님이 어머님을 닮았을 까닭이 없으련만 지레 짐작으로 어머님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들이다. 그 친구 분들이 속없는 말을 하더라는 말씀을 하면서도 어머님은 전혀 괘념하는 기색이 없으셨다.

아버님이 을축생이고 어머님이 갑자생이니 아버님께서 어머님보다 한 살 연하이긴 하셨다지만, 내 눈에도 어머님 친구 분들의 말처럼 모자의 사진이라 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비록 말씀은 밖으로 내지 않으셔도 어머님께서 이 사진을 그냥 무심히 보아 넘기고 계신 것은 아닌 것 같다. 삼십에서도 한 살이 모자란 아까운 연세에 어린 자손들을 남기고 갑작스런 변고로 떠나신 남편에 대한 한을 어떻게 말로 푸실 수 있으랴.

한이 먹빛처럼 짙겠지만 아버님의 사진을 바라보는 어머님의 표정만은 젊은 새댁이었던 40여 년 전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 어머님 가슴에 남아 있는 남편은 항상 젊은 모습으로 아버님을 그리고 계셨을 테니 어머님께서 어떻게 할머니의 마음이 되실 수 있겠는가.

가끔 아버님의 사진을 쳐다보시는 어머님의 눈길은 그래서 젊고 생기가 돌고 있는지 모른다. 추석 때 차례를 지내고 아버님의 성묘 길에 나서면서도 그런 어머님의 수줍은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성묘 갈 채비가 다 갖추어졌는데도 어머니는 한참 준비가 많으셨다. 머리를 새로 감으시고 평소에는 소홀히 하던 화장을 곱게 하시는가 하면 산을 꽤 오래 올라가야 하는데도 깨끗한 나들이옷을 꺼내 입으셨다. 이런 어머님을 보며 무어라 표현할 수 없어 가슴이 뭉클해 올랐다.

어머님 방에서 두 분의 사진을 가만히 올려다본다. 두 사진 사이, 40여 년 숱한 한을 감싸 안은 한 여인의 결 곧은 세월이 가슴에 애잔하게 닿아온다. 어쩌면 어머님은 젊은 남편의 사진에서 당시의 푸르든 시절을 찾아보고 계시지 않을까. 세월은 흘렀어도 사진 속의 아버님이 늘 청년의 모습으로 어머님을 바라보시듯, 어머님도 새댁 적의 고운 사랑을 항상 느끼고 간직하며 인고의 세월을 견디셨으리라.

내가 새삼스럽게 다시 사진을 바라보았을 때, 아버님의 곁에서 쓸쓸히 보였던 어머님의 주름살은 그 어떤 훈장보다 더 귀하고 값지며 빛나게 보였다. 그 빛이 어떤 촉수처럼 내 온몸을 가만히 더듬고 지나간다.

 

 

 

'현대수필4' 카테고리의 다른 글

38. 여체  (0) 2022.02.09
37. 어린 부처님  (0) 2022.02.09
35. 아버지의 방  (0) 2022.02.09
34. 아름다운 소리들  (0) 2022.02.09
33. 아름다운 강북  (0) 2022.02.09